오늘은 "고궁박물원"(故宮 博物院)을 가는 날이다.
아침을 먹기 전에 멀지 않은 강까지 산책을 가기로 했다.
나는 동쪽으로 가는 느낌인데 "북문광장"(北門廣場)이 나온다.
이곳에 온지 며칠이 됐지만 아직 방향감각이 없다.
저 건물이 "북문"(北門)이라는데 혹시 "북소문"(北小門)이 아닐까 할 정도로 문의 규모가 작다.
그런데 학생인듯한 여자들이 날이 쌀쌀한데 밖에서 부지런히 옛날 옷으로 갈아 입고 있다.
오늘 이곳에서 무슨 행사가 있으려나 보다.
그러고 보니 길을 건널 때도 횡단보도에 줄을 쳐놓고 경찰과 봉사자들이 많이 나와 있다.
"충효대교"(忠孝大橋)라는 다리 위로 올라왔다.
저 앞에(하류쪽) 보이는 다리가 "중흥대교"(中興大橋)란다.
이 강물의 이름이 "담수하"(淡水河)란다.
의아한 것은 지도상에는 오른쪽에 보이는 섬이 그려져 있지않다.
상류에 보이는 다리는 "대북대교"(台北大橋)라고 한단다.
이곳에는 이 새가 무척 많다.
이름을 모르는데 찾아 봐야지,,,
"승은문"(承恩門)
돌아오는데 횡단보도를 못 건너게 한다.
조금 있다 보니 오늘이 일요일이라 마라톤 대회가 있나 보다.
할수없이 돌아서 와야 했다.
그 덕분에 "북문"의 이름이 "승은문"(承恩門)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라톤은 남녀노소에 외국인까지 참가한듯 뛰는 대열이 끝이 없다.
아침을 먹고 방으로 올라와 TV를 트니 일기예보에 오늘 기온이 10도까지 내려 간다고 난리다.
10도에 뭔 난리인가 했는데 며칠 후 돌아와 뉴스를 보는데 대만에서 10도에 많은 사람이 얼어 죽었다고 한다.
아마도 노숙인들이 변을 당한듯했다.
아침을 먹고 호텔 맞은편의 지하철역(台北車站)으로 간다.
여기에서 붉은 선의 열차를 타고 "스린역"(士林驛)에서 내려야 한단다.
"스린"(士林)驛 1번 출구로 나와 조금 가면 버스 정거장이 있다.
R30, 304, 255, 815등 "고궁박물원"(故宮 博物院)으로 가는 버스가 여럿 있다.
우리는 "박물원"(博物院)바로 앞에서 내리는 R30을 탄다.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은 중화민국 타이베이시(台北市)에 있는 "중화민국 행정원 소속 국립박물관"이다.
이 "박물원"(博物院)에 있는 것은 중국 국민당(國民黨)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배하여
타이완(臺灣)으로 이동할 때에 대륙에서 가져온 문화재(文化財)가 거의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 박물원(博物院)이 소장품(所藏品)의 수는 69만 7490개나 되어 "세계 4대 박물관"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단다.
위낙 유물(遺物)이 많기 때문에 박물원(博物院)에서는 3개월에 1번씩 전시하는 소장품(所藏品)을 교환하고 있어,
모든 소장품(所藏品)을 관람하려면 빨라야 8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장제스"(蔣介石)는 중국 전통문화(傳統文化)에 애착이 많았다고 한다.
평소 지론(持論)이 "나라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문물(文物) 없이 살 수 없다" 라고 했단다.
그런 연유로 "국공내전"(國共內戰) 와중(渦中)에 패주(敗走)하면서도
베이징(北京) "자금성 고궁 박물관"(紫禁城 古宮博物館)에 있던 유물(遺物) 중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29만점과, 전국 각지의 유물(遺物)들을 타이완(臺灣)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중국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대륙에는 보물(寶物)이 없고, 대만(臺灣)에는 고궁(古宮)이 없다."
이 박물원(博物院)은 1965년 11월 12일 최초로 대중에게 공개됐다고 한다.
이 곳은 3개층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먼저 3층으로 올라갔다.
각방마다 전시품의 내력이 써 있는데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냥 보는 것이다.
처음 들어 간 방에는 아주 작은 병(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게 뭘까?
"비연호"(鼻煙壺)라고 한단다.
"비연호(鼻煙壺)"는 코담배를 담는 작은 용기를 가리키며
유리, 상아, 도자기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지며 상류사회의 취향에 따라 정교한 장식이 더해진 것이라고 한다.
서양에서 전래된 "코담배"(snuff)를 "토나호"(士拿乎)라고 번역하여 불렀다고 한다.
코담배는 발효시킨 담배 잎을 빻아서 향료를 더한 뒤 냄새를 맡는 담배를 말하며 강희제(康熙帝) 때 처음 전해졌다고 한다.
막힌 코를 뚫어줄 뿐만 아니라 정신을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어 궁중(宮中)을 중심으로 사대부 사회에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비연호"(鼻煙壺).
엄지손가락보다 작은 것도 있다.
"비연호"(鼻煙壺).
"비연호"(鼻煙壺).
사진을 접사해서 찍어 크게 보이지만 크기가 모두 손가락 정도다.
"비연호"(鼻煙壺).
작은 것을 이렇게 조각한다는 것이 대단하다.
이 "비연호"(鼻煙壺) 옥병(玉甁)도 엄지손가락 크기가 엄지손가락 정도다.
뚜껑과 몸통을 연결한 고리도 같이 만들었다는게 정말 놀랍다.
"비연호"(鼻煙壺).
"비연호"(鼻煙壺).
"비연호"(鼻煙壺).
다음 방은 청동기(靑銅器)들을 모아놓은 방이다.
저 위에 있는 물건이 중요한 물건인데 그만 사진을 못찍었다.
중간 가운데 뉘어 놓은 그릇.
왜 뉘어 놨을까?
그 그릇 안쪽 바닥에 글씨가 있다.
"상형문자"(象形文字)라고 해야 하나?
"서주 만기"(西周晩期)때의 "술그릇"(酒器)인 "송호"(頌壺)라는 이름의 그릇이다.
종주종(宗周鐘)
높이 65.6 cm, 너비 30 cm, 우(于) 사이 길이26.2 cm, 양 각(銑) 사이 길이 35.2 cm, 무게34.9 Kg
西周(9세기 BC) 시대에 나무나 기둥에 매달아 놓고 사용하는 제사용(祭祀用) 청동(靑銅) 악기(樂器)라고 한다.
종 둘레에 새겨진 122글자의 명문(銘文)으로 종주종(宗周鐘)의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당시 "서주 려왕"(西周 厲王)이 침범한 남국(南國)을 토벌(討伐)하려고 하자
인근 26개 나라가 모두 항복을 하여 신하국(臣下國)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주 려왕"(周 厲王)이 조상과 대신(大神)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특별히 이 종주종을 주조하여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고
이를 종묘에 진열하여 악기의 조화로움을 통해 선왕이 후대 자손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천하사방을 두루 보호해줄것을 희망하였다.
전체 명문(銘文)의 단어사용이 우아하고 내용이 광범위하여 서주 후기 제왕이 정벌을 나섰던 역사적 자료라 할수 있다.
"종주종"은 예기 악기(禮記 樂記)에 속하는데 왕실 종묘 제사에 사용하던 것으로
의식이 행해질 때 장엄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쓰였다고 한다.
가장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외형의 특징이다.
바로 36개의 유두(乳頭)가 높게 돌출되어 가지런하게 배치된 모습이다.
이러한 구조의 종은 종 아랫부분의 중앙과 측면에서 두개의
다른 음의 악기를 두들일 수 있어서 "쌍음조"(双音調)라 부르기도 한딘다.
만약 크기가 각기 다른 종을 한조로 편성하면 복잡한 음악을 연주할 수도 있는데
"종주종"은 바로 이 한 조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전국(戰國)시대 초기(初期 : 5~4 세기 BC) "술그릇"(酒器)
이것은 아주 작은 금속도장이다.
진한(秦漢)시대의 향로(香爐)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부여 박물관에 있는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비슷하다.
하지만 그 정교함에 있어서는 단연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가 최고다.
외국에서 들여 온 "오르골"(Orgel)인 듯하다.
이제 이곳에서 꼭 보아야 할 "3대 국보"를 볼 차례다.
하지만 지난 주만해도 있었던 "취옥백채"(翠玉白菜)는 다른 곳으로 전시를 나갔다고 한다.
육형석(肉形石)
육형석(肉形石)은 삼겹살 돌로 유명한 "청대 유물"(淸代 遺物)로, 간장으로 장시간 우려낸 동파육(東坡肉)과 비슷한 모양으로
삼겹살과 닮은 갈색 천연석에 껍질 부분을 좀 더 염색하고 땀구멍을 조각해 좀 더 실감나게 표현했다.
"취옥백채"(翠玉白菜)는 못본 것이 너무 아쉬워 인터넷에서 가져왔다.
흰색과 녹색을 지닌 천연 통옥에 조각된 작품으로
청나라 광서제(光緖帝)의 왕비인 서비(瑞妃)가 가져온 혼수품으로
배추는 신부의 순결함을 의미하고 배추 위에 살아 있는 듯 조각된 여치는 다산(多産)을 상징한다고 한다.
"옥웅준"(玉熊尊) 술잔.
이것은 똑같은 모양의 청동제(靑銅製)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것만 있다.
이런 유물들은 이름이 까다로워 일일이 알 수가 없다.
이곳은 "옥기류"(玉器類)를 전시한 곳이란다.
아마도 중국에서출토(出土)된 구,신석기(舊,新石期)때의 유물인듯하다.
西周시대(1046~771 BC) "대환조옥패"(帶環組玉佩)
모두 玉石을 매우 정교하게 다듬은 물건들이다.
명(明)시대(1368~1644) 옥공예품 (玉工藝品)
내가 알고 있었던 玉은 백옥(白玉)이거나 청옥(靑玉),황옥(黃玉)인데
이곳에서는 두 색 이상이 섞인 玉을 색에 맞게 가공한 것이 놀라웁다.
중화민국(1911~1945) 백옥 화조병(白玉 花鳥甁)
이 정도 되면 인간이 만들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첫댓글 사진이 정말 예술입니다.
역시 전문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