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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릉 이 있는곳(경남김해시) 쌍어문(雙漁紋) 에는 물고기 문양이 있는데
이문양 은 인도와 중국에도 있으며,보주태후(普州太后) 에서 보주 는 중국 사천성 의 지명이다.
허황옥 은 인도-중국-가락국(경남김해) 을 거쳐 들어온 신화가 아니라,역사적인 실존인물 이다.
김병모 前,서울대고고학과졸업/한양대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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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 (2009년8월)
뿌리 다른 한쪽을 찾아서
변택주
법정 어른스님 말씀 가운데 가장 또렷이 제 가슴에 박힌 ‘수본진심제일정진守本眞心第一精眞’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절집에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란 말씀도 있습니다.
‘수본진심제일정진’ 으뜸가는 정진은 ‘참마음을 지키는 것’이란 말입니다.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참마음자리.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이 말씀은 선가 화두 가운데 하나로 ‘부모 몸 받기 전 본디 모습은 무엇인가’ 이 화두 역시 뿌리 찾기, 제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평생을 바쳐서 뿌리를 찾기 위해 몸소 퍼즐을 맞춰 온 세계를 두루 다니며 40여년을 바쳐온 고고학자가 있습니다. 김병모 박사가 그 분인데요. 평생 연구를 집대성해 책 한 권을 엮어 작년 봄에 내놨습니다.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가 그것입니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나온 김해 김씨 김박사는 대학생 시절, 김해 김씨 시조 수로왕릉을 찾았다가 수로왕비 허황후릉에서 파사석탑婆娑石塔이야기를 듣고 수로왕비는 과연 인도여자인가 궁금해 하면서 본인 얼굴이 까맣다는 것과 연결시켜 ‘임금님 국제결혼’을 캐기 시작합니다. 그러기를 40년. 평생을 그 뿌리 ‘쌍어’ 사상에 얽힌 퍼즐을 목숨 걸고 발로 뛰면서 찾아 맞춰왔습니다.
결국 그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아유타국이 어디인지, 끊임없는 역사로 대탐험을 펼쳐 끈질기게 추적, 인도 옛 지도를 살펴 아유타국이 인도 남동쪽 아요디아로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아요디아국이 1세기에 북방 월지족月氏族 지배를 받으면서 지배층은 쫓겨나 중국 서남 고원지대를 거쳐 사천지방인 촉蜀나라에 정착한 것으로 봤습니다. 더구나 허황후 능비에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릉’이라 쓰인 데서 허황후가 보주普州란 곳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그 행적을 따라가, 보주가 사천성 안악현安岳縣임을 알아냈습니다. 그곳에서 서기 48년 전해에 반란을 일으켜 다시 강제 이주를 당했는데, 그 반란을 주모한 이들 가성家姓이 허씨라는 것도 후대 기록에서 확인합니다.
이렇게 역사궤적을 확인하는 연구결과를 보고받은 한국유전체학회는 허황후 후손으로 추정되는 왕족 유골에서 북방계가 아닌 인도 남방계 DNA를 추출해 냅니다.
까무잡잡한 인도 소녀 허황옥. 오빠와 더불어 장강長江을 타고 삼협三峽을 거쳐 황해로 나와 김해 앞바다에 이른 보트 피플이었습니다. 이들이 옮겨 다닌 지역을 꿰는 문화 공통분모로 김박사는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쌍어雙魚신앙에서 찾았습니다.
이 책을 권해드리는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40여 년 짧지 않은 세월을 뿌리 찾아 전세계를 돌며 퍼즐을 맞춰낸 김병모박사처럼 ‘어서 부지런히 정진해서 정견正見(바르고 능숙한 이해)을 얻어야 하겠구나.’ 하는 느낌이 퍼뜩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에 들어왔다고 알려졌지만, 그보다 3백여 년이나 앞선 48년. 또 다른 길.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과 결혼한 허황후를 통해서도 들어왔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허황후 오라버니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은하사銀河寺라는 절을 세웠습니다. 그 은하사에는 쌍어 두 쌍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심장을 보호하는 물고기 한쌍, 쌍어. 생명나무를 보호하는 물고기 한쌍 쌍어. 아직까지 우리나라 절에서는 김해 은하사를 비롯한 울산 개운사, 양산 통도사, 양산 개원사에서만 발견되어 주로 가야 고지에 퍼져있습니다.
언어학자 강길운 교수는 ‘가야말과 드라비다말 비교’라는 논문에서 가락Karak은 구舊드라비아말로 물고기를 뜻하고, 가야Kaya는 신新드라비아말로 물고기라고 밝혔답니다. ‘가야’나 ‘가락국’은 물고기나라라는 말이죠. 생명나무를 보호하는 두 마리 물고기 쌍어. 부처님 심장을 보호하는 두 마리 물고기. 부처님을 외호하는 나라 가야국, 물고기나라.
왜 물고기가 생명나무, 부처님을 지키는 것일까요? 불교에는 풍경, 목어, 목탁이 다 물고기입니다. 물고기에 담긴 뜻이 단지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눈을 부릅뜨고 정진하라는 뜻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식물. 나무는 우리 사람들 어머니, 뿌리입니다. 식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 올 수 없었으니까요. 어쩌면 식물이 우리 목숨 근원인 것처럼 물 또한 우리 목숨 뿌리라는 이야기도 담겨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보고, 우리가 본디 해양, 물에서 왔으니 그에 대한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을까? 혼자 상상을 해 보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해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답을 찾는 것은 아마도 우리 몫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 박사는 마치는 글에서 이런 말을 올렸습니다.
쌍어신을 믿고 살았던 사람들은 지중해로부터 한반도까지 넓은 지역에 살았다. 대강 기원전 7세기부터 쌍어를 신앙 상징으로 형상화하여 살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스키타이, 간다라, 마가다, 운남, 서첨, 가락국, 야마다이 등지에 걸치는 광범한 내륙지방을 오가면서 교역했다.
쌍어는 사원 대문에서 군왕이나 신을 지켰고, 신령스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막이나, 때로는 물속에서 버텨 서 있기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을 달리는 말 이마나 안장에도 쌍어는 수호신으로 매달려 있었고, 굴러다니는 자동차나 인력거에도 수호신으로 장식되었다. 중국에서는 여행자들 숙소나 식당, 돈을 지키는 존재로 대접받았다.
한국에서는 왕릉 대문과 부처님을 모시는 수미단에 장식되었고, 왜국에서는 여왕 옷을 장식하는 무늬로, 후세에는 재물신을 모시는 이나리 신사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한국 민속에도 오래 남아서 가게나 식당입구 안쪽에 매달린 북어 두 마리로 끈질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국적과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과 풍속이 다른 지구상 여러 민족들이 공통으로 믿고 있던 쌍어신앙은 경전이 남아 있지 않아서 민속신앙으로 취급되어왔다. 경전이 없기 때문에 학문으로 연구하기 힘들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오병이어五餠二魚로 남아있고, 네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 심장을 보호하는 물고기로 종교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로마 박해 시절 예수 그리스도교도들 사이 암호인 IXƟYƩ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는 내 주님’이라는 말의 약자다. 그 낱말들 머릿글자를 조합한 말이 물고기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기간 중에 습득한 쌍어신앙이 전승과정에서 지역화된 암호다. (356~357)
(맑고 향기롭게 소식지, 2009년 4월호)
자료2
허황옥이란 인도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이 김수로의 왕후가 되었다는 이야기만큼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이 부분은, 가야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가락국기>의 내용과 일치한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이 책에는 허황옥이 아유타(阿踰陁)의 공주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김해시 구산동에 소재한 허황옥의 무덤 앞에 있는 비석.
비문 왼쪽에 허황옥을 지칭하는 ‘보주태후’(普州太后)란 글귀가 있다.
그렇다면, 허황옥의 출신지인 아유타는 어디에 있었을까? 가야인들은 그곳이 남천축국(인도의 고대왕국)이나 서역(중국 서쪽)의 어느 나라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야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은, 1646년에 허목이 쓴 '보주태후릉 비음기'에 기록되어 있다. 보주태후릉이란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불린 허황옥의 무덤을 가리킨다. 이 무덤은 현재 김해시 구산동의 수로왕비릉에 있다.
또 비음기(碑陰記)란 무덤에 있는 비석의 뒷면에 쓰인 글귀를 가리킨다. 이처럼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인의 조상들은 가야의 초대 왕후인 허황옥이 인도 여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놀라운 것은 허황옥이 인도와 가야를 연결하는 매개체였음을 보여주는 물증이 오늘날 아시아 곳곳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체 어떤 증거일까?
이 문제에 관한 한, 고고인류학자인 김병모의 견해가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학설이 대립할 경우에는 김병모의 주장을 채택하여 스토리를 완성하도록 하겠다.
납릉심문 쌍어문, 인도반도 등지에도 있네?
김해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해 해반천(海畔川)이란 개천을 건너 동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도로 왼쪽에 사적 제73호 수로왕릉(김해시 서상동 소재)이 보인다. 숭화문(崇化門)이라고 쓰인 수로왕릉의 정문을 지나 가락루(駕洛樓)라는 망루를 통과하면 납릉심문(納陵心門)이라고 쓰인 문이 나온다. 그 문을 통과하면 김수로의 무덤이다.
▲ 수로왕릉 안의 납릉심문(納陵心門)에 새겨진 쌍어문. 붉은 별표로 표시된 부분이 물고기 무늬다.
그런데 납릉심문에는 좀 희한한 무늬가 있다. 제단 같은 것을 중앙에 두고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무늬다. 쌍어문(雙魚文)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납릉심문의 우측에 있는 숭인문(崇仁門)에도 동일한 무늬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쌍어문이 인도반도의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네팔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허황옥의 출신지인 아유타 즉 아요디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또 인도 북부의 유피주(州)에서는 쌍어문이 주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자동차 번호판이나 경찰의 배지에까지 새겨져 있다. 쌍어가 인간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이런 현상의 근저에 깔려 있다고 한다.
고대로부터 이 지역에 존재한 쌍어 숭배사상이 그런 형태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쌍어문이 가야시대의 유물이 되었지만, 인도반도에서는 아직도 그것이 현지인들의 의식을 일정 정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가야 유적과 인도반도에서 동일한 쌍어문이 발견되는 것은 이 무늬가 허황옥 집단에 의해 가야에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 김병모의 견해다.
▲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쌍어문. 자동차 번호판은 물론이고 경찰의 배지에서도 쌍어문을 발견할 수 있다.
별표 부분에서 쌍어문을 발견할 수 있다.
▲ 인도반도에 속한 네팔에서도 쌍어문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은 문에 새겨진 쌍어문. 별표로 표시된 부분이 쌍어문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허황옥 가문이 인도반도에서 가야 땅까지 이동하면서 경유한 것으로 보이는 지역들에서도 쌍어문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허황옥은 왜 가야에 왔을까
가야가 건국된 서기 42년으로부터 얼마 전인 기원전 1세기에, 인도 서북쪽에 살던 중앙아시아 쿠샨족이 인도로 밀고 내려왔다. 이에 따라 아요디야(아유타)란 도시의 지배층 중에는 동쪽에 있는 중국을 향해 망명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가야에 당도한 서기 48년에 허황옥이 스스로를 나이 16세의 아유타 공주라고 소개한 점을 볼 때에, 그는 아요디야란 도시를 지배하는 군장(君長)의 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문이 아요디야에 있었을 때만 해도 허황옥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허황옥은 서기 48년에 16세였고, 그의 가문은 이미 그 이전인 기원전 1세기에 아요디야를 떠났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후에도 이 가문이 아유타 출신의 유민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허황옥이 자신을 아유타 공주라고 소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허씨 가문이 정착한 곳은 오늘날의 중국 사천성 안악현에 해당하는 보주(普州) 땅이었을 거라는 게 김병모의 추정이다. 중국 후한(後漢)의 역사를 기록한 <후한서>에서 서기 1세기에 보주 땅에 소수민족들이 살았다고 기술한 점, 오래 전에 보주 땅에 형성된 허씨 집성촌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는 점, 보주 땅의 암벽에서 "후한 초에 허씨의 딸 황옥이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가 남들보다 나았다"라는 글귀가 발견된 점, 김해의 수로왕비릉에 있는 비문에서 허황옥을 보주태후라고 칭한 점 등이 김병모가 제시한 근거들이다.
한나라를 계승한 후한(後漢)은 서기 25년에 건국되었고 가야는 서기 42년에 건국되었으므로, 허황옥이 보주 땅에 살았다는 '후한 초'라는 시점은 가야 건국 직전과 거의 일치한다. 서기 48년에 허황옥이 16세였다는 <가락국기>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는 허황옥이 보주태후라고 불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가야에 오기 전에 보주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제주에서 서울로 시집온 여인을 제주댁이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그럼, 보주 땅에 살던 허황옥 가문이 그곳을 떠나 동쪽의 가야 땅을 향해 이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후한서> '광무제 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의 역사를 기록한 '광무제 본기'에 따르면, 허황옥이 가야에 출현하기 1년 전인 서기 47년에 보주를 비롯한 사천성 지역에서 소수민족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이 진압된 후에 사건 연루자들이 양자강 연변의 무한(武漢)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일이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허황옥 가문도 이 반란에 가담했다가 무한 땅으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그 뒤에 배를 타고 양자강을 지나 바다를 거쳐 가야 땅까지 당도했을 것이라는 게 김병모의 추정이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지나간 것으로 보이는 지역마다 쌍어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인도반도의 쌍어 숭배사상을 반영하는 쌍어문이 허황옥 집단의 이동루트를 따라 김해의 수로왕릉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는 게 김병모의 견해다.
김수로 무덤에 쌍어문 새긴 깊은 뜻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을 고려해볼 수 있다. 가야인들이 김수로의 무덤 앞에 쌍어문을 새긴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의 초대 왕후가 인도인이었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일까?
▲ 김해시의 전하교 입구에 있는 쌍어문. 김해시 곳곳에서 이런 조각물을 발견할 수 있다.
인도반도에서 사용된 고대 언어인 드라비다어에서는 '가야' 혹은 '가라'라는 발음이 '물고기'를 뜻했다고 한다. 가야라는 국호가 고대 인도어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국호에는 인도반도의 쌍어 숭배사상이 반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고기를 뜻하는 가야라는 발음을 국호로 선택했기 때문에, 가야인들에게는 물고기란 것이 어류뿐만 아니라 국호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수로왕릉에 있는 물고기 무늬는 가야의 국호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가야라는 발음이 고대 인도어에서 나왔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만 유효한 설명이다.
물고기 무늬에 얽힌 위와 같은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오늘날 김해시에서는 시내 곳곳에 쌍어문 조각물을 만들어 놓았다. 특히 주요 교량에서 쌍어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 인도의 아요디야시(市)에서도 허황옥과 가야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0년에 가락공원을 조성해놓았다. 2천 년 전의 허황옥이 한국과 인도의 두 도시를 연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인도인들이 가야 땅에 정착해서 왕후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한민족이 단일한 혈통이 아닌 복수의 혈통으로 이루어진 민족임을 보여준다. 북방 유목민족 출신의 김수로 집단과 남방 인도 출신의 허황옥 집단이 현지 토착세력과 힘을 합해 가야라는 나라를 운영한 것이다. 이 같은 가야의 역사는, 한국인들이 협소한 단일민족 관념을 떨쳐버리고 세계를 내 형제처럼 포용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출처 http://www.ohmynews.com 10.07.03 21:49l최종 업데이트 10.07.03 김종성(qqqkim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