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는 성(姓)과 본관(本貫)을 갖고 족보에 실리면서 양반이 되었는데도 왜 일상의 대인관계나 자녀결혼에 있어서는 성과 본관을 따지고 또한 조상과 가문이 거론되고 있을까? 이는 우리의 사회생활에는 아직도 혈연(血緣)과 지연(地緣)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286개의 많은 성씨 중에서 주성(朱姓)이 우리의 성(姓)이 되었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났다. 이는 결국 우리와 선조는 주성이란 혈통(血統)으로 이어져 왔음을 알게 된다. 혈통으로 이어진 우리 후손은 마땅히 주성의 원천과 역사를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수많은 한자 중에 붉을 ‘주(朱)’ 자가 나의 성이 되었으며, 언제 어느 때 어떻게 주성이 탄생했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 정체성 확립(正體性確立)의 기본(基本)이 될 것이다. 다음 내용들은 과거 주문의 선각자(先覺者)들이 족보(族譜)나 역사문헌(歷史文獻)에서 찾아낸 기록(記錄)들을 알기 쉽게 정리한 것이다.
주성은 3000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진 뿌리 깊은 성씨(姓氏)이다. 주성 역사를 공부하려면 주성이 되기 이전의 내력을 알아야 한다.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생활한 근거지를 알려면 역사학과 고고학을 연구하고 조사해야 하는데, 20세기 말까지 연구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우리 주씨는 인류학상으로는 북방 몽골 계통이고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 계통이다. 그리고 역사학상으로는 동이족(東夷族)인데, 한 갈래는 만주대륙을 거쳐 직접 한반도로 들어온 일족이 있고 또 한 갈래는 중국땅 깊숙이 들어갔다가 황해를 건너 한반도 남쪽지대로 들어왔는데, 우리 신안주씨는 이에 해당한다.
부언하자면 기원전 4000년경에 시베리아 바이칼호 남쪽에서 집단생활을 하던 부여족(夫餘族: 부리야트족)이 있었는데, 지구가 점점 차가워져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내려온 기마민족(騎馬民族)은 중국내륙 동북부로 옮겨 와 중국고대사(中國古代史)에 나오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를 이루었고, 이 삼황오제 시대를 신화와 전설에 의한 이야기라고 하며 우리나라의 경우 단군신화(檀君神話)와 같은 맥락이다.
삼황(三皇)은 중국 고대의 천자로서 천황씨(天皇氏)・지황씨(地皇氏)・인황씨(人皇氏)를 말한다. 또 다른 설은 복희씨(伏羲氏)・신농씨(神農氏)・수인씨(燧人氏: 皇帝) 혹은, 포희씨(包羲氏)・여왜씨(女媧氏)라고도 한다.
오제(五帝)는 삼황의 대를 이어온 다섯 사람의 성천자(聖天子), 즉 소호(少昊)・전욱(顓頊)・제곡(帝嚳)・요(堯)・순(舜)을 지칭한다.
기원전 2357년경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 중국 동부에 대제국(大帝國)이 있었고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전설상 염황연맹(炎黃聯盟)의 장(長)으로 98세까지 살았으며, 78년간 재위(在位)한 전욱(顓頊)은 우리 주씨의 원시조(元始祖)가 된다. 나라의 도읍은 고양(高揚: 지금의 하남성 玘縣)이었다. 즉, 중국 역사책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전욱제(顓頊帝)를 중국 역사상 최초 제왕인 황제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 연유는 황제의 원비(元妃)인 서릉씨(西陵氏) 사이에 창의(昌意)라는 왕자가 촉산씨(蜀山氏)의 딸 창복(昌僕)과 혼인하여 전욱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는 성씨제도(姓氏制度)가 없어서 살고 있는 땅 이름으로 씨성(氏姓)을 삼았다. 동시대에 부여족(부리야트족)으로 만주 대륙에 들어간 일족은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에 있었고 부족연맹시대(部族聯盟時代)를 거쳐 북부여(北夫餘)・남부여(南夫餘)・동부여(東夫餘) 등으로 갈라져 있을 때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있는
주국(邾國)의 계보
전욱(顓頊)--권장(倦傽)--축융(祝融)--육종(陸終)--자안(子晏)--조협(曹俠: 邾國건립)--비(非)--성(成)--차보(車輔)--장신(將新)--자문(眥文) --숙술(叔術)--하문(夏文)--의문 극(儀文 克: 이때 周나라와 동맹을 맺음)--쇄(瑣)--문공 거제(文公 蘧蒢)--정공 확차(定公 貜且)--선공 경(宣公 挳)--탁공 화(탁公 華)--장공 천(莊公 穿)--은공 익(隱公 益)--환공 혁(桓公 革)--목공 부(穆公 缶: 春秋戰國時代 去 ⻏ 邊爲姓 朱字 사용)
기원전 1111년 선조 조협은 중국 산동성(山東省) 평릉(平陵)의 옛 이름인 주(邾)를 성(姓)으로 하였고, 나라 이름도 주국(邾國)이라고 하였다. 선대인 주(邾)나라는 주(周)왕조가 중국을 통일할 때인 기원전 1046년 주(周)나라 무왕(武王)으로부터 ‘주(邾)’라는 작호(爵號)를 받아 주국(周國)의 후국(侯國)이 되어 17대 680년간을 이어오다가, 기원전 431년 춘추전국시대의 격동에 주(邾)나라가 망하여 초(楚)나라에 병합(倂合)될 때 우리 선대들은 주국의 ‘주(邾)’ 자(字)의 우측 변에 있는 고을읍 변 ‘⻏’을 떼어 ‘붉을 주(朱)’ 자(字)를 성(姓)으로 해서 훗날 만날 것을 기약하고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로써 수많은 한자 중에 붉을 ‘朱’ 자(字)가 우리의 성이 되었다.
우리 선대들은 주국(邾國)을 떠나 상현(相縣: 지금의 河南省)・단양(丹陽) 등지로 옮겨 17대가 이곳에서 살았다. 즉, 한(漢)나라 청주자사(靑州刺史)인 선대 주우(朱寓)가 기원전 180년경 ‘황건적의 난’ 때에 단양(丹陽)으로 피난 거주하였는데 이러한 연유로 1세 시조인 주자는 자칭 단양(丹陽) 주희(朱熹)라고도 하였다.
주우(朱寓)의 후예(後裔)인 주양약(朱良約)은 한(漢)나라 헌제(獻帝) 때 평릉(平陵)으로 이주(移住)하여 수대를 이어 살았다. 이로 인하여 1세 시조인 주자는 자칭(自稱) ‘평릉(平陵) 주희(朱熹)’라고도 하였다. 후손들은 휘주(鰴州)・흡현(歙縣)・황돈(黃墩: 지금의 江西省)으로 피난하여 수대를 살아왔다.
세월이 흐른 후 주양약(朱良約)의 후예인 주경(朱敬)이 수(隋)・당(唐)나라 때 명재상(名宰相)이었고, 그의 아들 주사(朱奢)는 당나라 현종(玄宗) 때 학사(學士)로 있었고 그의 아들 주잠(朱涔)은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 주근(朱瑾)은 당나라 마보군 총거(馬步軍 總拒)로, 영정후(英亭候)로 봉임(封任)되어 중국의 회계주씨(洄溪朱氏) 시조(始祖)가 되었다. 둘째아들 주괴는 일명 고료(古僚)라 하며 1세 시조 주자의 8대조(八代祖)로 신안주씨(新安朱氏)의 원시조(元始祖)가 된다. 위와 같이 우리 주성의 큰 갈래를 보면 주국(邾國)을 떠나 상현(相縣)을 중심으로 한 패국당 후예(沛國堂 後裔)와 회계주씨 후예(洄溪朱氏 後裔), 그리고 신안주씨 후예(新安朱氏 後裔)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주성(朱姓)의 선대 계보(先代 系譜)
목공 부(穆公 缶: 朱姓의 始作)--익(翊)--우(寓: 기원전 180년 황건적의 난 발생시 역약간세(曆若干世)--경(敬: 수, 당나라 명재상)--사(奢: 712~775 唐 玄宗祖 學士)--잠(涔: 號 師古)--근(瑾: 洄溪朱氏 始祖), 괴(瓌: 新安朱氏 元初祖)
우리나라의 각 성씨를 살펴 보면 첫째 중국 등 외국에서 도래(渡來)한 성씨, 둘째는 왕이 공신(功臣)들에게 하사한 성씨, 셋째는 고려시대 인구 통제를 위하여 여러 성씨를 주었다. 넷째는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신분계급이 타파됨으로써 성(姓)의 대중화가 촉진되었으며, 다섯 번째 1909년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누구든지 다 성(姓)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고유한 주씨 성(朱氏 姓)은 중국 땅에서 한국 땅으로 도래한 자랑스럽고 소중한 성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