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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에 둔 정이품(正二品) 관직으로 정원은 각 1원이다. 문형(文衡)이라고도 한다.
1401년(태종 1)에 대학사(大學士)를 고친 이름이다. 조선 전기에는 예문관에만 대제학을 두었으나, 1420년(세종 2)에는 집현전(集賢殿)에 대제학을 두었고, 1456년(세조 2)에 집현전을 홍문관으로 고쳐 대제학을 두었다. 후기에는 홍문관대제학이 예문관대제학을 겸임하였고, 대제학은 모두 문관(文官)으로 임용(任用)하였다. 대제학은 대개 본인이 사퇴하지 않는 한 종신까지 재임하였다.
대제학은 학문의 권위만 높다고 하여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우선, 대제학이 되려면 대과(그것도 문과)에 급제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호당(湖堂)' 출신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호당은 '독서당'의 별칭인데 '임금의 명을 받은 젊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입니다.
물론 가문도 좋아야 했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가문이 좋은' '임금의 장학생'들 중 '문과 대과'에 급제한 사람만이 '대제학'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문형'이라는 별칭이 의미하는 것처럼
학문의 권위 역시 인정을 받은 자라야만 했습니다.
홍문관이나 예문관이 행정기관이기도 했지만
경서를 연구하고 왕에게 자문하는 일종의 연구기관이었던 까닭에
(그래서 홍문관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으로 정승과 판서들은 예외 없이 거쳐갔습니다)
그 업무 역시 학자의 그것에 가까웠습니다.
이런 자리였으니 출사한 학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음직한 관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끝으로
네이버 백과사전을 보니 '문형'에 대한 보충설명이 있어 같이 인용하겠습니다.
문형의 별칭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는데, 반드시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 및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大司成),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등 나라 전체의 학문 관련 세 가지 최고 직위를 모두 겸직하는 경우에 한하였다. 이 3관(館)의 최고 책임자로서 관학계(官學界)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직위이므로 학자로서 최고의 명예로 여겼으며 품계(品階)는 판서와 동등한 정이품(正二品)이었지만 삼정승이나 육조(六曹) 판서보다도 높이 대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