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 20일.
이날은 마카오(奧門)가 중국으로 회귀되는 날이다.
강변도로에는 온갖 차량들이 번쩍번쩍 전조등을 켜대며 행진하고 있었다.
약간 부럽기도 하였고, 또 얄미웠다.
우리도 남북통일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찾을 때,
얼마나 기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중국인들은 마카오를 찾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왜 티벳을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티벳인들에게 돌려 주지 않는가?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
지도 한 귀퉁이에 '土橋'라고 분명히 있었다.
버스를 타고 장강대교까지 나오는데,
왜 또 그리 먼지... 덜커덕, 덜커덕.
꼬불꼬불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상하이, 난징, 꽝저우 그리고 충칭.
이 넓은 대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족에게,
아니 그때의 온 대한민국인에게 허용된 땅이라곤
웅벽한 중경의 먼 골짜기, 손바닥만한 땅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온갖 상념들이 오고 갔다.
내가 왜 이곳까지 와야하는 지,
그 이유를 어름풋이 알 것도 같았다.
약간의 진정된 마음과 숙연한 가짐으로 연화지 임정청사를 찾았다.
청사에 모셔져 있는 태극기가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태극기 앞에 서자, 저절로 오른손이 가슴에 올라갔다.
이곳 저곳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는데,
어제와는 사뭇다르게 그곳이 고향만큼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맨 윗층을 둘러보는데 한 중국 관리인이 뜰을 쓰는 것이 보였다.
문득,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소원했던
김구 선생이 떠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