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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회적 배경
잉카의 정치와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거론되어야 할 것은 역시 아이유(Ayllu)를 중심으로 한 자치적 운영 체제일 것이다. 이 아이유라고 하는 씨족 공동체는 잉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의 전 분야를 망라한 자급 자족적 구조로 운영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단위로서 이러한 씨족 공동체 중심의 체제는 마야, 테오티후아칸, 메시카 등의 고대 아메리카 대륙의 발전했던 문명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이 아이유의 중요한 성격들은 다음과 같다.
- 공동의 토지를 통한 협동생산 등의 공동경제활동을 한다
- 가부장중심의 단일한 조상을 가진 공동체로서 이론적인 족내혼을 행한다.
- 직접 혹은 가상적인 혈연관계로 구성된 불변의 영구집단
- 공동의 조상을 가진 씨족집단
- 집안 어른을 중심으로 한 가족 대표를 통해 중앙정부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와 같이 이 단위는 실질적이던 가상적이던 간에 혈연관계로 연결된 씨족집단으로서 그 안에서 자치적으로 경제적 활동의 분담과 소득배분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본단위인 아이유들이 모여서 더 큰 정치, 사회 단위들을 구성하고 이러한 상위 정치단위들은 여러 명의 각 아이유들의 원로들로 구성된 중앙위원회를 구심점으로 하여 정치적 안건을 결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씨족공동체 사회가 정치와 사회의 중심을 이루는 기본단위로서 그 상부 정치체제 속에서의 높은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극히 자연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정치적 권력이 개인이나 일부 특정집단에 두드러지게 집중하는 현상을 견제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실질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잉카는 400 여 개나 되는 세케스(ceques)라 불리는 행정의 단위들로 구성되어져 있었다. 먼저 중앙 아랫부분은 후린 쿠스코(Hurin Cuzco), 윗부분은 하난 쿠스코(Hanan Cuzco)라 불렸고, 후린은 콘데수유(Condesuyu: 서쪽)와 코야수유(Collasuyu: 남쪽)로, 하난 쿠스코는 친차수유(Chinchasuyu:북쪽)와 안데수유(Andesuyu: 동쪽)로 다시 분리되었다. 이러한 각 행정조직은 다시 코야나(Collana), 파얀(Pay n), 카야오(Cayao)라 불리는 3개의 단위들로 분리된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렇게 분리된 각 단위들은 또 다시 같은 이름을 가지는 3개의 단위로 구별되는데, 이러한 여러 정치단위들은 각자 원로회의나 위원회와 같은 강력한 정치기구를 통해 중앙정부의 행정과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정치적 힘의 배분에 있어서도 한 사람의 독자적인 결정에 의하여 나라가 움직여지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위, 아래 혹은 동, 서, 남, 북 등으로 나누어지는 행정조직은 단순한 지리적 분리만이 아닌 힘의 분배 현상도 동반하였다. 중앙정부의 경우 위원회 조직을 통한 의사결정의 다원화, 그리고 지방정부의 경우 각 지방분권적인 자치권의 인정 등을 통하여 정치적 권력이 다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원 집정, 사원집정의 전통은 여러 식민지 시대의 사료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는 잉카의 독특한 권력의 다변화된 모습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서양의 정치적 분위기와는 다른 씨족 중심의 사회환경과 전통이 이러한 잉카 특유의 정치제도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써, 너그러움과 존경을 지도자들이나 국민들이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사회 정치적 덕목중의 하나로 여겼다는 것이다. 항상 가족을 위해 걱정하고 노력하는, 마치 한 가족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잉카의 사회적 분위기를 통해 형상화되는 지도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즉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다변화된 정치적 힘을 조화시키는 데에 그들은 가족관계의 덕목을 그대로 적용 시켰다는 것을 발견하게된다. 씨족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힘의 분배는 정치지도자들을 가족의 어른과 같이 존경하게 했으며, 그들에게도 역시 그러한 가족적인 윤리를 가진 지도자의 실천을 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제체제의 특징
앞에서 본 정치 사회적 특징과 마찬가지로 잉카의 경제구조는 기본적으로 각 씨족 단위들의 자급 자족적 형태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토지의 공동소유, 집단적인 생산을 바탕으로 한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생활 도구들은 각 가정에서 생산 제작되었으며, 비교적 높은 전문성을 요하는 물건들은 각 마을 내에 있는 장인(匠人)들에 의하여 전수되어 특수화되어져 갔다. 그러나 기타 일반적인 농업, 건축 등의 기본 경제활동에는 모든 마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노동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각 개인의 일이나 마을의 공동사업은 여러 사람이 일손을 모아 상부상조의 원칙 하에 함께 해 나갔다. 이러한 특징들과 함께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그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노동에 참여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데, 이는 노동의 특권적 열외 계급 발달의 미약으로 이어진다. 즉 정치적 힘을 기반으로 한 경제적 특권을 구가하는 특수계층을 만들어내는 경제구조의 발달이 적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각자가 자신이 맡은 일의 성격과 종류에 따라 일을 하며 그것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마을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운영하는 방식은 마치 공산주의의 생산방식과 같은 듯 보이지만, 잉카의 다른 점은 가족 혹은 씨족이라는 단위를 중심으로 하여 이러한 체계들이 만들어지고 또 유지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급자족에 기반을 둔 구조는 잉카의 정치환경이 만들어낸 독특한 재정관리체제를 보여준다. 중앙정부에 보내는 세금이 절대적 의미를 지니는 의무이기에 앞서 어떤 면으로 본다면, 하나의 협조나 각출의 성격을 가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비록 외형적으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형태의 조세제도일지언정 그 내용 면에서는 상호부조 혹은 선물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즉 지방분권적인 정치단위들이 일정한 연합이나 연맹의 형태를 통해 잉카라는 하나의 구심점을 만들고 그것을 경제적인 상호 협력관계를 통해 다같이 운용해 나갔던 것이다. 각 지방정부는 정복에 의한 혹은 자율에 의한 연맹 편입이건 간에 상당수준의 자치권이 인정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세금을 바치는 데 있어서 높은 자율성과 탄력성이 존재하였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양과 품목의 결정에 있어서 납세자의 자율성을 엿볼 수 있는 정복당시를 적은 사료들을 만날 수 있다: "모든 지방에서는 해마다 그 지방에서 나는 것을 세금으로 가지고 오는데, 땅이 척박해 과일이 나지 않는 곳에서는 해마다 몇 꾸러미의 라가르띠하스를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세금의 징수가 원칙 없이 막연한 자율성에 의존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이유라는 가족 체제를 중심으로 한 상호이해와 필요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세금은 납세자들을 위하여 쓰여진다는 전체적 무언의 공감이 있기에 납세자 자신이 성실하게 자율적인 납세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씨족을 구심체로 하는 가족관계를 바탕으로 한 잉카의 경제체제하에서 가능하였으리라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 사회환경과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이 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초기 식민지 시대의 원주민에 대한 관찰에서도 이러한 점은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가르시라소 데라 베가라는 그 당시 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세 번째 원칙은 어떠한 이유나 명분으로도 인디오들이 자신의 재산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의무가 없고, 그것이 그의 일반, 전문 노동 혹은 정부나 최고 지도자에 대한 근로(勤勞)로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이러한 점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를 불문하고 - 그들이 같은 양의 세금을 내기 때문에 - 마찬가지이다. 자식과 가족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불렀기 때문에 비록 다른 것들 물질적인 부(副)〕을 가지고 있다해도 가족이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었다".
일부 상위 지도부가 세금을 통하여 외관상 부유한 생활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개인적인 부나 특권적 우월성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마을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그 필요성을 납세자들이 인정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특히 제사장들이 구가하는 화려한 의상과 융성한 대접은 그 종교적 격식에 의한 것으로서 그들이 개인적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세금이 행정적인 상부 정치 체계와 그를 관장하는 일부 엘리트들의 유지를 위하여 쓰여진 것 말고도,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자들을 위하여 쓰여진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마을 구성원들은 자신이 할당받은 농지 이외에도 공동의 노동력을 들여 마을 행정과 중앙정부의 세금 충당용 농지 그리고 마을의 공익 사업을 위한 농지를 같은 개념으로 경작하였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공동의 재정은 여러 가지 마을 전체에 필요한 것을 위하여 쓰여졌다. 그리고 그 중에 행정과 종교의식을 담당하는 존경받는 마을의 씨족지도자와 사제들의 유지비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을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세금 등을 잘 운용하여 마을의 축제와 제사 등을 준비하고 전체의 안녕을 유지해야 할 분명한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장거리 무역이나 근거리 물물교환에 대한 중앙 잉카 정부의 역할에서도 자치권을 존중하면서 다른 면으로 연맹의 성격을 지닌 중앙정부를 강화해나가는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 잉카정부는 각 지방의 생산물들 간의, 그 생산지의 차이나 풍, 흉작에 따른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원활한 물물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그 자체를 독점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마치 잉카의 중앙정부가 교역의 독점과 통제를 통한 부의 축적을 가졌을 것이라는 시각은 다시 한번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즉 생산물이 그것을 생산한 각 아이유의 관할 하에 제분배가 이루어지며 여기에는 각 주민들의 소비, 중앙정부에 세금의 형태로 주어지는 부분, 각 정치, 사회단위들의 행정집행 비용을 포함한다. 그러나 각 지역간의 생산물의 차이와 이에 따른 물물 교환의 필요성, 발달된 교통망 등은 단, 장거리 무역의 발달을 가져온다. 중앙 잉카정부는 각 마을에서 보내지는 세금을 통하여 재정을 유지하고 그 정치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각 마을들 간의 물물교환을 원활히 중재하여 주는 것도 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따라서 각 아이유들은 잉여 생산물의 교환과 필요한 물자의 구입을 중앙 정부의 도움으로 단, 장거리 무역의 형식으로 충당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은 잉카 사회의 정치 경제적 특징을 배경으로 삼아, 에스파냐 군대의 잉카 침략과정을 좀 더 잉카적인 시각으로 이해해 보도록 노력해 보자. 우리들은 일반적 역사 교양으로서 유럽인들과 그들의 정복과정에 따른 태도와 방법을 상대적으로 더욱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잉카인들이 보여준 정복과정에서의 행동 양식들은 위에서 설명한 정치 사회적 배경을 앎으로서 더욱 그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잉카 전쟁의 전통
일반적으로 25세에서 50세에 이르는 모든 잉카의 성인 남자들은 병역의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군대는 각 지역별로 편성되어 지방의 장들이 지휘와 관리를 담당하였다. 군대의 총수는 잉카의 최고 지도자로서 문장(紋章)과 종교적인 상징물 등을 앞세우고 군대를 지휘한다.
잉카 군대의 대단위 정복사업의 승리는 원활한 군대의 모집과 그 보급의 원활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국을 잇는 잘 발달된 교통시설은 위에 들은 병력의 동원과 보급을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겠다. 도로시설을 통하여 지방의 병사들이 한 곳으로 빠른 시간 안에 집결할 수 있었으며, 도로 주변에 설치된 식량과 무기의 보급창고들을 통하여 군수물자들의 원활한 공급이 이루어졌다. 만일 타완틴수유(Tahuantinsuyu)의 영역 밖으로 원정을 가게 될 경우에는 야마(llama)라고 하는 동물이 보급에 필요한 짐을 나르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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