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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많은 곳은 천년왕국에서의 믿는이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언급했다. 여기서 이것들에 대해 한번 살펴본 후 나중에 최종 결론을 내리겠다.
왕국에 들어가는 것과 왕국 안에서의 큰자와 작은 자
마태복음 18장 1절부터 3절은,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제자들은 천국에 관하여 즉 누가 천국에서 가장 큰 가에 관하여 물었다. 이것은 구원과 멸망의 문제가 아니라 왕국에서의 큰 자와 작은 자에 관한 문제이다. 주 예수님은 그들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이어 4절에서 그분은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다. 3절은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을 말하고 4절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길을 말해준다. 3절은 우리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4절은 계속 어린 아이가 되고 계속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하셨다. 이것은 왕국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첫걸음을 내디디면 그 다음 걸음도 그렇게 내딛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당신은 어린 아이같이 되어야 한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계속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여기서 주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문제를 계속 말씀하신다.
이어서 주님은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라고 하셨다. 무릇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해 이러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한 자, 즉 어린 아이 같이 된 자,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는 곧 주님을 영접하는 자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멧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6절). 이 말씀은 남을 실족케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 손해를 입고 죽음을 당하며 좋지 않은 종말을 보는 것보다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는 것이다. 만일 누가 당신을 죽여서 땅 속에 장사하지 않고 깊은 바다 속에 던져 놓는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일종의 화(禍)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사람을 실족케 함으로 장래 입게 될 화(禍)는 이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다. 7절 : 『실족케 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왕국 안에서의 지옥불
1절부터 7절까지에서의 주 예수님은 일반적인 것을 말씀하셨다. 이에 대하여는 이제까지 언급한 것으로 족하다. 우리가 주의하는 것은 8절 말씀부터이다. 여기서 주 예수님은 이 일을 확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이 틀린 일일 뿐 아니라 자신을 실족케 하는 것도 심각한 일이다. 8절은,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여기서 「네」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읽을 때, 당신은 「네」가 질문한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주 예수님은 그들과 많은 말씀을 나눈 후에, 그들에게 남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시고 이어서 8절에서는 그들 자신을 가리켜 계속 말씀하셨다. 만일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는 것이 낫다. 네 손이 도적질을 하고 네 발이 올바른 길을 가지 않는다면, 즉 네게 죄와 정욕이 있다면 그것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8절).
여기서 주님은 만일 그리스도인이 죄를 용납하고 포용한다면 장차 어떤 조우(遭遇)를 당하게 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리스도인은 장래 두 손과 두 발이 성한 채 영원한 불에 떨어지든지 아니면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은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이생에 죄를 처리하고 정욕을 처리함으로 한 쪽 손과 한 쪽 다리만 가지고 불구인 채로 왕국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정욕을 남용함으로 영원한 불에 던지워진다는 것이다. 이 불은 영원한 불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원한 불 가운데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주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그분이 하시지 않은 말씀에는 모두 의미가 있다. 만일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손과 발이 자주 죄를 범할 때 그는 천국 안에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게 된다.
손과 발을 찍어 내버리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람은 손발을 찍어 내버려도 죄를 범할 수 있다. 발이 없으면 차를 탈 수 있고, 한쪽 손이 찍어 내버려도 다른 쪽 손을 사용할 수 있다. 주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의 뜻은 사람에게 손발을 찍어 내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손을 찍어 버린다 하더라도 당신의 정욕은 제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밖의 육신이 아닌 내적인 정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당신이 찍어 버려야 할 것은 바로 당신으로 범죄케 하는 그것이다.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온 몸을 청결케 하고 어떤 부분을 찍어 내버려도 영생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한 쪽 손과 한쪽 발을 찍어 내버릴 뿐 아니라 두 손과 두 발을 찍어 내버린다 하더라도 여전히 지옥에 가야 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은 잘 다룸을 받지 않은 채 영원한 불에 들어가기 보다는 완전치 않은 지체를 가지고 있는 편이 낫다.
그 다음 9절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이 부분도 역시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 정욕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결국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기의 영원한 불은 지옥불이다.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지옥불의 형벌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지옥불의 형벌을 받을지라도 그것을 영원히 받지 않고 왕국의 때에만 받는다.
마태복음 18장이 이렇게 말할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동일한 가르침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에도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다. 마태복음 5장 21절~22절 :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5장의 서두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이 무리를 보셨다는 것을 읽는다. 그러나 그분은 무리를 가르치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남에게 욕하는 자는 형제이다. 그는 다른 형제에게 쓸모없다는 뜻의 라가라고 하거나 미련한 놈 또는 배신자라는 뜻의 모레라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형제를 부른 형제는 지옥불을 피할 수 없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모레라고 하지 않아도 지옥에 가기 때문에 여기서 말한 것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누구에게 욕하지 않았어도 지옥에 내려가게 된다. 성경에서 행위의 문제를 언급할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언급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언급할 필요가 없다. 이 사람은 구원받은 형제이다. 그러나 형제에게 욕했기 때문에 지옥불에 떨어지게 된다.
23절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많은 때 사람들이 당신을 원망하면 당신은 어쩔 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욕하여서 다른 사람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다면 당신은 예물을 드리고자 할 때 조심해야 한다. 만일 어느 형제가 좋지 않게 느껴져서 문득 그러한 느낌을 말해냈다면, 당신은 그것을 분명히 처리해야 한다. 24절 :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중요한 것은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다. 25절 :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당신은 피고와 같고 당신의 형제는 원고로서 당신을 고발하러 간다.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25절). 천국에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은 매우 엄숙한 일이다.
여기서 나는 몇 마디 엄숙한 말을 하고자 한다. 서로 사화하지 않은 두 형제나 두 자매는 결코 함께 왕국에 있을 수 없다. 장래 왕국 안에는 사랑과 긍휼이 있을 뿐이다. 오직 서로 사랑하고 피차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만이 천국 안에 있을 수 있다. 만일 내가 호(胡) 형제와 의견을 달리 했다 하자 그것을 이생에서 깨끗이 처리하지 않았다면, 우리 두 사람이 다 왕국 밖에 있게 되거나 최소한 한 사람은 왕국 밖에 있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왕국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오늘 호(胡) 형제와 의견을 달리하고서 장래 두 사람이 함께 왕국 안에서 다스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왕국 안에서 모든 믿는이는 동심합의 되어 있고 서로간에 어떤 장애도 없다. 오늘 당신이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 어떤 형제나 자매와 마찰이 생겼다면 조심해야 한다. 결국 당신이 들어가고 그가 밖에 있든지 그가 들어가고 당신이 밖에 버려지든지 할 것이다. 혹은 두 사람이 다 밖에 있게 될 것이다. 주님은 그가 아직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하셨다. 이 말은 그가 아직 살아있고 당신도 살아 있을 때, 주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그와 사화하라는 뜻이다. 주 예수님은 두 대적이 그분의 왕국 안에서 서로 원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오늘 우리는 남을 아주 쉽게 원망한다. 그러나 그 원망은 당신을 밖에 가두거나 그를 밖에 가두거나 아니면 두 사람 다 밖에 가두게 될 것이다. 오늘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아주 자유롭고 제멋대로 행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날에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함께 길에 있을 때에」사화해야 하는데, 만일 당신이 죽는다면 그 길은 끝난 것이다. 혹 그가 죽었어도 이 길은 끝날 것이며, 주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이 길은 끝날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가 아직 길에 있고 당신도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해야 한다.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줄까 염려하라』. 재판관은 주 예수님이시다.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라고 했는데 이 관예는 천사이다. 『(너를)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여기서 우리는 형제에게 죄를 범한 사람이 장래 상당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을 본다.
이 단락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여기의 옥이 바로 22절의 지옥불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23절이 「그러므로」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23절 이후의 말씀은 22절의 말씀에 대한 설명이다. 22절은 형제를 모레(미련한 놈)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고, 23절부터 25절까지는 만일 형제와 사화하지 않으면 옥에 갇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25절의 옥은 곧 22절의 지옥불인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영원히 멸망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이 회개하지 않거나 자백하지 않고 그에게 사함받지 않은 죄가 있다면,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 이어서 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얼마나 심각한지 생각해 보라. 26절 :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옥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바로 빚을 다 갚는 것임을 보여준다. 오는 시대에도 사함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만일 호리라도 갚지 않은 것이 있다면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
그 다음 구절인 27절부터 30절은 또 다른 단락으로서 그 의미는 대동소이하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구약의 명령은 간음하지 말라이나 신약의 명령은 마음 속에 음욕을 품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여자」는 원문에서 남의 아내를 말한다. 간음은 혼인 외에서 발생하는 불법 행위이기 때문에, 남의 아내가 아니면 간음할 가능성이 없다. 만일 남의 아내가 아니라면 그것은 간음이 아니라 음란이다. 성경에서 음란에 대한 형벌은 간음에 대한 형벌보다 중하지 않다. 여기서는 남의 아내에 대해 음욕을 품는 것을 말한다.
또한 여기의 「보다」는 단어는 원문에서 포함된 범위가 그리 광범위 하지 않다. 만일 「본 것」이 다 죄라면 이 죄에 떨어질 사람이 너무도 많을 것이다. 원문에서는 「만나다」를 뜻하지 않고 오직 「보다」를 뜻할 뿐이다. 「만나」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것이고 보는 것은 의도적으로 주시하는 것이다. 보고 음욕을 품는다는 말 속에는 어떤 목적을 위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 『여자에게 음욕을 품기 위해 보는 자마다』. 주님이 정죄하시는 것은 우연히 당신 머리 속에 들어온 그런 사상이 아니다. 주님이 처리하시는 것은 우연히 어떤 사상이 머리 속에 들어온 후 음욕을 품기 위해 다시 가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사탄이 당신의 육체를 자극하여 주입해준 어떤 더러운 사상이 아니다. 우리의 죄는 사탄이 우리에게 어떤 사상을 주입한 후 당신이 다시 가서 보는 이것이다. 우발적인 사상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이나 가서 보는 것은 당신 자신의 뜻이다. 돌발적인 사상은 시험이니 가서 보는 것은 시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29절 :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만일 당신의 오른눈이 가서 보라고 했다면 그것을 빼어 내버리거나 제거 하는 편이 낫다.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만일 당신이 정욕을 제하지 않고 죄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결국 「옥에 갇히게 된다」. 그 다음 30절은 이렇게 말한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은 주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 속한 사람들은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뛰어난 의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를 처리할 것을 말씀하신다. 만일 죄가 그들에게 남아있도록 허락한다면, 그들이 영원히 명망되지는 않으나 「지옥에 내려갈」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바이다.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 던질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 일에 대해 성경의 다른 곳은 어떻게 말하는가? 누가복음 12장 1절 : 『그 동안에 무리 수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기 전에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이것은 제자들이 외식하는 자들이 아닌 주님께 속한 자들임을 증명한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4절~5절 :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분명하다.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번 그리스도인도 「지옥에 던져질 」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즉 그들이 우리 몸에만 역사한다면 어떤 일을 해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을 「지옥에 던져 넣는 이」를 두려워해야 한다.
그 다음 구절인 6, 7절도 여기의 말씀이 주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주신 것임을 증명한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까마귀이지 참새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참새이다. 마태복음에서 말한 들판의 백합화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참새도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참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마 6:26). 이것은 이방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분명히 참새가 「지옥에 던져 넣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의 머리털이 하나님에 의해 세어진 바 되었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그리 상관하지 않으신다. 여기서 주님은 그분께 속한 사람에게, 사람이 우리 몸에 무엇을 하든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으실 수도 있다』. 우리는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을 다루는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 다음에 아주 보배로운 두 구절이 있다. 8, 9절 :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시인하는 이와 부인하는 이로 나뉘어진다. 어떤 사람은 은밀히 그리스도인이 되어 사람의 영광을 얻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주님을 시인함으로써 순교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여기까지 읽을 때 여러분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의 뜻은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해 무슨 해를 입었다면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부인함으로써 짓는 죄는 다른 어떤 죄보다 중한 것이다. 그분은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다. 1절부터 9절까지를 읽은 후에 당신은 5절의 「지옥에 던져 넣는 것」이 바로 9절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천사들 앞에서 그를 시인하는 것을 다음과 같은 예로 설명해 보겠다. 한 소년이 밖에서 나쁜 짓을 하고 갇히게 되었을 때 그의 부모나 가족들은 그로 어려움을 피하도록 그것을 대신해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 소년은 너무 나빠 부모가 조금만 고통을 주어도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부모는 그 아이에게 어떤 고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결국 그 아이를 보석해 내지 않는다. 주님은 믿는이들을 이렇게 대하신다. 만일 주 예수님이 당신을 시인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형벌 안으로 떨어진다.
계시록 3장에 아주 놀라운 말씀이 있다. 계시록 3장 5절 :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왕국이 시작될 때, 하나님의 천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심판대 앞으로 하나님께 들어올릴 것이다. 거기에 생명책이 있는데 그 책에 기록된 것은 바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다. 거기에는 많은 천사들이 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며 주 예수님도 거기 계신다. 한 천사 혹은 몇몇 천사가 생명책을 읽어갈 때, 주 예수님이 시인하는 이름은 왕국에 들어가게 되고 주 예수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인하지 않은 사람은 천사가 그 이름 위에 표시를 하고 제해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기록된 이기는 자의 이름은 흰색이고 실패한 이름은 검정색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조차도 없다. 어떤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이 없고, 어떤 사람은 이름이 있었으나 도말되었고, 어떤 사람은 기록될 때나 왕국 안에서나 여전하다.
만일 심판대 앞에서 당신의 이름이 도말되었다면, 이것은 당신이 끝났고 구원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계시록 20장 15절은,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영원히 불못에 있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책에서 찾아낼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불못에 던지워질 것이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때의 일이다. 우리는 계시록 3장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고 다만 그 이름들이 도말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때 그들은 불못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이 이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은 영영 요동하지 않는 견고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우리에게도 위험이 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용납하고,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며, 간음을 하고 형제를 욕하며, 사람들 앞에서 고통과 수치와 핍박을 당할 것을 두려워함으로 주님을 시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게헨나에 던져 넣으실 것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지옥에 던져 넣는 것」은 잠시 우리로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음
성경 다른 곳에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이 있다. 계시록 2장 12절은 우리에게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계시록 20장 6절은, 다시 죽지 않고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는 한 무리를 만난다. 둘째 사망은 바로 계시록 20장 끝부분에서 언급한 불못이다. 바꿔 말해서, 실패한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된다. 그들이 둘째 사망 자체를 당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둘째 사망은 당하지 않겠지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유황 불못의 때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될 때임을 안다. 그 때에 사탄과 세상과 사망은 모두 불못에 던져진다(계 20:10, 14). 동시에 어떤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그는 불못에 던져진다. 이것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공공연하게 불못으로 들어가는 때이다. 그러나 천년왕국 때에 실패한 그리스도인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된다. 단지 이러한 다루심은 불신자에 대한 것처럼 영원한 것이 아닐 뿐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연합하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면, 주님은 그들을 부패되도록 내버려두어 불신자들이 받는 것을 받게 하신다. 이것이 계시록 2장에서 말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으리라는 것의 의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한 말씀이다. 이 「해(害)」라는 단어는 그리 좋은 번역이 아니다. 원어의 뜻은 그리 강하지 않다. 우리 말에서 「해(害)」라는 단어에는 좋지 않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은 당신이 둘째 사망의 상함을 받게 된다. 혹은 둘째 사망이 당신을 한번 상하게 한다는 뜻이다. 크고 흰 보좌로부터 영원한 불목에 들어가기까지가 둘째 사망이다. 그러나 천년왕국 안에는 둘째 사망의 해가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죄를 처리하지 않았다면, 그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된다.
종말은 불태워짐이다
이제 히브리서에 있는 두 구절을 보기로 하자. 히브리서 6장 4절 :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여기에 이런 많은 자격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비췸을 얻었고, 계시된 하나님을 보았으며, 아버지 품속의 독생자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하늘의 은사 곧 유일한 은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맛보았다. 성경에서 은사가 복수로 사용되었을 때는 성령의 은사를 가리키고, 단수일 경우에는 유일한 은사로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독생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와 다르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주 예수를 소유했을 뿐 아니라 또한 성령에 참예한 바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주 예수를 얻었으며 성령의 내주하심을 갖고 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았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 내세의 능력은 바로 천년왕국의 능력이다. 천년왕국에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더욱 흥왕되고, 각종 능력과 기사와 이적이 충만할 것이다. 이 때문에 여기서 내세의 능력이라고 말한 것이다.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것은 천년왕국에 속한 것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인 것이다.
만일 오늘 이 사람이 진리를 버리고 미끌어지고 넘어졌다면, 다시 그를 회개케 할 수 없다. 이 사람은 많은 역사를 거치고 많은 비를 흡수하였지만, 넘어졌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것들을 내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7~8).
이 사람의 종말은 다음 세 가지 이다. 첫째로 그는 「버림을 당한다」. 이 버림당함은 바로 고린도 전서 9장 27절의 버림당함이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쓰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왕국 시대에도 나를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이 버림을 당하거나 버림이 되는 것은 바로 왕국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지 못하고 버림받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저주함에 가깝다」. 그가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받은 형벌이 저주함에 가깝다는 것이다. 셋째로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것은 무슨 뜻인가? 몇 주 전에 우리는 진여(眞茹)에 있는 땅을 불사르려는 계획을 가졌었다. 그러나 땅을 영원히 불사를 수 있겠는가? 당신은 땅을 오 년 동안 불사를 수 있는가? 그러므로 여기의 「불사름」은 일시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불사름」이 있다고 말했으나 다른 곳에서는 지옥불을 피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만일 당신이 이 두 부분을 합해 본다면 서로 일치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앞에서 말한 것들을 얻은 후에 하나님께 좋은 열매를 맺지 않고 도리어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면, 그는 불살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 불사름은 일정 기간 동안만 지속될 것이다. 만일 당신의 밭에 자란 가시와 엉겅퀴를 불사르려 한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리겠는가? 국민 학생들도 알듯이 엉겅퀴는 일단 불살라지면 다시 불사를 수 없다. 왕국의 불사름은 길어야 천년이다. 사실상 얼마 동안 불살라지는 가는 당신의 상태에 달려 있다. 가시와 엉겅퀴를 많이 내었으면 보다 오랫 동안 불살라질 것이고 적게 내었으면 보다 적게 불살라질 것이다.
우리에게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남았는가? 아직 주 예수의 보혈 아래 두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되는가? 아직 자백하지 않고 처리하지 않은 일들은 얼마나 되는가? 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이 말한 가시와 엉겅퀴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 예수님은 호리라도 갚지 아니하면 거기서 나올 수 없다고 하셨다(26절). 당신은 당신의 모든 빚을 다 갚아야 한다. 모든 가시와 엉겅퀴를 다 불사르는 것이 바로 모든 빚을 다 갚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밭과 같고 그의 악한 행위는 가시와 엉겅퀴 같다. 내가 산 '다섯 에이커'의 땅이 불살라진 후에 '삼 에이커'는 사라지고 '이 에이커'만 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불살라지는 것은 가시와 엉겅퀴이고 밭은 불살라지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아담 안에서 당신의 저주받은 것들 곧 응당 제거되어야 하나 제거되지 않은 것들은 불살라져야 하며,그것들이 바로 지옥불이 태우는 대상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불로 태워지지 않는다. 가시와 엉겅퀴가 다 불태워져도 밭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 당신이 구원받은 것에는 아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당신에게서 자라나온 것들 당신의 육신 안에서 자라나온 것들은 주 예수님의 보혈을 거치지 않았다면 상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히브리서에 또 한 곳이 있는데, 그것은 10장 26절부터 29절이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역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말씀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당신이 몇십 불로 소나 양 한 마리를 사서 당신의 속죄제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안 후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그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당신은 그분을 그 많고 많은 소와 양들 중의 하나로 여기는 것이다. 끝으로 『또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라고 말한다. 이는 성령께서는 당신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당신은 그분을 욕되게 하고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배도(背道)하는 사람의 길을 보여준다. 나는 이러한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람이 구원받았을 가능성도 있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사도는 다만 그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온 후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간다면, 그 사람은 더 중한 형벌을 받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의 종말은 심판과 맹렬하게 타는 불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맹렬한 불이 있음을 본다.
이 외에도 주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이 있다. 요한복음 15장 2절 :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이 가지는 주님께 속하지 않은 가지가 아닌 주님께 속한 가지이다.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잠시적인 형벌이 아닌 오늘날의 징계일 수도 있다.그러나 6절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어떤 가지는 불에 태워질 것이다. 어떤 가지는 싹이 트고 잎사귀를 내지만 과실이 없다. 그 안에 생명이 있지만 과실이 없다. 주 예수님은 그런 가지를 제하여 버리고 밖에 버리워 말라지게 하며 불에 던져 사르라고 하셨다. 여기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불을 통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많은 성경 구절을 본 후에 우리는 만일 그리스도인이 죄 문제를 분명히 해놓치 않으면 형벌을 받게 된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이 형벌이 어떤 형벌인지를 말해주는데, 이 형벌은 일반적인 것이 아닌 지옥불이다. 그러나 이것은 왕국 시대의 불이지 영원 안에 있는 불이 아니다.
이제 문제는 어떤 종류의 죄가 우리를 그런 지경으로 이끄냐는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처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무릇 회개와 자백과 처리와 배상을 거치고 주 예수님의 보혈 아래 둔 죄는 심판대 앞에서 결코 우리를 다시 찾지 않는다. 모든 죄는 지나갈 것이다. 가장 큰 죄도 지나갈 것이다. 한 가지 지나가지 않는 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 속에 품은 죄이다. 시편 66편 18절은,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한다. 마음 속에 품은 죄란 무엇인가? 마음은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 기관이다. 마음은 당신의 감정을 대표하고 심리적인 면에 있어서 당신 자신이다. 만일 당신의 마음에서 죄를 좋아한다면 주님은 듣지 않으신다. 당신이 많은 죄를 자백하지만, 어떤 것이 죄인줄 알면서도 마음 속으로 그것을 미워하지 않고 죄로 느끼지 않을 때, 주님은 듣지 않으신다. 이뿐 아니라 만일 당신에게 사람들과 해결되지 않은 무슨 문제가 있거나 아직 용서하지 않은 어떤 일이 있거나 남에게 거리낌이 될만한 일들이 있거나 주님께와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철저히 처리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 일들을 보혈 아래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럴 때만이 그 일들이 지나갈 수 있고 장래 형벌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결론의 말
이제 장래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내리겠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 영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그러나 왕국 시대때의 문제는 하나의 의문점이다. 누구도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왕국 시대의 문제이다. 왕국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많은 등급으로 나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신실히 일함으로, 주 예수님과 함께 핍박을 받고 수치를 받고 고난을 당함으로 주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 예수님과 함께 핍박받지 않고 수치당하지 않고 고난당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죄가 없고 일생 청결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비록 일에 있어서 그에게 특출한 것은 없지만, 최소한 주님의 이름으로 소자 하나에게 냉수를 줌으로써(마 10:42) 그들도 상을 얻게 될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이 얻은 상이 작다는 것 뿐이다. 왕국 때에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이 왕국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인데 그 중 어떤이는 큰 상을, 어떤이는 작은 상을 얻을 것이다.
기타 상급을 얻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무리이다. 성경은 그들이 어디 있게 될 것인가를 말하지 않고 단지 그들이 왕국 바깥 어두운 곳에 있게 되고(마 8:12, 22:13, 25:30, 눅 13:28) 하나님의 영광 밖에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비록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그에게 아직 회개치 않은 죄가 남아 있고 철저히 처리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다. 죄 문제가 아직 처리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잠시 불 속에 넣어져 모든 빚을 다 갚고 나서야 거기서 나올 수 있게 된다. 이 기간은 길어야 왕국 시대 끝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실지로 얼마나 되는지는 나도 모른다.
장래 일에 관하여 아직 우리가 모르는 많은 일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이미 충분하다. 비록 많은 상세한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도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직면하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충분히 말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상을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은 망하게 되며, 어떤 사람은 옥에 갇히게 되고 어떤 사람은 불에 던져져 태워질 것이다.
구원의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앞에서 충분히 보았다. 주 예수를 믿고 의지한 그리스도인의 구원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고 영생의 문제도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구원 받은 후부터 죽기까지의 그의 모든 행위의 실패와 성공은 왕국 안에서 그가 받을 것을 결정해 준다. 우리 하나님은 공평한 분이시다. 한편에서 그분은 구원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 주신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누구도 이 사실을 전복 시킬 수 없다. 다른 면에서 주님은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고 해서 함부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만일 우리가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불사름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만일 주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실 수 없고, 우리의 생활에서의 문제가 처리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장래 우리를 질책하시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그분은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분과 함께 거하도록 특정한 형벌로 우리를 정결케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예비하심도 공평하다. 일단 이러한 것들을 보았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 가르침과 경계를 받았을 것이다.
성경을 읽는 합당한 태도
여기서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에 관하여 몇가지 언급 하겠다. 첫째로, 어떤 무리는 오로지 은혜만을 믿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왕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유대인에게 적용시킨다. 그들의 설교를 들어보고 그들의 책을 읽어본다면, 그들이 왕국에 관한 모든 것들을 유대인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은혜에 관한 모든 것은 교회를 위한 것이고, 화(禍)에 관한 모든 것은 다 유대인을 위한 것이다. 모든 무겁고 힘든 것은 유대인을 위한 것이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간에 그분의 자녀를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바울의 서신에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 없기 때문에 그 서신들은 이방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반면에 어떤 무리들은 이제가지 언급된 성경 구절들이 다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죄인에게도 승리하고 패배하는 문제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터무니 없는 말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라면, 그것이 달든 쓰든 다 먹어야 한다. 사람들은 은혜에 대해 들을 때에는 기뻐하지만 왕국에 대해 들을 때에는 싫어한다. 그러나 한면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보여 주고, 다른 면에서 공의를 보여주는 이러한 말씀은 균형 잡혀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寓話)가 있다. 한번은 고양이가 독수리를 만났다. 독수리는 고양이에게 하늘은 이런 저런 면에서 정말 좋으니 거기로 데려가 줄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고양이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무엇 때문이니?』『하늘에 쥐가 있니? 쥐가 있으면 가고 없으면 안 갈 거야.』 하늘은 거룩하고, 죄나 세상이나 사탄이 없는 곳이다. 오늘 만약 하나님이 당신을 하늘로 데려가신다면 당신은 거기서 살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오늘 돌이키지 않는다면 합당하게 될 때라야 거기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이미 구원하셨다. 그러나 주관적인 면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우리 안으로 역사하시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기에 합당하게 되도록 우리를 채찍질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은혜만 전하고 왕국을 전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손상을 입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도 손실을 당하며, 왕국이 임할 때에는 더 큰 손실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부득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내가 전한 메시지로 인해 나를 더욱 반대할 것이다. 만일 이것이 내 말이라면, 나는 그들의 반대를 받아들이고 나 자신도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난들 이러한 말이 아닌 사람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하고 싶지 않겠는가? 나는 마태가 아니고 마가도 아니며 바울도 아니다. 히브리서를 내가 쓰지 않았고 계시록도 내가 쓰지 않았다. 만일 내가 쓴 것이라면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분은 이미 전하셨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셨다. 친구들이여! 성경을 읽을 때 당신은 사람이 무어라고 말했는지를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관심해야 한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머리 속에 많은 견해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진리라고 칭하는 어떤 것들이 있고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것들도 있다. 그들은 그들과 같은 것은 다 진리이고 그들과 같지 않은 것들은 모두 이단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많은 성경 근거를 가지고 있어도 그들의 생각이나 관점과 다른 것은 모두 이단이라고 한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끝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관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가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이단」을 말하고 사람의 가르침에 따른 「진리」를 반대할 수 있음을 인해 내 마음이 심히 기쁘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다른 어떤 것도 당신 위에 권위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정확히 보기 바란다. 우리는 다른 권위를 모르고 무엇이 신학인지도 모르며, 무엇이 사람의 말이고 무엇이 교회의 유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직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서 무어라고 말했는지만을 알 뿐이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는 성경 아래 굴복할 수 있을 뿐 그 말씀을 바꿀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자녀들의 운명과 왕국 안에서 우리가 갖게 될 상태를 알려 준다. 이러한 문제들은 장래 우리가 직면하게 될 문제이므로 우리는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이것을 주의한다면, 이 땅에 살 동안 우리는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게 된다.
두번째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오직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이단을 반대할 수 있고 이단으로는 결코 이단을 반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단 중에 완전한 이단은 없다. 이단은 다 진리에 오류가 더해진 그것이다. 이단이란 무엇인가? 이단은 옳은 것들에다 사람에게 속한 어떤 것을 추가할 때 곧 이단이 형성된다.
천주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연옥의 교리를 전파한다. 오늘 당신이 내가 전한 이 몇 메시지를 읽어 보지 못했다면, 당신은 연옥에 관한 교리가 옳은지 그른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읽어보았다면 당신은 연옥에 대한 천주교의 가르침이 전혀 옳지 않음을 알게 되고, 그것을 이단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천년 왕국에서의 일이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오늘이 연단될 때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이 표준에 이르지 못하면 천당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연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일단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하나님은 그가 완전히 연단될 때까지 그를 연단시키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런 교리를 찾아볼 수 없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에 음부에 가서 연단될 것이라는 말을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은 장래 왕국 안에서 징계를 받게 되는 것이지 오늘 음부 안에서 연단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둘째로, 천주교의 근본적인 오류는, 그들이 죽은 후에 신부가 기도를 하거나 살아 있을 때 면죄부를 사면 연옥의 시험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말이다. 성경은 오직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했다. 결코 신부의 기도가 죽은 사람으로 무엇을 탕감받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결코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없다.
셋째로, 그들은 사람이 잘 연단받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성경의 교리를 뒤집는 것이다. 성경은 천하 인간 가운데 주 예수님 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없다고 말한다(행 4:12). 오직 주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주 예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징계와 질책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결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기 전에 우리의 구원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직 하나님을 닮지 않고 완전하지 않고 좋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되 내세 왕국 때까지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이다.
성경 진리를 깨달았다면 당신은 천주교의 이단을 보았을 것이다. 천주교는 다만 그의 목적을 위해 성경 몇 마디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 진리를 이해했다면, 당신은 연옥의 교리가 은혜의 성질을 망쳐놓았음을 보게 될 것이다. 비록 나는 더러운 사람이지만,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음을 인해 감사드린다. 구원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그분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죽은 후에 나는 연단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징계가 무엇인지를 안다. 징계는 바로 우리로 그분을 완전히 닮게 하는 것이다. 그분이 나를 질책하시는 목적은 나로 그분을 닮고 그분과 똑같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구원과 무관하며 그분의 가정에서의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개신교 안의 이단을 다룰 수 있다. 오늘날 개신교 안에서는 두 종류의 오류가 발전되고 있다. 첫째는, 사람이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고 사람의 행위는 어떠해도 좋다고 말하는 한 무리의 개신교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한번 죽으면 영원히 구원받고, 그가 죽을 때까지 행위가 좋지 않아도 왕국 안에 있을 수 있으며, 다만 그의 지위가 남보다 낮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의 가장 큰 손실은 왕국 안에서 지위가 남보다 낮은 데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은 사람으로 방종하게 하고 제멋대로 행하게 한다. 은혜란 무엇인가? 이 무리에게 있어서 은혜는 느슨함과 방종을 위한 기회이다.
또 한 무리는 사람이 믿은 후에도 구원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 하루에 서너 번씩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생명책은 기록했다 지웠다 하는 것으로 인해 아주 희미하게 보일 것이다. 전에 어떤 형제는, 만일 한번 믿어서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다면 생명책이 엄청나게 두꺼울 것이라고 했다. 내 이름만도 몇 번이나 기록되고 몇 번이나 지워졌을지 모른다. 만일 범죄한 즉시 정죄받고 지옥에 내려가야 한다면,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이 양쪽은 다 극단이다. 이 두 무리는 모두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사람이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성경은 또한 그리스도인도 잠시 「불에 던져질」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형제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영 구원받는다는 한 쪽 진리만 붙잡고 왕국의 징계를 말하지 않는 데 있다. 또 어떤 형제는 만일 우리가 「지옥에 던져진다면」 이것은 우리의 영생이 가변적인 것이며 영영 멸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왕국과 영세(永世), 잠시적인 천 년의 형벌과 영세의 형벌과의 차이점을 보았다면 비록 그리스도인이 장래 형벌받을 가능성이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그분의 양들에게 주신 영생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볼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영영 멸망하지 않는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천주교의 연옥이 이단이라는 것을 알게 될 뿐 아니라 구원과 징계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나사렛 사람 예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영생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으나 왕국 때에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