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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예수와 몸의 부활을 전하였던 아덴(아테네)의 아레오바고 언덕)
오늘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한 그 내용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사도행전17:16-18)
사도 바울이 날마다 변론하고 쟁론하며 전했던 내용이 바로 예수와 또 몸의 부활입니다.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사도행전17:32-34)
사도 바울이 전한 것은 부활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거듭났다고 할 때, 거룩하다고 할 때, 온전하다고 할 때, 무엇이 거듭나고 거룩하며 온전하고 또한 부활했을까요? 오늘 나누고자 하는 내용이 바로 몸의 부활에 관한 부분입니다.
우선 우리가 거듭날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또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삼십 세쯤 되어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 즉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실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복음3:13-17)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누가복음3:21-23)
예수님의 생애가 침례(세례)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침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죽음을 얘기할 뿐 아니라 살아남도 얘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실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는 정결한 분이셨고 흠도 점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하는 일이 바로 침례의식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는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과 우리가 받은바 은혜가 모두 함축되어져 있습니다.
침례는 우리가 거듭나면서 제일 처음 행하는 행사입니다. 즉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면서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행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일을 행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 분은 이미 거룩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침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침례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본이 되어주셨습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침례의식은 죽음에서 부활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활했습니까? 침례를 받을 때 물 속에 들어간 것도 육체이고 물속에서 나온 것도 육체입니다. 여기서는 영과 혼을 다루지 않았고 오직 육체만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시작은 침례를 받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살아난 사람이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이 침례의식이었습니다.
(요단강 예수님 침례터. 예수님께서는 친히 침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와 함께 죽음에서 부활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된다는 말씀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태복음16:19-20)
이 부분은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한 말씀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까지 준다고 하십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천주교의 1대교황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됩니다. 물론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천주교에서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얼마나 신뢰했으면 천국열쇠를 준다고 하셨을까요? 이 천국 열쇠가 무엇인지는 다음 시간에 교제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태복음16:21-23)
예수님은 그렇게 믿고 신뢰했던 시몬 베드로에게 단호하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치십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오로지 예수님을 지켜주겠다는 마음으로 얘기했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 부분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건인지 증명해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은 바로 죽었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통하여 우리의 부활과 거듭남 또한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인지 아셔야 합니다.
사랑하고 신뢰하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노라고 했던 베드로에게, 주께서는 심하게 호통치십니다. 죽으셨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엄중했기에 사랑하는 제자의 말을 듣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비록 사랑하는 제자이지만 주께서 행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이었기에 꼭 행하셔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우리는 거듭나게 됩니다. 이 거듭남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인지를 우리는 살펴보십시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태복음17:22-23)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태복음20:17-19)
예수님은 그냥 죽어야 한다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삼 일 만에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하셔야만 하는지 우리는 이 사실들을 좀 더 깊이 있게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거듭났다” “부활했다”고 할 때 이 용어들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큰지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기 원합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한복음2:17-22)
요한복음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영접하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성령님을 어디에 영접해야 할까요? 사실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 곳은 성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십육 년 동안 지어놓은 성전을 헐라고 합니다. 그 곳은 이미 정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친히 삼 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죽었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한복음2:13-17)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2:18-19)
(예루살렘 통곡의 벽. 솔로몬의 성전 터이자 예수님께서 이땅에 계실 때에 헤롯이 46년째 짓던 성전 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물론 그 목적 속에 교회도 있고 거듭난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셔서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거룩하다” “의롭다” “온전하다” “흠도 점도 없다”고 하면 수많은 사람들은 ‘너는 죄를 안 짓냐’는 얘기부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도 죄를 지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거듭나서도 죄를 지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복음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죄와 불법을 도말하시어 기억지도 않는 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8: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이사야서1:18)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이사야서44:22)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이사야서43:25)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편103:3)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편103:12)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이사야서38:17)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예레미야31:34)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가7: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스가랴3:9)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6: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5:24)
당신은 거듭났다고 하면서 주님이 기억지도 않고 도말하신 죄를 아직도 짓고 계십니까? 성경에는 이보다 더 무서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는 나무로 아느니라”(마태복음12:31-33)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브리서10:26-29)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브리서6:4-6)
하나님이 행해주신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으로 옮겨진 이 육체가 죄를 범할 수 있을까요?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맛본 육체가 다시 타락하여 죄를 지을 수 있을까요? 육체를 거룩하고 정결하게 하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11:25-26)
영생과 연관되어진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한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는데 이 생명을 가진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을 행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셔서 우리를 부활시켜야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들의 영생은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생명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요? 물론 거듭나면서부터 시작입니다. 거듭나면서 이미 영생을 가졌고 이미 거룩하고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한복음15:3-4)
거듭난 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미 깨끗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다고 합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15:3-5)
이 과실은 무엇일까요? 바로 거룩하고 의로운 열매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하고 의롭고 온전한 모습을 설명해주는 내용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15:10-12)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부활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사랑입니다. 거룩하여지고 의로워진 사람들이 행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거듭남을 이야기 하셨고 부활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에 쌌더라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하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한복음19:38-20:9)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간 이후 부활한 모습을 설명해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에 대한 내용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육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정확히 전하려면 죽고 장사된 무덤 안에 빈 세마포만 있고 예수님의 육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을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한복음20:15-17)
마리아는 누가 예수님을 옮겼다고 얘기합니다. 즉 무덤 속에 예수님의 육체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지려 하니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으니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만질 수 있는 육체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내용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한복음20:26-29)
예수님의 육체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설명해주는 부분입니다.
(예루살렘 정원 무덤 내부. 예수님의 시신을 뉘었던 장소이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돌.)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을 만져보지도 못했고 눈으로 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고 만진바 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요한일서1:1-2)
이 부활의 의미가 이렇게 놀랍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5:12)
사도바울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3:21-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의 신분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로마서5:1)
의롭게 된 것은 우리의 신분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신분만 전하면 복음은 절반밖에 못 전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로마서5:17)
거듭난 자들의 상태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의롭게 된 신분을 가진 자들이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상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5:21)
이 부분은 신분과 상태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영생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로마서6:3)
이러한 자들에게 필요한 부분이 바로 세례 즉 침례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침례를 이야기할 뿐 아니라 죽음도 이야기 하고 살아남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6:4)
새 생명가운데서 행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로마서6:5)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활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단지 이론적으로 함께 죽고 장사되었다가 함께 부활했다는 논리만 갖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무덤 속에는 육체가 없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육체가 부활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6:6)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함께 죽고 장사되었다가 함께 부활시켜 거듭나게 하시고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십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로마서6:7-9)
사망이 다시는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새 생명가운데서 왕노릇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신앙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듭난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생명을 함부로 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전해 주신 이러한 부활의 놀라운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생각과 지식대로 생명과 부활을 함부로 논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부활절이라 기념하는 날, 많은 이들은 삶은 달걀을 나누며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이 놀라운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깨어나지도 못하는 삶은 달걀을 가지고 부활절을 기념하는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루살렘 정원무덤 전경.)
이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확실히 아셔야 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은혜로 우리는 신앙을 해야 합니다.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사도행전2:31)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누가복음24:36-39)
분명히 살과 뼈가 있는 육체가 부활한다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부활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사도행전17:18)
또한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무덤이 열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려서 그 무덤속에 있던 육체가 부활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마태복음27:50-52)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이사야서26:19)
무덤속에는 육체를 묻었습니다. 영혼을 묻은 것이 아닙니다. 무덤이 열리는 사건은 육체를 부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해주신 이 모든 사실들을 보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의 제사방법과 성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민족들이 성소 안에서 행해왔던 일들을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자가 되었는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브리서9:11-14)
분명히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로 부정한 자들의 육체도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할 수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는 무엇을 정결케 했을까요? 바로 거듭난 성도들의 육체와 생각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다룰 때 영만 얘기하거나 혼만 얘기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 혼 몸을 다 거룩케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을 때 무엇이 죽었을까요? 바로 육체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그들의 죄를 가릴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2:1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세기3: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세기3:21)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서 아담과 하와의 육체에 입히십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한번 더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담에게 육체를 가려주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죄 지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좋은 에덴에서의 삶을 포기한,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육체를 가려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도 무화과나무 잎이 아닌 가죽옷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이 한 행위를 보셔야 합니다. 죄를 범하자마자 그는 자기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렸다는 사실입니다. 이 의미가 어떤 의미를 간직하고 있을까요? 육체가 무의미하다라고 말하시면 절대 안됩니다. 최초의 인간이 행한 행위가 육체를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의 의미로 최초의 인간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셔서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2:7)
여기서 우리는 깊이 묵상해봐야 합니다. 흙으로 육체를 만드시고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신 하나님, 그러자 사람은 생령이 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깊이 묵상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영접하라 하시며 영접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1:14)
또한 마지막 날 사람을 만드시고 천지가 창조되어지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세기1:31)
하나님이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를 정결케 하고 거룩케 하여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들어오십니다. 즉 영과 혼과 몸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영생을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5:23)
여러분이 하늘나라 가실 때 영만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고 혼만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육체 또한 가야만 온전한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거듭남을 논하고 복음을 논할 때 영과 혼과 몸을 함께 논해야 합니다. 몸인 육체와 혼인 생각은 항상 같이 움직입니다. 죄를 지을 때도 함께 움직였고 거듭날 때도 함께 거듭나야 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2: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1:12)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 안에 영접하려면 우리의 혼과 몸은 거룩해야 합니다. 그중 어느 하나가 거룩하지 않다고 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전하고자 했던 복음 또한 이 복음이었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브리서9:14)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했을 뿐 아니라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 놀라운 복음을 듣고 거듭나서 새 생명가운데 거하는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을 행해주신 하나님을 찬미하며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이 바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