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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밥도 먹고 책도 먹습니다. 그래야 몸도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새로워지니까요. 새로움은 변화이며 변화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당연지사니까요. 새로워지지 않으면 이미 생명이 아닌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낡아감도 늙어감도 새로움이라는 걸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우리는 새로움과 결별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리틀도서관 책먹방에서 책맛보기할 책은 저자 김훈의 [달 너머로 달리는 말]입니다.
제목은 선
명한 허구적 색채에서 생생한 구체적 현실을 읽다’로 정해보았습니다. 저자가 빚어낸 색채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들여다보게 해주었습니다. 허구로 현실을 적나라하게 실토하니 예술이라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색깔로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바람과 함께 불타는 초원, 밤하늘에 돋아나는 별, 바다에 장엄하게 부서지는 노을, 고요함을 품은 은은한 초승달, 온갖 죽음들을 쓸어내고 회복하는 강물 등이 떠오릅니다.
책의 초반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초나라는 흐르는 강물을 숭상했다. 흐르고 또 흘러서 사라지고 잇닿는 새로움과 해마다 흐름을 바꾸어 새 길을 열어내는 물의 힘을 초나라는 거룩히 여겼다.”
흐르는 물처럼 생명있는 것들은 항상 새로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새로움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초나라는 물을 위력을 성스럽게 여겼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싱그럽게 자라나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들 속에서 새로움을 맞닥뜨릴 때마다 환호하고 환영합니다. 그런데 낡아감과 늙어감도 새로움을 품고 있다는 것을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의 책은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의 후반부에 이를 때까지도 새로움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그 낡아감과 늙어감의 새로움이 새롭고 궁금하여 책이 끝날 때까지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낡아감과 늙어감의 새로움은 자라남과 피어남 속에 깃든 새로움 못지않게 경이로웠습니다.
일흔이 넘은 늙은 저자의 사유가 펼쳐낸 문학덕분이었습니다. 저자의 늙음에 감사했습니다. 봄, 여름이 새로움을 담고 있어 아름답다면 가을, 겨울 역시 새로워서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책에서 젊은 말은 젊어서 아름답고 늙은 말은 늙어서 아름다웠습니다. 책은 젊음의 아름다움과 늙음의 아름다움을 함께 담아내고 있지만 그 아름다움의 실체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젊음을 닮으려고 하는 늙음은 오히려 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몸의 쇠약함을 영혼의 맑음으로 승화시켜 가야겠구나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저자는 언어의 타락과 한계에 주목하고, 책이 없는 나라를 선망했지만 영혼이 가난한 독자에게는 여전히 책이 필요합니다. 책이 필요치 않는 영혼을 저는 언제 마주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아득합니다.
책은 초승달을 향해 달리는 신월마(新月馬) 떼의 풍경으로 시작합니다. “산맥 위로 초승달이 오르면, 말무리는 달 쪽으로 달려갔다. 밤은 파랬고, 신생(新生)하는 달의 풋내가 초원에 가득 찼다. 달릴 때 말들의 피는 빠르게 돌았고 숨은 깊었다. 말들이 다가갈수록 초승달은 뒤로 물러섰다.
말들은 한없이 달렸다. 초승달은 가늘었고 빛에 날이 서 있었다. 초승달이 희미해지면 말들은 사라지는 달을 향해 소리르르 모아 울면서 더욱 빠르게 달렸다. 초승달이 지고, 달 진 어둠에서 흐린 별이 보일 때까지 말들은 달렸다. 후세의 사람들이 이 말 떼를 신월마(新月馬)라고이름 붙였다. 초승달을 향해 달리는 말이라는 뜻이다. 신월마는 달에 닿지 못했다”
초나라의 신월마가 떠오른 초승달이 질 때까지 달렸다면 단나라의 비혈마(飛血馬)는 해가 저물 때까지 달렸습니다. 핏빛과 함께 달려가는 비혈마의 모습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해가 수평선 쪽으로 내려앉고 바다와 하늘이 붉어지면,, 비혈마들은 저무는 해를 향해서 달려갔다. 노을은 빛 속에 어둠을, 어둠 속에 빛을 품으면서 어두워졌다.
비혈마들은 어둠에 잠겨가는 마지막 빛을 향해 더욱 빨리 달렸다. 소멸하는 빛에 비혈마들은 조바심쳤다. 달리는 힘이 전신으로 솟구쳐 오를 때 비혈마의 피는 거칠게 흘렀다. 목에서 머리로 머리로 올라가는 핏줄이 밖으로 터져서 핏방울이 바람에 흩어졌다. 피를 날리면서 비혈마는 밤새도록 달렸다. 비혈마는 이 피바람에 붙여진 이름이다.
말들의 눈동자에 저무는 빛이 번득였다. 밤에 말들은 해안에 당도했다. 말들은 고개를 들어서 인광이 부서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안에서 말들은 건너갈 수 없는 저쪽을 향해 높이 울었다. 신월마는 달에 닿지 못해도 달렸고 비혈마는 바다를 건널 수 없어도 달렸습니다. 젊어서는 그랬습니다. 그것이 젊음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신월마는 유목의 나라 ‘초’의 말이었고, 비혈마는 농경의 나라 ‘단’의 말이었습니다. 나라는 전쟁이 필수입니다. 두 나라가 전쟁을 하면 이쪽 저쪽의 말들은 영문도 모르고 전쟁터에서 달려야 했습니다. 유목의 나라든, 정착의 나라든, 국가 유지와 번성을 위해서는 야만과 폭력은 일상이었습니다. 그 탓에 생명 있는 것들의 죽음은 지천으로 깔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 있는 강, 나하가 있었기에 온갖 것들의 죽음들을 쓸어내고 회복시켰습니다. 강은 숱한 죽음들을 품고서 흐르고 흘러 세상을 정화시켰습니다. 강물은 숭상 받아 마땅했습니다. 또한 나라아닌 나라, 월나라가 있었기에 초와 단을 떠난 사람과 말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주었습니다. 국가가 저지르는 횡포를 떠난 이들을 품어주는 월나라가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 궁금합니다.
저자는 초나라와 단나라의 역사서를 제시하며 이야기를 끌어내기 시작했습니다. “ 초의 [시원기]나 단의 [단사]는 모두 제각각의 기록이다. 초와 단이 나하를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싸웠으므로 그 기록들은 서로 부딪친다. 게다가 단의 기록은 당대에 이루어졌으나 초의 일들은 후세에 문자로 옮겨졌으므로 두 건의 서물은 서로 맞물리지 않는다. 나는 초원과 산맥에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들을 짜 맞추었다. “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의 이야기에는 수많은 사람, 말, 개 등의 죽음이 다반사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질척거리지 않았습니다. 애달은 죽음도 없었습니다. 죽음은 그저 죽음일 뿐이었습니다. 늙음 또한 늙음일 뿐이었습니다. 생로병사가 고통으로 그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그저 생명가진 것들의 당연한 일상이었습니다.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얽매여 있지도 않았습니다. 늙고 병든 그대로 그저 담담하게 그 길을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 되었습니다. 늙지 않으려는 욕망, 병들지 않으려는 욕망, 죽지 않으려는 욕망이 거세되니 담백한 생명들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특히 ‘돈몰(旽沒)’의 풍속은 위엄있는 죽음으로 와 닿았습니다. 돈몰에서 돈은 밝을 돈이고, 몰은 가라앉을 몰입니다. 돈몰은 밝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돈몰의 풍경을 따라가보기로 합니다. “식량이 모자랄 때는 늙은이는 굶었다. 배고픔이 남세스러워서 늙은이들은 스스로 나하에 몸을 던졌다.
새벽에 늙은이들이 강물을 따라 사라지는 풍속을 돈몰이라고 적었다. 늙은 백성들이 스스로 소멸의 길에 나아감으로써 산 자들의 삶을 긴장시키고 초원에 활기를 넣어주는 일이었므로 돈몰의 강을 흘러가는 노인의 소멸은 평화로워 보였다.
쉰 살이 넘자 초나라 목왕은 늙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왕뿐 아니라 초의 늙은이들은 늙음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다. 목왕은 일찍이 싸움터에서 죽어서 봉분없는 무덤으로 초원의 흙 한줌이 되려고 했으나 몸이 삭아서 싸움터에 나가지 못했다. 목왕은 큰아들에게 군사를 맡기고 자신은 초막에 들어앉았다. 군대를 보낸 다음 날 새벽에 목왕은 물가로 나왔다. 물줄기의 흐름이 빨라서 배를 띄우면 노를 젓지 않아도 이틀이면 나하의 본류에 닿는다.
목왕은 쪽배를 타고 나하가 바다에 닿는 하구쪽으로 스스로 사라지려는 것이었다. 돈몰의 풍속을 따라 왕은 나하 하구에 바신의 백공를 버릴 작정이었다. 교군들이 가마를 들어서 배 위에 얹었다. 목왕은 가마 밖으로 팔을 내밀어 손수 밧줄을 풀었다. 배는 물결에 실려서 강심으로 나아갔다. 교군들이 물가에서 멀어져가는 왕으 배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절했다. 왕이 돌아보며 말했다. 돌아가라, 춥다, 가서 말에게 먹이를 주어라.
초나라 목왕의 마지막 모습은 어쩐지 매화에 물을 주라던 퇴계의 임종과 닮아보였습니다. 목왕과 퇴계는 당신들이 죽더라도 남아있는 자들에게 일상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깁니다. 산 자들에게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내야 할 책무를 상기시켜 주면서 그들은 사라집니다.
목왕은 늙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고 물러남을 실천합니다. 목왕의 부끄러움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부끄러움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부끄러움의 미학이라 해야 할까요? 목왕의 부끄러움과 겸손과 물러남은 자연의 순리로 여겨졌고, 그래서 아름다웠습니다.
동시에 정계를 은퇴하지 않는 뻔뻔한 늙은 정치가들의 현재 모습이 떠올랐는데 그들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물러나지 않고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나대고 있는 그 모습은 외면하고 싶을 정도의 추함이었습니다. 달콤한 권력의 그 맛을 늙어서도 포기하기가 쉽지 않은가 봅니다. 쿨하게 물려주고 돈몰하는 목왕의 위대함이 그래서 더 부각되어 보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이야기를 전하는 속에서, 말이 되기도 하고,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말이면서 사람이고 사람이면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이라는 소설은 환타지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환타지가 아닌 생생한 현실로 와닿았습니다.
대략 30년의 기자생활을 했던 저자의 문학은 현실에 바탕한 ‘보고서, 기록, 다큐, 논문, 역사’등에서 얻은 배경지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구체적 현실을 실감하고 대비하면서 읽느라 빨려들었습니다. 그가 창작한 이야기는 현실을 들여다보기에 안성맞춤인 허구였기에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그는 책을 쓰는 저자이지만 책이 없는 나라를 선망하고 책읽기보다는 직접 경험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나는 읽은 책을 끌어다대며 중언부언하는 자들을 멀리하려 한다”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제 가슴이 뜨금했습니다. 저자는 세상을 두루 경험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친 서적에 탐닉한 자들이 날뛰는 세태를 두고 볼 수가 없었던 듯 것 같습니다.그래서 소설 속에서도 그 속내를 초와 단 두 나라를 통해 피력합니다.
“초나라는 문자를 멀리 했다. 왕들은 문자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일을 금했다. 초나라 사람들은 시와 노래와 춤과 놀이와 싸움을 좋아했다. 시와 노래는 반드시 암송해서 무기나 밥처럼 몸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왕들은 가르쳤다.
말(言)에 홀려서 허공을 떠도는 마음들을 초나라 목왕은 걱정했다. 초의 선왕들은 기록된 책으로 세상을 배우지 못하도록 엄히 단속했다. 목왕은 세상과 문자가 뒤섞이는 사태를 두려웠다. 땅에 주저앉아서 말을 주절거리는 자들의 게으름을 경계했다. ”
“단은 문자를 알았고 문자로 세상일을 적었고 문자를 받아들였다. [단사]를 기록하는 자들 가운데 후세에 말 잘해서 영화로운 자들이 이야기를 덧붙이고 비틀기를 거듭했다. 그러므로 단사에서 옮길 만한 대목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라의 이름(글자) 아래서 죽고 또 죽였으니 이름의 힘을 알 것이로되, 이름은 글자에 지나지 않을 진되, 이름의 힘이란 대체 무엇인가, 사람의 마음 속에 있으나 세상에는 없는 것들을 세상의 땅 위에 세우려고 단은 싸우고 또 싸웠다. 또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고 그것들이 이루어지기가 더딤을 한탄하면서 많은 문장을 지었다”
이를테면 저자는 단나라를 통해‘ 사회주의, 민주주의, 애국심, 민족주의, 진보와 보수’ 등과 같은 서적과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태를 빗대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직접 부딪쳐서 사람과 세상을 배우고 배려하기보다는 오로지 서적에 매몰된 자들이 말로만 떠들어대는 몰염치, 천박함, 거짓, 위선이 도를 넘는 모습을 간과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책보다는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다음과 같이 쐐기를 박습니다. “ 단나라는 문자를 숭상해서 많은 병서를 지어냈으나 적의 병법과 아군의 병법이 짝을 이루며 서로 비겼고, 싸움은 병서 밖에서 벌어졌다.”
그렇습니다. 실제 상황은 책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론대로 세상은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재난이 닥쳤을 때 살아남는 법 역시 매뉴얼 밖에 있을 수 있습니다. 책대로 매뉴얼대로 하다가는 허망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축구에 관한 이론을 많이 안다고 해서 축구를 잘하게 되는 건 아닙니다. 직접 발로 축구를 해봐야 축구 실력이 느는 거니까요.
이런 저런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라고 이론을 정립하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래야 저래야 한다고 말로 글로 떠들기보다는, 직접 자신이 작은 일이라도 실천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싶은가 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재난과 참사의 피해를 입은 약자를 돕는 시민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이라는 책은 유튜브에다가 책맛보기라는 이름을 내걸고 저 자신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저를 드러내고자 하는 허영심을 성찰하는 기회도 가지고 자의식을 들여다보게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저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고마운 책입니다.
저에게는 이렇게 아직 책이 필요한 듯합니다. 하지만 책을 만드는 저자가 책의 무용성을 강조하는 그 마음가짐을 잊지 않겠습니다. 항상 윤택한 일상과 구체적 현실을 염두에 두는 책맛보기가 되도록 애써보려고 합니다.
이냥 문자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세상일을 모두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이상, 다양한 책과 정보를 통해 간접경험을 도모하는 것이 전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간접 경험을 하고자 하는 것도 직접 경험에 보태서 더 잘 살아남기 위해서니까요. 책읽기는 저의 빈약한 영혼에 거름을 주기 위해 필요합니다. 마당에서의 노동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