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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古處士竺山全公墓碣銘*** 공의휘는 세삼이요,자는 의숙이요, 성은 전씨이니 축산인이요 학고는 基 號이다.
백제때 환성군 휘섭을 상조로하고 신라때 휘선은 정선군이요 휘이갑은 고려 태조를 대신하여 순절하시니 정선군을 봉하고 草溪 道溪書院에 향사하였다.
고려말에 이르러 휘원발은 현량으로 선임되어 중국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位가 金紫에 이르러 榮祿大夫兵部尙書兼集賢殿太學士하고 환국하게되니 본국이 조공을 감하여 병든것을 제거한 공으로 축산부원군을 봉하니 세칭 국파 선생이다.
이분이 諱한을 두시니 문과 사복시정이요 이분이 諱慄을 두시니 덕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다. 여러대를 지나 諱大황에 이르러 임진란에 의병으로 군사를 일으킨 공으로 啓功郞을 받고 壽陞 嘉善大夫 戶曺參判을 하였으니 공에게 6대조이다. 諱克秀 諱承業 諱聖源은 고조 증조와 考이다. 고의 휘는 震光이니 효행으로 贈朝奉大夫童夢敎官 하였다.비는 영인 진성이씨 찰방 원길의 여니 영조 을미에 공을 용궁의 만의동 집에서 낳으시니 나던결로 총명하여 말을하면 사람이 놀랄 말을 하곤 하였다.
처음으로 수학하는데 한번보면 成誦하였다. 어려서부터 성장하여서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 하였으며 독실하게 참된 공부를 하였으니 거의 침식을 잊을뻔하였고 고인의 서적 외에는 하는일이 없었으며 世事가 浮沈함에는 전혀 괘념하지 않았고 어버이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고 오로지 부모의 안색을 살펴 마음에 거슬리지 않도록 봉양에 힘썼다.
세상 돌아가는 도리가 점점 쇠락하는것을 보고는 분수밖의 명리따위는 원치아니하고 매양 구름사이의 달과 비온뒤의 산에서 자연히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심신이 청신하여져서 오직 뜻이 자적하였으니 참으로 천부의 성질을 온전히함을 평생의 이력으로 삼았다. 영고와 성쇄같은데 이르러서는 그 운수에 한정이 있으므로 전원에다가 정자를 세우고 속세를 멀리하고 거닐다가 정침에서 終하니향년이75세더라.
5남을 두시니 重龜 重載 重昌 重采 重天이요,중귀는 1남 熙學을 생하였고 중제는 1남 熙穆을 두었으며 중창이 1남 熙鳳을 생 하였고 중제는 允濟后로 출계하엿고 중천은 3남을 두시니 熙孝,熙友,熙仁이다.餘는 不盡錄한다.
어느날 후손 澣默 連默 在魯甫가 북쪽으로 오백리를 쫒아와 나에게 공의 묘명을 청하거늘 돌아보건데 이 변변치 못하여 이를 감당하지 못하나 길이 멀지만 나를 돌아본 정성을 봐서도 사양치 못하여 家乘에서 取하여 대략을 기록하고 아울러 평일 들은바를 참고하여 우와같이 撰하여 塞責코져 하노라.
묘는 구태산 중봉 갑향원에 있다.
이어서 銘을 하여 가로되
이력이 독실하여 家聲을 계수 하였다.전원에서 이를 즐겨 일생을 소요 하니라.
정사팔월 족후손炳都 謹撰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