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은 행주이며 벼슬은 참봉(參奉)을 하였으며, 참판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가업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대받았다. 을미(乙未) 정미(丁未) 의병운동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된 그는 실전(實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상소를 올려 일제에 의한 개혁을 혁파하고 구제(舊制)로 환원할 것을 청원한다든지, 각지에 격문을 돌려서 투쟁할 것을 호소하여 호남의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가 남긴 글에서 의병전쟁에 참여한 당시 유생들의 위정척사 사상의 전형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기우만은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생각하면서 유생들 가운데 그 지조를 지켜 이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을 매우 기특하게 여겨 칭찬해 주고 있다. 이것은 적지 않은 유생들이 자정(自靖)하지 못하고 지조를 굽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기우만 자신의 경우에는 농민군들이 들이닥쳤으나 그의 집이 학자의 집이라 하여 농민들이 스스로 약탈을 삼갔다는 것이며, 기우만이 책을 읽다가 나가서 농민들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기우만의 인품에 감동한 농민군 대장이 자신의 무리를 바칠 터이니, 그들을 이용하여 "서양놈과 왜놈을 물리치면 좋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이에 기우만은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을 나무라며 자수하라고 권했다. 그렇게 의연하던 그가 몇 년 후에는 스스로, "왜놈 양놈을 몰아내어 영원히 수모를 막아내기로 하자" 고 각 처에 통문을 보내게 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기우만은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 망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라 말하고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는 통분의 상소를 올렸다.
신은 삭발령을 들은 후부터 문을 닫고 식음을 전폐하며 장차 자결하여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려고 맹서하였사옵니다. 대개 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면 신자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와신상담해야 할 것인데 나라 형세가 날로 깎이어 설욕할 가망이 없사옵고 전장(典章) 문물은 바로 역대 선왕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옛 제도이온데 하루아침에 개혁하여 다시 볼 기약이 없사오며 지금 머리까지 깎는 데 이르러는 변란이 궁극에 달했습니다. 무릇 나라치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사람치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것이 낫습니다. 나라가 망한다는 것도 욕된 일이지만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 망하는 것보다 더하옵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물론 가증스러운 일이지만 머리 깎는 그 가증함이 죽는 것보다 더하옵기 때문에 나라가 차라리 망하고 사람이 차라리 죽어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이것은 일찍이 1881년에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의 총수 역할을 하던 활동과 맥을 같이 하는 사상으로 당시 단발령에 대한 유림인사들의 전형적 사고라 할 수 있다. 1896년 1월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의 격문을 받고서 분연히 일어나 각읍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여 근왕(勤王)할 계획을 세웠다. 1월 29일에 나주(羅州)에 도착한 통문의 대략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공을 시기하고 정의를 방해하는 행동은 역적의 무리로 규정지으며,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의(義)는 이미 글월에 밝혔으니 통문이 도착하는 즉시로 날짜를 정하여 각기 소속 관하에서 대의에 호응하는 민병(民兵)을 모집하되, 선비들은 그 규율을 봉행하고, 이교(吏校)들은 그 두령에게 복종하라. 지휘와 절제는 스스로 계획을 정하고 궁시(弓矢)와 총칼을 모두 대비해서 난폭한 자를 제거하여 이 위급한 내란을 밝히고, 왜놈, 양놈을 몰아내어 영원히 외적의 수모를 막아내기로 하자···
대략 이상의 통문을 받은 호남 각 고을의 선비들이 호응하여 몰려왔다. 2월 향교(鄕校)에 들어가 의병 일으킬 것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각 읍 경영(京營) 완영(完營)에 통고하기를 "머리를 깎이고 울부짖는 것은 모두 양심의 발로라 인정하고 빨리 개과 천선하여 옛 제도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였다. 드디어 고광순(高光洵) 기삼연(奇參衍) 기주현(奇周鉉) 양상태(梁相泰) 기동관(奇東觀) 이승학(李承鶴) 기 재(奇宰) 기동노(奇東魯) 등을 거느리고 2월 11일 나주(羅州)로 나아갔다. 나주는 동학농민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병사(兵事)에 능하고 의기 있는 사람이 많은 고장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임진년에 건재 김천일(健齋 金千鎰)이 의거한 바 있던 항일정신의 본고장이었다. 2월 16일 건재의 사당에 제를 올리고 제문을 지었다.
아! 우리 선생이시여 산하의 기운을 받아 나셨네.
도학도 훌륭하시거니와 절의마저 겸했구려.
저 옛날 임진년에 나라 운수 비색하여
선생이 먼저 외치자 의병이 모두 일어났네······
(우리도) 마침내 의병을 일으켜 원수 갚기를 맹세했소.
머리 위로 저 하늘에 흰 해가 내리 비치고
귀신에게 질문해도 이 길이 옳다 하네.
선생께 여쭤도 의혹될 것 없으리다.
이 때에 호응하여 모인 사람들은 모두 심의(深衣)를 입고 대관(大冠)을 쓰고 서로 읍양하며 서열을 지키며 나아갔다. 그러나 군량과 무기가 없고, 기율(紀律)이 없어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모두 향리의 거족들로서 글 읽던 유생들이라 전투와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시 2월 30일 광주에서 집합하기로 약속하고 22일 광주로 행군하여 향교로 들어가 몇 차례의 상소를 올려서 구제도와 구신(舊臣)을 쓸 것을 건의하였다. 그 동안 송사는 산에 들어가 의분과 정열을 악부(樂府)짓는 데에 바쳤다. 1900년 7월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제수하고 주임관(奏任官)으로 승진시켰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것은 참정 신기선(參政 申箕善)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는데 송사는 신식 벼슬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상소조차도 올리지 않게 되었다. 문인 허 간(許 幹)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물어 보니, "나는 본시 위인이 오활하고 학식이 허소하여 비록 이 세상이 아니더라도 나아갈 생각이 없는데 하물며 이 때가 어느 때이냐"하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1904년 광주로 이사하고, 1905년 1월 도약정(道約正)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것은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향약(鄕約)을 신설하고 추대한 것인데 이도재의 거취가 불분명하므로 나아가지 아니한 것이다.
10월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상소문을 올려서 처음부터 개화정책에 잘못이 있었다고 지적하고, 매국적들을 제거하고 구제도로 돌아갈 것을 또다시 역설하였다. 이어서 "나라가 무너졌는데 학당(學堂)이 있어서 무엇하리"하며 학당을 허물었다. 1906년 1월 각 읍에 통문을 보내어 곡성(谷城)에서 회집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청국에 청원하고자 출국할 길을 모색하였으나 감시가 삼엄하고 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하여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일로써 10월 광주 경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출감하였다. 그러나 1907년 1월 녹천 고광순(鹿泉 高光洵)·성암 김상기(省庵 金相琦)·금포 이항선(錦圃 李恒善) 등 의병이 송사를 찾아와 순천(順天)에서의 패전에 관하여 의견을 나눈 일이 있는데 이로 인하여 3월에 다시 영광(靈光) 경무서에 수감되어 광주로 압송되었다가, 4월에 목포 경무서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는 중에 일인들은 끊임없이 회유하고자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한반도를 일인이 통치하는 것은 개화(開化)시켜 주고자 하는 것이라며, 을사5적에 대한 그의 감정을 탐지하고 누그러뜨리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굴하는 빛이 없었지만, 송사는 구체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인지 구속 기소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설득하고자 한 것은 호남의진에서의 송사의 영향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09년에는 『호남의사열전』을 집필하였다. 이것은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모두 패배하고 오히려 득세한 무리들이 의병을 폭도라 지목하고 사람들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려하였기 때문에 머지않아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게 될까 우려하여 그 기록을 전하는 일을 시급하게 여기었던 까닭이다. 대체로
기삼연(奇參衍) 고광순(高光洵) 김봉규(金奉奎)
김용구(金容球) 박경래(朴慶來) 전수용(全垂庸)
김영엽(金永曄) 김익중(金翼中) 김치곤(金致坤)
박영건(朴永健) 정원숙(鄭元淑) 성경수(成卿洙)
등의 약전을 기술하였다. 이들은 일찍이 그가 보낸 통문에 호응하여 의기를 떨친 의병장들이었다.1910년 5월 경연(經筵)에서 송사의 시호를 문간공(文簡公)이라 정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증직하였다.이것은 마지막 숨을 몰아가던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이 그의 상소문을 통한 애국충정에 대한 말없는 보상이었던 것이다. 7월 국망하였다는 비보를 접하자 토굴(土窟)속에 은거하고 종신토록 일화배척(日貨排斥)과 각종 세금을 불납하는 등 개인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
고종 31년(1894) 동학농민운동이 터졌을 때, 관군이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거북을 새긴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받침돌은 땅 속에 파묻혀 그 윗부분만 보이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농민운동이 일어나 나주에까지 동학군이 쳐들어오게 된 과정과 당시 나주목의 수령이던 민종열 목사가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치밀한 방어계획을 세웠던 사실, 그리고 관군과 동학군이 나주목에서 싸우는 과정등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동학군에 반대했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짐작되며, 비문은 기우만이 짓고 송재회가 글씨를 써서 고종 32년(1895)에 세웠다. 동학항쟁 당시 나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여 동학농민운동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