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 전쟁 과정에서 중국에 진출한 일본군이 설치한 위안소에 일본인 여성에 이어서 한국인 여성이 위안부로서 보내졌습니다. 전쟁이 태평양•동남아시아 지역으로 확대되자 조선인 여성은 그 지역으로도 많이 보내졌습니다.
조선에서는 먼저 '매춘부'이었던 자가 동원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어서 가난한 집 딸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끌려갔다고 생각됩니다. 취업사기도 이 단계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감언, 강압 등,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방법이 취해진 사례와 관련된증언이 있습니다. 내지(그 당시의 일본본토)에서는 금지된 21세 이하의 여성이 많이 끌려갔던 것은 알려졌습니다. 그 가운데 16,7세의 소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가네다 기미코씨의 경우
가네다씨는 나중에 목사가 되는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생후 곧 생모와 이별하고 한국으로 건너갔지만 가족과 떨어지는 날이 계속되는 등 생활은 어려웠고 가족도 화목하지 못하여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1938년, 가네다 씨가 식모살이를 하던 16살 때, 아는 사람이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권유를 받고, 그녀처럼 속아서 모여든 여성들과 함께 중국 자오징(棗強)의 위안소로 보내졌습니다. 온 힘을 다해 저항하는 중, 일본군인의 총검에 찔린 가슴의 상처나 꺾인 손목의 상처는 죽을 때까지 완전히 낫지 않았습니다. 현실을 잊기위하여 손을 댄 아편에 중독된 가네다씨는 1945년에 치료를 위해 위안부 생활에서 벗어나, 살아서 종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가네다씨의 증언기록은 여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