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석의 뿌리
김녕김씨의근원은 시조는 신라 대보공(大輔公)김 알지 후 →경순왕(敬順王)
자대안군 은열 후→ 김녕군 문열공 시흥(時興) 김녕김씨 관조1세이며→ 9세
손 백촌 김 文起(문기) 후 충의공 파조후→10세손 현석(玄錫)→11세손충립(忠
立)→12세손충지(衷之)→13세손永時(영시) 장손혈통.
14세손1,논학 영동16세손이휘(신문고)→18세손정구(時48세)(1731년교지 받음)
2,제학 나산입향조→ 묘지석(墓地石)묻음→18세손인상 당시(55세)
墓 誌石(묘 지석)
본 묘지석은 2019년5월28일 선조의 합동 묘원을 조성한 경주시 양남면 상라
리(마읍지)산51번지로 이령하면서 묘지석(墓地石)을 발굴하게 되었으며 묘지
석의 발굴경위는 을미보 경오보 등 족보내용에 입향조의 이동사실을 기록하
여 상라리 25번지 범바위 골 15세손 휘 선일 조 산소에 증손자인 18세손 휘
인상(仁尙) 할아버지께서 묘 밑에 묻었다는 족보의 기록과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참고 하여 묘지석을 발굴하게 되었으며 본 지석(誌石)은 휘
선일할아버지의 상석 아래에 묻혀 있어서며 약 40kg자연석에 33자로 나산입
향조 송와공은 김 문기할아버지의 아들 현석후손으로 1592년(임진년3월)16세
에 영동에서 이동사실의 기록이다.
그리고 신원 복 관작교지를 받은 18세손 휘 정구(時48세)선조와 묘지석을
묻은 18세손 휘 인상(55세) 선조와는 같은 항렬이며 그때 당시 정황을
보아 서로 유대가 많았다고 본다.
묘지석을 묻은 일자의 기록은 없으나 교지를 받은1731년의 시기와 족보의
기록이나 인상할아버지의 연세를 미루어 볼 때 묘지석은약300(288)년
전후로 묻었다고 추정된다.
묘지석을 묻은 의미는 조선 초기 단종 복위의 실패로 사육신 백촌 할아버
지후손들은 그 어려웠던 은둔생활의 삶을 살아오면서 한 시류의 역사에
묻혀 버릴뿐 한 가슴에 응어리 진 한을 새겨 묻었다 고 본다.
아무리 세상이 바꿔었다 하더라도 사육신 백촌 할아버지의 충의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