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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 엡 1장 3절
그리스도인의 실패의 체험
우리가 갓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마음이 참으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고 우리의 생명에 대하여 소망이 충만했었다. 갓 구원받았을 때 우리는 그때 이후로 모든 죄악이 다 우리 발 밑에 밟혔고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우리는 갓 구원 받은 이후로 우리가 이길 수 없을 만한 큰 시험은 없고 우리가 해결할 수 없을 만한 큰 어려움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의 미래는 참으로 영광의 소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처음으로 죄사함의 평강과 기쁨을 맛보았었다. 이때 우리는 참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고 하늘이 우리에게 매우 가까운 것 같았으며 또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는 것 같고 실패하는 날이 하루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좋은 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고, 그러한 아름다운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다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죄들이 돌아온 것을 보게 된다. 당신이 구원받았을 때 이겼다고 생각했던 죄악들이 다시 돌아오며 한동안 당신을 찾지 않던 죄악들이 다시 찾아오게 된다. 또 당신의 오래된 성질과 교만과 질투가 다시 고개를 들게 된다. 성경을 읽어도 별로 유익이 되지 않고 기도도 했지만 전과 같은 친밀한 맛이 없다.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심도 전과 같지 않고 사랑도 갈수록 식어간다. 분명하게 처리 받은 일도 몇 가지 되기는 하지만 어떤 일들은 참으로 처리할 방법이 없다고 느껴진다. 매일 당신에게는 승리의 노래보다는 패배의 노래가 많은 것 같고 승리보다는 실패가 더 많은 것 같다. 당신은 스스로 속에서 무언가 큰 결핍이 있다고 느낀다. 당신이 자신을 바울이나 요한이나 베드로 또는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이 그들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당신이 사람을 도울 수 없다. 당신은 자신이 승리한 부분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어도 실패한 부분은 알려 주지 못한다. 당신이 승리한 날들은 몇 일이 되지 않지만 실패한 날들은 너무나 많았음을 느끼게 된다. 매일 우리는 이렇게 근심된 날들을 지내왔을 것이다.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체험이다.
구원받았을 때 우리는 모든 죄가 사해졌으므로 죄가 영원히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한번 느낀 기쁨과 평강이 영원토록 지속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죄가 다시 찾아오고 시험이 다시 올 줄 누가 알았는가? 즐거울 때가 많지 않고 근심할 때가 더욱 많게 될 줄 누가 알았는가? 이러한 상태일 때 우리는 두 가지의 일을 경험하게 된다. 한 면으로는 시험과 교만과 질투와 성질이 돌아오고 또 한면으로는 이러한 자신을 억제하려고 한다. 이러한 죄악이 돌아올 때 당신은 이것을 극복하여 밖으로 나타내지 않으려고 많은 힘을 들일 것이다. 자신을 억제하는 일에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다. 실패한 사람은 매일 실패,성공,범죄,후회가 끝없이 반복되는 생활을 지내다가 결과적으로 크게 실망하게 된다. 사람들은 구원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의도적으로 자신의 죄를 억제하려고 하든지, 아니면 승리하는 생활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고 자신을 체념한다. 낙심하거나 실망하게 된다. 그들은 한 면에서 승리하지만 또 한 면에서는 실패한다. 그들이 자신을 억누르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죄악이 잠시 멈춘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실패하게 되면 어찌할 방도가 없이 죄를 짓게 된다.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묻겠다. 우리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오르실 때 그분은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체험을 생각하셨겠는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의 생활, 곧 한번 성공하고 한번 실패하며 오전에 성공하고 오후에 실패하며 오전에 이기고 저녁에 실패하는 생활을 생각하신 적이 있었겠는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은 우리가 거룩함과 공의로 그분을 섬기는데 충분하지 않은 것인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은 우리가 거룩함과 공의로 그분을 섬기는데 충분하지 않은 것인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죄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옥의 형벌에서 해방되기 위한 것인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죄의 고통에서 구원하시지 못하고 다만 장래에 있을 영원한 죄의 고통에서만 구원할 수 있는 것인가?
오, 형제자매들이여, 여기까지 말할 때 나는 "할렐루야" 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 계실 때 지옥의 고통뿐 아니라 죄의 고통까지도 생각하셨다. 그분은 죄의 형벌의 고통뿐 아니라 죄의 권세의 고통도 생각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길을 예비해 놓으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이 이 땅에서 사신 것처럼 살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해 놓으셨다. 형제자매들이여, 십자가에서 그분은 지옥의 고통을 돌아보셨을 뿐 아니라 죄의 고통도 돌아보셨다. 바꾸어 말해서, 그분의 구속의 역사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위치와 근거를 예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과 같은 생활을 살지 않아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는 죄인들에게 전해 줄 복음이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죄인들' 에게 전해 줄 복음도 있으므로 "할렐루야!" 라고 말해야 한다. 전에 십자가의 구원이 당신에게 전파되었듯이 오늘 '그리스도인 죄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인 죄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할 복음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정하신 생명
지난 메시지에서 우리는 우리의 체험이 어떤가를 보았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정하신 생명이 어떤 것인가를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어떤 생명을 살아 나타내야 하는가? 이것은 성장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고 거듭나 영원한 생명을 얻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 이것을 알 때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결핍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 이제 우리는 몇 군데 성경을 보기로 하자.
1. 죄들을 벗어난 생명임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고 말한다. 이번에 연대와 북평에 있는 몇몇 형제들은 나에게, 과거에는 그리스도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으나 이제는 "예수! 내 구주!" 라고 부르겠다고 말했다. 왜 그분은 예수라 불리우는가? 그 이유는 이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미 예수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했고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구주가 되었고 당신이 죄 사함 얻은 것은 사실이며 또 이를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예수님이 이루신 것이다. 이제 문제는 당신이 죄 가운데 살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죄에서 해방되었는가에 있다.
당신의 옛 성질이 아직도 당신을 찾아오고 당신의 죄악이 아직도 당신을 묶고 당신의 생각이 여전히 전과 같이 당신에게 달라붙어 있고 당신이 전과 같이 자신을 위하는가? 아니면 당신은 이미 죄에서 벗어났는가? 내가 여러 차례 말한 구명대와 구명선의 비유를 오늘 한번 더 사용하겠다. 바다 속에 빠진 사람에게 구명대를 던져 줄 때 그 사람이 구명대를 붙잡으면 가라앉지는 않지만 물속에서 올라오지도 못한다. 가라앉지는 않지만 올라오지도 못한다. 이것은 죽어 있는 상태 같지도 않고 살아 있는 상태 같지도 않다. 그러나 구명선은 이렇지 않다. 구명선을 사용할 때는 바다 속에 빠진 사람을 배 안으로 구출할 수 있다. 우리 주님의 구원하는 방법은 구명대의 방법이 아니라 구명선의 방법이다. 주님은 죽어가는 상황도 아님 그렇다고 완전히 살아난 상황도 아닌 그 중간에서 멈추지 않으신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죄 중에 남겨 두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성경 안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미 믿었지만 아직 죄에서 나오지 못하고 죄 중에 살고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성경이 틀렸다는 말인가? 아니다. 성경은 틀리지 않다. 우리의 체험이 틀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을 때 또 무엇을 하셨는가? 성경에서는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다고 말하는가? 다음을 계속 보도록 하자.
2. 하나님과 친밀한 교통을 갖는 생명임
누가복음 1장 69절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으니" 라고 말하고 74절과 75절에서는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그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리라." 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다. 우리는 이미 구원의 뿔을 얻었다. 이 구원의 뿔은 우리를 위해 무었을 했고 또 어떤 단계에까지 우리를 구원하였는가? 그분은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구출하셨다. 그분이 우리를 구출하신 후 우리가 어떤 생활을 하는 것을 요구하시는가? 그분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신 후 다만 우리가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시는가? 다만 이것 뿐인가? 만일 이런 것에 불과했다면 우리는 다만 때때로 의와 성결로 그분을 섬겼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은 우리가 종신토록 성결과 의로 섬기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활은 우리가 이 땅 위에 사는 한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일생토록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겨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너무나 부끄럽게도 우리는 이 모든 날들 동안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기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성경 말씀이 틀리지 않다면 당신의 체험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성경 말씀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의 체험은 옳은 것이다. 과거에 나는 성경에서 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자주 생각해 왔다. 성경에 따른다면, 무릇 주님께서 구원하신 사람들은 종신토록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겨야 한다. 만일 성경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의 체험은 옳은 것이고 성경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당신의 체험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3. 주님으로 인해 완전히 만족하는 생명임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말한다. 이 한 마디는 얼마나 귀한가? 주님은 그분이 주는 물이 그분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특별한 그리스도인의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낯선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분은, 만일 당신이 믿는다면 곧 생수를 얻을 것이며 이 생수가 당신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형제자매들이여, 목마름이란 무엇인가? 목마름은 충분히 만족하지 않은 것이다. 주님이 주신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불만이 해소되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만족하는 것임을 인해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한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다만 갈증이 해소되는 정도로 만족했다 하자. 그러면 그에게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영원히 만족케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당신이 도시의 대로를 지나갈 때 목마르지 않았는가? 당신이 커다란 백화점 앞을 지나갈 때 목마르지 않았는가?
당신은 이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또는 저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것은 목마름이 아닌가? 당신의 동급생이나 동료들이 갖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며 목마르지 않았는가? 당신은 그러한 것들을 갖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은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니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 하셨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이러한 생명이지만 우리의 체험은 이렇지 않다. 주님은 그분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주님이 있어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른 일들과 다른 것들이 있어야 충분하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틀렸는가 아니면 우리의 체험이 잘못되었는가? 둘 중의 하나가 틀린 것이다. 주님은 부도수표를 내지 않으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다 우리에게 주신다. 과거 우리의 체험은 한 찬송가에서 말했듯이 '절반의 구원'이었다. 주님은 믿는 사람이 왜 목마르지 않다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그 사람 속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의 속에 새로운 요구와 만족이 생겼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앞에서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기고 있는가?
우리는 누가복음 1장 75절에서 제사장 사가랴가 말한 것처럼 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며 성결과 의로 그분을 섬기고 있는가? 우리 안에는 매 시간 솟아나서 다른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샘물이 있는가? 중국에 '무위(無爲)',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계시면 만족하므로 '무구(無救)'.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주님으로 만족한가? 당신은 참으로 주 예수님으로 만족한가? 만일 당신이 만족하지 않다면 당신의 생활은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4. 영향력이 충만한 생명임
요한복음 7장 37-38절에서는 "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고 말한다. 누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가? 특별한 그리스도인이나 사도가 아니요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 아니라 모든 믿는이들, 곧 당신과 나처럼 일반적으로 믿는 이들이다. 당신과 나 같은 사람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과 나를 접할 때 만족을 얻고 목마름이 그치게 된다.
나에게 한 친구가 있는데, 당신은 그녀를 만날 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속되고, 야심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탐내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당신이 어떤 일에 대해 만족스러워하지 않는다 하자. 그녀를 일단 접하면 당신은 주님이 이미 충분히 당신을 만족케 하셨음을 느끼게 된다. 어느날 당신이 어떤 일에 대해 만족스러워한다 하지. 당신이 그녀를 접하면 당신이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주님은 믿는 사람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모든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체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오늘 내가 말한 것은 특별한 그리스도인만이 갖는 체험이 아니라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체험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사람들이 당신을 접할 때 더 이상 목마르지 않다고 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목마르다고 하는가? 가령 형제들이 와서 고통에 대해 불평하면 나도 고통스러운 것을 불평하고. 당신도 나도 다 근심을 이야기하며, 다 실패한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우리는 다 생수의 강이 아니라 메마른 사막이다. 심지어 당신은 다른 사람의 풀을 말려 죽일지도 모른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의 잘못이다. 하나님은 틀릴실 수 없는 분이다. 그러므로 잘못이 우리에게 있지 않겠는가?
5. 죄의 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생명임
사도행전 3장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성전 행각에서 전한 메시지도 역시 우리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 성취하신 일도 바로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체험은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들이라면 최소한 자신이 알고 있는 죄들을 마땅히 이겨야 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들을 이기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죄를 주님을 힘입어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수년 동안 우리를 따라 다니는 여러 가지 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그러한 죄들을 모두 이겨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표준이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어쩌다 가끔 죄를 범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다 가끔 이김을 체험한다. 우리의 체험은 얼마나 비정상인가?
로마서 6장 1절부터 2절에서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주 예수를 믿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다. 주 예수를 맏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죄에 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다음 구절에서 대답을 볼 수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6:3)". 바꾸어 말하면, 침례 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침례 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6:4)". 이것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일상생활이다. 침례 받은 사람은 모든 행동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이 말씀은 어떤 특별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구원받고 침례받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다. 우리 각 사람이 다 침례를 받았으므로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체험이다.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인가?
로마서 6장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고 말한다. 나는 이 구절을 매우 귀히 여긴다! 형제자매들이여, 어떤 사람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가? 앤드류 머레이 뿐인가?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 뿐인가? 아니면 모든 믿는 사람이 다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가?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이들 가운데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우리 가운데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우리가 다 은혜 아래 있다.
그러나 14절 앞부분에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는 문장이 있다.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함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 하자! 이기는 것이 특별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아님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자. 이기는 것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체험인 것에 대해 감사하며 찬양하자.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다 은혜 아래 있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 하고 찬양하자. 나는 갓 구원받았을 때 이 구절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 나는 많은 승리를 체험했고 여러가지 죄들을 이겼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은혜롭게 대하셨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죄가 나를 주관했었다. 실제로 몇 가지 죄들이 늘 다시금 나를 찾아왔다. 나는 여러가지 죄들을 이겼지만 여전히 몇 가지 죄들이 있었다. 이것은 마치 어떤 형제를 만난 체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길에서 어떤 형제를 만나 그에게 인사했다. 잠시 후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사고 나오다가 또 그 형제를 만나서 인사했다. 그리고 다음 번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나왔는데 또 그 형제를 만나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다른 길로 가다가 또 그와 마주쳐 고개로 인사했다. 이렇게 그날 나는 연이어 다섯 번이나 그와 마주쳤고 다섯 번이나 그에게 인사했다. 우리가 마주치는 것도 그 형제와 마주쳤던 것과 같다. 마치 죄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따라 다니는 것 같다. 끊임없이 우리와 마주치고 계속 우리를 따라 다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질이 계속 따라다니고, 어떤 사람은 교만이, 어떤 이는 질투가 계속 따라다니며, 어떤 이는 게으름이, 어떤 이는 거짓말이 계속 따라다니고, 어떤 이는 인색함이, 어떤 이는 비열함이 계속 따라 다니며, 어떤 이는 이기주의가 계속 따라다니고, 어떤 이는 더러운 생각이, 어떤 이는 더러운 정욕이 계속 그를 따라다닌다. 아무튼 개개인마다 계속 따라다니는 한 가지 죄가 있다. 나 개인에게는, 계속 나를 따라다닌 몇 가지 죄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죄가 나를 주관했다고 시인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 당신은 죄가 나를 주관치 못한다고 하셨으므로 잘못은 저에게 있습니다." 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문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 않고 내게 있음을 시인할 따름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만일 당신의 생활이 실패한 생활이라면 이것은 하나님 의 정하심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하신다.
로마서 8장 1절에서는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말한다. '정죄'에 대해 이미 수차 말한 바 있다. 이십 년 전 고대 사본을 발굴했던 사람은 이 단어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일반적인 의미이고 또 하나는 법률적인 의미이다. 일반적인 의미에 따르면 '무능'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무능함이 없나니."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은 얼마마 놀라운가! 그러나 나는 이 구절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여러분에게 묻고자 한다. 웨슬레만을 위한 것인가? 마르틴 루터만을 위한 것인가?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무능함이 없나니."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이들에게는 더 이상 무능함이 없다.
2절에서는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 말한다. 내가 이것을 한번 말하고 심지어 백 번 말하여도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곧 특별한 그리스도인만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무능함'이란 무엇인가? 로마서 7장에 따르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는 것이며, 원함은 내게 있으나 행함은 없는 것이다. 내가 무능하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역사가 결심한 후에 그러한 결심을 다시 무너뜨리는 것의 연속이다. 뭔가를 계속 결심하지만 다시 실패를 반복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무능함이 없다고 하셨다.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일이 계속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법은 어떤 장소, 어떤 상태에서든 똑같은 한 가지 방법에 대해 동일한 결과를 갖는다. 법은 바로 항상 있는 어떤 현상이고 일정한 성향이며 항상 반복되는 어떤 상태이다. 예컨대, 땅의 중심에는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언제든지 당신이 어떤 물체를 공중으로 던지면 그 물체는 중력 때문에 항상 땅으로 떨어진다. 이 중력이 하나의 법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화를 내는 것이 하나의 법이다. 한두 번은 참고, 세 번째에는 약간 꿈틀대다가 네 번째는 크게 성질을 낸다. 이 형제와 부딪쳐 보아도 이러하고 저 형제와 부딪쳐 보아도 이러하다. 처음에는 참을 수 있어도 후에는 폭발해 버린다. 매번 시험받을 때마다 결과는 항상 이렇다. 많은 때 교만도 이와 같다. 남이 당신에게 한 마디 칭찬할 때에는 당신의 마음이 아직 움직이지 않아도 두 마디 칭찬하게 되면 당신의 얼굴은 빛나는 것 같다. 무릇 똑같은 절차를 거쳐서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곧 법이다. 죄를 짓는 것도 하나의 법이 되었다. 많은 형제들이 어떤 일에 대해서는 좋아하다가 어떤 일을 부딪치면 화를 내게 된다. 그들이 여러 가지 것들을 이길 수 있지만 어떤 것만 부딪치면 죄가 꿈틀 거린다.
형제자매들이여, 특별한 그리스도인만 죄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오늘 이후로 더 이상 무능하지 않고 죄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위의 성경 구절들은 모두 사실이지 요구하는 명령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이런 체험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 일치되지 못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6. 모든 환경을 이긴 생명임
로마서 8장 35절에서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고 말하고, 37절에서는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고 말한다. 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이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기신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이나 칼은 고사하고 남이 약간 좋지 않은 얼굴색만 비치어도 즉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겼다고 말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체험이 되어야 한다. 승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체험이지만 패배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체험이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른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넉넉히 이겨야 한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을 막론하고 우리는 이것들을 이길 뿐 아니라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어려움이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미친 사람들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할렐루야! 우리는 미친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우리는 이 모든 일을 개의치 않고 다 넉넉히 이겼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체험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놓으신 체험이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은 어떠한가? 성경에서 우리에게 이런 체험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생활을 체험하는 길을 찾지 못한 것이다. 환난이 오기 전에 미리 소리를 지르며 " 인내해야 한다. 지금 나는 고난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길을 발견한다면 이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기게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는 "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 말한다. 형제자매들이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때로 승리하고 때로 실패하는 것이 아니며, 오전에 실패했다가 오후에 승리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항상 이기는 생활이다. 만일 당신이 어떤 시험을 받았는데 시험을 이겼다면 밤에 너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해야 한다. 당신이 이기지 못한 것이 기이한 일이 되어야 하고, 당신이 이긴 것은 일반적이며 자주 있는 일이 되어야 한다.
7.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 생명임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은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쎄서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말한다. 여러분은 에베소서 2장 10절이 8절과 9절에 뒤이은 말씀임을 기억해야 한다. 앞 구절에서는 너희가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10절 에서는 우리가 그의 만드신 바로서 우리로 선한 일을 하도록, 곧 하나님 께서 전에 예비하신 바 안에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이것 또한 특별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 인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체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우리로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려 하심이다.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을 따라 선을 행하는가 아니면 선을 행하면서 항상 원망하는가? 예를 들어, 당신이 바닥을 닦고 있다 하자. 당신은 한 면으로는 바닥을 닦으면서 또 한 면으로는 왜 우리 한두 사람만 닦고 다른 사람은 닦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당신의 이런 생각은 교만이 아니라면 원망일 것이다. 이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고 선을 행할 줄 알며 인색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이기적이지 않고 남 주기를 아까와하지 않으며 무엇이든지 기꺼이 남에게 줄 수 있다. 만일 아주 좋은 그리스도인만 선을 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애통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을 행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체험이 되어야 한다.
8. 빛이 충만한 생명임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는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정하신 생명이다.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 사람은 특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무릇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 빛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일 따름이다. 빛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9. 온전히 거룩케된 생명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믿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이다. 바울이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라고 한 것은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또한 흠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능히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실 수 있고 온전히 흠이 없게 보존하실 수 있다.
오늘 내가 말한 것들은 다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주님이 예비하신 것 들이다. 주님의 구원은 능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히 죄를 이기고 죄의 얽매임을 받지 않으며 죄를 발 밑에 밟을 수 있고 하나님과 간격없는 교통을 갖게 한다. 이것은 주님이 예비하신 것이기 때문에 다만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체험할 필요성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의 체험은 어떠한가? 만일 당신의 체험이 성경과 다르다면 당신은 아직 완전한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이다. 당신이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완전한 구원을 받지 못했다. 오늘 당신에게 한 가지 소식을 알여 주겠다. 그것은 곧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께서 성취하신 것은 당신을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죄의 고통에서도 해방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완전한 구원을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가 날마다 이 땅에서 초보적인 구원을 얻게 할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매일 승리하게 한다.
승리란 무엇인가? 승리는 우리가 구원을 체험하는 면에 있어서 추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받을 때 약간 부족한 것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그분은 우리가 이 땅에서 표류하는 인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대신에 우리가 완전한 해방을 체험하는 것을 보기 원하신다. 우리가 믿을 때 완전하게 구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보충 수업이 필요하다. 즉 과거에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을 보충해주는 이기는 체험이 필요하다.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의 구원이 다만 우리가 죄를 짓고 난 후 통회하는 것을 반복하도록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우리가 여전히 범죄할 수 있는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죄에 묶였다. 이제 이미 구원받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죄에 묶여 있단 말인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가 다스렸지만 지금은 이미 구원받았는데 여전히 죄가 다스려야 한단 말인가? 죄는 하나님과 완전히 상반된다. 우리는 죄가 조금이라도 우리 안에 남아 있지 않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과 상반된 어떤 것을 하시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죄가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 기질적인 죄든지 연약함에 속한 것이든지 몸과 관련된 죄이든지 생각 에서 지은 죄이든지 죄는 항상 죄이다.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리자. "주여, 당신께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이 성취하신 것은 나를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 가졌던 구원의 체험이 완전한 것이 아니었음을 주님께서 보여 주시기 바란다. 우리가 이길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보여 주시기 바란다.
형제자매들이여,만일 우리의 체험이 성경에서 말한 것과 일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겨야 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사 우리 자신을 드러내시기 원한다. 우리는 죄를 범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속이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주님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형제자매들은 주님의 십자가가 어떤 일들을 성취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가신 것이 당신을 다만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거짓말하지 않아야 한다. 당신은 자신을 억누를 수 있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자신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다. 주님의 승리가 죄를 완전히 부서뜨린다. 할렐루야! 죄가 이미 주님의 발 밑에 짓밟혔다! 오,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통을 체험하지 못하고 죄를 짓밟는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모든 사람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를 축복하시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