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아들
20220 이서진
칠흑같이 새까만 밤이 자리를 잡고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 새하얀 달님과 깨알 같은 별들만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동그란 달님은 오늘도 여전히 조용하게 높은 하늘에서 인간 세상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 달님 옆에서 귀여운 별들은 심심한지 이야기를 하며 킥킥거리고 있었다. 이 평화로운 세상 가운데 달님의 눈에 띄는 여인이 있었다. 허름한 차림을 한 그 여인은 조심스럽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산봉우리 가장 높은 곳으로 달님, 자신을 만나러 오고 있었다. 평소 자신에게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희망을 들어주어서인지 인간 세상에 자신의 소문이 쫘하게 퍼진 모양이었다. 달님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인이 산봉우리에 도착했다. 무척 힘이 드는지 연신 숨을 빠르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여인을 지켜보며 달님이 말했다.
“무슨 일로 저를 만나러 오셨지요?”
달님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여인은 눈을 크게 뜨고 달님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제야 용기를 냈는지 굳게 다문 입술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는 ‘레나’라고 하는 천한 집시에요. 돈도, 능력도 없고 얼굴도 아름답지 못해 아직까지 저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남자가 없답니다.”
자신을 ‘레나’라고 소개한 그 여인은 말을 하다가 설움이 북받쳤는지 갑자기 굵은 눈물방울을 쏟아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레나를 지켜보던 달님은 왠지 그녀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러니 제발, 흑, 제발…, 제가 형편이 이러니 많이 바라진 않을게요. 제발 집시남자와라도 맺어주세요. 흑흑.”
달님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레나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평소 조금 외로웠던 달님은 조건을 내걸었다.
“알겠어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달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레나는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달님을 올려다보았다.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그러니 제발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일단, 당신은 갈색 피부를 가진 집시남자와 사랑하게 될 거에요. 하지만 먼저 그의 아이를 낳아주세요. 저는 조용한 밤에만 세상을 내려다보니 줄곧 외로웠어요. 그러니 제물로 희생될 그 아이를 제게 주세요.”
그 말을 들은 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달님, 당신은 어머니가 되고 싶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사랑이 뭔지 몰라요. 가슴이 아프겠지만 제 아이를 드릴게요. 대체 인간 아이와 무얼 바라는 거예요.’
레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달님과 약속했다. 소원을 이루게 된 레나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가득 안고 기쁘게 산을 총총 내려갔다. 그런 레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자상한 달님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슬퍼보였다. 레나의 작은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게 되자, 밤은 또다시 조용해졌다.
며칠 후, 레나는 시끌벅적한 가게에서 일을 하고, 구석진 곳의 테이블에 앉아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묵묵히 식사만 하고 있던 레나의 조용한 앞자리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레나는 얼굴을 들어 다가온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갈색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레나는 달님의 말이 생각나 깜짝 놀랐다. 달님이 말한 사람이 바로 이 남자일까 생각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다가온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레나에게 말했다.
“멋진 오후입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빈자리가 없어서 그러는데 잠시 합석을 해도 될까요?”
사람이 많긴 하지만, 빈 테이블이 한둘 정도는 있었다. 그래서 레나는 이 사람이 괜히 이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다리 아프실 텐데 어서 앉으세요.”
서로를 마주보고 앉은 레나와 남자는 처음 얼마간 조용히 식사만 했다. 너무 조용한 분위기에 질렸는지 남자가 말을 꺼냈다.
“저는 ‘로크’라고 합니다. 그쪽은 이름이 뭐지요?”
“‘레나’예요.”
레나가 수줍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로크는 더욱 적극적으로 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흠, 예쁜 이름이네요. 이 가게에서 일을 하시나보죠?”
레나가 두른 앞치마를 보고 한 말이리라. 레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질 땐 서로 아쉬운 듯이 인사도 했다. 간만에 즐겁게 식사를 한 레나는 남은 오후동안 열심히 일했다. 다음날이 되자, 같은 시간에 또 로크가 찾아와 레나 앞에 앉아 식사를 했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더욱 친해져갔다. 매일같이 로크와 식사를 하다 보니, 레나는 어느새 로크를 사랑하게 되었다. 로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부터 며칠 뒤 어느 날, 로크가 갑자기 레나의 집에 찾아왔다. 로크가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은 처음인지라 레나는 놀랐다. 로크는 반 무릎을 꿇고 장미꽃다발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레나,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요. 아무 능력도 없고, 잘생기지도 않은, 천한 집시일 뿐인, 그런 저이지만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레나는 수줍었지만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소원을 들어준 달님에게 속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고는 꽃다발을 안아들고 로크를 일으켰다. 둘은 감격의 포옹을 했다. 그날로 레나와 로크는 결혼을 했고, 로크는 레나와의 가정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제대로 된 일자리도 찾았다.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던 레나와 로크 사이에도 아이가 생겼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들은 ‘이름은 뭐라고 하지?’, ‘아기 옷은 몇 벌 정도 만드는 게 좋을까?’,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하는데, 어디가 좋을까?’와 같은 행복한 고민을 했다. 그런데, 레나는 내심 달님과의 약속을 로크에게 말할까 말까 망설였다.
‘로크가 들으면 무지 슬퍼할 거야.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말해주자.’
레나와 로크는 행복하게 아기가 태어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몇 달 후에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다. 사내아이였는데, 이상하게도 까무잡잡한 아버지와 달리 피부가 매우 새하얬다. 게다가 눈처럼 흰 머리칼과 은빛을 띤 눈은 까만 밤하늘의 달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아이를 보고 놀라며 아이에게 저주를 퍼부어댔다.
“어맛! 저한테 가까이 하지 마세요. 이런 괴물의 저주가 저에게 옮으면 어떡할 거예요?”
“쯧, 달의 저주를 받았군요. 이런 아이는 당장 내버리는 것이 당신들에게도 좋을 겁니다. 어휴,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이젠 저런 괴물도 태어나는구나.”
레나는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슬펐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단지 생김새가 다른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로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괴물자식 따위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래서 날마다 술에 절어서 늦은 밤까지 거리를 방황하다가 집에 돌아왔다. 레나는 그런 자신의 남편에게 실망했지만 원망하지는 않았다.
보름달이 뜬 날 밤, 레나는 달님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자신과 로크에게서 난 아이를 달님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나는 슬픈 마음으로 로크를 기다렸다. 로크가 집에 들어서자 레나는 슬픈 얼굴로 말을 했다.
“여보, 할 말이 있어요.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하려 했던 말이었지만 아이가 생겨 너무나 기뻐하던 당신에게 실망을 안길 수가 없어서 이제야 말을 꺼내요.”
로크는 언짢은 얼굴로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사실, 아이가 태어나면 달님에게 제물로 바치기로 약속했었어요. 당신과 맺어주기로 한 대가로요.”
“흥! 그런 괴물 따위 줘버려! 난 그 녀석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들은 레나는 슬펐지만, 로크가 아이에게 미련이 없으니 보내기가 쉬울 것 같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레나는 로크에게 제물 의식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로크는 레나를 무시하고 집밖으로 나와 다시 주점으로 향했다. 그런 로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나는 꾹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주점으로 향하던 로크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나와 저렇게 다른 아이가 태어나다니, 믿을 수 없어. 아까 레나가 달님인지 뭐시긴지랑 약속을 했다고 했지. 설마 저 자식 놈이랑 닮은 녀석이 자기가 달님의 인간현신이라고 속이고 레나를 꼬드긴 것 아냐?’
이런 생각을 하던 로크는 레나가 부정을 저지른 것을 확신하고 화가 나서 집으로 뛰어갔다. 손엔 시퍼런 칼을 쥐고. 갑자기 들이닥친 로크 때문에 레나는 깜짝 놀랐다. 레나를 본 로크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로크는 자신의 아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레나에게 물었다.
“레나, 이 아인 누구지?”
“무, 무슨 소리에요, 여보?”
“모른 척 하지 마. 난 다 알고 있어. 넌 나를 배신했어!”
“무슨…, 커헉!”
로크는 격분하여 레나의 가슴에 칼을 꽃아 넣었다. 연약한 레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화가 풀리지 않은 로크는 옆의 요람에 누워 시끄럽게 울고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
‘내친김에 저 녀석까지 죽여 버리자.’라고 생각한 로크는 아이를 잡아들고 산을 올라갔다. 조금 높은 절벽 끝에 다다른 로크는 무자비한 손속으로 자신의 아들을 던져 버렸다. 잔인한 미소를 지은 로크가 뒤돌아서서 가려고 발걸음을 돌렸을 때였다. 순간, 로크가 휘청거렸다. 절벽의 너무 끝에 서 있었기 때문에 땅이 부서진 것이다.
“어, 어어. 으아아아아아아악!”
로크는 그대로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아내와 자식을 죽인 나쁜 남자의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달님은 자신의 정기를 받은 불쌍한 아이의 영혼을 거두었다. 그리곤, 아이가 울지 않도록 자신이 아이의 요람이 되어 아이와 함께 지냈다. 아이가 즐거워하는 날이면 달님은 보름달, 슬퍼하고 우는 날이면 초승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