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국파(菊坡)이다. 전법총랑(典法摠郎) 전충경(全忠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도총랑(判圖摠郎) 전대년(全大年), 아버지는 응양군 민부전서(鷹揚軍民部典書) 전진(全珒)이다.
1315년(충숙왕 원년) 고려 문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원나라에서 고려의 젊은 인재들을 차출하였는데, 이 때 전원발은 선발 파견되었다. 원나라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 고려 원나라 시대의 병부에 속한 고위관직)겸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太學士;학식이 풍부한 집현전 고위 관직), 영록대부(榮錄大夫)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는 바닷가에 위치하여 나라는 작은데 세공의 폐가 많습니다.”라고 말하여 세공으로 인한 고려의 부담을 덜도록 노력하였다. 그가 귀국할 때 원나라 순제(順帝)가 소원을 묻자, "다만 고려에서 거두는 공물(貢物)을 대폭 삭감해 주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대답하여 공물의 특감(特減)을 허락받았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개국했지만, 명나라와의 조공관계는 원나라의 조공으로 유지되었다.
전원발은 명나라가 개국하자 고려로 환국하였다. 공민왕은 전원발의 공로를 인정하여 당시 경북 예천군 용궁면에 소재한 성화천을 전원발이 나라를 소생시켰다는 뜻으로 ‘소천강(蘇川江)’으로 개명하여 하사하고, 축산부원군으로 명하였다. 전원발은 소천강변에 청원정(淸遠亭)을 짓고 만년(晩年)을 보냈다.
현재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보은 법주사 자정국존비(報恩 法住寺 慈淨國尊碑)』의 비문은 자정미수(慈淨彌授)스님이 입적하자 왕명에 의해 이숙기가 글을 짓고, 전원발이 글씨를 썼다.
전원발의 아들은 사복판사(司僕判事) 전한(全僩)이며, 손자 전강(全强)·전근(全謹)·전경(全敬)은 모두 장원급제하여 청환(淸宦; 학식과 문벌이 높은 인물에게 주는 벼슬)으로서 현달(顯達; 높은 지위에 오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