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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시며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으면 과실을 절로 맺음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5:5))
오늘 우리는 제가 참 좋아하는 찬송가 493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을 불렀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이 찬송가의 4절에 “주 따라 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 찬송을 부르며 뒤따라 가리라”를 “주님과 가는 길 은혜의 길이라 찬송을 부르며 주 함께 가리라”라고 가사를 고쳐 불러 왔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접한 자들이며 주와 함께 영생을 누리는 이들이며 우리의 삶은 험하고 먼 길이 아니라 은혜의 길이기에 이 부분의 가사를 고치게 되었지요. 하지만 모든 찬송가 중에서도 새 생명을 얻고 사는 삶에 대하여 이 찬송가 493장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더 시적이고 더 좋은 가사로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이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제게는 참 은혜가 되었지요. 여기 3절에 보면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맛보니”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이 가사를 부르며 이 영생을 맛보며 사는 관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요. 이 가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시면 은혜에 관한 것, 새 생명에 관한 것, 은혜와 평화에 관한 것, 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은혜로 거듭난 우리의 모습과 이 모든 것들이 들어 있지요.
그런데 여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찬송가는 은혜롭게 잘 부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전부터 여러 분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거듭나야 거듭난 삶을 산다”는 말씀을 굉장히 많이 드렸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거듭났다”는 것을 단지 하나의 상징으로만 생각하고, 추상적인 의미로만 생각을 할 뿐, 우리의 실질적인 삶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거듭난 사람만이 거듭난 삶을 산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지요.
사실 이것은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도 이야기하고, 평화도 이야기하고, 감사도 이야기하고,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산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영생을 맛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확실한 것을 갖고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가 거듭나서 얻은 것이 바로 영생이고 생명인데, 이 영생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 안에 있는 존귀한 사람들인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요한복음을 함께 살펴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믿는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 믿음이 얼마나 존귀한지 함께 은혜를 나눠 보기를 원합니다.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셨던 장소이자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던 장소였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모여 있을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하시며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지요.(요한복음29: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5:24)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5:39)
여기에 보시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얻어진 이 “영생”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영생이라는 단어는 이야기하고 영생을 가졌다는 말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을 우리가 얼마나 발견할 수 있었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우리가 영생을 가졌다고 하는데, 영생을 가진 우리는 이것을 실질적으로 누리고 있습니까?” 또 다른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한복음5:26)
이 말씀이 정말 우리에게도 은혜가 되어져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과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즉 이 아들에게는 “생명”이 있었으며, 그분은 바로 그 “생명”을 가지고 살아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영생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생명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답입니다.
저는 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아들에게도 주셨습니다. 이 아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그 “생명”을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 그 “살아있는 모습”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세상은 죽기까지 그분을 괴롭히고 그분에게 많은 아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조금 더 읽고 생각했더라면 쉽게 영생을 누리는 길에 섰을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이야기하고 영생을 이야기합니다. 영생을 모르는 사람도 없고, 생명을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가지고 영생을 누리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성경은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6:40)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이 없고 영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마지막 날 살아나지 못한다는 말씀이지요. 저는 이 말씀이 정말 은혜롭습니다. 내가 이 영생을 이해했고 영생을 누리는 자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요한복음6:47-48)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한복음6:51)
(갈릴리 호수. 주께서는 이곳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여 주신 이후에 주님이 바로 영생을 주는 생명의 떡임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요한복음 6:1-58)
여기서 우리의 예배를 한 번 돌아보십시다. 우리가 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예배 때마다 떡과 잔을 나눕니다. 함께 떡을 떼고 함께 잔을 나눕니다. 이것이 바로 근거입니다. 이 예배가 영생을 누리는 근거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한복음6:58)
영생을 누리고 산다는 것이란,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어찌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논할 수 있을까요? 거룩한 하나님을 먹고 마신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말로 설명 될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어느 누구도 함부로 여기에 대해 논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요한복음6:60)
그랬습니다. 이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영생을 먹고 마시고 누리고 사는데, 이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어렵도다!”라고 했었지요.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요한복음6:61-62)
여기서 이제 엄청난 이야기를 또 해주십니다. 만약에 내가 부활을 하게 되면 어찌하겠느냐? 영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생을 누리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며, 또한 생명 안에서 살아있는 것을 이해 못하니 이제 어찌하겠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6:63)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이 여기에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씀의 의미도 모른 채 인용하며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육은 무익하고 썩어져 없어지고 사라질 것이므로 우리의 육체가 아무 의미가 없고 육체가 행하는 섬김이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함을 주장하며 육체의 거룩 또한 부인하면서 이 말씀을 인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것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영혼들에게 엄청난 말씀을 해 주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6장에서 7장, 8장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시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시고자 한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8:31)
바로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되는 것이지요.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생명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국 사랑이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한복음14:19-21)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시고 또한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하십니다. 즉 새생명을 가진 자, 영생을 가진 자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임을 설명하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또한 이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님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그 생명, 즉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22:35-4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한일서5:2-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계명을 주셨는데,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었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계명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로 그 안에 살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삶 속에서 행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에, 우리가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 안에 살며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 바로 그분의 목적이었습니다. 주께서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그 생명이 사랑이기에, 사랑은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만찬을 드신 이후에 주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심을 보여 주셨을 뿐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1-35))
우리가 늘 말하는 “은혜, 감사, 충만, 행복, 기쁨” 이 모든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은혜로운 삶을 누린다, 충만하다, 감사하다, 참 기쁘다” 이런 표현을 할 때 무엇이 은혜를 누리는 것이며, 충만한 것이며, 감사하고 기쁜 것일까요? 어떤 일들이 잘 되었을 때입니까? 아니면 기분이 좋을 때입니까?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입니까? 은혜와 충만과 기쁨과 감사와 이 모든 것들은 “사랑”할 때에만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 서로 나눌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안에 영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했고, 거듭났으며, 우리는 이제 거룩하고, 의롭고, 흠도 점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충만한 삶을 삽니다. 그런데 이 “충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충만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라고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면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라고 할 때 “영생을 맛보는 것”이 실질적으로 무엇이냐는 점입니다. 그저 추상적인 개념일까요? 아니면 충만하게 느껴지는 감정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진정한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랍고 은혜롭고 행복하고 충만한 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명이 사랑이기에, 그 생명이 살아 있음이 사랑으로 나타날 때, 은혜와 행복과 감사와 충만 또한 더불어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을 참으로 맛보며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지난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충만하다”고 할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십니까? 박수 치며 찬송 부르고 감정이 격앙되었을 때 그것을 보고 “충만하다” 했었습니다. 엄청난 일이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충만”하게 찬송을 부르고 방언까지도 했다 한들 그들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정말 허무한 것이었지요. 그 충만하게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께 무릎 꿇고 이것도 해결해 주시고 저것도 해결해 달라고 애걸복걸하고 매달리는 삶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과연 영생을 맛보고 있습니까? 은혜와 감사와 충만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거듭난 자는 생명을 가지고 영생을 누리는데, 이 영생 안에서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충만한 것인가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가졌습니다. 영생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게 얼마나 존귀한지 이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설명 드리면 이러합니다. 충만하다, 은혜롭다, 참 평화가 넘친다, 감사하다, 기쁘다 - 이 모든 것을 전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표현이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믿고, 또한 영생을 누리는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그 생명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사랑이었고 행위였습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위가 없으면 죽었다고 하신 그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2:26)
평생을 저는 이것을 가지고 논해 왔고 많은 이들과 교제해 왔습니다. 왜 이 말씀을 드려야만 할까요? 여기에 “영생”의 핵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결정체가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복합니다! 은혜롭습니다! 충만합니다!” 이 말을 할 때, 그 의미는 바로 “사랑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사랑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쓸 때 남녀간의 사랑을 많이 이야기했었습니다. 하지만 형제자매에게는 그렇게 많이 써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어디에 써야 할까요? 첫째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피로 값주고 산 이들에게 써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듭나지 못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가운데 이들에게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이론적인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글로만 존재하는 것이어도 안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우리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믿는 자가 영생을 가졌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영생을 가졌나니!” 앞으로 가질 것도 아니고, 먼 훗날 이루어질 것도 아니고, 이미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영생을 가졌다고 할 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래서 저는 지난날 많은 이들과 교제하며 “살아있음이 무엇인지 보여 보십시오! 거듭났다고 하시니 거듭난 게 무엇인지 보여 보십시오!”라고 말해 왔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은 저에게 “믿음으로 시작하여 행위로 마친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입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한복음6:51)
주께서는 자신이 하늘에서 온 산 떡이니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영생을 누린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한 떡에 같이 참여하고, 한 잔에 같이 참여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 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가 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과 내가 또한 사랑해야 할 것, 즉 형제자매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떡에 함께 참여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요한복음6:47-48)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한복음6:49-51)
주께서는 영생을 말씀하시다가 생명의 떡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주님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인데, 이전에 만나를 먹은 자들은 그것을 먹었어도 죽었지만 이제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한다고 하시며 이 떡이 바로 주님 자신의 생명이며 주님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이것은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할 때, 영생을 주셨다고 할 때, 그 사랑과 영생의 수준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다른 곳에 보면 형제를 “라가”라고, 즉 “바보”라고 하느니 차라리 연자 멧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고까지 하셨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린도전서 10:16-17)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이런 사람들임을, 이렇게 복된 자들임을 우리가 함께 다시 돌아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 이 복됨을 함부로 버리지 마십시다. 세상에서 보기에 미천해 보일지 몰라도 여러분은 누구보다 귀한 자들입니다. 형제자매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존귀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온전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라는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으며, 이보다 더 큰 충만은 없는 것이지요. 바로 “사랑”을 가지고 누릴 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