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밤의 낙서(落書)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온 세상이 낮에는 불타고, 밤에는 대지 위로 올라오는 축축한 습기로 사람의 몸이 천근으로 늘어지는 계절이다.
벌써부터 전국의 해수욕장이 개장했고, 사람들은 시원한 물을 찾아 산천으로 떠날 꿈을 꾸고 있다.
요즘 한국은 북한과의 평화 분위기로 뜨거운 여름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모를만큼 바쁘게 돌아가고 있고, 전세계의 관심이 미국과 북한 정상회담에 쏠려있다.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침울한 역사 스토리였던 한반도 분단사에 가장 획기적인 평화의 신호가 울려 퍼지는 지금, 각계 각층의 국민 모두가 무엇을 생각하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해답과 추측성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통일이라는 과제가 너무나도 광범위하면서도 겉으로의 해답보다는 속으로의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저 정치인들의 행보와 흘러가는 정치사에 눈으로 바라볼 뿐, 일반 서민으로서는 무어라고 딱히 발언할 것이 없다.
우리 문인들은 그저 글 쓰고, 짓고, 작품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최선의 일이다.
필자는 여름이면 가끔씩 생각나는 추억같은 일이 있다.
아주 오랜, 젊은 시절의 어느 여름날을 시 작업에 몰두하며 시간을 잊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의 성가신 발걸음을 피해 집안 다락방에 들어앉아서 시를 쓰고, 짓느라고 땀을 흘린 여름날이 있었다.
‘백팔번뇌’라는 첫 시집을 발간하기 위해 108편의 시를 목표로 책 구상과 함께 너댓개의 단편적인 장르를 설정해 놓고 그 좁은 다락방에서 마당이 보이는 조그만 창문의 빛을 통해 부채 하나에 무더위를 해결하면서 스스로 고행의 시를 쓴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열정이 너무도 그리울 때가 많다.
아무런 잡 생각이 없이 오직 시에 매달렸던 그 무더위 속의 열정이 지금의 내 문학의 기초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당시도 세상은 바쁘게 돌아갔고, 낮에는 필자도 생업에 매달려야 했으며, 주위엔 늘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시를 써야한다는 어떤 비장한 각오가 있어서 또 첫시집 발간이라는 역사적(?)인 사명마저 갖고서 무더운 여름밤을 모기를 쫓으면서 밤을 꼬박 새우기를 여러번 했던 그 시절이, 지금 생각해보면 한여름 밤의 무수한 별 이야기만큼이나 나의 문학사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 몹시도 아름답게 느껴지기만 한다.
그 무더웠던 여름밤에 쓰고 또 쓰고, 찢어버렸던 낙서(落書) 원고지가 좁았던 다락방을 채울 때마다 때론 좌절하고 때론 한 싯귀라도 건지는 즐거움에 희열했던 그 고행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그리운 추억이 되어버렸다.
중국 당대의 시인 이백의 이야기는 늘 많은 것을 생각케 해주는 문학사 고전인데, 이백의 명시 ‘양원음(梁園吟)’에 얽힌 이야기는 한 여름밤에 음미해 볼 수 있는 명전이다.
이백이 3년간의 호기롭던 장안의 한림학사 시절을 마치고, 고독한 자신의 처지를 절절이 바라보던 시절에 하남성 서북쪽에 있었던 양원에서 시인 두보와 고적과 노닐면서 일순간에 일어난 시상(詩想)으로 일필지휘하여 담벼락에 취홍 속에서 써 내려간 낙서같은 시가 ‘양원금’이라고 전해져 오는데 그 내용인즉,
두보와 고적이 함께 한 양원의 어느 담벼락 앞에서 이백이 “술에 취했는데 시가 어찌 없겠는가?” 라며 붓을 들어 담벼락에 일필지휘하여 시를 써 나갔는데 이 담벼락의 주인장이 화를 내며 “남의 담에 어찌 이런 낙서를 하는가?”하면서 이 시(낙서)를 지우려고 하자,
마침 귀갓길이었던 가야금 타는 여인 '종(宗)씨 녀' 라고 알려진 한 여인이 이 담에 써진 시를 읽으며 감탄하던 중, 담 주인이 걸레로 이 시를 지우려는 것을 놀래 가로막으며 몸에 지니고 있던 천금(千金)을 주고 이 이백의 시가 써진 담벼락을 사서 보존했다는 고전이다.
이 ‘종씨 녀’ 는 측천무후 때 재상이었던 종초객(宗楚客)의 손녀 로서 후일 이백의 네 번째 아내가 되는 인연이 된다.
위대한 시인의 즉흥적인 명시를 한낱 낙서(落書)로 알고 지우려했던 순간에 한 여인(요즘은 ‘팬’이라고 표현)의 후원으로 남게된 이백의 담벼락 시 ‘양원금’은 두보와 고적 그리고 이백의 문학사를 이야기한 삼현사(三賢祠)에서 엿볼 수가 있다.
낙서(落書)와 작품의 필연관계를 느낄 수 있는 고전이다.
낙서(落書)와 낙서(樂書)의 묘한 관계 설정이 이루어지는 문학의 묘미를 감지할 수 있다.
문인에게 있어서 사색이란 매우 중요하다.
평상시 어떤 대상에 대해서 신중히 생각하고 관찰하는 습관은 문학 작업의 중요한 기초이다.
그러나 이것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고행의 작업이다.
물론 순식간에 이백처럼 써내려가는 취흥의 작업도 이을 수 있지만 그것은 이백 같은 경우, 평소, 대상에 대한 깊은 사색이 밑바탕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해 본다.
대부분 글의 원본(초고)은 낙서(落書)로 묻혀 버린다.
수도 없는 낙서(落書)의 행렬이 이어지면서 결국에는 낙서(樂書)로 귀착되어 문인은 스스로 기쁨과 자부심을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 많은 낙서(落書)속에 진정한 낙서(樂書)의 끝에 다다르는 것이다.
2018년 여름이 무덥다.
우리 한국신춘문예 회원 작가들은 이 한 여름 밤에 땀을 흘리며, 작품 작업에 매달리는 추억의 시간을 만들기 바란다.
세상 도처의 모든 대상이 문학작품의 소재이다.
짜증나는 여름밤의 모기 성화도,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줄줄 흐르는 땀 목욕도, 먹고 살기 힘든 직업적 일의 스트레스도 모두 문학작품의 소재이다.
그러면서도 시원한 바람 속 바닷가의 모래밭 이야기가 더욱 싱그럽고, 사랑하는 연인과의 파도소리 들으며 나누는 이야기가 향기롭고, 절절히 외로운 나그네가 되어 윤동주의 별을 바라보는 고독한 시의 이야기도 아름답기만 하다.
이 한 여름밤을 고독과 고행과 고뇌의 문학작품에 땀흘리는 여러분 문인들의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위대한 문인의 탄생을 또 기대해 본다.
‘2018년 한국신춘문예 여름호’를 발간하며
발행인 엄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