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杏壇(행단)이란 곳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기도 하려니와 은행나무는 본래
長壽(장수)의 의미가 있고 열매는 後孫(후손)번성의 의미도 있다.
이렇게 의미 있는 杏木(행목)을 골라 福(복)되고 좋은 터에 壇(단)을 조성하여 手植
(수식)한 것 은 후손들에게 임금님께 忠誠(충성)하고 부모님께 孝道(효도)하는 방법
을 가르쳐서 세상 돌아가는 理致(이치)를 깨우치게 하여 가문의 번영을 도모하게
하는 것은 朝鮮(조선)의臣下(신하)로서 남은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이에 행단을 복원하여 그 경위를 밝히는 한편 縣令 公(현령공)께서 백성을 사랑하
고 잘 다스린 자취와 내력을 敍述(서술) 한다.
縣令公(현령공)의 본관은 창원(회산)이고, 휘는 碩健(석건), 호는 孤山(고산)이시며
配(배)는 東萊(동래) 鄭(정)씨이고 公(공)의 묘는 행단북쪽 臥龍山(와룡산)에 모셨다.
始祖(시조)는 元(원)나라 귀족이며 高麗(고려) 壁上三韓三重大匡(벽상삼한삼중대광)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 推誠佐理功臣(추성좌리공신) 檜山府院君(회산부원
군) 恭僖(공희) 檜巖(회암) 黃石奇 先生(황석기 선생)이시고 派祖(파조)는 高麗名相(고려명상)
檜城府院君(회성부원군) 恭靖(공정) 黃 裳 先生(황 상 선생)이시다.
曾祖(증조)는保務郞將(보무랑장)이시고 太祖七年(태조7년)에 成均館 直講(성균관 직강)이신
諱(휘) 元雍(원옹 이시고 祖(조)는直長同正(직장동정)總(총)이시고 考(고)는定略將軍(정략장군)
이시며 贈(증) 嘉善大夫(가선대부) 兵曹參判(병조참판)退菴(퇴암) 諱(휘) 有明(유명)이시다.
公(공)은 1487년 24세때 對馬島(대마도) 宣慰使(선위사) 鄭誠謹 公(정성근 공)을 陪行(배행)
하여 탁월한 활솜씨로 對馬島主(대마도주)를 壓迫(압박)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고
1492년(성종 23년) 武科(무과)에 33명중 장원급제 하여 拜命(배명)은 司憲府監察行
(사헌부감찰행) 南海縣令(남해현령)이다. 子(자)의 諱(휘)는 碗(완)이요 五衛司直(오
위사직) 이시고 長孫(장손)의 諱(휘)는 士謙(사겸)이요 通禮院引儀(통례원인의)이시
다. 次孫(차손) 諱(휘)士誠(사성)과 三孫(삼손) 諱(휘) 士謹(사근)두 형제는 壬亂(임
란)에 충익공 곽재우 의병장과 함께 火旺山城(화왕산성)등 여러 전장에 참전하시다
변을 당하여 전사하셨다.
그 이후 後孫(후손)들이 시대의 潮流(조류)에 순응하고 적응하며 번성하드니 공의 유지를
받들어 이곳에1565년(명종21년)에 臥龍齊(와룡제)를 건립하고 1696년에 祥鳳書堂
(상봉서당)이 건립되고 연이어 龍山書堂(용산서당)과 英洞書堂(영동서당)이건립되었
다. 1745년에는 檜源祠(회원사)가 건립되고 1755년에 柳溪祠(유계사)등을 건립하
여 공부자수수(孔夫子授受)의 뜻을 후손들에게 전하여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야흐로 100년 전에 신교육의 搖籃(요람)인 유원간이학교가 개교 하
여 지금의 유원초등학교가 되었으니 공의 遺業(유업)이 오늘날 까지 빛난다 하겠다.
公(공)의 자질이 원래 慈愛(자애)롭고 淸廉(청렴)한지라 南海縣令(남해현령)으로 부
임하여 懸民(현민)을 다스리는 동안 선정을 베풀고 민폐근절에 크게 힘썼으니 朝鮮
朝(조선조)의 臣下(신하)로서 功(공)으로 표상되는 바니 公(공)께서 떠나실 때 懸民
(현민)들이 遺愛碑(유애비)를 세워 기렸다.
柳原(유원)의 入鄕祖(입향조)이신 공의 자애로운 덕을 기려 1755년 (영조 31년) 柳
溪祠(유계사)에 배향하여 후손들이 매년 정기향례 올리고 公(공)의 높으신 뜻을 밝게 닦아
길이 後裔(후예)들에게 傳(전)하는 바이다.
- 2016년에 16세손 재우 삼가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