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임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이제까지 상식처럼 사실로 믿었던 일들이 가끔 허구로 밝혀지는
경우가 있다. 이제까지 사실로 믿었던 일들이 정반대인 경우를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곤 한다.
역사의 조명이라는 것도 사실은 또 다른 왜곡인 경우가 상당수 있다.
임존성 연구를 하면서 처음으로 사서를 정밀하게 분석했다.
지금은 사료정리가 되어 있으니 참 편하다. 필요한 부분만 읽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해석이 되어 있으니 한문을 몰라도 그다지 어려움을 못 느낀다. 그런데 나는 참으로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어디에도 백제 임존성은 존재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백제 부흥운동 초기의 기록에는 임존산 대책 소책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며 임존성이라는 지명은 명실상부하게 역사서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임존산은 분명 존재했는데 왜 임존성은 없었을까?
사서의 기록대로라면 부흥운동 전에는 적어도 성은 없었다는 것이 자명해졌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에는 백제 임존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백제의 조직을 보면 방.군.성 체제로 되었다. 5방 37군 200여성이 있었다.
즉 방 밑에 군이 있고 군 밑에 성이 있는 것이다. 군은 2~3개의 영현(성)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임존성은 성이면서 영현을 거느리고 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임존성이 특수한 지역이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연기 향토사학자 김재붕의 설이다. 최초로 임존성에 대한 논문을 쓴 사람이다.)
사실 나는10여 년 동안 연구자들의 설을 그대로 믿었다. 학자들의 연구도 그대로 믿었다.
하물며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기록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0여년의 관심과 답사 끝에 최근에 임존성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고,
향토사학자와 학자들의 연구에 의구심을 갖게 되어 사료를 정밀 분석하고
나는 참으로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임존성을 막연히 백제 성으로 인식하던 고정관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임존성은 분명히 부흥운동 초기의 기록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언가 착각에 빠져
역사적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의문점은 흑치상지의 관명에 풍달군장이라고 되어 있는데
정작 풍달군은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내린 결론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적어도 백제 임존성은 무언가 편찬자가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대흥군 본 백제 임존성‘이라고 한 것은 대단한 착오를 한 것이다.
신당서, 구당서,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 백제 부흥운동 사료를 보면 어디에도 부흥운동 초기에는
임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임존산 대책과 소책만이 존재한 것이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며 분명 임존산성이 아닌 임존성이 역사에 등장한다.
그리하여 부흥운동의 거점 임존성은 임존성으로 존재한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시대의 대흥의 지명은 무엇이었을까?
대동지지에는 지분촌으로 기록되어 있다. 허나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지분촌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흑치상지전에 보면 풍달군장이었다고 한다. 바로 풍달군이 대흥의 백제시대 행정지명이었다.
그런데 왜 풍달군은 사라졌을까?
백제 변방의 임존산에 부흥운동의 거점성을 축조하여 임존성으로 명명하고 당시 동북아 역사의
중심으로 되자 자연스레 풍달군은 사람들로부터도 행정적으로도(이미 백제가 멸망했으므로
행정명은 의미를 상실했다) 잊혀지고 임존성이 대신하였던 것이다.
다른 지역은 백제시대의 지명이 그대로 존재할 수 있었으나 풍달군 치소는 이미 나당군의
임존산 대책과 소책의 공격시 초토화 되었다. 나당군이 철수 했으나 이제는 임존산에 있는 대책이
부흥군의 거점성이 되어 모든 행정이 그곳에서 이루어 졌다.
임존산 대책은 임존성이 되어 부흥운동의 중심이 되자 모두 임존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누구도 풍달군은 기억하지 않았다. 당나라가 점령한 후는 지심현으로 하였는데,
신라가 당군을 몰아내고서도 이곳 지명은 풍달군이라 하지 않고 임존성이라는 지명을 쓴 것은
이미 풍달군은 역사속으로 사라져 임존성이 고유명사화 되었기 때문이다.
경덕왕 때에 임존성을 그대로 임성군으로 바꾸었고, 고려 초 다시 대흥으로 개명하여 삼국사기
편찬자들 조차도 임존성을 백제 임존성으로 착각하여 누구도 기록의 오류를 몰랐던 것이다.
그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이어졌고 후세 사람들은 기록의 오류를 생각할 수 없었다.
최근에야 임존성에 관심을 가지고 학술발표회를 열었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삼국사기의
오류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요즈음 웹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임존성 관련 수많은
글들을 하나하나 검색하면서 내가 정말로 위대한(자화자찬이지만) 발견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지역사회에서는 내가 평범한 농사꾼이라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말이다.
-사적 90호 예산 임존성의 재문제 연구- <성부제>
첫댓글 임존성은 성이면서 영현을 거느리고 있다?
(풍달군이 임존성으로 대치되었기에)
풍달군 치소(학산성)는 이미 나당군의 임존산 대책과 소책의 공격시 초토화 되었다.
나당군이 철수했으나 이제는 임존산에 있는 대책이 부흥군의 거점성이 되어 모든 행정이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역사학계가 발칵 뒤집어질 발견이다.
성부제님의 글 덕분에 뒤엉킨 많은 부분이 풀어지는 느낌이다.
임존산 대책, 소책이 부흥군의 거점성 임존성으로 부활하였다?
임존산 대책 소책 공격시 주변의 풍달군 치소인 학산성과 임존산 소책은 함락되었지만 임존산 대책은 무사하여 부흥군의 중심 역할을 하게되고, 자연스럽게 풍달군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지고 부흥군의 본산으로 인식된 임존성이 대신하게 되었다,라는 주장....
부흥운동이 확장되며 백제 전역이 부흥군 수중으로 들어오고, 나당군은 사비 웅진성에 고립된다.
부흥군은 몰려드는 지원군과 유민들로 인하여 임존성은 공간이 협소하여 주둔지를 산악지역으로 옮기는데 그곳이 주류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악지역에 3만명 이상 머무르며 장기간 항전할 수 있는 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류성은 특정 산성이 아니라 산악지역의 넓은 공간 임을 추측할 수 있다. 주류성은 부흥군과 유민들이 함께 머무른 왕성으로 자리하고, 임존성 학산성 석성산성은 주류성의 외곽성으로 역할을 한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