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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주 씨는 동양(東洋)의 5000년 역사(歷史)와 더불어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집안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우선 역사상(歷史上) 주 씨의 위치(位置)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우리의 뿌리를 설명하고자 한다
1. 동양역사와 우리 주씨의 원류(源流)
- 기마민족(騎馬民族)의 주류(主流)인 주씨(朱氏) -
동양 고대사에 자주 나오는 동이족(東夷族)이란 극동아시아 지방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을 말한다. 이 민족은 아홉 개의 나라를 세워서 살았기에 이를 역사상 구이(九夷)라고 불러 왔다. 동이족(東夷族)이 중국 대륙 동부(東部)와 북부(北部), 만주 대륙(滿洲大陸), 한반도와 일본열도 등 지역에서 세력을 가지고 국가(國家)를 세우기 이전에 이 지역에는 고아시아 인종(古亞細亞人種)인 축치(Chukchee), 콜랴크(Kolyak), 길랴크(Gilyaks), 캄차달(Kamchadal), 아이누(Ainu), 에스키모(Eskimo) 등의 인종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거의 날것을 먹고(生食) 사는 인종으로서 중국 동해안, 요동 남해안, 한반도 곳곳에서 조개껍데기 무덤(貝塚)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과 그들의 생활 도구인 마제석기(磨製石器), 유문 토기(有紋土器) 등의 발견은 이들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다가 기원전 3000년대에 동부 시베리아와 북몽골 지방의 넓은 초원에 살고 있던 기마민족이 지구의 기온이 점점 추워져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900년 전이다. 이때를 역사상 신석기(新石器) 농경문화 시대라고 한다. 남쪽으로 내려온 기마민족은, 한 갈래는 중국대륙 동북부로 내려와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시대를 이루었고, 또 다른 한 갈래는 만주대륙으로 내려와서 우리 한국 고대사에 나오는 고조선(古朝鮮) 시대를 이룩하였다. 이들은 모두 하늘(天)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으로, 하느님을 상제(上帝) 환웅천왕(桓雄天王) 또는 천군(天君)이라 불렀고, 국가나 부락사회(部落社會)나 가정을 보호하는 신(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신앙생활을 하였다.
삼황오제시대(BC 2357년)에 중국 동부에 대제국이 있었으니 이 나라를 세운 사람이 전욱(顓頊)이라 하여 우리 주씨의 원시조(元始祖)가 된다. 나라의 도읍은 지금의 산동성 평릉(平陵)이다. 중국 역사책인 자치통감(資治痛鑑)에는 전욱제(顓頊帝)를 중국 역사의 최초의 제왕(帝王)인 황제(黃帝)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다. 즉 황제(黃帝)에게는 원비(元妃)인 서릉씨(西陵氏)와 사이에 창의(昌意)라는 왕자(王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촉산씨(蜀山氏)의 딸인 창복(昌僕)과 혼인하여 전욱(顓頊)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에는 성씨제도(姓氏制度)가 없어서 살고 있는 땅 이름을 씨성(氏姓)으로 하였다. 전욱제(顓頊帝)로부터 권장(倦章)-축융(祝融)-육종(陸終)-자안(子晏)-조협(曹俠)으로 이어지는 혈통(血統)은 평릉(平陵)의 옛이름인 주(邾)에서 살고 있었기에 그 땅 이름인 주(邾)를 성(姓)으로 하였고, 나라 이름도 주(邾)라고 하였다.
주(邾)나라가 1600년 간 지속되다가 기원전 1111년에 주 왕조(周王朝)가 중국을 통일할 때 우리 선조의 주(邾)나라는 후국(侯國)이 되어 17대 680년을 마지막으로 중국은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31년)에 들어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때 우리 선대들은 주(邾)나라를 떠나는 자손들에게 혈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여 주(邾)에서 고을읍변인 ‘⻏’를 떼어 오늘날 우리 성씨인 주(朱)로 고쳐 부르기로 하여, 어느 땅에 가 살더라도 붉을 ‘주(朱)’의 성은 같은 혈통이란 것을 알도록 하였다.
2. 세계사(世界史)와 우리 주문 역사(朱門 歷史)
앞에서는 우리 주씨의 발생으로부터 주(邾)의 성이 주(朱)로 바뀌어진 기원전 403년까지의 세계사(世界史)와 우리 주문 역사(朱門 歷史)를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기원전 403년부터 주(邾)나라를 떠나 하남(河南)의 상현(相縣)과 단양(丹陽)으로 옮긴 우리 조상들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하남(河南)이라는 곳은 황하문명(黃河文明)의 발상지로서 글(文字)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이고, 동이족(東夷族)인 은왕조(殷王朝)가 이곳에서 동북아시아(東北亞細亞)의 문명(文明)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은(殷)나라의 역대 왕릉(歷代王陵)과 상형문자(象形文字-한자의 본바탕)를 만들어낸 창힐(蒼頡)의 묘(墓)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씨의 옛 선대(先代) 어른들이 십칠대(17代)가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또 우리 한국 역사(韓國歷史)에 주목해야 할 점은 기원전 230년 진(秦)나라에 멸망한 한(韓)나라가 이곳 하남(河南)에 있었다가 그 백성이 요동(遼東)을 거쳐 한반도(韓半島)로 내려와서 삼한시대(三韓時代)를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주 씨의 원 시조(元始祖)인 전욱(顚頊) 임금이 산동(山東)지역에 제국(帝國)을 세웠고, 이어 같은 동이족인 은 왕조가 이곳 하남에 국가를 세워 황하문명을 발생시켰다. 그 흐름이 한 갈래는 중국대륙의 남부(南部)로, 또 한 갈래는 요동(遼東)의 고조선(古朝鮮)을 거쳐 한반도로 내려온 것이다. 서기 1년부터 1234년까지의 세계사와 우리 조상들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불의(不義)를 원수같이 싫어하는 우리 선대 할아버지들의 모습과, 언제나 가난하고 약한 백성 편에서 목숨을 바쳐 싸워 온 선대 할아버지들의 모습과, 무지(無知)한 백성들에게 진리의 학문으로 깨우치게 한 선대 할아버지들의 모습을 살펴 볼 수가 있다. 서기 8년에서 25년까지 한 왕조(漢王朝)를 아무 공(功) 없이 빼앗아 왕위(王位)에 오른 왕망(王莽)에게 항거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농사(農事)에 의지하다가 25년에 왕망(王莽)이 망하고 광무제(光武帝)가 후한(後漢)을 되찾게 되자 고향에 있던 선대 할아버지들이 모두 나라 일에 참가한 행적이요,
둘째는 764년 당(唐)나라 때 종래의 균전제(均田制 : 토지 사유를 제한하고 농민에게 일정한 경작지를 준제도)를 철폐하고 대사유제도인 장원(莊園 : 귀족, 공신들이 무조건 차지하는 토지제도)이 실시되자, 농민의 고통을 보다못해 우리 선대들이 농민군(農民軍)을 일으켜 관군(官軍)과 싸워 결국 907년에 이르러 당(唐)나라가 망한 유명한 황소란(黃巢亂)이었고,
셋째로는 수만의 문자(文字)에서 기본문자 천자문(千字文)을 만들어 일반 서민들에게 문맹(文盲)을 없애게 한 후량(後粱)의 태조(太祖) 주전충(朱全忠), 또는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저술(著述 : 책을 만드는 것)이 우리 1세조 주자(朱子)에게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의 깊게 알아야 하겠다.
지금부터는 동국시조(東國始祖)인 청계공(淸溪公)이 고려로 건너온 후의 우리 조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고려(高麗)가 몽골(蒙古), 즉 원(元)나라의 침략을 받아 몹시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될 시대의 우리 할아버지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원(元)나라가 망(亡)함과 때를 같이하여 고려(高麗)도 점점 쇠망의 길로 들어가는 시대에 우리 주 씨의 흐름을 살펴보면
첫째, 동국시조(東國始祖) 청계공(淸溪公)이 몽골군의 추색(追索)을 피하여 용담(龍潭)으로 피난 가서, 그 지방 토착민(土着民)의 자녀를 모아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쳐 이 땅에 주자학(朱子學)의 뿌리를 내린 일. 지금도 용담(龍潭)에 가보면 주천서원(朱川書院)에 청계공(淸溪公) 할아버지를 배향(配享)하여 매년 광산 김씨(光山金氏)들과 인근 유림(儒林)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다.
둘째로 원(元)나라가 고려(高麗)를 속국(屬國)으로 만들어 (1) 일본을 정복하기 위한 전함(戰艦)을 고려 백성들을 징발하여 만들게 한 것 (2) 고려 땅에 있는 금(金)을 캐서 바치게 한 것 (3) 해마다 고려의 처녀(處女) 2000명을 원(元)나라에 보내게 한 것 등 아주 고된 부역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어서, 당시 충렬왕(忠烈王)은 몇 차례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 사정을 호소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마지막으로 중신(重臣)인 문절공(文節公) 주열(朱悅) 6세를 원 세조(元 世祖, 쿠빌라이)에게 보내기로 하고 끝내 3대부역(三大賦役)을 면(免)하게 하여 국난(國難)을 타개한 것.
셋째로, 7세 문간공(文簡公) 할아버지가 나쁜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받은 일, 아버지인 문절공(文節公)이 너무나 청렴결백한 중신이기에 사사로운 정실에 흔들리지 않으므로 이에 반감을 가진 간신들이 마침 문절공(文節公)이 돌아가시자 그 아들인 문간공(文簡公)이 삼사좌윤(三司左尹)의 벼슬에 오름을 틈타 모함을 하게 된 것.
넷째로 고려(高麗)가 점점 쇠약해짐을 틈타 북방의 여진족이 내려와 함경도 땅에 정착하므로 전주에 있던 7세 첨의부사공(僉議府事公) 인환(印還) 할아버지가 당신의 친구인 이안사(李安仕) 일족(一族)과 더불어 북상(北上)하여 여진족(女眞族)을 몰아내고 함경도 땅에 들어간 일.
다섯째로 8세 종손(宗孫) 헌정공(憲靖公) 의(義) 할아버지가 당신의 장모인 충렬왕(忠烈王)의 폐비(廢妃)와 부인 경숙공주(慶淑公主)를 데리고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부임(赴任)한 일. 이것은 원(元)나라에서 강제로 원(元)의 미실공주(迷失公主)를 충렬왕(忠烈王)의 왕비(王妃)로 삼으려 하였기 때문이며, 이때 충렬왕(忠烈王)의 나이 34세였다.
여섯째로 8세 사충(思忠) 장군이 덕흥군(德興君) 사건에 관련되어 억울하게 처형당한 것과 요승(妖僧) 신돈(辛旽)의 횡포에 분개하여 공민왕(恭愍王) 면전에서 신돈(辛旽)을 힐책했다가 영해(寧海) 변방으로 귀양간 8세 원세(元世) 할아버지의 일 등, 고려사에 나오는 우리 주씨의 선대들이 이 연표에 기록되어 있다.
몽골의 세력에 시달려 나라의 힘이 약해진 나머지 결국은 475년(918 ~1392)간 나라를 통치해 온 고려왕조가 망하고, 조선(朝鮮)을 국호(國號)로 한 이씨(李氏)왕조가 세워졌다.
이때 우리 주문(朱門)의 선대(先代) 어른들은 ① 고려에 대한 충절(忠節)로 이씨조선에 항거한 어른들과 ② 이씨조선에 적극 협력하여 개국(開國)을 서두른 어른들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하나 1398년, 즉 이씨조선이 개국한 지 6년 만의 제1차 왕자란(王子亂) 이후부터는 이 두 갈래의 우리 선대 어른들은 조선왕조로부터 박해와 탄압을 받아야 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9세 종손(宗孫) 흥득(興得) 할아버지가 당신의 목숨을 당신 스스로 끊은 일, 능득(能得) 할아버지가 광양(光陽)으로 귀양간 일, 11세 순정(淳精) 할아버지가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끝내 화장(火葬)당한 일, 순문(淳文) 할아버지가 평안감사(平安監使)를 그만두고 삼등(三登) 변방에 은신(隱身)한 일 등은 앞서 말한 (1)에 속하고, 이태조(李太祖)를 도와 이씨조선 개국(開國)에 공신(功臣)이 된 11세 웅성군(熊城君) 자정(子精) 할아버지와 안천군(安川君) 인(仁) 할아버지는, 이태조(李太祖)가 왕자란(王子亂)에 실망한 나머지 왕위(王位)을 버리고 함흥으로 가게 되자 같이 동행한 지 얼마 안 가서 안변부사(安邊府使) 조사의(趙思義)가 이태조(李太祖)를 다시 왕위에 올리기 위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자 태종(太宗)은 두 주씨공신(朱氏功臣)의 책동(策動)이라 하여 두 할아버지의 개국공신의 녹(祿)을 박탈하고, 이때부터 태종(太宗)은 주씨(朱氏)라면 이를 갈며 증오하기 시작하여 박해와 탄압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관향을 떠나 각지(各地)로 피난, 귀양(流配), 이산(離散)한 할아버지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중국대륙에서는 우리와 같은 혈통(血統)인 주씨가 몽골의 세력을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하여 명(明)나라를 세워 문화를 향상 발전시켜 나가는 통쾌하고 시원한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씨조선 태종(太宗) 때(1402)부터 약100년 간 우리 선대들이 박해(迫害)를 받아오다 각 지방에 분산하여 초야사림(草野士林 : 벼슬을 하지 않고 촌락에 묻힌 선비들)으로 살아 있던 할아버지들이 ① 국가시험인 과거(科擧)에 합격한 사람이 계속 나타나기 시작했고 ②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이 발생하자 최전선인 영남지방(嶺南地方)에서 무열공(武烈公・19세 朱夢龍) 할아버지를 비롯한 우리 선대들이 왜적(倭敵)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功)을 세웠고 ③ 온 백성 중에 가장 모범된 충효자(忠孝子)가 우리 주문에서 표창되었고 ④ 각 지방으로 분산(分散)한 일가들의 혈통(血統)을 밝히는 족보(族譜)가 간행되기 시작하는 등 그 시기가 1488년부터 1644년 사이이다.
100년 간 온갖 박해의 수난을 겪어가면서도 학업에 충실하여 과거에 합격한 할아버지들의 끈질긴 인내와 면학(勉學), 나라의 위급함을 구하려고 목숨을 내던져 왜적들과 싸운 할아버지들의 충절 등이 나라와 온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져 주문에 대한 인식이 점점 깊어져 가는 역사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앞에서 이씨왕조(李氏王朝)의 우리 주문에 대한 나쁜 인식이 점점 깊어져 가고 있었지만 1645년에서부터 1808년 사이에 우리 선대 어른들에게 국가시험인 과거에서 으뜸가는 성적인 장원(壯元)급제가 계속 이어졌고, 송우암(宋尤庵) 선생 문하(門下)에서 주비(朱棐), 주남로(朱南老) 같은 이름난 학자(學者)가 나타나는 등 태종(太宗) 때부터 100년 동안 박해만 받아 오던 주씨 가문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1735년의 영조대왕(英祖大王)과 1778년의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이 나라 주성(朱姓)은 성현(聖賢)의 자손이니 존경으로 대우하라” 하며 잡부역(雜賦役) 징발(徵發)을 면제(免除)케 한 교서(敎書 : 임금이 아래 관속에게 내린 통지)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올바르고(正) 의(義)로운 사람에게는 때가 오면 하늘이 알아주어 반드시 빛을 보게 된다는 것을 우리 선대 어른의 위대한 노력에서 볼 수 있다.
1800년대에 이르러 서학(西學)이라 하여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와 많은 신도들이 학살되고, 프랑스 또는 미국 군함이 강화(江華)를 침공하고, 또 국내에서는 홍경래란(洪景來亂)을 비롯한 각지의 민란(民亂)이 발생하는 어지러운 국난(國難)이 닥쳐오자, 이 기회를 엿보던 일본(日本)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1895년의 민황후(閔皇后)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시해됨으로써 국내 정치인들은 친로(親露)・친일(親日)로 나누어져 주체성이 없는 혼란에 부닥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기에 우리 주문에서 31세 주석면(朱錫冕) 일가가 군부대신(軍部大臣)이 되어 우선 우리 주씨 집안부터 일치단결하자는 뜻에서 고종황제(高宗皇帝)께 상소문(上疏文)을 올려 한 뿌리의 자손들이면서 제각기 살고 있는 땅 이름을 본관(本貫)으로 하고 있는 87개 본관을 신안(新安)으로 통일하여 처음으로 대동보(大同譜)를 간행(刊行)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1902년의 임인보(壬寅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