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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원 (41)
공주시 (4)
고로서원
사곡면 호계리
1808년(순조 8)에 건립되었으며 1924년 제각(祭閣)인 경모재(敬慕齋)가 지어졌고, 1931년 중수하면서 부여의 외산(外山)에서 발견된 정분의 영정을 모사하여 봉안하였다. 1982년 정분의 충절과 정지산의 효행을 기린다는 뜻에서 충효사라고 명명하였고, 공주시에서 사당 전방에 정려(旌閭)를 짓고 사당에 걸려 있던 명정을 이전하였다. 1994년 공주 지역의 유림(儒林)과 후손들이 사우와 삼문(三門)을 세워 고로서원(古老書院)이라 명명하고 정분을 주향으로 하여 정지산을 함께 배향하고 있다.
명탄서원(충절사)
장기면 월성동
1490년(성종 21)에 창건되었으며, 1585년(선조 18)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서원이 처음 건립된 곳은 명탄(鳴灘:현재의 세종시 금남면 영대리)이므로 명탄서원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1967년에 간행된 《명탄서원지》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후손들이 유허지에 모옥(茅屋) 1칸을 짓고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1851년(철종 2)에 이학수(李鶴秀)와 조재응(趙在膺), 안광직(安光直:1775~?) 등이 건의하고 유림들의 발의로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55년 공주향교의 유림, 이명성의 후손 이찬(李燦) 및 이명덕의 후손 이태희(李泰熙) 등이 경비를 모아 1956년에 현재의 사당과 삼문을 재건하였다.
용문서원
상왕동
1663년(현종 4) 이유태(李惟泰)가 중동(지금의 상왕동)으로 이주한 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사송서재(四松書齋)와 함께 세운 사립교육기관으로서 이곳에서 수백 명의 문인(門人)을 육성하였다고 한다.
원래 명칭은 용문서재(龍門書齋)였으나 용문서원으로 명명하고 1977년 국가의 지원을 받아 고택(古宅)과 함께 복원한 것이다.
충현서원
반포면 공암리
1581년(선조 14) 서기(徐起)에 의하여 주자(朱子)를 비롯, 이존오(李存吾)·성제원(成悌元)·이목(李穆)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복원하고 1624년(인조 2)조헌(趙憲)을 추가 배향하였다. 1625년 ‘충현(忠賢)’이라 사액되었으며, 그 뒤 김장생(金長生)·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서원터에 설단(設壇)하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6년에 복원하였다.
금산군 (4)
송곡서원(서산)
인지면 무학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학문 연구와 명현(明賢)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사림(士林)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이다. 송곡서원(松谷書院)은 1694년(숙종 20)에 세워졌으며 정신보(鄭臣保)·정인경(鄭仁卿)·유방택(柳方澤)·윤황(尹璜)·유백유(柳伯濡)·유박순(柳泊淳)·유윤(柳潤)·김적(金積)·김위재(金偉材) 등 9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10년에 다시 세웠다.
영광서원
<자료미확보>
유곡서원
<자료미확보>
청풍서원
불이면 불이리
1678년(숙종 4)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길재(吉再)의 청절(淸節)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76년과 1979년에 군의 지원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논산시 (11)
구산서원
부적면 부황리
<부황리 풍경. 자료 수집 중>
1702년(숙종 2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윤전(尹烇)·윤순거(尹舜擧)·윤원거(尹元擧)·윤문거(尹文擧)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다시 복원하지 못하였다.
금곡서원
연부읍 금곡리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 남루(南樓)에서 스스로 분사(焚死)한 김수남(金秀南)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서원이다. 1687년(숙종 13)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 가야곡면(可也谷面) 조정리(釣亭里)에 신축하고 금곡사(金谷祠)’라는 사액을 받았다.
1690년(숙종 16)에 김수남의 유풍지(流風地)인 현재의 위치로 이축하였으며, 1781년(정조 5) 성삼문(成三問)과 조계명(曺繼明) 양위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그해에 서원터에 단소(壇所)를 설치하고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7년에 사우를 건립, 복원하였다.
노강서원
광석면 오강리
1675년(숙종 원년)에 김수항(金壽恒)의 발의로 윤황(尹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682년(숙종 8)에 ‘노강’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를 추가 배향하였다. 그후 1723년(경종 3)에는 명재(明齋) 윤증(尹拯)과 윤선거(尹宣擧)를 추가 배향하였다.
1717년(숙종 43) 사액현판이 철거되었다가 1722년(경종 2)에 회복되었고 1781년(정종 5)에 나라에서 중수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보존되었던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돈암서원
연산면 임리
1634년(인조 12) 창건.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예학파(禮學派) 유학자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으며, 1660년(현종 1)에 사액(賜額)된 호서지방(충청도)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보존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봉곡서원
연무읍 고내리
숙종38년(1712) 여산 공촌면 장항리에 창건하였다. 묵암 이계맹, 고담 이순인, 취은 남명한, 추당 진극효, 경재 남두건 제 선생을 모시다가 고종 5년(1868) 서원 훼철령에 의거 철폐된 후 1899년 돈암서원 유림에 의거하여 여산향교 유림과 여산부사 윤기진 및 후손의 협력으로 봉곡서원지에 5선생 단을 설치하여 봉곡단소로 운영되다 유림 출연금과 문교부 지원으로 1966년 3월 현위치에 사우를 건립하였다.
조정서원
가야곡면 조정리
익안대군 방의(芳毅)의 증손자인 옥계 도정공 이현동(李賢童)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현동은 1455년 단종의 폐위를 반대하며 스스로를 농맹아라 칭하며 낙향하여 일생을 마쳤다. 서원은 1978년 후손인 이성구가 사우를 건립하였다.
죽림서원
강경읍 황산리
1626년(인조 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이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황산사(黃山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5년(현종 6)에 ‘죽림(竹林)’이라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珥)을 추가배향하였다. 1695년(숙종 21) 다시 송시열(宋時烈)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유허지(遺墟地)에 제단을 마련, 향사를 계속하여오다가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중단되었다. 그 뒤 1946년 지방유림이 옛 제단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곡서원
부족면 충곡리
1688년(숙종 1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계백(階伯)과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33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관계당국의 협조를 얻어 복원하였으며, 이현동(李賢童)·박증(朴增)·김정망(金廷望)·김익겸(金益兼)·김홍익(金弘益)·이민진(李敏進)·김만중(金萬重)·박종(朴種)·조병시(趙秉始)·김자빈(金自殯)·이학순(李學純) 등 11명을 추가 배향하였다.
행림서원
가야곡면 육곡리
1570년(선조 3)경 지방유림이 서익(徐益)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이소(李韶)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광복이 되자 유림이 서원의 복원을 결의하고 계속 추진하여 1966년에 복원하였다.
효암서원
가야곡면 노곡리
조선 중기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강응정(姜應貞)·서익(徐益)·양응춘(梁應春)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은진현 갈마동에 갈산사(葛山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713년경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효암서원으로 개편하였으며, 김문기(金文起)·김성휘(金成輝)·양응춘·남준(南俊)·김필태(金必泰)를 추가 배향하고 서익은 행림서원(杏林書院)으로 이관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광복 후 유림의 발의로 각계의 도움을 받아 서원을 복원하였다.
휴정서원
부적면 신풍리
1699년(숙종 2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무(柳懋)·유문원(柳文遠)·이항길(李恒吉)·김정망(金廷望)·권수(權)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9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1959년에 유림들이 현위치에 단소(壇所)를 설치하고 비석을 세웠다가 계속적인 서원의 복원을 추진하여 1985년 복원하고 송익필(宋翼弼)·김공휘(金公輝)·김현(金顯)·김상연(金尙埏)·김진일(金鎭一)·김우택(金禹澤)을 추가배향하였다.
보령시 (1)
화암서원
청라면 장산리
1610년(광해군 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지함(李之菡)·이산보(李山甫)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86년(숙종 12)에 ‘화암(花巖)’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723년(경종 3)에는 이몽규(李蒙奎)를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뒤 1922년에 지방유림의 발의로 복원하면서 이정암(李廷馣)과 구계우(具繼禹)를 추가배향하였다. 1960년경 수몰지구가 되어 현재의 위치에 이건하였다.
부여군 (11)
간곡서원
임천면 구교리
영조 16년(1740년)에 세워졌으며 고종 5년(1868년)에 손실됐다가 1971년에 복구됐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노성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토호의 반란을 진압한 공을 세운 유동수(柳東秀, 1579∼1654)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남산서원
장암면 장하리
1770년(영조 46)에 건립되었으며 서원의 부속건물인 흥학당(시도유형문화재 제125호)은 이 지역 세력가이던 풍양 조씨 문중이 세운 것으로 서당으로 사용되었다.
동곡서원
세도면 동사리
조선시대 철종 때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신(趙愼)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유림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1928년 복원하여 ‘상절사(尙節祠)’로 현판을 달았다.
1937년에 동곡서원으로 승원(陞院)되었다.
반산서원
임천면 충절로
퇴수 조성복이 처음 봉사된 곳은 1757년(영조 33)에 공주군 정안면 활원(活源)의 문회당(文會堂)이었는데 시대의 변화로 그 유지가 어렵게 되어 1957년에 조성복의 고향인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의 동곡에 사우를 새로 짓고 위패를 옮겨 모셔 퇴수서원이라 하였다. 그 후 1966년에 사림들의 공론으로 가림(嘉林)의 남쪽 반산(盤山)이란 곳에 이건하였다. 이건후 규모를 넓혀 조박과 조견소 두 분을 배향하면서 주향이 조박이 되고 조견소와 조성복이 배향이 되었다. 이처럼 추배과정에서 주향이 바뀌게 된 것은 추배된 인물인 조박은 조성복의 증조이고, 조견소는 조성복의 조가 되기 때문이었다. 즉 가장 선조가 되는 조박이 주향이 되고 박의 자인 조현소와 증손인 조성복이 가족윤리상 배향이 된 것이다. 따라서 서원의 명칭도 주향이 바뀌면서 배향이 된 조성복의 호에서 연유한 퇴수서원이라 할 수 없게 되어 이건 후 서원의 명칭을 건립한 곳의 지명이었던 반산에서 연유하여 반산서원이라 하게 되었다.
봉호서원
석성면 봉정리
<봉정리의 풍경>
1693년(숙종 1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윤문거(尹文擧)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윤단(尹搏)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부산서원
구암면 진변리
1719년(숙종 4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집(金集)과 이경여(李敬輿)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같은해에 ‘부산(浮山)’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그 뒤 군수 정연달(鄭然達)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에 의해 1980년에 복원하였다.
창강서원
부여읍 지석리
1629년(인조 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황신(黃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82년(숙종 8)에 ‘창강(滄江)’이라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광복 이후 지방 유림의 적극적인 주선과 후손들의 협력으로 195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창렬서원
임천면 구교리
삼학사(三學士)라고 불리는 조선 중기 충신 윤집(1606∼1637)·오달제(1609∼1637)·홍익한(1586∼1637)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숙종 43년(1717) 세웠고 경종 1년(1721)에는 ‘창렬사’란 현판을 임금이 내렸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손되지 않았다.
청일서원
홍성면 교원리
1621년(광해군 1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시습(金時習)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 ‘청일(淸逸)’이라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가 1884년 지방유림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현재 위치에 이건하였다. 이와 동시에 김효종(金孝宗)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칠산서원
임천면 칠산리
1687년(숙종 1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계(兪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7년 칠산(七山)이라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으며, 1966년 지방유림과 후손이 협력하여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퇴수서원
임천면 만사리
1757년(영조 33)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박(趙璞)·조성복(趙聖復)·조견소(趙見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광복 후 유림의 발의로 관계기관의 도움을 받아 1957년에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서산시 (2)
성암서원
읍내동
1719년(숙종 4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숙(柳淑)과 김홍욱(金弘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21년(경종 1)에 ‘성암(聖巖)’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가 1896년 복원되었다.
송곡서원
인지면 애정리
1694년(숙종 20)에 세워졌으며 정신보(鄭臣保)·정인경(鄭仁卿)·유방택(柳方澤)·윤황(尹璜)·유백유(柳伯濡)·유박순(柳泊淳)·유윤(柳潤)·김적(金積)·김위재(金偉材) 등 9명의 위패를 모셨다.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10년에 다시 세웠다.
서천군 (3)
건암서원
문산면 수암리
<이산보의 산소>
1662년(현종 3)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산보(李山甫)·조헌(趙憲)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고, 1709년조수륜(趙守倫)·조속(趙涑)을 추가 배향하였다.
1713년에 ‘건암’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맡아왔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후 복원되지 못하다가 1983년경에 유림의 주선으로 충청남도 서천읍 둔덕리에 건암서원 유허비를 세웠다.
문헌서원
기산면 서원로
선조 27년(1594)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광해군 2년(1610)에 한산고촌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이듬해에 나라에서 문헌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고 인재 이종학·음애 이자·배옥헌 이개 등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고종 8년(1871)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후에도 처음 문헌서원이 있던 곳에 단(壇)을 만들고 분향해 오다가 1969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짓고 문양공 이종덕 한 분을 더하여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화산서원
안천면 백삼로
황희의 영정을 안치하고 그의 자손인 황보신, 황징 등을 배향하기 위한 서원으로 그 서원의 강당에 있는 현판들의 기록에 의하면 1922년에 서원으로 승격되고 1970년 2월에 또 중수되었다.
아산시 (2)
독성서원
염치읍
경향 유림들의 발의로 철종 9(1858)년 독성서사(獨醒書社)로 세워 해마다 제향을 받들어 오다가 만 10년되던 해 고종 5(1868)년9월 대원군의 훼철령(毁撤令)으로 헐려진 것을 2004년 4월 30일 복설(復設)한 서원으로서 배향위는 효정공(孝貞公) 죽실(竹室) 임홍망(任弘望)(1635~1715), 충정공(忠定公) 강개옹(慷槪翁) 임창(任敞) (1652~1723), 충헌공(忠憲公) 서재(西齋) 임징하(任徵夏) (1687~1730), 문경공(文敬公)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1811~1876) 선생이다.
정퇴서원
배방읍 중리
<홍가신 기념관>
1634년(인조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맹희도(孟希道)·홍가신(洪可臣)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같은 해 충효당(忠孝堂)이라는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이순신(李舜臣)·강봉수(姜鳳壽)를 모셨다.
1692년에 조상우(趙相禹)·강백년(姜栢年)·윤현(尹俔), 1705년에 조이후(趙爾後)를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천안시 (1)
검계서원
풍세면 금호1길
열읍원우사적, 서원가고, 문헌비고, 동국원우록, 조두록 등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영성지와 충청도읍지에는 실려 있다.
영성지에 검계서원(향현사)의 위치로 젹혀있는 검벌 리가 충청도읍지에는 검계리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현재의 위치인 삼태리를 가리킨다.
전신의 후손 문중에서는 이곳에 영조 병술년인 1766년(영조 42)에 진사 채홍신과 진사 전시덕이 주동이 되어 검계서원을 건립하고 비로소 의절을 갖추었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