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무엘상3장1~9절
제목 :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
1. 사무엘을 부르실 때 당시의 상황(1~3절)
1)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음(1절)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아이 사무엘의 '아이'는 넓은 의미로는 유아(infancy)의 나이로부터 청년기(adolescence)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나,
대체적으로는 '소년(boy)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이때의 사무엘의 나이를 12세로 보았습니다(Antiquities, V.10, p4).
한편 히브리 사회에서는 12세부터를 성전으로 올라 갈수 있었습니다.(눅 2:42).하나님께서는 그 통념을 인정하셔서 그때 사무엘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당신의 일을 시작토록 하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
'엘리 앞에서'는 '엘리의 감독을 받들면서'란 뜻입니다.
그리고 '섬긴다'(솨라트)란 말은 구약 성경에서 성전 봉사 활동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출 28:35, 43 ; 29:;30 ; 민 16:9 ; 신 10:8 ; 대상 15:2 ; 대하 8:14).
따라서 이 말은 결국 사무엘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희생 제사의 직무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여호와의 말씀 -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던 신적계시 (神的 啓示, divine revelation)을 일컫는 일반적 명칭입니다.
(사 38:4 ; 렘 1:2, 4 ; 6:10).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 이 표현은 그 시대의 타락하고 부패한 영적 상황을 암시해 주는 말입니다.
즉 계시의 희귀는 성경 전반의 가르침에서 볼 때,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종이었습니다(암 8:12).
*암8:12절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한편 여기서 '보이지'(니프라츠)란 말은
'크게(널리) 퍼지다'(파라츠)란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곳곳에 충만히 퍼지다'의 뜻입니다(Driver, 잠 3:10).
*잠3:9~10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따라서 '보이지 않았더라, 는 말의 의미는
(1)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지 않았고(시 74:9),
(2)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에 지극히 무관심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마 7:6).
이상 - (하존). 또는 '환상'(사 29:7)으로도 번역되는 이 말은 정상적인 시각(視覺)이 아닌 꿈과 황홀경 등의 특수한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전달되는 묵시(黙示, revelation)를 가리킵니다(Lower).
그러나 이것은 아예 오감(五感)이 완전히 마비되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자아의식은 분명한 가운데,
다만 초자연적으로 임하는 신적 계시의 전달 방법 중 하나입니다.
2) 엘리 제사장의 영적 무감각해짐(2절)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 이와 같은 사실은 나이 100세를 바라보는 엘리의 고령(4:15)을 감안할 때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절의 표현은 단순히 엘리의 육체적 노쇠뿐만 아니라,
그와 비례하여 점점 약해져가는 엘리 제사장의 영적 무감각을 암시해줍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또한 엘리 제사장이 왜 4-9절의 내용과 같은 행동을 하
게 됐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가 자기처소에 누웠고 - 대제사장 엘리의 '처소'는 분명치는 않으나
사무엘이 잠자던 곳과는 다소 떨어진 곳 곧, 성막의 입구 쪽 별관 정도였을 것입니다(Klein).
당시 성막은 실로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의 원활한 수행을 위한 제반 부대(附帶) 시설들 - 예를 들면 당직 제사장들의 처소,
사무엘처럼 성소에 헌신한 자들 및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처등 - 이 성막 주변에 세워지고 준비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3) 때는 아직 새벽이 이르기 전임(3절)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하나님의 등불 - 이것은 매일 저녁마다 성소(the Holy Place)의 안을 밝히기 위하여 켜지는 일곱 가지로 된 등잔의 등불입니다(출 27:21).
이 등불은 저녁에 점등되어 등의 기름이 완전히 떨어지는 새벽까지 계속 켜져 있었습니다(출 30:8 ; 레 24:2). 출 27:20, 21 주석 참조.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 그러므로 이 말은 때가 아직 완연한 새벽이 되지 않았음을 암시해주는 말입니다(Keil).
사무엘은...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 이 말은 사무엘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봉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성막(taberna-cle)안에 머물고 있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한편 여기서는 '여호와의 전'(헤칼 예호와)은 단순히 건물로서의 성막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시 11:4).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맛소라(Masoretic Text)는 1:9에 이어 여기서도 성막을 '궁전' 또는 '궁궐'이란 뜻의 '헤칼'로 취한 듯합니다.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 이것은 사무엘이 지성소(支聖所, the Holies)안에서 잠을 잤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언약궤가 지성소 안에 안치된 것은 사실이지만(출 26:33),
그 언약궤는 넓게 생각하면 또한 '전'(殿, 헤칼)안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차례씩 들어갈 수 있는
여호와의 전 뜰 주변에 제사장, 레위인, 헌신자들을 위해 지어놓은 거처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Keli, Fay).
한편 여기서 저자가 본절에 '하나님의 궤' 라는 말은 본 절에 특별히 삽입하여 기록함으로써, 그 다음 절에서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심(4~8절)
“[4]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5]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6]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7]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8]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4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고 하였습니다.
사사 시대 말기의 타락상으로 인해 여화와의 말씀이 휘귀하던 때에,
마침내 여호와의 계시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본절은 나실인으로서 레위 지파의 헌신자에 불과했던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소명 받는 순간이요'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는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총과 은혜의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5절에 사무엘은 밤중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엘리가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부르는 줄로 착각하고, 즉시 일어나 엘리에게로 달려 갔습니다.
한편 이는 당시 사무엘이 대제사장 엘리의 인정을 받고,
그의 개인 시종의 역할도 감당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그러나 엘리는 “부리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엘리는 사무엘이 깊은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헛 것을 들은 줄로 생각해버린 듯합니다.
엘리의 눈이 어두워서 거의 보지 못했다는 2절의 언급으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6절에서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내 아들아 - (베니). 본래 이 말은 나이나 신분상의 차이가 현격할 때,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다정하게 부르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의미에 덧붙여 난처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의 난감한 심정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호칭이기도 합니다.
7절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 본절은 사무엘이 세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이 있었음에도, 하나님께 제대로 응답치 못했던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줍니다.
즉 그 이유는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알지 못했다'란 말의 의미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와 전인격적인 개인적 교제가 아직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알다'(야다)란 말은 단순한 지식적 깨달음 뿐만 아니라,
남녀가 동침하듯(창 4:1)체험적으로 아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 '알지 못하고'는 사무엘이 율법을 배움으로써 여호와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으나,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은 아직 없었음을 말해 줍니다.
따라서 그처럼 사무엘이 그때까지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경험하지 못한 탓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식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실 때 엘 리가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다시 부르실 때에 대답할 말씀을 가르쳐 줍니다.
3. 여호와께 대답할 말을 가르쳐 주심(9절)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엘리가...깨닫고 - 당시 엘리 제사장은 영육이 노쇠했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계시도 희귀(稀貴)한 상황 탓으로 처음 두 번은 사무엘의 행동을 단순히 착각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세번째 사무엘의 행동을 보고,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그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사무엘을 세번씩이나 부르신 이가 여호와인 줄 늦게나마 깨달은 엘리 제사장은 이제 동일한 부르심이 있을 때 해야 할 일을 사무엘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 이것은 말씀하시는 분께 대한 존경과 겸손,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태도입니다(Klein).
1) 하나님이 은총 안에 머물게 하옵소서.
2) 음성을 듣고 깨닫게 하오소서.
3) 하나님의 영이 충만케 하시고, 영의 눈이, 영의 귀가 열리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