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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두영 작성일 2015-10-19 (월) 15:00
웨지우드:나는 사람도 형제도 아닙니까?
창업자 조시아 웨지우드(1730~95)
유럽 도자기의 기원
독일 작센의 영주에서 폴란드의 왕이 된 아우구스투스 2세는 군비를 갖추기 위해 최고의 연금술사로 알려진 요한 뵈트거(Johann Bottger)를 붙잡아 놓고 중국의 백자(白瓷)와 똑같은 자기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흰 바탕에 파란 무늬를 그린 청화백자(靑華白瓷)는 당시 유럽의 왕실마다 앞 다투어 사들일 만큼 비싼 가격에 거래됐기 때문이다. 온 유럽의 연금술사들이 백자 개발에 매달린 가운데, 뵈트거는 1708년 가마에서 하얀 접시를 구워내고 이듬해 유약까지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왕은 1710년 왕립 자기공방을 설치하고 백자를 생산하도록 했다. 유럽에서 처음 자기를 구워낸 마이센(Meißner) 공방의 기원이다. 마이센에서 만들어진 백자는 ‘하얀 금’(Weiße Gold. White Gold)이라 불릴 만큼 비싼 가격에 거래됐다.
중국이 독점하던 자기(瓷器) 기술이 마이센으로 넘어 가는데 500년 가까이 걸렸지만, 마이센의 자기 기술이 유럽으로 빠져 나가는 데는 5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 2세가 알브레히츠부르크(Albrechtsburg) 성에 도공들을 가두어 놓을 만큼 철저하게 기밀을 보호했지만, 도공 2명이 목숨을 걸고 오스트리아빈에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로 빠져 나가 기술을 퍼뜨렸다. 오스트리아의 로열비엔나(Royal Vienna. 1718)를 시작으로 덴마크의 로열코펜하겐(Royal Copenhagen. 1775), 영국의 로열덜튼(Royal Dulton. 1815), 헝가리의 헤렌드(Herend. 1826) 같은 도자기 공방이 각국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속속 성장했다.
사실, 유럽에서 자기를 가장 먼저 구워낸 곳은 마이센 공방이 아니다. 마르코 폴로가 1295년 청화백자를 베네치아에 소개한 뒤, 이탈리아의 공방들이 거의 300년 동안 매달렸지만 아무도 그 비밀을 풀지 못했다. 이탈리아 메디치(Medici) 가문의 후원을 받은 메디치 공방이 1575년 처음으로 비슷한 자기를 만들어냈다. 이를 효시로 루이 15세의 애첩인 마담 퐁파두르(Pompadour)의 후원으로 프랑스에서 세브르(Sevres. 1759) 공방이 등장했다. 메디치 공방이나 세브르 공방에서 만든 것은 연질자기(軟質瓷器. Soft Porcelain)로, 중국이나 마이센에서 구워낸 경질자기(硬質瓷器. Hard Porcelain)와 다르다. 단단하고 빛이 맑은 경질자기에 비해 연질자기는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1350℃ 이하)에서 구웠기 때문에 경도와 색상이 떨어진다. 연질자기는 청화백자를 흉내 내다가 실패한 ‘짝퉁’인 셈이다.
청화백자는 중국 명나라 때 징더전(景德鎭)에서 구운 것이 가장 유명하다. 징더전의 가오링(高陵)에서 나는 찰흙(점토, China clay)의 품질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이 찰흙을 우리나라에서는 고령토(高嶺土), 영어로는 카올린(Kaolin)이라 부른다. 영국은 찰흙의 품질이 떨어져 제대로 된 백자를 만들지 못하던 가운데, 1748년 토마스 프라이(Thomas Frye)가 흰빛이 강한 백자를 굽는데 성공했다. 런던 동쪽에 있는 그의 가마 부근에 가축시장과 도살장이 있어 찰흙에 뼛가루가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어 조시아 스포드 (Josiah Spode)가 뼛가루를 매우 잘게 갈아 섞은 찰흙으로 아름다운 우윳빛 자기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본차이나(Bone China)다. 뼛가루를 태워 섞었기 때문에 골회자기(骨灰瓷器)라고도 한다.
유약기술로 시장 선도하며 ‘여왕의 도공’으로 불려
대대로 이어오는 평범한 옹기장이의 집안에서 13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조시아 웨지우드(Josiah Wedgwood)는 9세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맏형에게서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배웠다. 12세 때는 천연두를 앓고 나서 오른쪽 무릎이 약해져 물레를 돌릴 수 없게 되자, 도자기의 틀을 잡거나 유약을 바르는 일을 맡았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할까, 천연두가 그의 도자기에 대한 경험과 안목을 일찌감치 높여준 셈이다. 그는 도자기를 구울 때 가마에 소금을 넣어 광택을 내는 소금유(鹽釉. Salt Glaze)를 연구하다가 사업 기회를 찾던 가운데 1754년 운 좋게도 토마스 윌던(Thomas Whieldon)과 함께 동업을 하기도 했다. 윌던은 이탈리안 블루(Italian Blue) 그림을 그대로 베껴내는 전사(轉寫) 기법을 개발한 스포드를 길러낸 영국 도예 기술의 선구자다.
샬롯 왕비에게 바친 Queen’s Ware
웨지우드는 당시 유럽에서 시도하던 수많은 유약에 대해 직접 실험하고 보완하여 새로운 기술을 완성했다. 특히 구리 성분을 넣어 푸른빛을 내는 녹유(綠釉. Green Glaze)와 철 성분을 넣어 누런빛을 내는 황유(黃釉. Yellow Glaze)는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녹유는 푸른빛이 강한 청기와를 만드는데, 황유는 중국 궁궐의 누런 기와를 굽는데 사용한다. 그는 1759년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세우고 녹유로 브로콜리(Broccoli)나 콜리플라워(Cauliflower) 같은 꽃양배추 무늬를 넣거나 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긴 찻주전자, 찻잔, 찻잔받침 같은 찻잔 세트를 생산했다. 당시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은 중국 청화백자에 중국에서 재배한 차(茶)를 달여 마시는 것이 최고의 호사(豪奢)였기 때문이다. 웨지 우드는 유약 기술로 시장을 선도하며 당대 최고 도공의 반열에 올랐다.
수많은 실험을 거친 재스퍼 웨어 시편
단골인 하원의원 윌리엄메리디스(William Meredith)가 국왕 조지 3세의 왕비샬롯(Queen Charlotte)에게 웨지우드의 제품을 추천하자, 고급 그릇에 일가견이 있는 왕비는 1763년 웨지우드에게 왕실에서 사용 할 식기를 주문했다. 덮개와 받침이 있는 접시세트, 찻잔세트, 커피세트, 수저받침, 촛대, 과일바구니… 해서 모두 944점이다. 그 아름다움에 반한 왕비는 ‘여왕의 도공’(Potter to Her majesty)이라는 명예를 하사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Catherine the Great)가 분홍 꽃을 그린 만찬 세트(Husk Service. 1770)와 풍경을 그린 만찬 세트(Green Frog Service. 1773)를 잇달아 의뢰했다. 당시 자기 세트들은 납 성분이 든 소금유로 구워 크림색이 선명하기 때문에 ‘크림웨어’(Cream Ware)라고 불렸다.
1738년 이탈리아 베수비오 산자락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가 화산재에 묻힌 도시 폼페이를 발견했다. 고대의 이집트나 그리스·로마의 문화를 흠모하고 재현하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분출되는 출구를 연 것이다. 웨지우드는 고대 이집트의 궁전을 장식한 붉은 대리석을 닮은 ‘로소 안티코’(Rosso Antico. 고대의 붉은 빛), 고대 이집트의 검은 도자기를 보는 듯한 블랙 바살트(Black Basalt. 검은 현무암. 1768), 고대 그리스·로마의 벽옥 같은 느낌을 주는 재스퍼 웨어(Jasper Ware. 벽옥 자기. 1774)를 잇달아 발표했다.
로소 안티코
이들 도자기는 돌가루 성분이 많은 찰흙으로 빚은 뒤 유약을 아예 바르지 않거나 초벌에서만 살짝 발라 광택이 나지 않기 때문에 돌과 비슷한 질감을 주는 스톤웨어(Stoneware)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귀족들이 사용하던 희귀한 골동품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재스퍼 웨어에서 풍기는 웨지우드 블루(Wedgwood Blue. 청회색), 웨지우드 그린(Wedgwood Green. 녹회색)은 1753년 공식 색상으로 채택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찰스 다윈의 외할아버지인 웨지우드, 고온측정장치 발명
찰흙의 조성을 바꿔보고 유약의 성분을 달리 해보면서 최적의 조건을 찾던 웨지우드는 가마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있어서도 철저하게 과학적인 태도를 취했다. 어떤 온도로 얼마나 오래 불을 때느냐 하는 것이다. 웨지우드는 처음에 불의 세기에 따라 점점 붉어지는 찰흙의 색깔을 기준으로 온도를 파악하다가, 찰흙이 수축되는 정도를 기준으로 온도를 재는 고온측정장치를 발명했다.
고온측정장치 Pyrometer
온도에 따라 찰흙이 수축되는 기본단위를 웨지우드(Wedgwood)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고온측정장치로 블랙 바살트와 재스퍼 웨어를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영국의 산업혁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웨지우드는 1783년 영국 왕립협회 회원으로 선출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는데 그쳤지만 과학에 대해 박식한 경륜을 지닌 덕에 웨지우드는 1775년 발족한 만월회(滿月會. Lunar Society)의 회원이 되어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친분을 나눴다.
블랙 바살트 재스퍼 웨어
진보적인 과학자의 모임이었던 만월회를 묘사한 그림
만월회는 밤늦게 다닐 수 있는 보름달이 뜨는 저녁에 만나는 모임으로, 산업혁명의 불씨를 지핀 매튜 볼턴, 증기기관을 만든 제임스 와트, 산소를 발견한 조셉 프리스틀리, 진화설의 선구자인 에라스무스 다윈, 천왕성을 발견한 윌리엄 허셜 같은 진보적인 과학자들이 활동했다. 웨지우드는 이 모임에서 에라스무스 다윈을 만나 서로의 딸과 아들을 결혼시킨데 이어 손녀와 손자까지 혼인 시키는 친분을 과시했다. 웨지우드는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의 외할아버지이자, 찰스의 아내인 엠마의 친할아버지다. 그는 막대한 자금으로 찰스 다윈을 후원하여 진화론을 탄생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도자기 역사상 최초의 마케터
웨지우드는 도자기를 빚는 바탕흙(素地), 성형(成型), 유약(釉藥), 소성(燒成)을 진행하는 각 단계에서 최고의 기술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생산, 조달, 유통, 마케팅, 디자인 같은 경영의 측면에서도 매우 진보적인 업적을 이뤄냈다. 그는 장인이 모든 과정을 전담하는 방식을 버리고, 분업을 통해 원가를 낮추고 품질을 맞추는 대량생산체제를 도입하여 산업혁명에 앞서 나갔다. 제품이 장식용이냐 실용이냐에 따라 가마, 작업장, 직원을 따로 배치하여 원가와 품질을 관리했다. 직원의 출근과 작업량을 기록하고 공장 운영규정과 직원 교육과정을 두었으며, 현금 유동성에 대비하여 고정비와 변동비를 나눠 분석하는 회계체계를 갖추기도 했다. 지금은 당연하게 보이는 이런 진보적인 경영을 18세기말에 처음 시도한 것이다.
그는 또 영국 중부를 흐르는 트렌트(Trent) 강과 머시(Mersey)강을 잇는 운하 건설을 지원하여 품질 좋은 찰흙을 조달하고 도자기를 유통시키는 기반을 확보했다. 웨지우드는 운하의 중심지인 스토크온트렌트(Stoke-on-Trent)에 증기기관을 설치한 최신 도자기 공장을 짓고 신제품인 블랙 바살트와 재스퍼 웨어를 대량 생산했다. 놀랍게도 웨지우드는 최근 유행하는 현대 마케팅 기법을 창안하거나 먼저 채택하여 판매에서도 앞서 갔다. 20세기에 유행했거나 지금도 널리 쓰이는 상품안내서(카탈로그), DM(Direct Mail), 무료 배송, 환불 보증, 전시 체험, 셀프 서비스, 외판원 제도, BOGO(Buy One Get One) 같은 영업이나 마케팅 활동을 18세기에 벌인 것이다. 웨지우드는 샬롯 왕비에게 식기 세트를 원가 수준으로 납품하면서 ‘퀸즈 웨어’(Queen’s Ware)라는 명칭을 쓸 수 있는 승낙을 받아냈고, 예카테리나 2세에게 만찬 세트를 공급하면서 대중에게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이른바 로열 마케팅(Royal Marketing) 또는 귀족 마케팅(Noblesse Marketing)이다.
예카테리나 2세에게 바친 Frog Service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린 그는 1771년 예쁜 자기 세트에 제품 목록과 주문서를 동봉해서 독일의 왕족과 귀족 1천 명에게 소포로 보냈다. 원하면 그 가격에 구입하고, 원치 않으면 돌려 보내도 좋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자존심 때문에 쉽게 반송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적중한, 사상 최초의 강매(Inertia Selling)다. 브랜드 마케팅에도 선구적인 발자국이 남아있다. 웨지우드는 1760년 가마에서 자기를 굽기 전에 밑바닥에 ‘Wedgwood’를 새기도록 했다. 처음에는 ‘짝퉁’을 방지하기 위한 단순한 목적 이었지만, 고객에게 브랜드를 기억시키는 브랜드 마케팅의 효시로 기록되는 발자취다. 이에 웨지우드는 ‘영국 도공의 아버지’라는 명예를 넘어 ‘18세기의 스티브 잡스’로 칭송받고 있다.
노예무역 폐지 캠페인 적극 참여
노예제도를 비판하는 브로치
왕실의 후원을 업고 귀족과 거래했지만, 진보적이고 청교도적인 성향을 가진 웨지우드는 노예제도를 앞장서서 반대했다. 그는 노예무역을 폐지하자는 캠페인을 지원하기 위해 1787년 도자기로 예쁜 장신구를 대량으로 만들어 무료로 나눠 주었다. 손과 발이 쇠사슬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흑인 노예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장면을 담고 있다. ‘나는 사람도 형제도 아닙니까?’(Am I Not a Man And a Brother?). 재스퍼 웨어에 돋을새김으로 구운 이 카메오(Cameo)는 패션 소품이 되어 브로치, 머리핀, 팔찌, 메달 같은 장신구에 달린데 이어 그 디자인이 차나 담배를 담는 상자나 접시에도 새겨져 노예폐지 운동의 상징으로 확산됐다. 이 카메오는 프랑스와 미국으로도 건너가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노예해방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토기(土器. Earthenware), 도기(陶器. Pottery), 자기(瓷器. Porcelain)는 주로 굽는 온도로 구분한다. 토기는 500~600도, 도기는 1,000~1,300도, 자기는 1,300도 이상의 온도에서 굽는다. 높은 온도에서 구울수록 잘 깨지지 않는데다 색상도 맑고 곱다. 찰흙의 성분이나 품질보다는 굽는 온도에 따라 도기가 되기도 하고 자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증기기관으로 높은 화력을 확보한 영국이 본차이나를 먼저 발명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옹기(甕器)는 유약을 칠했는지, 몇 번 구웠는지에 따라 나뉜다. 질그릇은 진흙을 빚어 그냥 구운 것이고, 오지그릇은 질그릇에 오짓물(잿물)을 입혀 한 번 더 구운 것이다. 질그릇이든 오지그릇이든 모두 흙으로 빚은 것이다. 하느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었다는 것을 웨지우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외침이 더 가슴 깊이 파고드는 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도 형제도 아닙니까?”
글_허두영
(주)테크업 대표이사
서울대에서 재료공학을 배우고 한국방송통신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전자신문과 서울경제신문 기자를 거쳐 과학동아 편집인을 지냈다. CNET Korea, 사이언스타임즈를 창간하고 소프트뱅크미디어 대표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과학수필가로 등단해 <사랑하면 보이는 나무> <신화에서 첨단까지>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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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단골인 하원의원 윌리엄메리디스(William Meredith)가 국왕 조지 3세의 왕비샬롯(Queen Charlotte)에게 웨지우드의 제품을 추천하자, 고급 그릇에 일가견이 있는 왕비는 1763년 웨지우드에게 왕실에서 사용 할 식기를 주문했다. 덮개와 받침이 있는 접시세트, 찻잔세트, 커피세트, 수저받침, 촛대, 과일바구니… 해서 모두 944점이다. 그 아름다움에 반한 왕비는 ‘여왕의 도공’(Potter to Her majesty)이라는 명예를 하사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Catherine the Great)가 분홍 꽃을 그린 만찬 세트(Husk Service. 1770)와 풍경을 그린 만찬 세트(Green Frog Service. 1773)를 잇달아 의뢰했다. 당시 자기 세트들은 납 성분이 든 소금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