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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네코 후미코'는 누구인가
가네코 후미코는 우리에게는 비교적 낯선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이며 조선을 사랑하고 일본 제국에 맞선 아나키스트로서 제법 알려져 있기도 하다.1903년 일본 요코하마 시에서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9살이 될 때까지 무적자였다. 말하자면 천황제 국가의 가족제도의 희생자로서 무적자이자 여성이라는 이중의 억압으로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억압과 고난은 유년시절과 조선의 고모 집에서 보낸 7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시간,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계속된다.
가네코 후미코는 열일곱 살 되던 1920년 봄에 도쿄로 혼자 올라와, 신문팔이, 가루비누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을 하며 공부를 한다. 가네코 후미코가 자신을 발견하고 사회주의사상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고학을 하며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만나면서부터였다. 특히 조선인 '주의자들'(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가 섞여 있었다)과의 만남이 그녀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그녀는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물로서 고통 받는 식민지 조선인과 가족제도의 희생물로서 노예처럼 살아온 자신을 동일하게 파악하고 그 정점이 천황제라고 인식하며, 천황제와 대결하기 시작한다. 또한 그녀는 이때 베르그손, 스펜서, 헤겔 등을 읽고, 특히 슈티르너, 니체 등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봄부터 아나키스트 박열과 동거를 하며 함께 투쟁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박열과 함께 한인 사상 단체의 효시로 평가되는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 창간호와 2호를 1922년 7월과 8월에 발간하고, 이어 박열과 함께 아나키스 단체 흑우회를 결성한다. 11월에는 박열과 함께 『후데이센징』을 창간하고 1923년 6월까지 4호를 발간한다(3호와 4호는 『현사회』로 개제). 그리고 1923년 4월 박열과 함께 대중 단체 불령사를 조직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의 노예적인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국가와 사회의 모순, 기존의 제도와 대결하면서 치열한 투쟁을 계속한 것이다.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9월 3일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검속된다. 1924년 초 예심 심문 과정에서 폭탄 입수 계획이 드러나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대역죄'로 대심원으로 넘겨져 1926년 3월 25일 사형선고를 받는다. 열흘 뒤 '은사'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죽는다. 공식적으로는 '목매달아 죽었다'라고 하나 '타살 의혹'이 있으며 지금까지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해 11월 5일 가네코 후미코의 유해가 박열의 선영(경북 문경)에 안장된다 (2003년 11월 묘를 박열의사기념관 옆으로 이장).
2. "누구라도 눈물 없이는 읽기 힘들" 옥중 수기: 가난과 학대와 고난으로 점철된 가네코 후미코의 삶
이 옥중 수기는 재판에 참고가 될 만한 과거 경력을 써 내라는 예심판사 다테마쓰의 명령에 따라 가네코 후미코가 쓴 그녀의 일대기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재판이 모두 끝난 후 판사로부터 수기를 돌려받고, 이를 동지인 구리하라 가즈오에게 보내, 구리하라가 그녀의 사후 5주년을 맞아 출간함으로써 이 수기는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가네코 후미코의 말대로, 이 수기는 단 한 점의 거짓도 없이 그녀의 모든 생활을, 전 생애를 있는 그대로 고백한 기록으로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선물이며 유품이다. 공부를 매우 잘했고 머리가 좋았던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수기 전체에 걸쳐서 비상한 기억력과 문재 넘치는 묘사력으로 20세기 초반의 일본과 조선의 다양한 풍경과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
이 수기를 편집한 구리하라는 서문에서 "아마 누구라도 눈물 없이는 읽기 힘들 이 수기를 전국의 뜻있는 독자들에게 보내고 싶다."라고 말한다. 가네코 후미코가 얼마나 힘들게 세상을 살았기에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고 할까.
일본에서의 유년시절
가네코 후미코는 아주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으나 부모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예닐곱 살 무렵부터 가난, 고통, 천대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아버지가 엄마를 호적에 올리지 않아 무적자(조선의 고모 집으로 오기 위해 외할아버지의 5녀로 입적하면서 무적자를 면한다)였던 가네코 후미코는 정식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학교에 가서도 연필과 노트를 마련하지 못해 학교를 23일이나 쉬고, 선생님이 출석 확인 때 자신의 이름만 부르지 않고, 절도범으로 몰리는 등 갖은 괄시와 천대를 받는다. 또한 아버지가 이모와 몰래 정을 통해 집을 떠나간 후에는 가난한 생활이 극에 달해 엄마는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대장장이, 항구의 하역꾼(고바야시) 등과 동거를 하고, 급기야는 가네코 후첹코를 창기로 팔려고 한다. 그후 엄마는 집세를 못내 야반도주를 하고, 결국은 먹고살 수가 없어 동거하던 고바야시의 고향 산골까지 밀려가서 갖은 고생을 한다. 거기서 반년 정도 산 가네코 후미코는 엄마와 함께 외갓집으로 돌아오지만, 엄마가 곧 재혼을 하여 엄마와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의 고모 집으로 가서 살게 된다.
조선에서의 청소년 시절: 식모 생활
가네코 후미코는 1912년 가을, 고모 집의 양녀가 될 것이라고 믿고 조선에 왔으나 오래지 않아 양녀에서 밀려나고 열두세 살 때부터는 사실상 식모로 전락하여 친할머니와 고모의 온갖 구박을 다 받으며 학교를 다니게 된다. 습자지나 그림물감 등 학교 준비물을 제대로 안 챙겨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부엌일을 하다가 솥을 깨뜨렸다고 솥 값을 변상하게 하고, 정월 초에 떡국을 먹다가 할머니의 젓가락이 부러졌다고 집 밖으로 쫓아내고, 못사는 집 애와 학교 등하교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말 안 듣고 함께 다녔다고 매타작을 한 후 헛간에 이틀이나 가두고, 그 일로 두 달이나 학교를 못 가게 한다. 또한 가네코 후미코는 한여름에 집에 다니러 온 할머니 친척의 애를 업고 그 친척 수행하는 것을 거절했다고 할머니에게 짓밟혀 집 밖으로 쫓겨나 이틀이나 먹지 못하고, 그 길로 자살을 결심하여 철길로, 강으로 내달렸으나 결국 자살을 포기한다. 학교에서는 운동이나 놀이를, 가정에서는 모든 자유를 빼앗긴 가네코 후미코는 급기야는 책을 읽고, 잡지와 신문을 보는 것마저 금지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열네 살에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가네코 후미코는 그로부터 일본으로 돌아올 때까지 2년 동안 하루 종일 할머니의 심술궂은 감시를 받으며 완전히 고모 집의 식모로 일한다.
도쿄에서의 고학 시절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으로 돌아와 외갓집과 아버지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와 여러 차례 충돌한 후 1920년 봄에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하고 창조하기 위하여 가족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당시에 '청춘의 꿈, 젊은이의 지상낙원'이라고 여겨지던 도쿄로 혼자 올라온다. 처음에 잠시 작은외할아버지 집에 있다가 독립하여 도쿄 우에노에 있는 신문 보급소에서 기숙하면서 신문을 팔고, 동시에 세이소쿠영어학교와 겐수학관을 다닌다. 그러나 신문팔이 고학은 너무 고된 노동이어서 공부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쫓겨나다시피 신문 보급소를 그만두고 친구의 소개로 도쿄 유시마의 신하나 초에 셋방을 얻어 살면서 가루비누 노점상과 행상을 한다. 그러나 가루비누 행상으로는 밥도 얻어먹기 힘들었다. 그래서 구세군 소대장의 소개로 사탕가게 집에서 연말까지 식모살이를 하고 식모살이를 하는 동안은 학교를 그만둔다. 그다음 해 초에 '주의자' 사이에서 2개월 정도 더부살이를 하다가 다시 작은외할아버지 집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닌다. 그해 11월 작은외할아버지 집을 나와 고치마치의 유라쿠 초에 있는 이와사키오뎅집(일명 '사회주의 오뎅')에서 일한다. 여기서 낮에는 손님을 접대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닌다. (이 수기는 가네코 후미코가 이곳에서 기숙하면서 박열을 만나 교제하고 박열과 동거하기 직전으로 끝난다.)
3. 고통과 억압의 처절한 삶을 넘어선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는 이렇게 고통 받고 억압받으며 처절한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삶에 지지 않고, 자신의 삶의 노예가 되지 않고 이를 극복해갔다. 자신을 학대한 과거,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힌 운명에 감사하며 고통마저도 은혜로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억압에 저항하고 투쟁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역사적인 삶으로 만들어갔던 것이다.가네코 후미코는 도쿄로 와서 사회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고 각종 문헌을 읽으면서 사회주의사상을 체화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머슴, 개, 조선인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회주의사상에 공명한 그녀는 자신과 같은 불쌍한 계급을 위해 전 생명을 바쳐 싸우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라는 말을 좀 더 이해하게 되며, 당시 일본 사회의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해도 공부할 수 없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알고, 부유한 자가 더욱더 부유해지고 권력 있는 자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이유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사회주의사상을 결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회주의가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사회의 변혁을 구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로 민중의 복지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혁명이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것이며, 민중은 결국 권력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는 통찰을 보여준다. 민중 혁명이 일어나고 사회가 변혁되면 "지떵자는 권력을 장악할 것이다. 그 권력으로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세울 것이다." 그때 민중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민중은 다시 그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하나의 권력을 대신하여 다른 권력을 가져오는 일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가네코 후미코가 혁명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민중이 혁명의 주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통찰은 그후 20세기에 일어난 여러 혁명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며, 특히 '권력'과 '지배'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로서의 분명한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19세기의 유명한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인 막스 슈티르너를 사숙(私淑)한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적으로 훌륭하게 되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회적 평판에 좌우되지 않는 자신의 일, 자신의 길을 찾으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로서의 면모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남들이 훌륭하다고 하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나는 남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는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 …… 나는 나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사상의 진정성과 영혼의 자유로움
무엇보다도 우리는 수기 전반을 통하여 가네코 후미코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과 정면으로 대결했으며, 세상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거침없이 '자유연애'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녀가 선구적인 사상과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박열과의 만남과 사랑에서 그 절정에 달하는 것을 본다.
박열의 시 를 읽고 강한 감동을 받은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이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것을 박열의 시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친구의 하숙에서 우연히 박열을 마주친 후에는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이 박열의 안에 있고, 박열이야말로 그녀가 찾고 있던 사람이며, 박열이야말로 그녀가 할 일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믿음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 그녀는 박열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더 나아가 기존의 관습을 깨뜨리고, 즉 조선인과 결혼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던 당시의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박열과 결혼함으로써 그녀의 사상의 진정성과 영혼의 자유로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을 고통받지 않게 할 것이라고 맹세하며 "죽을 거면 함께 죽읍시다. 우리 함께 살고 함께 죽어요." 하고 수기를 끝맺는다.
- 이학사는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수기가 일본에서 출간된 지 80년 만에 처음으로 초판본을 그대로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합니다(한국어로 처음 출간됩니다).
출생과 성장
1903. 1.25 요코하마시에서 출생. 부 사에키 분이지(佐伯文一), 모 가네코 기쿠노(金子きくの)
1910. 가을, 어머니와 함께 야마나시현 기타쓰루군 단바야마촌 고소데(山梨? 北都留郡 丹波山村 小袖)로 이주, 고바야시(小林)의 친척 고바야시 미키의 집 헛간에서 살다.
1911. 봄 야마나시현 히가시야마나시군 스와촌 소마구치(山梨? 東山梨郡 諏訪村 ?口)에 있는 어머니의 친정 집으로 오다.
조선생활 체험
1912.10.14 외할아버지의 5녀로 입적(入籍)하고 아버지 누이 가메가 시집간 이와시타가(岩下家)에 맡겨져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로 가서 살게 되다.
12.11 부강공립심상소학교 4학년에 입학.
1917. 3.24 부강공립고등소학교 졸업.
1919. 3. 1 3.1운동 일어나다. 조선인들의 만세운동에 감동을 받다.
야마나시 외가로 돌아오다
1919. 4.12 부강을 떠나 야마나시에 있는 외가로 가다.
1920. 4. 동경으로 상경, 정칙영어학교에 다님. 신문배달, 가루비누장사, 가정부, 인쇄소공원,
1921. 여름 원종린,정우영, 김약수, 정태성과 교류하다.
11. 고지마치구 유라쿠쵸에 있는 이와사키오뎅집에서 일하다.
박열과 만나다.
1922. 1~2 세이소쿠영어학교에서 니야마 하쓰요와 알게 되다.
2~3 박열과 만나다
4~5 박열과 도쿄부 에바라군 세타가야쵸 데이지리에서 신발가게를 운영하는 아이카 와 신사쿠의 집에 셋방을 얻어 동거에 들어가다.
7.10 박열과 흑도회 기관지 <흑도> 창간.
8.10 <흑도> 제 2호 간행.
박열, 가네코 후미코, <太い鮮人> 창간.
12월 말 <太い鮮人> 제2호 간행.
1923. 3.15 박열과 <현사회>(<太い鮮人> 개제) 제3호 간행.
3. 박열과 도쿄부 도요타마군 요요하타쵸 요요기 도미카야의 셋집으로 이사.
4. 박열과 불령사 설립.
6.30 <현사회> 제4호 간행.
8.11 불령사 제6차 정례회의, 박열의 집에서 개최.
관동대진재와 구금
9. 1 관동대진재 발생하다.
9. 3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보호검속’되다.
9. 4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경찰범처별령’에 따라 구류가 연장되다.
10.20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 불령사 동인 16명을 치안 경찰법위반 혐의로 기소.
1924. 1.25 가네코 후미코, 황족과 정치실권자에게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자신과 박열이 논의한 후, 김중한에게 상하이에서 폭탄을 입수해 달라는 의뢰를 한 적이 있다고 예심신문에서 증언.
2.15 박열, 가네코 후미코, 김중한, 폭발물단속벌칙위반 혐의로 추가 기소
1925. 5. 4 다테마쓰 예심판사 전향을 요구, 후미코 전향을 거부.
여름 가네코 후미코, 자서전 집필 시작. 7.17 검사국장, 형법 제73조 및 폭발물단속벌칙 위반 혐의로 기소.
12.4 <조선일보> 특파원, 이치가야형무소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면회.
1926. 2.15 <도쿄아사히신문>, 가네코 후미코가 자서전을 1,000매 이상 썼다고 보도.
2.26 대심원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제1회 공판.
3.23 도쿄시 우시고메구청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결혼신고서 제출.
3.25 대심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사형 판결.
4. 5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은사’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
4. 8 가네코 후미코,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우쓰노미야형무소 도치기지소로 옮기다.
옥중사망
7.23 우쓰노미야형무소 도치기지소에서 목매달아 죽다.
7.31 후세 다쓰시 등, 도치기현 시모쓰가군 이에나가촌 갓센바에 있는 형무소 공동묘지에서 후미코의 유해 발굴.
가네코 후미코의 유골, 도쿄 조시가야에 있는 후세 다쓰시의 집에 도착.
8. 1 동지들이 경관의 감시를 피해 가네코 후미코의 유골을 후세 다쓰시의 집에서 가지고 나가는 사건이 일어나다.
8.14 박열의 형 박정식, 장남 박형래를 데리고 후미코의 유골을 가져가기 위해 경상북도 상주를 출발, 8월 16일 도쿄에 도착.
8. 가네코 후미코의 유골을 이케부쿠로경찰서에서 상주경찰서로 보내기로 결정
11. 5 후미코의 유골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팔령리에 안장.
1931. 7.10 슌쥬샤에서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간행.
1946. 3.25 박열후원회 일본총본부 주최로 ‘박열선생 부인 고 가네코 후미코 여사 추도 1973. 7.23 문경 팔령 가네코 후미코 묘소에서 묘비제막식 거행.
1976. 3.20 야마나시현에 있는 가네코家에서 ‘금자문자비(金子文子碑)’ 제막식 거행.
조선인과 항일투쟁 일본인 가네코 국가주의 저항…박열과 ‘거사’ 가네코 후 미코는 한국인들에게 무척 낯선 일본인 여자다. 23살의 짧은 생이었지만, ‘비극적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요코하마에서 혼인신고도 하지않은 부모관계 속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등 불우하게 자랐다. 호적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소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다. 9살 때 조선에 사는 친척의 양녀가 됐지만 오히려 학대만 받았다. 그러나 그는 때 마침 일어난 3·1운동을 조선에서 목격했다. 그의 내부에서 자라던 강자에 대한 반감이 체계적 사상으로 다져진 결정적 계기였다.
그는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감격했다”고 그 때를 회고했다. 도쿄로 돌아온 가네코는 독립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조선인 박열을 만난다. 이때부터 ‘비국민’이자 가족제도의 희생자였던 그의 삶은 확실히 바뀌었다. 혼자 공부하며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을 접했다. 이를 통해 “충군애국과 여자의 순종을 강요하는 권력의 대표자가 천황”이라는 믿음을 굳혔다.
이후 박열과 함께 천황암살 계획을 꾸몄지만 사전에 발각돼 체포됐다. 그녀는 법정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한국인과의 공동투쟁을 당당하게 주장할 정도로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다. 사형판결을 받은 뒤 천황이 내 린 사면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그는 사면서류를 찢어버렸다. 이후 감옥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임신 중인 몸이었다.
생애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숨진 일본여인의 묘가 한국에 있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의 한자락에 자리잡은 묘의 주인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박열(朴烈.1902~1974) 의사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가네코씨는 문경 출신인 박열 의사의 도쿄 유학시절인 1922년에 만나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아나키스트의 길을 걷게 된다. 여기엔 경찰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가난에 찌든 어린시절, 신문을 팔거나 식당에서 일을 하며 힘든 생활을 했던 이력도 작용했다. 박 의사와 동거하던 중 1923년 9월 1일 간토(關東) 대지진 때 가네코씨는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대역죄로 박 의사와 함께 검거돼 1926년 3월25일 둘 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일본 당국은 가네코씨가 그 해 7월 일본 우쓰노미야 형무소 여죄수 독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수감생활 중 박열과 가네코가 옥중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옥중에서 임신까지 하게 돼 당국이 이 같은 사실이 외부로 알려질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낙태수술을 하다가 숨졌다는 설도 있어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당시 여러 의혹이 제기됐다. 이후 박 의사의 형인 정식씨가 일본으로 건너가 가네코씨의 시신을 수습해 집안 선영인 문경읍 팔령리에 안장했다. 박 의사 집안에서도 가네코씨의 존재를 인정한 셈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죽은 일본인이 한국에 묻히게 된 배경에는 조선의 남자를 사랑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했던 이력이 있었던 것이다.
박열의사기념 사업회에서는 2003년 11월 마성면 박열 의사의 생가 뒤편으로 가네코씨의 묘를 팔령리 깊은 산속으로부터 이장하여 그 억울한 원혼을 다소나마 생가지에서 달랠 수 있도록 하였다.
가네코의 정치적 동지인 박열 의사는 문경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입학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 해에 도쿄(東京)로 건너가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아나키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친일파에 대한 테러활동도 전개 했고, 한국전쟁 때 납북돼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장을 지낸 뒤 1974년 1월17일 사망했다.
일본 릿교(立敎)대 교수를 지낸 야마다 쇼지는 2003년 국내에서 발간된 '가네코 후미코 :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제국의 아나키스트' (산처럼刊)에서 죽음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가네코씨의 일생을 그렸다. 야마다는 불행했던 삶 속에서 가네코씨가 식민지 조선인의 고통을 자기 처지처럼 이해하게 됐으며, '대일본제국 국민'이었음에도 여기에 편입되지 못한 자기 삶을 한탄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런 가네코씨의 짧지만 극적인 삶은 1972년 일본에서 일대기를 그린 '여백의 봄'이 출간된 뒤 일본에서 연구 모임까지 결성될 정도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한편 金子文子의 법정 태도 역시 혁명가의 아내로서, 아나키스트 사회운동가로서의 진지하면서도 헌신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945년 12월7일 도쿄에서 있었던 ‘朴烈 출옥축하대회’에 참석한 후세 선생은 이날을 보지 못하고 먼저 간 金子 여사야말로 “국경을 초월해 동지애를 훌륭하게 실천한 일본 여성의 모범”이었다고 극찬했다. 또한 사형언도 직후 소위 감 1등 무기징역의 은사장을 형무소장이 내밀었을 때 그것을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그녀가 남긴 유언 아닌 유언이 우리 가슴에 감동적으로 와닿는다. “천황의 이름으로 기왕에 사형을 언도했으면 그만이지 다시 은사니 어쩌니 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농락하다니 말이 되는가! 박열에게 바친 아내로서의 文子, 조선에 바친 조선민족으로서 선택한 길인데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간 무기징역의 일본감옥 속에서 더 살아보았자 그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차라리 죽어서 그 뜻을 부군 박열에게 바치고 조선땅에 내 뼈를 묻음으로써 모든 것을 조선을 위해 바친다면 그 뜻을 언젠가 누구라도 알아주게 될 것이 아닌가?” 金子 여사는 왜 황태자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느냐는 심문에 대해서는 “나는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떠받들고 있는 천황 또는 황태자가 실은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로봇에 불과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분명히 밝히고 싶었으며 또한 천황과 황태자는 소수 특권계급이 그 사복(私腹)을 채울 재원으로서 일반민중을 기만하기 위하여 조종하는 인형이자 괴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 했다” 고 답했다. 또한 천황제를 어떻게 보느냐는 심문에 대해서도 “나는 천황이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인간이지 결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폭탄을 던져 천황도 우리와 똑같이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라고 거침없이 토로한 바 있다.
1924년 5월14일, 제10회 예심조서에서 金子 여사는 ‘김상옥(金相玉)사건’으로 이미 형이 확정되어 복역 중인 김한(金翰)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소상히 밝혔다.
문: 허무주의자인 피고 등이 어떻게 의열단의 김한 등과 제휴하게 되었는가??
답: 의열단(義烈團)은 조선독립을 위해 조직된 비밀단체이며 김한은 공산주의자이지만 그들은 그 수단으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시인’하고 있으므로 김한이 의열단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허무주의자이지만 의열단이 일본권력에 반해서 폭탄을 사용하려는 데 서로 공감한 바 있으므로 상호보완적으로 제휴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의열단이 사용한 폭탄은 살인용 건물파괴용 등 몇 가지가 있지만 우리는 주로 살인용을 의열단으로 부터 분양받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진술함으로써 상해의열단과의 연대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후세 선생은 1946년 전후(戰後)에 출간한 ‘운명의 승리자 朴烈’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청년 박열이 도일한 직후부터 부당 단발사건, 잡지 ‘不逞鮮人’ 발행, 흑우회 운동 등에도 직간접으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역사건’ 변호 이후 20여 년간 동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대역사건 취급방식에 대하여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재판의 준비와 교섭 또는 사후처리에 있어 모든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등 동지의 우의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또 후세 선생은 박열과 金子 여사의 옥중결혼 수속을 밟아준 데 이어, 1926년 7월23일에 金子 여사가 자살하자 흑우회 동지들과 함께 그 유골을 화장하여 잠시나마 자기 집에 안치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 감시망을 피해 박열의 고향 경북 문경에 안장되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무기징역 감형 후 법정에서.. 당시 2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