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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김대통령 집무실에 대한 도청여부를 논하는가
당신의 안방이 누군가에 의해 도청당하고 있다면 당신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안방은 청와대다. 김대중 대통령의 집무실은 과연 도청으로부터 안전한가.
『뉴욕타임스』는 지난 1977년에 미국의 청와대 도청을 보도하면서 도청의 중요한 이유를 "남북한간에 어떤 비밀흥정을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 이라고 밝혔다. 주한미군 정보에 밝은 한 예비역 대장은 "6공 때 노태우-김일성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은밀한 작업이 미군 첩보부대에 의해 '적발' 돼 미국의 강력한 압력을 받고 무산됐다" 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은 2차대전 때부터 중요통신을 도청하는데 탁월했다. 1993년 8월 15일 비밀해제된 미국정부의 문서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법의 가로채기'(Magic Intercept) 라고 불리는 8백 쪽 분량의 이 문서는 당시 미국첩보원들이 적국과 우방국을 가리지 않고 중요 전신을 가로챘음을 보여준다. 이 문서엔 일본군부가 히로시마 원폭투하 전부터 항복을 고려하고 있었고 미국도 이를 알고 있었으면서 투하했다는 충격적인 사실까지 포함돼 있다.
주한미국 정보기관 중 한반도 전자감청(도청) 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주한미군 501-MI여단의 정체를 밝혀보자.
1951년부터 활약, 한때 1천6백여 명
주한미군 501여단의 정식명칭은 501st Military Inteligence Group(501 군사정보단)이다. 통칭 MI 라고도 부른다.
501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100일 만인 1950년 10월 13일 본부와 본부중대가 구성되면서 탄생됐다. 이 때의 정식명칭은 501통신정찰단(501st Communication Reconnaissance Group). 일주일 후인 50년 10월 20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캠프 피케트에서 처음 가동될 때 501은 ASA에 배속되었다. 군사안보국 ASA(Army Security Agency)는 국가안보국인 NSA(National Security Agency)의 예하로 NSA의 영역 가운데 군관련 정보를 담당해왔다.
한국에 파견되기 위해 캠프 피케트에서 7개월간 훈련한 501은 1951년 5월 29일 캘리포니아의 캠프 스톤맨으로 이동했고, 한국전쟁 발발 1주년인 1951년 6월 25일 드디어 부산항에 도착했다.
501 이 서울 가회동의 임시본부에 도착한 것은 1951년 7월 13일이었다. 임시본부는 벽돌로 만들어진 2층 가정집을 사용했는데 곧 지금의 정독도서관인 화동의 경기중학교 건물로 옮겼다. 전쟁이 끝나자 501은 한국에 먼저 나와 있던 모든 ASA 부대들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명실상부한 주한미군 정보기관의 대표가 되었다. 501은 한국전쟁중에 주한미군의 각 전술부대에 효과적인 정보를 제공하면서 그 조직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501은 몇 차례의 변신을 거쳐 오늘의 MI가 된다. 1956년에 501st ASA Group으로 됐다가 1978년 1월 1일을 기해 501st MI Group이 된 것이다. 501-MI의 주력은 캠프 코이너(Camp Coiner) 에 있다. 본부는 80년대 말까지 남영동 용산고등학교 옆에 있었으나 현재는 용산미군기지 바로 옆 보광동에 있다.
501의 규모가 현재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4개 대대라는 보도도 있으나 확인할 수는 없다. 주한미군 관련자료에 의하면 1953년 전쟁 직후 501은 3개의 대대와 5개 중대로 구성돼 있었는데 장교와 사병을 합쳐 1천6백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그 규모에 있어 전쟁 직후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501여단의 주력 대대의 하나인 751대대는 평택에 있다. 이 대대는 초대사령관의 이름을 따 주클러대대라고도 불린다.
501은 주한미국 정보기관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려면 미국 정보기관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미국 정보기관의 두 축은 CIA 와 NSA 이다. CIA 가 미국의 여러 정보기관을 통합·조정하는 것인 반면, NSA 는 보다 특수한 영역인 약호·통신·전자 정보의 수집 및 해독을 주임무로 한다. 두 기관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501은 전술정보뿐 아니라 전략정보까지 취급한다는 면에서 볼 때 그 출발이 NSA 의 하부기관이었고, 그것을 중요업무로 하지만 CIA 의 영역까지 포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고 한국현대사에서 군이 줄곧 제 1의 파워집단이었다는 한반도의 현실이 501의 영역을 자연스럽게 확장시켰을 것이다.
501의 부서구성은 NSA 의 구성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NSA 는 10개의 중요부서로 구성돼 있다. NSA 서열 1위이고 최대의 단일부서인 암호첩보작전부는 도청과 암호해독을 전담한다. 이 밖에 전신컴퓨터부, 통신보안부, 연구기술부, 시설병참부, 계획정책부, 계획재정부, 종합고문부, 암호학교 등이 있다.
NSA 를 총체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노작은 제임스 벰포드가 쓴 『수수께끼의 궁전』(1993) 이다. 벰포드가 "자본주의 세계 최초의 단일 스파이 도청기관" 이라고 표현한 NSA 는 1952년 11월 4일 정식으로 탄생됐다. 1959년에 만들어진 NSA 법은 'NSA의 기능, 활동, 인원, 직원 이름, 직함, 봉금은 밝힐 필요가 없다' 고 돼 있다.
NSA 는 세계 도처 4,120개소에 24시간 체제의 전파 방수(傍受) 기지를 설치해두었다. 마이크로파와 위성이라는 두 개의 혁명이 NSA 의 능력을 극대화시켰다. 5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직원 중에는 세계 50여 개의 외국어를 청취·번역하기 위한 미국 최고의 외국어 전문가 집단도 포함돼 있다.
통신감청(도청)이 주임무인 '주한미군 CIA'
한국 속의 NSA 라 할 수 있는 501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그간의 보도는 이런 정도가 전부이다.
"(주한미군 정보기관 가운데) 501은 주로 대북관계의 전투·전략정보 수집에 종사하고 있다. 한국에서 활동한 역사가 가장 오래고 한때는 한국군부와 정치에 관련된 활동도 했었다."(『월간조선』, 1988. 8)
한국군부와 정치에 관련된 활동은 과연 '한때' 만 하고 손을 뗐는가. 501은 통신감청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외에서 발행되는 한반도 관련 일간지·잡지·서적을 분석하는 일과 '적색분자', 귀순자에 대한 심문 등 '정보' 의 모든 영역을 담당한다.
그래서 501을 주한미군 CIA 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CIA요원이 외국에서 활동할 때 미군이나 미대사관·미상공회의소 직원 등으로 위장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501은 주한 CIA의 안전한 활동공간으로 이용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일 수 있다. 한 주한미군 정보관계자는 501이 CIA의 통제를 받으며 정기적으로 CIA 자료를 건네주고 있다고 했다.
501요원들 중에는 일정기간 근무 후 주한미대사관의 정보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들도 있다. 물귀신이란 별명을 가졌던 한 미군 하사관도 그런 경로를 거쳤다.
501이 현존하는 주한미군 정보기관의 대표격이라 할 때 그의 활약상을 짐작케 하는 전례를 미군정시 주한미군 정보기관이었던 G-2 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방선주 교수(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는 G-2가 정보원(情報源) 과 접촉하여 정보를 생산하는 방식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암호해독과 통신검열 각종간행물 입수·분석 친미인사들과의 접촉 포로·피난민 심문 현지답사 및 여론조사.
방교수는 특히 G-2의 통신검열대에 주목했는데 미군 15명 미만, 한인 2백 명 미만으로 구성된 검열대는 이때부터 전화도청을 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한 한국경제 담당관은 "우리는 남한경제의 골격을 알고 있었으나 이 부대는 여기에 피와 살을 제공하였다" 고 이 검열대의 공적을 평했다.(『한국현대사와 미군정』, 한림대, 11쪽)
501요원들은 통신감청을 주요임무로 하기 때문에 한국에 오기 전에 대부분 미국 특수언어 학교에서 1년간 한국어교육을 받는다. 한국에 와서도 '특별한 사람들' 은 한국여자와 결혼해 언어를 습득하고, 대학교 부설 한국어학당에 다니기 때문에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고 알아듣는다. 연세대 한국어학당 501요원들은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연세대가 발행한 『연세요람』(1988, 562쪽)에 의하면 연세어학당은 주한미대사관과의 계약에 의해 1959년부터 1987년까지 566명의 미대사관직원들을 교육시켜온 것으로 돼 있다. 이들 직원 중에 501요원들이 포함돼 있었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한국어를 열심히 배운다고 하더라도 감청과 도청의 언어권은 교과서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만으로 501을 운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인 501요원은 6·25전쟁 때부터 있었다. 당시 그들이 한 달 월급으로 쌀 40가마를 살 수 있었다고 하니 요즘 시세로 치면 520만원이라는 고액을 받은 셈이다.
손원일-렘니저의 1956년 극비협약으로 한국군(인) 활용가능
CIA 가 안기부와 1962년에 정보교환 협정을 맺었듯이 501도 그들의 원활한 정보활동을 위해 한국군 파트너를 필요로 했다. 그 필요를 구조적으로 해결해준 것이 1956년 1월 10일 한미양국간에 체결된 협정이다. 이 협정에 의해 국방부 직할부대인 7235부대가 창설·유지돼왔다. 그러나 이 협정은 아직 그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협정의 내용과 이름은 군사 1급비밀로 분류돼 있고 그것을 볼 수 있는 한국인은 국방부장관과 7235부대장에 한한다.
이름 모를 이 협정을 체결한 사람은 미국 극동군사령관 렘니저(Lemnizer) 와 한국 국방부장관 손원일이었다. 당사자가 손원일 장관이었다는 것이 우연이었는지 미국의 선택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미국이 손장관을 매우 친미적인 인사로 평가하면서 예의주시해왔던 것만은 사실이다.
미국무성의 정기 비밀정보 보고서 「Intelligence Report」1960년 7월 14일자는 「이승만 이후 남한의 새 지도자들」이란 제목이다. 여기엔 허정, 정일권, 이종찬 등 정계와 군부의 실력자 47인에 대한 평을 싣고 있는데 손원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해군중장인 손원일은 해군총장(1948∼53) 과 국방장관(1953∼56) 직을 탁월하게 수행했다. 그는 이기붕과 친했고 이승만 지지자였으나 그들에게 무조건 복종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승만 정권이 온건한 정책을 택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52년 정치파동 때는 무력진압에 반대했다. 국방장관에서 물러난 것은 그가 금융부정에 연루됐다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이 나온 뒤였다. 그는 이성적이고 지적이고 분별 있는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불확실해 보이는 건강(신장염?) 만 아니라면 그는 앞으로 주미한국대사를 맡기에 적격이다. 그는 미국에 매우 우호적이고(very friendly to US) 강력한 반공주의자다."
여하튼 이 역사적인,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앞으로도 당분간 알려지지 않을 협정을 모체로 하여 501은 한국군(인)을 501요원으로 끌어다 쓸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미국NSA 국장과 국방부 7235부대장간에 체결된 '한미 특수번역 및 전사지원협정' 이다. 1975년에 제정되고 85년에 개정된 이 협정은 군사 2급비밀로 관리되는데, 501에 지원되는 한국군(인) 요원의 신분관리, 책임한계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501은 1975년 이 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 스스로 한국인 요원들을 채용했다. 그들 중에는 아직도 현직에 남아 있는 이들이 많은데 CMS 라 불린다. 501이 이 땅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뽑혀가기 시작한 이들 CMS 들이 어떤 절차와 심사를 거쳐 501 인사과에 의해 채용됐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75년 협정 이후 501은 필요한 한국인 요원을 국방부 7235부대를 통해 뽑았다. 이들 요원들은 MND 라 불린다. 501이 MND 를 선발하면서 7235와 어떤 밀약(협정)을 했는가는 최근 진행중인 두 재판을 통해 그 일각이 알려지고 있다. MND 요원이었다가 '해고' 당한 정재명 씨와 이상기 씨가 "우리는 속았다" 면서 국방부에 소송을 제기, 밀약의 껍질을 하나둘씩 벗겨내고 있다.
미군 501요원의 권위와 '고용' 된 한국인의 신세
이들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협정의 내용 중에는 △한국 국방장관의 승인하에 군무원 인사법에 따라 뽑되 △한국 군부대 군무원의 정원에 속하지 않으며 △미측의 요구에 따라 적격자를 채용하며 △보수는 미측에서 부담하고 △미측이 근무해제 여건 발생으로 감원을 요구하면 국방부는 군무원 인사법령에 따라 직권면직시킨다고 돼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방장관 명의의 공채시험(일간지 정식공고) 에 응시했던 MND 들은 나중에야 자신이 한국군 군무원도 아니고 미군 군무원도 아닌, 공무원법과 근로기준법의 보호도 못 받고 결국 연금도 못 받는, 오로지 그저 501의 MND 요원 신세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임용에 관한 모든 것이 군사기밀", "당신들은 비노출 신분" 이라는 상관들의 말에 그저 죽어지내 왔다는 것이 두 사람의 주장이다.
MND 의 급여는 미국 NSA 에서 나온다. 501을 위해 일하는 이들이 NSA 와 7235의 밀약에 의해 탄생됐고 이들의 월급이 NSA 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한국 안의 NSA' 와 501여단이 그 임무와 조직에 있어 상당히 겹치고 있음을 알려준다.
반면 CMS 는 501여단으로부터 직접 급여를 받는데 그 액수가 MND 의 배에 가깝다. 한미행정협정은 17조에서 미군이 한국에서 한국노동법을 따르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 미군무원' 인 CMS 들은 MND 가 받지 못하는 노동법의 보호도 받고 있다.
과연 그것이 일반적 분위기인가는 확인할 순 없지만 한 전직 MND 는 501안에 미군-CMS-MND간의 '계단식 아부' 가 굳어져 있다고 했다. "MND" 들은 그들의 조장 노릇을 하는 CMS 들에게 잘 보이려 한다. 또 CMS 들은 미군 사병이나 장교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쓴다. 국방부에 의해 정식으로 3, 4, 5급 군무원으로 채용된 MND 들이 새파란 미군들에게 쩔쩔매고 있다. 예컨대 회식을 할 때도 MND 와 CMS는 회비를 내지만 미군은 사병이라도 항상 공짜였다. 미군들도 2, 3차까지 당연히 공짜로 먹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1985년 12월, 4급 군무원 신분인 나는 일개 미군 하사관에 징계를 받는 일이 있다. 징계심사의 주심은 미군 하사관이었고 그의 양 곁에는 두 명의 CMS 가 앉아서 나를 심사했다. 나는 그때 상당한 모욕을 느꼈다. 몇 년 후 그 미군은 이임하면서 나에게 '그땐 미안했다' 면서 '그동안 CMS들이 나에게 무척 아부했다' 고 말했다."
501의 한국인 활용방법은 MND 나 CMS 로 요원화하는 것만이 아니다. 보다 조직적이고 쉬운 방법은 그의 한국군 파트너인 국방부 7235부대 자체를 활용하는 것일 것이다. 7235부대의 일부 부대원들은 현재 봉급 수령시 '정보비' 명목의 '을종수당' 을 미군측으로부터 받는다고 한다. 그것이 어떤 명목이든 국방부 직할부대가 미군측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특이점' 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7235부대는 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아예 부대 자체가 미군 예하에 배속돼 있었고 사병 월급까지도 미군측에서 부담했었다.
7235는 이용주 부대라고도 불렀다. 국방경비대 3기인 이용주 장군이 박정희 시대 내내 19년간 7235부대 책임자를 지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후 김용금·오자복·김신배·이상수·윤학렬·최준식·최권영 장군 등이 이 부대를 맡았다. 501요원으로 잔뼈가 굵은 미군 고위층 중에는 7235부대의 '고문' 으로 '고용' 되는 이들도 있다.
501의 도청솜씨와 청와대를 꿰뚫는 전파
박정희 시대에 청와대를 도청한 것이 NSA 짓이냐 CIA 짓이냐 하는 것에 대해 한때 한국언론이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러나 주한 미국 정보기관들은 유기적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에 그것은 우문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501의 도청솜씨가 어느 정도인가라는것도 CIA의 도청능력을 다뤄온 기존의 글들과 별다를 수 없다.
501 취재에서 재확인한 것은 한반도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도청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1993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이윤수 의원은 안기부가 한국통신의 전화고장 실험회선을 전용해 남산의 안기부 안방에서 전국의 모든 전화를 엿들을 수 있고 가입자의 통화내용을 엿듣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501의 도청세계에서 보면 지극히 수공업적인 것이다. 501은 땅(안테나 숲), 바다(함대), 하늘(위성과 정찰기) 에서 입체적으로 쏘아대는 마이크로파로 한반도내의 무선은 물론이고 유선통화의 내용까지 도청할 수 있다고 한다. 501요원들 중에는 하루종일 도청된 정보를 정리·분석하는 일만 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일일보고서는 다섯 부로 만들어져 주한미국 고위층에 전달된다.
501이건 CIA 이건 안기부(현 국정원)이건 도청능력을 논할 때 가장 궁금한 것은 유선도 무선도 아닌 그냥 목소리 대화를 어떤 내부장치 없이 전파를 쏘는 것만으로 도청해낼 수 있는가이다. 그런데 501은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
『뉴욕타임스』(1977. 6. 20) 는 주한미국 정보기관이 이미 그러한 방식으로 75년에 청와대를 도청했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전자도청 기술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소식통들은 전자도청 공작이 외교적 모험이 따르는 것이어서 극히 조심스럽게 수행되었다고 말했다. 전자장치 기술자들에 의하면 이 도청방법은 청와대를 보호하고 있는 보안망을 뚫고 들어간다는 어려운 문제를 극복하고, 또 한국인을 고용해 대통령 집무실에 들여보내는 위험도 필요 없는 방법인 지향성(指向性) 전파탐지 방법이었던 것 같다.
한 전문가에 의하면 이 방법은 도청대상 사무실 안에 어떤 장치를 할 필요가 없으며 전파가 도청대상 사무실 방향으로 발사되면 이 전파는 목표대상들을 찾아 이동한다고 한다. 전파는 목표와 충돌, 이 진동으로 반송파(返送波) 가 발사돼 사무실의 소음과 함께 목표대상의 육성을 전달한다. 이 방법은 전파가 벽과 유리를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송신기와 목표대상물이 서로 가려지든 가려지지 않든 관계없이 이용할 수 있다."
현재 501은 이러한 지향성 전파탐지 방법으로 한반도 전역에 대한 감청(도청) 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는 도청방지 장치를 갖추지 못했다면 청와대는 아직도 주한미국 정보기관의 도청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을 것이다.
501 도청요원의 고백 "한국 사단장 통화도 도청"
501에서 직접 도청업무를 맡아본 경험이 있는 ㄱ아무개 씨를 만나봤다. "501이 청와대를 도청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능하다" 고 잘라 말했다. 그가 말하는 도청방법은 이런 것이다.
"501의 도청요원은 헤드폰을 끼고 모니터 앞에 앉으면서 임무를 시작한다. 유선이건 무선이건 전화통화를 도청한다고 하자. 그는 모니터와 연결된 채널을 돌리면서 그가 도청할 필요가 있는 특정통화가 있는지를 헤드폰을 통해 스크린한다. 만약 그 특정통화를 포착했다면 그 통화가 진행중인 전파(유선일 경우에도 라인에 전파가 발생한다) 의 전파수를 자동으로 알아낸다.
모니터엔 통화지역과 그 지점의 좌표가 표시된다. 즉 어느 곳에서 어느 곳으로 얼마의 주파수로 통화가 진행중인가를 그 편리한 장비는 알려주는 것이다. 수신요원은 자신의 수신기 채널을 통화가 진행중인 주파수와 똑같은 주파수에 맞춘다. 통화내용은 자동 녹음된다." 요즘 시중에 나오는 전화기 중에는 3자통화가 가능한 전화기도 있다. 501의 도청기기는 그런 기능을 무한대로 확장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기기의 이름은 알파벳 P로 시작된다.
유무선 통화 도청시 501 도청요원은 두 통화자 사이에 끼여들어 3자 통화도 할 수 있고 두 통화자의 통화를 방해할 수도 있다. ㄱ씨는 심심풀이로 전파방해 장난을 해본 적이 있다. 어느 핸가 팀스피리트 훈련 때 여주 근처에서 현장작전을 지휘하는 한국군 사단장끼리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 ○○○인데 우리는 서쪽을 기습할 테니 당신은 동쪽을 치시오." ㄱ씨는 전파방해 키를 눌렀다. 501이 쏜 전파가 두 사단장이 통화하고 있는 전파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아그 다시 말해보슈, 감이 안 좋은데." '다시 말해보슈' 를 다섯 번이나 할 정도로 계속 전파를 방해하니 그 사단장이 눈치를 챘는지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외쳤다고 한다. "야이 새끼야, 내가 누군지 알고 방해해! 빨리 안 나가!"
ㄱ씨는 이 예를 들면서 한국군의 모든 부대이동은 501에 의해 낱낱이 체크된다고 했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 12·12 와 5·17 때 한국군의 이동상황을 미리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미국관리들의 말은 진실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없다.
501의 도청기기 P는 전화도청뿐 아니라 대화도청도 가능하다. 단 이때 대화하는 방이나 그 주변에 발신기를 설치해야 한다. 그러나 ㄱ씨는 "발신기가 없더라도 대화를 도청할 수 있는 기능이 내가 접해본 P에는 없으나 그것이 가능한 또 다른 기기가 필경 있을 것인데, 그 존재 유무도 극비사항" 이라고 말했다.
여하튼 이 정도면 501이 '마음만 먹으면' 청와대의 모든 유무선 전화는 도청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501요원들에겐 특급비밀을 다룰 수 있는 '증' 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도 허가 없이 출입할 수 없는 초특급 비밀구역이 부대내에 따로 있다. 8시간 3교대로 24시간 근무하는 이곳엔 한국인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여기에 들어간 미국인들이 한국어 때문에 도청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진 않는다. 그들뿐 아니라 모든 501요원의 70∼80%는 한국인만큼 한국어에 유창하다. 한국어 유창 여부가 인사고과에 반영되기 때문에 계급이 높을수록 더 한국어에 능숙하다.
이 비밀구역에 안 들어가 본 사람 중에 이곳에서 무엇이 이뤄지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이곳이야말로 한국 국내정치와 관련한 도청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생긴다. 여기에 501요원 신분의 주한 CIA요원들이 들어 있으리란 추측도 가능하다.
어떤 언론인은 주한CIA 요원은 40∼50명이 고작일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비노출을 원칙으로 하는 주한 CIA요원들에게 501과 같은 미군기지는 참으로 좋은 활동공간일 것이다. 501요원들은 다른 주한미군들이 1∼3년 만에 한국을 떠나는 데 비해 10년 이상 근무하는 이들이 많다.
용산 미8군기지 곁에 있는 보광동 501본부는 사복 입은 미국인들의 출입이 잦은 곳이다. 그들 중엔 주한미국 고위관리들도 포함된다. 이 곳에서는 주한미대사, 미8군사령관, 501여단장, CIA지부장 4인이 매월 한 번 꼴로 모여 501요원들이 수집·분석한 고급정보들을 논한다. 주한미국 고위관리들은 역대 독재정권에 대한 그들의 지원을 한국민이 문제 삼을 때마다 "우리는 그러한 사태진전을 모르고 있었다" 고 반복해왔다.
그러나 501의 발가락을 더듬으면서 섬뜩하게 떠오른 것은 박정희대통령이 1976년 박준규 당시 공화당 정책위의장에게 했다는 이런 말이다.
"미국사람들이 도청하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못하겠는가."
(이 기사는 지난 95년에 발행된 <우리현대사의 숨은 그림 찾기>에 실린 것을 수정하여 올린 것입니다.) | |
첫댓글 최근 도청 관련 뉴스가 자주 보이는데, 옛날에 보았던 레이저 도청을 첨단이라고 소개들 하길래 올려봅니다. 95년에 나온 정보네요. 중요 부분에 색칠했어요.
오연호가 마음엔 안들지만 흔히 볼 수 없는 기사라 괜찮네요. 우린 생체데이터 감시피해자죠. 이런 도청은 우스울 정도의 피해자들이죠
일본에있을때 전철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며 서있는데 한 두칸 떨어진곳에서 외국남자가 마치 절 안다는듯이 쳐다보는데 , 그 표정이 마치 뭔가 의미심장해서 기억에 남아있었는데, 한국에 들어오고 몇달후에 대전역에서 똑같은 사람을 목격한 기억이 있습니다. 닮은 사람이겠거니 했었는데 동일인물이었던것같아요. 확실친 않지만요.
잘 봤습니다. 제가 겪어본건 제가 대구 동성로에 작년에 열심히 1인 시위할때 외국인에게 많이 시키더라고요. 영어. 아시아계쪽애들에게도 많이 시키더라고요. 저는 속으로 이야 이놈들이 세계많은 언어를 하는 놈들이구나 생각 했는데 좀 이해 되네요.
근데 그럼 벽, 거울도 통과해 지나가는 전파가 인체에 반사된다는 이야기인가요?
또 전파는 어디에서 쏘기에 다른 모든 사물, 사람들은 모두 통과하고 청와대 안의 목표인 사람에게만 반사가 되는건지..
그 사람에게 어떤 장치가 되어있지 않는 이상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왜 저런 기술의 세세한 면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는건지..
고맙습니다
미국은 악마가 맞습니다. 미국민들도 악마가 있겠지만 미국 정부는 확실히 악이 맞습니다. 본인들의 더러움과 추잡함을 숨기려고 똑같이 악마인 중국북한이란을 싸잡아서 악으로 지칭하고 본인들은 선인양 그러는데 미국 북한 모두 다 악이 맞습니다. 심리가 아주 교묘해요. 악마가 먼저 상대방에게 악마다! 하고 소리치면 다들 그 악마로 지칭된 사람을 악마로 생각 또는 의심하게 됩니다. 이런 간사한 마음씨를 가진 미국이 악의 한축을 담당하지 않고서야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합니까!
수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