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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 보이는 산이 경주의 산중 중앙에 위치해 있는 경주낭산입니다. 남산이 아니고 낭산(狼山)이에요!^^
낭산의 모양이 이리(늑대)가 엎드린 형상 같다고 해 한자 이리 낭(狼)자를 써 낭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마천의 사기에서 동쪽의 큰 별을 낭(狼)으로 부른다고 했어요. 이것으로 보아 이리 형상 때문이 아니라 신라 왕궁의 동쪽에 자리한 까닭에 낭산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높이 108m로 경주의 산중에서는 좀 낮은산이죠. 경주는 동쪽에는 명활산! 분황사에서 보문단지 방향으로 보문단지 입구 남쪽에 위치 해 있는 산으로 명활산성이 지금도 남아 있어요. 남쪽은 금오산으로 우리가 잘 아는 남산이에요. 서쪽 선도산은 서라벌대학 뒤에 있는 산으로 태종무열왕릉이 이 산에 위치해 있어요, 북쪽 소금강산은 백률사가 있어요. 백률사에 대해 잠깐 이야기 하자면 신라에 불교를 가져온 사람이 이차돈이에요. 이차돈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해요. 반월성에서 목이 잘렸는데, 잘린 몸에서 흰피가 하늘로 솓아 올랐고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 백률사라고 합니다. 경주박물관에 가게 되면 이차돈에 관한 비석이 있을 거에요. 시간 되시면 한번 찾아 가 보세요.
다시 경주낭산으로 와서 이 4개의 산중 중앙에 위치해 있는 산이 경주낭산입니다.
신라 실성왕 때 낭산에 구름이 일어나 누각과 같이 보이며 향기가 매우 짙게 퍼져 오랫동안 계속되었다고 해요. 이것은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신유림'으로 여기고 이때부터 낭산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했고, 성역으로 보존 했다고 해요.
낭산은 이처럼 신라시대 부터 신성시 되어 왔던 진산( 鎭山)이에요. 진산은, 한 마을이나 고을의 중심이 되는 산을 진산 또는 주산(主山) 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작은산으로 별 알려져 있지 않지만 추후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될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낭산에는 많은 유적이 있으며, 낭산과 관련 된 위인들이 다수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유적에서는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 황복사지(삼층석탑), 능지탑, 최치원독서당, 마애보살삼존좌상, 관음보살입상, 중생사(석조십일면관음보살상), 만정사지(구황동 목탑지), 낭산 고인돌(지석묘) 등 많은 유적지가 있으며, 낭산관련 위인에는 선덕여왕, 최치원, 백결선생, 월명사, 양지, 고려전기의 최승로 등 많은 위인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낭산을 답사하며 숨겨진 낭산에 대한 신비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역사에 대해 하나씩 알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천왕사지로 이동하겠습니다.
사천왕사는 신라 호국사찰로 - 신라와 당나라 연합으로 삼국을 통일하게 되어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 시킨 후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을 하게 되죠. 당나라가 신라를 정복하려고요.
이때 신라 문무왕은 방책을 강구하는데 사천왕사를 세우고 이곳 사천왕사에서 명랑법사를 비롯한 12명의 명승으로 하여금 문두루비법이라는 비법을 행하니 서해에서 오던 당의 배들이 풍랑으로 인해 모조리 침몰 해 버렸어요.
이렇게 신라가 두번이나 당군을 물리치자 당나라 고종이 당시 신라사람 박문준을 불러 "너의 나라는 무슨 비법이 있길래 두번이나 많은 군사를 보내도 살아 돌아오는 자가 없느냐?"라고 물었어요.
박문준이 대답하기를 "본국을 떠난지 10여년이 되어 본국의 일을 잘 모르고, 다만 상국(당나라)의 은혜를 두터이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그 덕을 갚기 위해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지어 황제께서 만년토록 장수하시기를 축원할 뿐입니다"라고 하였어요. 이에 고종은 대단히 기뻐하며 예부시랑 악붕구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 그 절을 살펴보게 하였어요.
그러나 사천왕사는 실제로는 당나라 같은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만든 절이여서 당나라의 조사를 받으면 들통이 날것이 뻔했기에, 신라 조정은 당나라 사신 악붕구에게 보여주기용으로 미리 사천왕사 남쪽에 새 절을 날림으로 급하게 절을 지었는데요 그 절이 바로 망덕사 입니다.
저기 남쪽 들판에 몇그루의 소나무가 보이죠?
저곳이 망덕사지 입니다.
예상대로 악붕구는 오자마자 먼저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사천왕사에 들르고 싶다고 말하니, 신라에서는 악붕구를 망덕사로 안내 했는데, 악붕구도 뭔가 미리 입수한 정보가 있었는지 망덕사의 문 앞에서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의 절이다." 라고 하면서 들어가지 않는 거에요. 그래서 신라에서는 악붕구에게 금 1천냥을 주어 매수했고 악붕구는 본국에 돌아가 당고종에게 황제의 수명을 축하하는 절이 맞더라고 거짓 보고를 올린 덕에 무사히 넘어 갔다고 합니다.
사천왕사에는
향가 중 제망매가 아시죠? 제망매가를 지어신 분이 월명사 이십니다.
생사(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에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에 떨어지는 잎처럼
같은 나뭇가지(부모)에 나고서도(네가)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아, 극락세계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 제망매가, 월명사 -
이 월명스님이 이 사천왕사에 계시면서 피리를 불어 달을 멈추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리고 사천왕사지와 관련 된 또 한분의 인물은
신라의 미켈란젤로라는 양지 스님이 계셨어요. 사천왕사지 하면 이 곳에서 발굴된 유명한 작품이 있어요. 혹시 무엇인지 아시는 분 있으세요? 네에! 바로 녹유사천왕상전이라는 사천왕 조각품이에요. 경주박물관 가시면 볼수 있어요. 이 녹유사천왕상전은 섬세함과 정교함이 깃던 대작이에요. 이 녹유사천왕상전을 만드신분이 양지 스님이에요.
녹유는, 도자기 굽기 전에 유약 바르는거 아시죠? 그 유약의 색깔이 녹색이여서 녹유라고 하고요,
전은 한자 벽돌전(塼)자로 흙으로 구운 벽돌이라는 뜻으로, 녹유사천왕상전이란 흙으로 부조로 된 사천왕상을 만들어 녹색유약을 만들어 구운 것으로 탑의 기단면석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신라시대 다른 사찰의 사천왕상들이 악귀를 밟고 서 있는데 반하여, 녹유사천왕상전의 사천왕상은 특이하게 악귀를 깔고 앉은 좌상의 형식이에요. 특히 사천왕이 왼손에 칼을 세워들고 잡귀 두 마리를 꿇어 앉혀 그 등에 앉은 모습은 조각적 기량이 뛰어나요. 또한 흠잡을 데 없는 사천왕의 정확한 신체표현과 정교한 무늬, 그리고 악귀의 사실적 표현은 생동감과 현실감을 잘 살려주고 있어요. 이러한 조형감각은 기존 삼국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완벽한 기법이라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저기 돌기둥 두개 보이시죠! 당간지주에요! 사찰에서 의례나 행사가 있을 때 입구에 높이 다는 깃발을 당, 깃대를 당간, 당간을 지탱해주는 지지대를 당간지주라고 해요. 학교의 국기게양대라고 생각 하시면 이해가 될거에요!
세월의 흐름속에 당과 당간은 사라지고 당간지주만 이렇게 남아 있어요!
그리고 저 당간 지주 옆에 귀부 두기가 있어요. 귀부는 거북모양으로 만든 비석 받침돌 이에요.
이 보세요! 섬세한 조각 솜씨를요.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거 같죠!
아쉽게도 머리가 떨어져나가 없어요! 여기 사천왕사지 귀부 뿐만 아닌 바로 앞에 있는 남산의 대부분 부처, 경주에 있는 수많은 부처의 머리가 없어요!
머리가 떨어져 나간 이유를 몇가지 추정 하는데요,
지진 등 자연재해 때 약한 목부분이 떨어져 나간것으로도 추정하고요, 그리고 몽골, 왜(일본)가 침략 했을 때 파괴 한것으로도 추정 되고요, 조선시대 유교는 숭배하고 불교는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 때 잘려 나간 것으로도 추정 되어요.
다행히 귀부의 머리하나가 발굴되어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어요.
귀부 위 비석도 세월의 풍파속에 사라졌어요. 그래도 다행스럽게 사천왕사의 비석 중 몇몇 비석의 조각들이 원래 위치는 알수 없으나 출토가 되었어요.
출토된 조각난 비석 중 경주 김씨의 내력과 무열왕. 문무왕의 업적과 삼국통일의 과정, 문무왕을 화장해 뼛가루를 바다에 뿌렸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는 문무왕릉비의 조각도 나왔어요. 조선시대 주민이 밭을 갈다가 발견 했다고 해요. 그 후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 아시죠? 이분이 경주를 방문하여 선덕여왕릉 아래의 낭산 기슭에서 문무왕릉비의 상단부와 하단부를 재차 확인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요.
조선시대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의 책(이계집)에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의 조각들을 1796년(정조 20)에 발견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이 조각들의 탁본은 청나라 책(해동금석원)에 내용이 실려 있어요.
그런데 이 비석조각들이 어느날 실종되어 버린거에요. 이 조각들은 그 이후 있는 곳이 다시 묘연했으나 200여년의 세월이 흘러 1961년 비석의 하단 부분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되었고, 상단부분은 2009년 동부동의 한 주택의 수돗가에 박혀 있는 것을 한 훌륭하신 수도검침원의 제보로 다시 우리곁으로 돌아 오게 되었습니다.
사천왕사지는 일제강점기 때 잠깐 발굴된적이 있다가 2006년에 전체적인 세부발굴이 시작되었어요.
가람배치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에 탑을 세운 쌍탑식가람으로 하나의 금당과 두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형태에요! 각 탑의 형태는 세가지 종류의 녹유사천왕상전이 24개로 둘러져 있었어요. 남쪽에는 중문지, 경루 북쪽으로는 강당지가 있으며 둘레를 지붕이 있는 긴 복도 형태인 회랑으로 둘러싸고 있는 구조에요.
사천왕사지 이자리에 1980년대 까지 마을이 있었어요! 마을이름이 '천왕끝에' 였어요. 이름이 사천왕사에서 유례가 된거 같아요. 가게도 있었고 이발소도 있었어요. 발굴 및 공원화 사업으로 마을은 철거 되었어요.
사천왕사지는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도 간직 하고 있어요.
바로 여기 보시면 철도가 보이시죠. 일제강점기 일본은 부산에서 포항으로 이어지는 동해남부선 철길을 만들었어요. 이 철길은 풍수의 맥을 끊어 놓았어요. 일제는 우리의 맥을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고, 철도와 도로를 놓아 지형을 갈라 놓았어요. 여기 보세요. 이렇게 사천왕사지를 관통시켜 놓았잖아요. 그래도 다행히 2021년 12월 드디어 기차가 멈추었고 철길 철거 작업이 시작 되었어요.
자 이제 선덕여왕릉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선덕여왕 잘 아시죠? 예전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 되었죠. 이 드라마로 인해 선덕여왕릉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졌어요.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에요. 여왕의 이름은 김덕만이에요.
황룡사9층 목탑, 첨성대, 분황사가 선덕여왕 시대에 건립되었어요.
선덕여왕의 예지력이 돋보이는 3가지 이야기가 있는데요
먼저 당나라 태종이 진홍, 자색, 흰색의 3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을 보내 왔는데 선덕여왕은 그림만 보고 모란꽃에 향기가 없을거라고 말을 했어요. 씨앗을 심어 모란꽃을 피운 후에 보았더니 실제로 향기가 없었어요. 여왕은 어떻게 그림만 보고 모란꽃에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나비가 함께 그려져있지 않아 그림 속 모란꽃에 향기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해요.
두번째 이야기는 영묘사의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개구리가 가득 모여 3,4일을 울고 있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여왕에게 보고 드리니, 여왕은 잘 훈련되 정병 2,000명을 건천 여근곡으로 보내어 숨어 있던 백제 군사들을 전멸 시켰다고 해요.
마지막 세번째는 선덕여왕은 살아 계실 때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짜에 죽으리니, 나를 도리천 가운데 묻어 주시오.”라고 말해요. 신하들이 그곳이 어딘지 모른다며 장소를 묻자, 낭산의 남쪽이라고 하셨어요. 신하들은 선덕여왕이 죽은 뒤 그 유언대로 따라 하였는데, 그 뒤 문무왕이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지었어요. 좀전 본 그 사천왕사지에요. 불교에서는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고 말해요. 사천왕천을 상징하는 사천왕사가 지어졌으므로, 그 바로 위인 선덕여왕의 무덤은 도리천이 되는 것이예요.
왕릉의 형태는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 석축으로 이루어 져 있고 그 위에 흙을 쌓아올렸어요. 지름은 24m이고요... 그럼 둘레는 얼마일까요?
원의 둘레 공식이 어떻게 돼죠? 지름 곱하기 π(3.14) 죠! 그럼 지름 24 곱하기 3.14하면 75.36이 나와요!
네에~! 왕릉의 밑둘레는 74m에요. 공식이랑 거의 맞아 떨어지죠!
높이는 6.8m 에요!
동네 어르신 말씀으로는 예전 1960년대 쯤에 이 선덕여왕릉을 발굴 하려고 한적이 있었데요.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비가 억수 같이 퍼 부어서 발굴을 중단 했다고 해요. 여왕님의 신비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이제 자리를 잠깐 밑으로 이동 하겠습니다.
저기 소나무가 있는 저기 조금 높은 지형 보이시죠? 저기가 뭔지 아세요.
네에! 고분이에요. 잘 보시면 하나가 아닌 두개의 고분이에요.
받침석도 있고 어느정도의 지위가 있었던 분 같아요.
이 두기의 고분에 대해서 조사가 필요하나... 아쉽게도 도굴을 당하였답니다.
제가 중학교 때 1987~89년 사이 같아요. 토끼를 잡는 다고 이 곳까지 왔는데 굴이 파져 있는 거에요.
그 때 신고를 하여야 하는데... 너무 세상에 대해서 몰랐나 봐요...... 그리고 일주일 후에 다시 이 고분을 찾게 되었는데 파져 있던 굴이 흔적도 없이 매꾸어 져 있었어요. 지켜 드리지 못해 너무 죄송합니다......
자 이제 능지탑으로 이동 하겠습니다.
이동하시면서 이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감상해 보세요!
정말 아름답고 멋지죠!
잠깐 저 밑에 마을 보이시죠?
저기가 상강선마을이에요. 낭산에는 4개의 마을이 있어요. 상강선! 여기동네 사람들은 윗강시라고 해요. 그리고 좀 전 답사한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릉 입구 안쪽에 있는 마을이 하강선(아랫강시) 이고요. 다음 답사코스인 능지탑이 위치 해 있는 마을이 첫배반이에요.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답사코스인 황복사지가 있는 마을이 황복마을 이에요. 낭산의 위인 중에 백결선생 이야기가 있어요. 백결선생은 박제상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박제상이라는 분은, 망부석 아시죠? 사람이 돌로 변했다는 이야기! 박제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신라의 왕자를 구하러 간 사이 그의 아내는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어요. 박제상은 왕자를 구하고 자기자신은 끝내 왜구들한테 처참이 운명하셨어요. 이 박제상의 아들인 백결선생님이 이 낭산 마을에 살아셨다고 해요.
백결선생 설화의 내용은, 신라시대 명절에 집집마다 다 떡을 해먹는데 백결선생집은 너무 가난하여 떡을 해 먹을 수 없어 선생이 거문고로 방아 찧는 소리를 연주하여 그의 아내를 위로 했다고 해요. 백결선생의 백결은 옷을 백번을 기웠다고 해서 백결선생이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요.
그리고 들판 끝에 릉이 하나 보이죠?
저 들판이 보문들이고 뒤에 보이는 산이 경주의 동쪽산인 명활산이에요. 그리고 저 릉이 선덕여왕의 아버지 무덤인 진평왕릉이에요.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에 경주편에 진평왕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시간 되실 때 한번 읽어 보세요!
자! 이제 능지탑에 도착했네요!
능지탑은 예로부터 능시탑 또는 연화탑으로도 불려왔어요.
일반 신라시대 탑하고는 다르죠.
보통 신라탑이라 하면 돌로 된 3층석탑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분황사탑을 닮은 같기고 하고요...
예전 흙과 돌 무더기로 방치 되어 있던 것을 1970년대에 복원한 거에요. 동해 바다 감포 밑에 봉길해수욕장이 있는데 봉길해수욕장 앞 바다에 바위섬이 보일거에요. 바로 문무대왕의 수중릉 대왕암이에요. 문무대왕을 화장 하여 그 뼈를 묻은 곳이죠.
그 화장터가 바로 여기 능지탑이에요!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대왕은 자신이 죽으면 10일 이내에 왕국 바깥 뜰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을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답사 첫코스인 사천왕사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 되었고, 능지탑 발굴현장에서 불에 탄 흙이 나와, 그래서 이곳 능지탑을 문무대왕 화장터로 추정 하고 있어요.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고 추정이에요. 지금 이렇게 복원되어 있는 탑의 형태도 추정해서 복원한거에요.
원래는 5층이였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복원 후 남은 석재는 저기 보이시죠? 저렇게 쌓아 놓았어요.
십이지상 12가지 중 범(호랑이), 용, 뱀의 세 종은 남아 있지 않고 9종의 쥐, 소, 토끼,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십이지상만 남아 있어요. 그런데 쥐상만 다시 한 번 볼까요. 다른 십이지신상은 모두 갑옷을 입었는데, 쥐상은 평복을 입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다른 십이지신상은 고부조로 새겨졌지만 쥐상은 저부조로 새겨져 있어요. 전체적인 형태도 조금 더 길쭉하고요.
능지탑의 십이지신상은 능지탑을 위해 조성 된것이 아니라 다른 장소에 있었던 십이지신상을 옮겨 온것이라고 해요.
능지탑 발굴에서 나온 유물은 경주박물관 별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발굴 조사 당시 폭 5.8미터 가량인 사각형 단과 네면에 설치된 약4미터인 감실이 확인 되었어요. 불상을 모시는 공간인 감실에는 진흙으로 빚은 어마하게 큰 불상인 소조불 좌상 조각들이 발견 되었어요.
소조불 발, 코, 무릎과 부처 머리 부분인 육계 등과 수막새와 암막새, 장식기와인 치미 등 다양한 기와와 금동불, 석조불도 나왔어요.
문무대왕에 대해 잠깐 설명 드리면 문무대왕은 신라 제30대 왕으로 태종무열왕의 아들로 삼국통일을 이룩하죠. 죽은 후에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로 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해 수중릉인 대왕암에 묻혔어요.
이제 중생사로 이동하겠습니다.
신라시대에 중생사가 있었는 데 지금의 중생사는 그 신라시대의 중생사가 아닌 근대에 새로 지워진 사찰이에요.
그래도 지금 보듯이 중생사 마당에는 석탑 자재들 및 많은 다양한 옛석재들이 있는 걸 보아서 여기가 중생사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박물관 별관에 가면 석조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는데 그 보살상이 이 곳에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어요.
중생사에는 전해내려 오는 설화가 있어요.
옛날 중생사 주지스님이 절의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 절을 떠나려고 하는데 어느날 어렴풋이 잠을 자는데 꿈을 꾸니 대성(큰성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법사는 아직 머물러 있을 것이지 멀리 떠나지 말라. 나는 인연이 있는 것으로써 재 드리는 비용을 충당하리라.”고 하니, 스님은 기뻐하면서 감사하고 잠에서 깨어나서는 마침내 머물고 떠나지 않았어요.
그 후 13일 만에 어떤 두 사람이 말과 소에 짐을 싣고 문 앞 있는 거에요. 스님이 나가서 “어디서 왔느냐?”라고 하니, 말하길 “우리들은 금주 지방 사람인데, 지난번에 한 스님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말하길 ‘나는 동경 중생사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네 가지의 어려운 일로서 연화(불사를 경영하여 인연이 있는 사람을 인도하고 교화함)를 위하여 여기에 왔습니다.’고 하므로 이웃 마을에 시주를 거두어 쌀 여섯 섬과 소금 네 섬을 얻어서 실어 왔습니다.”고 하였어요. 스님이 말하길 “이 절에서는 연화가 없었는데 당신들은 아마 잘못들은 것 같소.”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스님이 거느리는 방향으로 우리들은 왔는데 이 신견정 물가에 이르러서 말하길 ‘절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하여 우리들은 뒤쫓아서 마침내 온 것입니다.”고 하였어요. 절의 스님이 인도하여 법당 앞까지 들어가니 그들은 대성을 우러러보고 예배하며 서로 말하기를, “이 부처님이 시주를 구하던 스님의 상입니다.”고 하고 놀라서 감탄해 마지 않았어요. 이 때문에 쌀과 소금을 바치는 것이 해를 더하여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또 하루 저녁은 절 대문에 불이 나서 마을사람들이 달려와서 구하는데 법당에 올라와 관음상을 찾았으나 간 곳을 알지 못하여 살펴보니 이미 정원의 가운데에 서 있는 거에요. 누가 그것을 밖에 내놓았는지를 물었으나 모두들 모른다고 말하므로 이제야 대성의 신령스런 위력임을 알았답니다.
또 다른 중생사 관련설화는 점숭이라는 스님이 이 절에 살고 있었는데, 글자는 알지 못하지만 성품이 본래 순수하여 향과 꽃을 부지런히 받들었어요. 어떤 스님이 그의 거처를 빼앗으려고 친의천사(襯衣天使)에게 하소연하길 “이 절은 국가에서 은혜를 빌고 복을 받드는 장소이니 마땅히 문소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주관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천사가 옳다고 생각하여 그를 시험하고자 소문을 거꾸로 주니, 점숭은 받은 즉시 펴들고 거침없이 읽었어요. 천사는 탄복하고 물러나 방안에 앉아 다시 읽으라 하니 점숭이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어요. 천사가 말하기를, “상인은 진실로 대성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하고 끝내 절을 빼앗지 않았어요. 당시 점숭과 같이 살던 처사 김인부가 고을의 노인들에게 전하였으므로 이 이야기를 기록했어요.
또 다른 관음보살이야기는 좀 있다 장소를 이동해서 이야기 해 드릴게요.
여기는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이에요.
마모가 심하죠! 그나마 지금은 이렇게 부처님을 보호 해주는 전각이 세워져 있어요.
이 전각은 1990년대에 세워 졌고요 그 전까지는 부처님을 보호 해 주는 시설이 없었어요.
예전에 부처님 오른쪽에 큰 돌사과(꽃사과)나무가 있어서 가을이 되면 빨간 돌사과로 가득했어요.
이 마애보살삼존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물 제665호로 지정되어 있어요.
보살상과 신장상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런 예는 매우 드문 일이에요.
본존불의 높이는 1m정도이며 좌우 협시 두분은 높이 0.9m 정도입니다.
중앙 본존불은 수행자세인 결가부좌한 여래상으로 추정되며, 그 좌우는 무장형의 신인 신장상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존불은 비교적 원만한 얼굴에 작은 눈은 눈두덩이 불룩하게 튀어나왔고 코는 마멸되고, 입술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어요. 두 귀는 보이지 않고 양볼은 통통하며 목은 짧고 왼쪽 어깨 위에 법의를 입고 있어며, 입은 옷은 고려불화에서 보이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비슷해요.
좌우의 양 협시상은 모두 본존불을 향하고 있으며 갑옷을 입고 있어요. 왼쪽 신장상은 고수머리이고 얼굴에는 비교적 높은 코에 크고 긴 귀가 있어요. 목에는 Ω형의 옷깃이 보이며 왼손은 무릎 위에, 오른손은 검을 잡고 있어요. 오른쪽 신장상은 인도의 터번 같은 것을 쓴 듯하며 눈을 부릅뜨고 매우 높은 코를 지녔어요. 한쪽 다리는 곧추 세우고 다른 한쪽 다리는 대좌 아래로 내려뜨린 유희좌를 하고 양손은 삼차극이라는 창을 잡고 갑옷을 입고 있어요.
이제 낭산의 서쪽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지금 가는 곳은 밭하고 논 밖에 없어요. 하지만 낭산을 찾게 되면 꼭 들러야 하는 장소에요.
여기에요! 밭둑 이 자리에요!
경주박물관에 가면 잔디밭에 아름다운 돌부처님 한분이 서 계실거에요. 관음보살상입상으로 바로 여기 밭둑에서 옮겨 졌어요.
관음보살입상은 지금 이 자리에 머리없이 서쪽 방향으로 향해 허리까지 흙에 파 묻힌 상태로 서 있다 1990년대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예전 미리 옮겨진 머리를 부착해 복원하였어요. 복원 가정을 보면 머리는 일제시대 때 조선총독부 경주박물관 한켠에 옮겨져 있었어요. 1970년대에 박물관 관계자들이 몸체를 조사한던 중 마을 노인으로 부터 이 불상의 머리는 다른불상의 머리와는 다르게 길쭉하며, 경주박물관에 있을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요.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1990년대 초반 같아요. 제가 밭에 나왔을 때 포크레인 한대와 네다섯명의 사람들이 와서 머리없는 부처님을 발굴해서 옮겨 갔어요. 그리고 1997년도에 이 자리에서 연꽃대좌가 새롭게 발굴되었어요. 세개로 나누어져 있던 것을 조합하니 딱 맞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관음보살입상이 복원 된거에요.
복원된 관음보살입상은 높이 3.76m, 어깨폭 0.9m, 대좌높이 0.7m의 큰규모로 뛰어난 조형미를 자랑하며, 통일신라시대 관음보살상으로는 최대 작품이며, 석굴암의 불상들에 비견되는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어요.
삼국유사에 중생사 관음보살입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이야기 속의 관음보살입상이 아마 이 관음보살입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야기 잠깐 해 드릴게요.
옛날 중국의 한 황제가 화공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총희-특별한 귀염과 사랑을 받는 여자)을 그려 달라고 했어요. 황제의 명을 받은 화공은 그림을 완성한 후에 그만 잘못해서 붓의 물감을 그림 위에 떨어뜨리고 말았어요. 물감이 그림의 배꼽 밑에 떨어져 점이 찍이고 만거에요. 시간도 없고 해서 화공은 그대로 그 그림을 황제에게 바쳤는데 황제가 노발대발하면서 금방이라도 화공의 목이 날아 가게 되었어요. 황제 자신만 아는 여인의 배꼽 밑 사마귀를 화공이 정확히 그려 놓았던 거에요. 화공은 아니라고 몇번이나 이야기 했지만 황제는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 때 한 승상이 화공의 마음이 정직한 것 같으니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니, 황제는 그럼 "내가 간밤에 꾼 꿈을 그려 바치게 하라. 내 꿈과 틀림이 없다면 용서하겠다"고 했어요. 화공이 어떻게 황제의 꿈을 알겠어요. 그러나 화공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을 그려 받쳤어요. 그것을 본 황제는 그를 놓아 주었어요.
그야말로 관세음보살의 힘이 화공을 살린 거에요. 그 후 자유의 몸이 된 화공은 신라에 건너와 낭산 중생사의 관음보살입상을 만들었다고 해요.
고려전기 문신인 최승로 탄생이야기도 관음보살입상과 함께 전해 지고 있어요!
고려 성종에게 올린 정치개혁서인 '최승로의 시무 28조' 국사 시험에 많이 나와요!^^
신라 말 한 부부가 아이가 없어 중생사 관음보살께 정성스럽게 빌었어요.
그러던 중 임신을 하게되어 남자아이를 낳았어요.
아이를 낳은지 석달 째 기쁨도 잠시! 후백제 견훤이 쳐들어 온거에요! 여기서 잠깐 한번 생각해야 봐야 할게 있어요! 이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버렸다고 전해져 내려 오는데, 진짜 술잔치를 버렸을 까요...? 적들이 쳐 들어 오고 있는데... 포석정에 대해 새롭게 이야기가 되고 있는 내용이, 경애왕은 술잔치를 버린게 아니고 신들에게 나라를 구할수 있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을 까 하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어요.
후백제에 의해 무법천지의 난장판이 된 경주에서 피난길을 가야 하는데, 이제 석 달도 채 안된 갓난아기를 안고 몸을 숨기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였어요. 놀라서 악을 쓰며 우는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적군이 달려오기라도 한다면 어른과 아이 모두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운 판국이 된거죠. 숨을 죽이고 숨어있으려면 아기의 입을 막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아기의 숨이 막혀 소중하게 얻은 아들이 생명을 잃을 위험도 없지 않았어요. 생각다 못한 부부는 아기를 안고 중생사로 달려가 관음보살상 앞에 애기를 두고 피난을 떠나게 되었어요. 보름쯤 후 난이 끝나고 부부는 돌아 와 아기를 찾아 중생사로 갔어요. 석 달도 채 못 된 어린 핏덩어리가 보름이 지나도록 팽개쳐져 있었으니, 어찌 무사히 살아 있기를 바랄 수가 있었겠어요.
그런데 이게 왠일이에요! 갓난아기는 아주 건강하게 살아 있는 거에요. 살결은 이제 막 목욕을 시킨 것처럼 깨끗하였고, 몸도 튼튼하게 부쩍 자라 있는거에요. 방긋방긋 웃고 있는 아들은 덥석 껴안으니 아직도 아기의 입가에는 젖내음이 남아 있었어요.
이 아기가 바로 고려 시무28조를 작성 한 최승로 입니다.
지금 경주박물관 잔디밭에 있는 관음보살입상은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은 채 외롭게만 보여요!
빨리 본래의 이 자리로 돌아와 중생의 희노애락을 내려다 보시면서 중생에게 사랑과 행복을 선사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논길을 따라 가다 폐철길로 해서 7번 국도로 해 최치원 독서당으로 향하겠습니다!
이 철길이 사천왕사지에서 본 철길이에요. 북쪽방향으로 가면, 동궁과 월지 방향으로 경주시내를 관통하고 있어요. 2021년 12월에 기차는 멈추었고, 우선 이렇게 철도 레일이 철거 되었어요.
이제 인도로 가겠습니다.
이 도로는 7번국도 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도로라고 할 수도 있죠!^^ 미스터트롯 출신 장민호 아시죠?^^ 장민호가 부른 7번국도가 이 도로 입니다.^^ 부산, 울산, 경주, 포항으로 해서 동해안을 따라 우리나라 최전방인 고성 통일전망대 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독서당으로 올라 가기전에 저기 논에 두 개의 큰 바위 보이죠?
고인돌(지석묘)로 추정 되고 있습니다.
고인돌에는 북방식고인돌과 남방식고인돌이 있는데, 북방식고인돌은 우리가 흔히 고인돌이라면 그려지는 고인돌! 어떤 고인돌인 줄 알겠죠? 두개의 받침석이 있고 그 위에 평평한 돌이 올라 가 있는게 북방식고인돌이고요, 남방식고인돌은, 언양 읍내에 가면 큰바위가 있는데 혹시 보신분 있어요? 그 큰바위가 남방식고인돌을 대표하는 언양고인돌이에요. 여기 낭산 두기의 고인돌도 보면 언양고인돌가 형태가 비슷해요. 낭산 고인돌에 대하여 아직 연구조사가 되어 진것은 없고요, 발굴 등 조사가 이루어져 낭산의 깊은 역사가 재조명 되었으면 합니다.
독서당 가기 전 한 군데 더 답사하고 가겠습니다.
바로 여기 고인돌에서 저 수로만 건너면 되어요. 수로의 이름이, 여기 지역분들은 '낙차'라고 해요! 수로 높낮이로 인해 몇몇 곳에 콘크리트로 인공폭포를 만들어 놓았는데, 여기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다 보니 '낙차'라고 불려 지고 있어요. 보문단지호수에서 내려 오는 인공수로로 농업용수용 이에요!
여기 흙더미 위에 몇개의 돌들이 보이죠?
여기는 만정사지(구황동 목탑지) 입니다.
1960년대 신라문화동호인회에서 발견되어 구황동목탑지로 불리다가 그 후 가스관 매몰 공사를 하기 위해 먼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하던 중 목탑지 서쪽방향 40~50m 지점에서 다수의 만정사지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어요. 이후로 이 목탑지가 만정사지로 추정되어요. 동서 길이 11.6m, 남북 길이 11.3m, 높이 1m의 흙을 다져 쌓은 탑지로 되어 있어요. 이 중앙에 산소보세요. 누군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산소를 만들어 놓았내요..... 여기 이 석재는 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인 심초석이에요. 심초석 중앙에 사리함을 봉안하기 위한 사리공이 조성되어 있어요. 발견당시에는 주변에 석등대석과 와편 등이 산재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답사 코스는 최치원 독서당을 답사 후 낭산정상으로 해서 황복사지(삼층석탑)로 이동하겠습니다.
낭산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 독서당은 신라말 최치원 선생이 공부한 곳이에요! 최치원 선생의 생가는 저기 황룡사지 옆 들판에 석탑이 하나 보이죠! 미탄사지삼층석탑인데 저 미탄사지 옆에 최치원 선생 생가가 있었다고 해요.
독서당의 형태는 정면 4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되어 있어요. 아쉽게도 지금까지 여러차례 보수가 이루어져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는 없고요, 최근 2021년 4월에 화재가 나 본채가 전소 되어 다시 중건 했어요. 낮은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툇마루 앞쪽으로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중복된 보수로 초석의 형태가 일관되지 않고 다양하게 되어 있어요.
여기는 우물 터에요! 아직 물이 마르지 않고 있죠.
이 비석은 1850년 철종임금때 건립된 최치원유허비에요. 유허비란 옛날의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들을 선현이라고 하는데 이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이분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입니다.
담장 밖에 최치원선생이 심었다고 전하는 향나무가 있었는데, 1980년대에 도벌꾼에 의해 베어 져 버렸어요.
최치원선생은 신라말기 학자로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가 18세 때 당나라 과거에 합격해요. 당나라에서 이런저런 요직을 맡아 보다 29세에 신라로 돌아와 나라를 위해 올바른 자신의 뜻을 펼쳐 보려고 하지만 신라는 이미 국운이 기울고 있었어요. 진성여왕에게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시무책 10여조를 올렸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어요. 최치원선생은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이제 독서당 뒤쪽으로 해서 낭산정상으로 올라 가겠습니다.
여기 표지석 보이죠! 여기가 낭산정상이에요!
잠깐만 남쪽으로 내려 가 볼까요! 저기 터인 곳이에요!
여기는 낭산바위 중 으뜸인 낭산바위라고 해요! 배반들판과 남산이 한눈에 들어 오죠!
낭산 선령(신선)님이 위 자리에 내려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으세요?^^
이제 마지막 코스인 황복사지로 이동하겠습니다.
이동하면서 동서남북 풍경을 한번 보세요!
저기가 명활산이에요. 남산도 한눈에 들어 오고요. 서쪽 선도산도 보이고 밑에 태종무열왕릉도 저기 보이내요. 옆에 저기 충효 김유신장군묘가 있는 수도산(송화산)도 보이죠. 국립경주박물관, 동궁과월지, 반월성, 황룡사지 그리고 경주시내가 한눈에 들어 와요. 북쪽에 소금강산도 보이고요.
이제 알겠죠? 왜 경주낭산이 경주의 산중 중앙 산이고 진산인지요!!
그리고 여기 잠깐 보세요! 바위 보이죠! 낭산에 있는 바위중 가장 큰바위라 해 바위산이라고 해요!^^
여기 바위구덩이 보세요! 빗물에 의해 생성 된것으로 추정 되고요, 깊이는 50센티미터 정도고 연중 이렇게 물이 고여 있어요.
이제 우리의 낭산 답사 마지막 코스에 다 왔어요.
저기 탑 삼층석탑 보이죠! 저탑이 황복사지 삼층석탑이에요!
지금 위치는 낭산의 북쪽 이에요. 남쪽 사천왕사지에서 시작해 마지막 코스인 황복사지 삼층석탑에 도착했습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국보 제37호로 높이 7.3m로 3층의 석탑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분황사모전석탑, 문무왕대왕암 가기 전에 있는 감은사지삼층석탑, 덕동댐 건설로 인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고선사지삼층석탑 이후에 만들어 진 규모가 전기탑 보다 작아 진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이에요.
일제강점기 1942년에 수리공사 때 명문이 조각된 금동사리함과 함께 금제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불교 장식인 장엄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사림함의 명문에 이 탑은 신문왕의 아들인 효소왕부터 성덕왕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되어 있어요.
금제 불상 2구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국보 제79호 높이 12.2㎝인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과 국보 제80호 높이 14㎝인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2구에요. 이 2구의 불상에서 특이할 만 한것은 99.9%순금으로 이루어 져 있어요. 우리나라의 금동불상이라 하면 동이나 흙으로 만든 불상에 금도금을 한거에요. 이 탑에서 나온 2구의 불상은 전체가 금으로 이루어 져 있어요.
저 앞에 석재들이 보이죠! 황복사지에요!
황복사는 진덕여왕 8년 의상대사가, 의상대사 아시죠? 신라시대 대표 스님이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죠. 이 중 의상대사가 이 황복사에서 (출가) 스님이 되셨다고 해요. 의상대사는 불교의 한 종파 중 화엄종을 창시 했어요.
황복사지는 일제강점기 때 발굴이 있었고, 그 후 삼층석탑과 심하게 파손된 귀부와 당간지주가 남아 있었고 몇 기의 십이지신상이 땅에 파 묻혀 윗부분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어요.
황복사지는 2016년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시작해 총 5차례 진행 되었고, 많은 건물의 자취와 유물이 나왔어요.
하지만 거듭된 발굴조사에도 황복사지는 여전히 학계에서 논쟁이 이어지고 있어요. 건립시기와 건물 배치, 유물 성격은 물론 심지어 절터 명칭을 두고도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어요.
황복사지 라는 이름도, 학계에서는 '전해진다'는 뜻으로 한자 전하다전(傳) 자를 붙여 전 황복사지라고 해요.
예전 '황복' '왕복'글자 기와가 나오면서 황복사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하였으나,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서는 오히려 '인백사' 나 '선원사'글자 기와만 출토돼 논란이 지속되고 있어요.
발굴결과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화랑 터, 담장 터, 배수로, 도로, 연못 등 대규모의 유구(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가 발견되었어요.
2017년 2차 발굴조사 때 금당지 동측 기단에서 토끼, 뱀, 말, 양 4점의 십이지신상이 확인되었고요, 2018년 3차 발굴조사 때 금당지 북측 기단에서 쥐, 소, 개, 돼지 4점의 십이지신상이 추가로 확인 되었어요. 조각된 석재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으며 황복사지의 중요 건물로 보고 있어요. 축조 당시 십이지신상 탱석은 다른 왕릉에서 옮겨와 건물지의 기단석으로 다시 사용한 것으로 여겨져요.
저기 돌들이 둥굴게 있죠! 왕릉으로 추정하고 발굴을 했는데, 발굴 결과 미완성 된 가릉으로 밝혀졌어요.
황복사지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곳입니다.
이것으로 경주낭산 문화유적 답사를 마치겠습니다.
앞에 너른 황금빛 들판도 한번 보세요! 높은 푸른하늘도 한번 올려다 보시고요.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낭산과 황금빛 들판, 푸른하늘 그리고 이 자리에 우리가 이렇게 서 있습니다.
경주낭산 많이 사랑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