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술보 서문(丙戌譜 序文)
사람이 처음 태어났을 때는 누구나 타고난 양심(良心)과 친족(親族)을 아끼는 마음이 두텁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도덕(道德)이 후(厚 )한 데로 돌아가 정의(情誼)는 삼친(三親)으로부터 9족(九族)에 이르고 조상(祖上)을 그리는 마음은 기공복(期功腹)으로 부터 백대(百代)에 미치게 된다,
대게 종친끼리 화목(和睦)하게 지냄은 근본(根本)이요 족보(族譜)를 만드는 것은 맨끝의 일이다,
종친(宗親)끼리 화목하지 않으면 족보를 만들 수 없고, 족보를 만들지 않으면 종친을 찾아 존경(尊敬)할 길이 없다,
족보란 위로는 소목(昭穆)의 차례(次例)를 잇고 아래로는 많은 분파(分派)를 펴 나가는 것이다, 족보 만드는 것이 어찌 조상(祖上)의 가르치심이 아니며 조상을 추모(追慕)하는 정성(精誠)이 아니겠는가,
갑신(甲申<1824>)년 겨울 10월에 선조(先祖) 경원군(慶原君)의 시향(時享) 날을 맞이하여 여러 종친(宗親)이 모인 자리에서 의논(議論)하여 우리의 족보를 다시 간행(刊行)하기로 하고는 곧 여주(驪州) 용두리(龍頭理)에 모이고 팔도(八道)에 글을 보내어 알린바 각 고을의 종친들이 모두 호응(呼應)하니 이는 애족(愛族)하고, 조상(祖上)을 받드는 정성(精誠)으로 여러분이 발기(發起)하고 수고(手鼓)한 공(功)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시조(始祖)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은 고려(高麗) 목종(穆宗)때 벼슬하여 경흥군(慶興君)에 봉(封)하여젖고 우리 원주 이씨(原州 李氏)는 본래(本來)경주 이씨(慶州 李氏)에서 나왔는데 아찬공(阿湌公)으로부터 상서공(尙書公)까지 그 세대(世代)와 파계(派系)를 명백(明白)히 알 수 없는 것은 고증(考証)할 문헌(文獻)이 없기 때문이가,
경주 이씨 족보를 살펴보면 세차(世次)가 실전(失傳)되어 상서공(尙書公)을 경주이씨 휘 현복(諱 玄福)의 아래에 계차(系次)해 놓았고 공(公)을 휘 이금서(諱 李今書)의 외증손서(外曾孫婿)라 하였으니 휘 금서(諱 今書)의 외증손서가 어찌 9세손(九世孫) 아래에 계차(系次)할수 있겠는가? 년대(年代)와 문헌(文獻)이 크게 잘못 되었는데 어찌 이를 고증(考證)하여 잘못 전해진 것을 분별(分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려조(高麗朝) 경흥군(慶興君)으로부터 12세(十二世) 찬성공(贊成公)까지 내려오면서 세습(世襲)이 빛났었고 그 세 아드님 가운데 백씨(伯氏)는 부정(副正), 중씨(仲氏)는 중랑장(中郞長), 계씨(季氏)는 봉례(奉禮)로 본종(本宗)과 지파(支派)가 현달(顯達)하여 이루다 적(錄)을 수 없고 이조(李朝)에 와서 태종대왕(太宗大王)이 12대조(十二大祖)인 중랑장(中郞將)을 경원군(慶原君)에 봉(封)하였으니 “아 ! 아름답고 위대(偉大)하다,
공(公)은 고려(高麗) 말기(末期)에 혁명시대(革命時代)를 만나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수양산(首陽山)의 절개(節介)를 지켜 원주 치악산(雉岳山) 사전리(沙田理)에 은거(隱居)하였는데 그 기풍(氣風)이 은행나무에 맺었고, 그 절개는 여현(輿峴)에 빛나 곧은 충성(忠誠)과 높은 절의(節義)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비추인다,
개경(開京) 두문동(杜門洞)에는 이조(李朝)에 굽히지 않은 절사(節士) 72인(人)의 청절비(淸節卑)가 그 가운데 오현(五賢)이 있으니 공(公)은 그 한분 이시다, 아 ! 우리 자손은 그 절의(節義)를 기리어 사모(思慕)할뿐 연대(年代)가 멀고 멀어 세보(世譜)가 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축년(己丑年<1769>)에 비로소 족보를 만들었는데 그 세대(世代)를 보면 연문(衍文)과 오서(誤書)가 많으니 어찌 소목(昭穆)을 신중(愼重)하지 못 하였음인지 안타까이 여긴다,
호남(湖南)의 신축보(辛丑譜<1781>)는 교통(交通)이 험란(險難)하고 너무 떨어져 각파(各派)를 두루 올리지 못 하였으니 한 가지 흠(噷)이다,
그러나 지금은 각 고을의 종친(宗親)들이 각 파(派)의 명단(名單)을 만들고 또 보소(譜所)에 와서 일을 돌보니 조상(祖上)에 보답(報答)하고 추모(追慕)하는 성의(誠意)가 대단하다,
세대(世代)가 멀고 문헌(文獻)을 고증(考證)할 수 없어 만성보(萬姓譜)나 여러 가문(家門)의 기록(記錄)에 따라 보면 우리 선조(先祖) 상서공(尙書公)부터 익흥(益興)이씨로 되어 있으니 익흥(益興)은 곧 원주(原州)의 옛 이름인데 고려조에서 고을 이름을 다시 원주로 고친 뒤부터는 원주 이씨(原州 李氏)로 되어 있으므로 구(舊)원주 이씨 춘계(春桂)공의 후손과는 다르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종족(宗族)을 이룬 사람으로 족보는 만들고 종족을 우애(友愛)하지 않은 이가 없지만 우리 이씨의 이 족보가 이루어진 것은 참으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다행이다,
그러나 백형(伯兄) 사웅(師雄)씨가 여기에 뜻을 두어 일가(一家)사람 종선(種善)과 함께 해(年)를 두고 상의(相議)해 왔는데 종선이 불행히도 일찍 죽고 우리 집도 불행하여 백형마저 세상을 버리니 어찌 지하(地下)에서 천고(千古)의 한(恨)이 없겠는가, 이 사람이 천견박식(淺見薄識)으로 보소(譜所)의 끝자리에 참여(參與)하여 여러 성씨(姓氏)의 족보를 살펴보고 집에 간직한 세전(世傳)의 글을 거두며 명단(名單)을 모은 다음 경기 충청 강원 전라의 일가(一家)들과 뜻을 같이하여 위로는 몇 대동안 미쳐하지 못한 일을 마치고 아래로는 갈래를 가려 놓았으니 거의 종족끼리 화목하고 소목(昭穆)하고 존경(尊敬)하는 본이라 말할수 있다,
각 고을에 흩어져 사는 모든 일가들도 그 근원(根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할아버지의 자손(子孫)인데 자꾸 나뉘어져 소원(疎遠)해 지고 소원한데서 길가에 스쳐가는 사람과 같이 된다,
촌수(寸數)에 따라 친의(親誼)가 줄어드는 것이기에 족보가 전하여 지지 않으면 끝내는 자손(子孫)은 고아(孤兒)처럼 외로워진다,
족보가 만들어져도 만일 일가끼리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면 이 족보의 간행(刊行)은 한갓 문서(文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족보를 함께 하면서 족보 만드는 것만을 서둘지 말고 일가끼리 화목(和睦)을 본뜻으로 삼는다면 마을에 사는 자손들이 집에 들어서는 효우(孝友)하는 길을 생각할 것이고 나가서는 제경(悌敬)을 바르게 할것임에 끝없는 복록(福祿)을 받고 조상의 가르침을 먼 뒷날까지 이을지니 어찌 가문(家門)의 명성(名聲)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순조(純祖) 26年 병술(丙戌<1826년>) 가을 8월 하순(下旬)에
후손(後孫) 사동(師侗) 삼가 머리글로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