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왕과 남제왕 개중비직은 개로왕의 아들!"
남제왕 개중비직은 공주송산리 6호분의 주인.
일본이 자랑하는 일본고고국보 2호 "우전8번신사경"은 1932년에 공주송산리 6호고분군에서 가루베지온이 왜경들이 조선인들은 접근을 못하게 철통같은 경비를 하고, 완전도굴해간 작물이다.
다른 유물들은 1932년 도굴품을 1873년에 船山고분에서 발굴한 것으로 만들어 일본유물로 둔갑시키기 위한 거짖임이 들어남.
1873년에 벌굴했다면서도 보고서도 없든 것들을
1934년 글자를 판독했다는 보고서가 이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1932년에 6호분에서 도굴한것을
1934년에 일본고고국보2호로 만든 우전8번경의 판독발표와,
선산의 환두대도의 75자의 * * *鹵글자들을 판독했다는 논문 발표.
.
그러나 계미동경=인물화상경(우전신사경)은 48글자중에 斯麻라는 글자 때문에 우전8번신사에 숨겨두고 1934년부터 해독하고서는, 삼국사기를 허구의 역사서라 폄하하면서, 1951년에 6월에 일본고고국보2호로 내어놓은 동경(거울)이다.
이 청동경과 선산의 유물이라는 것들, 금동신발,금동관모, 등은
斯麻(武寧)王의 尙方(왕의 물건을 제작 관리하든 관청)에서 만든것으로, 무녕왕능의 유물들과 똑같은 유물들이다.
글자: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紫沙加宮時斯麻念長壽遺開中費直濊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比竟".
"사마대왕년503년8월10일 의자사가궁에 있는 남동생왕 개중비직이 장수하기를 바라면서, 예맥인 금주리와(다른 한사람) 2인등이 양질의 백동2백한으로 이경을 만들었다."
경에 목숨수자의 약자로 된것을 봉자라고. 빌유자를 보낼견자로.
위의 문장내용에 어느글의 퍼즐이 옳을가?
왜인들은 1.壽-奉자로, 遺-遣자로 만들어=
1. 斯麻念長壽遺開中費直 =사마가 개중비직이 장수하길 바라며.
2. 斯麻念長奉遣開中費直 =사마가 男弟王에게 길이 봉사하기
위하여, 開中費直을 보내어.
왜인들은 개중비직을 경을만든 장인으로 만들고 있다.
피장자를 알수있는 능이 2개가 있다.
1. 斯麻王 = 武寧王 능.
2. 6호분 = 斯麻 男弟王(담로) = 開中費直의 능이다.
무녕왕능의 제작자는 6호분의 주인인 사마의 男弟王 開中費直 이시며, 竟에 나타나 있는 대로 건강이 약하였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러기에 개중비직이 後生을 준비하여, 자기 능(6호분)을 정성들여 만들었는데, 무녕왕이 갑자기 서거하자, 자기 능의 상좌에다 서둘러 무녕왕 능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6호분은 벽돌도 고급이고 정교하게 빈틈없이 만들어지고 정성들여졌는데, 무녕왕능은 부실공사의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고 있다.
남재왕의 지휘하에 무녕왕과 왕비를 안장하였고, 사마 왕릉의 입구를 529년 막은 마지막 벽돌이 6호분의 벽돌(임진년=512년)이 만들어진 벽돌 이었다.
남제왕은 빈틈없는 성격의 소유자로써 무령왕의 지석을 기록들을 남기신 분이라, 6호분에는 더 자세한 역사서가 매장되엇었을 것을 일본인들이 도굴하여다가, 공주의 마한의 역사로 = 일본고서기
만들고, 공주의 비류백제의 역사로 = 일본서기를 만든 것이다.
환두대도의 글씨.
(治)天下獲(復) * * * 鹵大王世奉爲(事) 典曺人名(無)利弓
八月中用大鐵* 四尺*刀 八十練六十* 三寸上好*刀
服此刀者長壽 子孫**得三恩也 不失其所銃 作刀者 伊太*
書者張安也. ***결자는 百濟蓋.
이 환두대도는 蓋鹵大王이 아들 開中費直(담로)에게 하사한 것.
蓋鹵大王世 辛亥年, 471年.
船山의 환두대도의 "蓋鹵大王世"(471년경)의 글과 우전신사경이라는 경에 "斯麻 大王年" 癸未年(503년)이라는 글자는 두유물이 한곳 6호분의 유물임을 입증할수있는 것이다.
사마와 개중비직은 개로왕의 아들이라는것.(1914년(대정3년)에 강효석이 만든책 典故大方왕력편)에 = 斯麻는 蓋鹵왕의 아들이라고 되어있으며, 癸未竟에 開中費直은 斯麻의 男弟라고 새겨져있다.
계미동경속에 斯麻라는 글자때문에 일본의 역사로 만드는데, 걸림돌이되고 도굴품이라는게 들어나니까? 사마를 뒷전으로 숨김.
삼국사기의 역사(사마가 무령왕 이름)를 허구의 역사서라고, 호도하고 비방하면서, 癸未銅竟을 우전8번신사에 감추어두었다가
1951년에 우전8번신사경이라고, 일본의 고고국보 2호로 만들어 내어놓은 竟이 癸未銅竟이다.
6호분은 무녕왕능 보다 먼저 제작되었으며, 그 능의 주인이 무녕왕능을 만들었으며. 그는 권력을 가지고 있든 담로세력의 권력자 남제왕 개중비직의 작품이다.
6호분의 주인은 蓋鹵대왕의 아들이며, 斯麻의 남동생 담로왕 이었든 開中費直이시다.
계미동경의 글자 사마라는 글자때문에 1932년부터~1971년까지
삼국사기의 역사를 허구의 역사서라고 부정하며 왜곡하였으며,
1971년 무녕왕능지석발굴로 정확한 역사가 확인된 이후부터는
사마의 출생의 비밀 "개로왕의 동생 곤지가 461년 만삭이 된 개로왕의 왕비를 아내로삼아 일본청병사로 같이 가든 중에 오비야(가가라사끼)의 동굴에서, 사마를 낳았다." 허구의 전설을 만들어 냄.
斯麻는 倭에 간일도 없는데, 癸未銅竟의 사마때문에 왜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거짖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마가 그곳에서 자라고 결혼하여 낳은 자손들이 일본천황이라는
허구의 역사를 만들다.
그리고 첫째부인과 같이 백제에 건너와서 40세에 왕에 등극하였다고 만들고 있다.
우전8번경은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할적에 주민이 받친 유물이라면서, 아무런기록도없이 오랜세월이 흘러 1934년에 해독을 시작했다는 것과 선산의 유물도 글자해독했다는 발표 논문이 1932년 6호분의 유물임을 입증. 三韓때가 503년 以後인가?
환두대도글자= 개로대왕(471년)아들= 동경의 사마대왕 남동생(503년)=개중비직.
개로와 개중비직의 관계를 몰랐기에 글자 발표된것.
1934년부터 계미동경의 해석을 시작하고 사마라는 글자가 들어나면 6호분의 유물이라는 것이 탄로 나니까? 삼국사기를 부정하였든 것이며, 우전팔번신사에 모셔두었다가 1951년에 우전팔번 신사에서 찾아낸 국보유물로 만듬.
-제멋대로 조작하고 간교하게 가필하여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도굴유물을 왜곡하고 감추어야, 역사앞에서 들어나는 거짖.
지금도 한국의 사학자라는 분들(이병도후예)은 일본인들의 주장을 답습하여 등극 이후에 얻은 젊은 여인이 왕비라는 것--.
그리고
첫째부인은 홀로 6호분에 묻혔다는 억측의 조작들의 역사를 지어내고 있다.
남제왕은 百濟의 담로의 諸侯중의 한분이 틀림없으며, 그 王陵이 6호분이다.
6호분은 사마왕의 侯王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든 담로왕 이었다.
사마왕은 삼근왕이나 동성왕보다 나이가 더많은 분이다
사마왕도 웅진지척에서 담로왕으로 군림하시다가, 동성왕의 사후에 쉽게 왕에 등극이 가능했든 것.
왜에서 귀국 한 것이 아니다.
무령왕의 동경의 글자
"尙方作竟 眞大好 上有仙人 不知老 渴飮玉泉飮食棗 壽如金石兮".
(상방작경 진대호 상유선인 불지노 갈음옥천 음식조 수여금석혜)
"상방에서 거울을 만드니 참으로 좋구나. 하늘의 선인들은 늙지도않고, 목마르면 옥천에서 물을마시고, 배고프면 대추를 먹듯이, 이거울을 보는사람은 생명이 쇠와 돌같이 영원하리라."
癸未銅竟과 무령왕능의 竟과 묵대경들이 後韓鏡이아니라,
선산의 유물들과 모든경이 무령왕의 尙方(왕의 물건을 관리 감독하든관청)에서 만들어진 유물들이다.
백제의 유물들의 섬세하며 무척 정밀하였다.
그리고 사마왕의 목관 나무가 일본산 금송이 아닌 백제의 관목일 것이다. 철저한 검증이되면 모든것을 가려질것.
무녕왕능의 유물들=선산의 유물들, 묵대경등, 우전신사경등은
무령왕의 상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재질과 만든 수법등을 정밀감정 분석하면 나타날것.???)
上其의 유물들에 글자가 없었다면 숭두리째 倭의 역사가 될뻔한 무서운 역사의 반란이며 음모였다.
나라는 이완용이 팔아먹고, 역사는 이병도가 팔아먹어,
倭의 고서기는 웅진의 馬韓의 역사로 쓰였고, 일본서기는 웅진(공주)의 비류백제의 역사로 만들어진것.
2016년 1월. 왕눈벌. 010-3403-3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