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란 밤송이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 찍은 사진이 붙은 학생증이 아마 아직도 고향의 부모님 댁에 있을 것이다. 밤톨 모양의 빡빡 깍은 새파란 머리, 눈은 동그랗고 입은 야무지게 다물고 있다. 얼굴 전체가 정돈된 모습으로 귀엽게 생겼다. 키도 몸집도 조그만 해서 갓 입학했을 당시 처녀였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귀여움을 퍽 많이 받았다. 벌써 삼십 이 년 전의 일이다. 일단 야무졌던 것만은 틀림없다. 야무지다는 말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의 성질이나 생김새, 행동 따위가 빈틈이 없이 꽤 단단하고 굳세다.’라고 되어 있는데 뜻 그대로였던 것 같다. 사진을 보면 일단 머리며 얼굴 표정이 단단하게 보이고, 의지도 쉽게 굴복하지 않는 성정을 지녀 살아오다 고비에 맞닥뜨려도 바로 꺾이는 일이 없고, 설사 꺾였다 해도 시간을 두고 다시 일어서는 오뚜기 같은 오기를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빈틈없이 완벽을 기하려는 성격을 표출해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충돌을 빗기도 한다. 성적은 우수했다. 입학 당시에는 별로 잘하진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중학교처럼 등수를 매기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경쟁이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못했던 터라 평가방식이라든지 당시 우리를 둘러싼 주변환경이라든지의 변화가 왔어도 심층적으로 의식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들의 자식들의 공부에 대한 참여방식이 다른 부모들과는 달랐다는 점도 주효하다. 원래가 없었던 집안이라 틈만 나면 학교에 와서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부모들과 격이 같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심은 어느 부모에게도 뒤지지 않으시지만 부담은 가지지 않아도 좋았다.
점심 식사 후 운동장에는 까만 색깔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일으키는 먼지로 한바탕의 북새통을 이루었다. 언덕 위에 자리한 학교의 운동장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이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중학교 운동장보다도 작았다. 그래도 축구를 하는 중학생들과 축구장을 가로질러 설치된 농구장에서 농구를 하는 고등학생 형들의 거친 몸짓이 쉴새없이 다가왔고, 우리 꼬맹이들은 한 발을 다른 쪽 허벅지 위로 바짝 치켜올린 채 철봉대가 놓여있는 운동장 한쪽 귀퉁이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닭싸움을 벌리고 있었다. 대개 마지막까지 두서너명이 양편에 남아 각축전을 벌였는데 게중에 난 항상 남아있었다. 그렇게 해서 매번 이겼는지 졌는지, 얼마나 이겼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다리가 아파 곧 빠질 것 같아도 난 이를 악물고 쉽게 져주거나 발을 내려 승부를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웬만하면 걸어다녔다. 버스로 가면 여덟 정거장이었는데 차비를 아끼기 위해 학교 뒤로 난 산복도로를 타고 집까지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통학했다. 아낀 차비는 별도로 쓰지 않았다. 회수권(버스승차표)이 그렇게 해서 다 떨어지면 부모님에게 돈을 탔다. 대신 친구들과 한 시간 반 정도의 길을 지금 돌이켜보면 꽤 즐겁게 다닌 것 같다. 가방은 무거워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시 도로에는 지금처럼 지하철이나 대중교통이 잘 발달되지 않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많은 사람들과 학생들로 늘 활기가 찼다. 그 말은 볼거리가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학생들의 주머니를 노리고 도로 곳곳에 나와 진을 친 각종 행상인들은 그 종류도 다양해 당시의 학생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대개가 리어카로 행상을 꾸렸는데 지금은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번데기와 쥐포 등을 연탄불에 구워 팔고, 설탕으로 녹여 만든 각종 모양새의 상품을 걸어놓고 복권처럼 표를 집어 맞추면 가져가게 하는 것부터 어른들의 도박에 해당하는 동전을 놓고 회전판의 숫자와 동일한 숫자가 되면 다섯 배의 돈을 주는 사행놀이판, 그 외에도 집에서 만든 듯한 각종 생활용품이나 장난감, 의류 등을 거리에 늘어놓고 팔았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심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학년 때 처녀였던 담임선생님은 얼굴이 예뻐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학생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은근히 좋아했던 선생님은 그러나 화가 나면 남자선생님들처럼 몽둥이를 들고 엉덩이를 때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힘도 좋아 맞을 때 긴장하지 않으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그런 양면성을 지닌 선생님의 눈에 뜨인 것은 다름 아닌 어느 날 주번일지를 적어 검사를 받던 날이었는데, 선생님이 보시기에 정자로 또박또박 쓴 글씨가 마음에 드신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주번일지를 도맡아 기록하게 되었는데 선생님 곁에 있는 기회가 다른 아이들보다 많아 기분이 우쭐해지게 되었다.
선생님은 남학생이 다니기에는 창피할 곳으로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선생님이 맡은 과목이 과학인지라 실험실로 가면 선생님이 혼자 사용하시는 연구 기자재실이 실험실 한 귀퉁이에 있었는데, 하루는 그곳으로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가보니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양장점 위치를 가르쳐주시더니 그곳에 가서 옷을 좀 찾아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창피한 줄 모르고 마냥 순응한 채 옷을 찾아드렸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나중 겨울방학에 한 통의 연말 카드가 날아왔는데 눈에 익은 예쁜 글씨가 적힌 선생님이 보내신 카드였다. 선생님은 그렇게 나를 생각해주신 것이었다. 집에 책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부를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 일을 못하시는 할머니와 밑으로 동생 둘이 더 있어 흑백 텔레비전과 책상이 같이 있는 방에서 공부하기는 사실상 어려웠고 그나마 나머지 방 하나는 늘 냉골에 방 자체가 칙칙해서 공부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수업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대충 저녁을 때우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배가 고픈 시절이었다. 장남이라고 부모님은 내 손에 조금씩 용돈을 쥐어주셨다. 그 돈은 몇 백원이었지만 당시 버스 차비가 삼십 원 했으니 그 돈이면 웬만한 것은 사 먹을 수 있었다. 쉬는 시간 십 분 안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달려가 펄펄 끊인 라면을 국물까지 다 마시고 선생님께서 수업 들어오시기 전까지 교실로 돌아온다. 당시 매점에는 밀가루를 기름에 튀겨 빵을 만들어 겉에 설탕을 바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빵 안에 단팥을 넣어 팔았는데 이 빵들도 잘 팔렸지만 그보다는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도는 꼬들꼬들한 면발이 입안에서 녹는 뜨거운 라면의 인기가 제일이었다. 그 라면의 면발이 먹을 때 꼬들꼬들한 맛을 내고 짧은 시간 안에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은 라면 삶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사전에 물에 담궜다가 꺼내놓는데 만지면 눅눅한게 물기가 남아 있었다. 물과 수프를 먼저 넣고 끊으면 면을 넣었다가 십 초쯤 후에 바로 꺼내어 그룻에 부어주는데 계란까지 넣어진 라면은 보기에도 세차게 구미를 당길 뿐 아니라 맛도 아주 좋았으며 먹고나면 가지게 되는 포만감은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부리나케 달려 교실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으면 뿌듯하게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감이 안 좋으면 결코 감행해서는 안 되는 스릴만점의 식도락이었다.
지금까지는 계속 일 학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험을 잘 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다른 학생의 답안지를 본 일이 있다. 그 학생의 아버지는 선생님이셨는데 뛰어난 성적을 내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경쟁자인 것만은 틀림이없었다. 도덕은 만점이 잘 나오는 과목이다. 선생님은 시험 문제를 어느 특정 참고서에서 모두 발췌, 출제하셨는데 미리 답을 다 알고 치루는 기분이 들어 부담이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점 때문에 미루고 놀다가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아 시험 때 정답을 놓고 오히려 고민을 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봄볕이 옆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노곤한 오전 이었으리라.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옆에 앉은 진익은 문제를 다 풀고 난 다음 답안지를 덮어놓으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고개를 돌렸을 때 서로가 쓴 답을 전부 비교해 볼 수 있었다. 두어 개가 다른 답이었다. 얼른 시험지를 들추어 문제를 다시 훑어보는데 진익이 쓴 답이 아무래도 정답 같았다. 전날 도덕 시험을 얕잡아보고 잠시 딴 짓하느라 밤늦도록 공부를 했지만 만족할 만큼 문제를 다 숙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진익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얼른 답을 수정한다. 나중에 점수를 발표하는 날 도덕 점수는 이십 점 만점에 이십 점이 나왔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는데 남들은 꿈에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덕호는 항상 몸에서 냄새가 났다. 뻐덩니에 눈도 흐리멍덩했는데 어딘가 좀 모자라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렇지만 친구들은 덕호를 외면하지 않아 사이가 비교적 좋았다. 덕분에 덕호도 잘 지내 나중에 대학에 같이 진학, 교정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런 덕호를 상대로 국어과목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장난 걸기를 즐겨하셨다. 당시 덕호는 키가 작아서는 아니고 하여튼 교탁에 붙은 맨 앞 책상에 앉아 있었다. 국어담당이신 박달수 선생님은 올백을 하셔서 훤하고 넓은 이마에 큰 매부리코, 파란 면도 자국이 선명한 전체적으로 큰 얼굴에 큰 몸집을 교탁 뒤 의자에 앉으신 채 수업을 하시다 말고 심심하다 싶으시면 덕호 얼굴에다 침을 ‘퉤’하고 뱉으시는 것이다. 그리곤,
-에이 더러운 자슥, 세수는 했나.
라며 욕을 하듯 말씀하신다. 물론 뱉는 흉내만 낼 뿐이지만 선생님 말씀을 듣느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차에 갑작스레 터져나오는 선생님의 우스꽝스런 모습에 그만 배를 잡고 웃느라 교실 안이 한바탕 소란스러워진다.
-에이 퉤, 퉤.
두어 번 더 침을 뱉으시는데 처음에는 가만히 맞고만 있던 덕호도 급기야는 두 팔을 들어 막는 시늉을 해서 선생님의 우스꽝스런 동작에 재미를 더한다. 교실 안이 갑자기 웃는 소리로 열기에 휩싸인다. 귀를 기울이면 다른 반들도 가끔씩 열기에 휩싸인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때는 조금만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교실이 떠나가라고 한바탕 크게 웃던 시절이었다.
이 학년 담임선생님은 그 전에 몇 번 먼발치서 본 적이 있는데 키가 껑충 커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분이셨다. 나중에 상견례를 위해 교실에 오셨을 때 앞에 앉아 조심스레 올려다보니 약간 뻐덩니셨다. 그러나 깡마른 체격대로 선생님은 매우 깐깐하신 분으로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앞으로 학교 생활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위협으로 엄포를 놓으셨다. 학생 하나하나 염두에 두신 듯 삼월 첫 시험이 끝나고 개개인의 성적이 일목요연하게 적힌 학급성적표를 들고 오셔서 교탁으로 부르시는데,
-성적이 많이 올랐어. 잘 했다. 들어가도 좋다.
성적이 나쁘거나 전 학년에 비해 떨어진 학생들은 들고 오신 가늘고 단단한 뭉둥이에 의해 혼쭐이 났다. 선생님은 모든 학생들을 사전에 꼼꼼하게 점검하신 듯 했다. 세계사는 나의 밥이었다. 체질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했던 탓이라 공부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적힌 책을 읽듯 했다. 내 생애 전반을 통틀어 학교생활 중에 그렇게 자신했던 과목은 없었던 것 같다. 한 번도 만점을 놓친 적이 없었던 과목이었다. 세계사 시험을 치고난 후면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서두르는 행위는 참고서를 꺼내 문제의 답을 확인하는 것인데, 틀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하느라 가슴이 파닥파닥 떨리는 설렘과 기쁨의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흐릿하지만 짜릿하게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만점임을 알면서도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점수를 확인할 때면 기쁨과 통쾌함으로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된다. 만점을 받는 학생이, 그것도 한 해 내내 받은 학생은 우리 반에 서 나뿐이기 때문이다.
세계사 선생님은 처음 뵈었을 때 저 멀리 아프리카인을 닮은 듯한 외모로 인해 약간 기이한 영향을 받았다. 머리카락은 미장에 막 다녀오신 것처럼 꼬슬꼬슬했고 얼굴은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늘 누렇게 떠 있었으며, 입술은 두껍고 늘 잠이 들깬 듯한 눈동자와 흐느적거리는 말투는 경우에 따라서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에 경청하기보다는 잠을 부를 수도 있었다. 마치 약을 먹고 수업을 들어오신 분 같았다. 그것도 수면제. 수업을 듣는 일년 내내 한 번도 또렷한 눈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술은 드시지 않았다. 맨 앞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관계로 그 점은 충분히 알 수가 있었고, 약을 드셨는지 여부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선생님은 칠판에 판서를 해나가면서 설명을 하시는 스타일이었는데, 어쩌다 보면 잠에 취해 눈을 감으시면서 마치 뒤로 넘어갈 듯 휘청거리기까지 하셨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면 수업 중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신 것 같다.
-난 평소에도 이렇게 잠에 취한 모습이 많은데, 담뱃불 붙이는 잠시 동안에도 잠이 들어 라이터에 머리를 태울 뻔한 적도 많아.
라며 그 말씀을 하시는 중에도 목소리는 취한 듯 약간 절어 있었다.
이 학년 때는 성적에 관한 한 깃발을 날리는 해였다. 만점을 받는 과목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성적도 급상승을 했다. 늘 오등 이내에 들더니 학년이 마칠 즈음에는 반에서 이등까지 올라갔다. 한 반에 육십 오명이 수업을 받던 시절이었다. 성적표가 나오면 세 가구가 세 들어 사는 집안은 희비가 엇깔렸다. 앞집에 사는 동갑내기 여자애는 물론이고 그 애의 남동생은 그 집 엄마의 지청구를 귀가 아리도록 들어야 하는 것이다. 세계사, 도덕, 국사, 수학까지 만점을 받은 달에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성적표를 놓고 앞집에 들으란듯 점수를 읽으시며 입을 다물 줄 모르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공부에 취미를 들인 것은 이때부터였다.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아 참고서와 문제집을 사보는 일은 또래의 아이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 담임선생님은 전과 같이 성적표를 들고 오셔서는 한 명 한 명 부르셔서 성적을 확인하고 성과를 논하는 시간에 의례적으로 날 부르셔서 칭찬을 하셨다. 육십 여명이나 되는 학급 안에서 성적이 가장 많이 올랐기 때문이었다. 늘 무뚝뚝한 표정의 어떤 때는 무섭기도 했던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그렇게 인자하게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성적이 올라 공개적으로 칭찬을 받았던 일은 초등학교 육 학년 이후 처음이었다. 학교에서는 과목 평균이 팔십오점 이상이면 우등상이라고 해서 초록색 학교 상징이 하얀 색 중앙에 선명하게 찍힌 상장을 매달 주었는데, 많은 학생들 앞에서 매달 받던 일은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성적이 조금 모자라 상장을 못 받은 달도 있었다. 그것은 고향의 부모님 집에 아직도 보관중인 상장을 보며 기억을 하기 때문이다.
삼 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일학 년 때 한문을 가르치셨던 분인데 원래 영어가 주전공이고 한문을 부전공쯤으로 대학에서 공부하신 것 같다. 그러나 한문 시간에 칠판에 판서하시는 한문 글씨는 명필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잘 쓰셨다. 선생님은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자르지 않고 기르셨는데 전반적으로 살이 좀 찌셔서 그런지 둔해보였다. 머리에 늘 기름을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바르시고 얼굴에는 기름진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코가 큼지막한 채 약간 날이 선 터라 욕심이 많게 보였다. 둔하게 보였을 뿐 실제의 선생님은 꽤 날카로운 분으로 수업 도중 약간의 무질서만 보여도 교탁 앞으로 불러내어 혼찌검을 내셨다. 주로 뺨을 때리셨는데 맞는 애들은 하나같이 엄한 선생님의 지도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삼월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가정 방문이 집집마다 이루어졌다. 한 친구네 집의 방문이 끝나면 그 친구의 안내로 선생님은 다음 학생의 집을 방문했다. 우리는 서로의 집에 놀러간 적은 없지만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서로간에 알아야 할 것은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다. 점심 시간때 책상 위에 내놓는 도시락과 반찬을 보면 대개 집안 사정을 알 수 있었고, 비록 획일화된 제복같은 검은 교복이지만 옷감의 질과 다림 정도, 그리고 옷에서 풍겨오는 향기로운 냄새 등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잘 사는 집 애들은 대개 얼굴이 뽀얗고 이빨이 표백한 것처럼 희었으며, 자랑을 하려고 그랬는지 교복 안에 받쳐 입는 옷은 대개 남방으로 가난한 집 애들은 가지기 어려운 옷이었다.
기억이 희미한 탓인지 선생님이 시간을 내셔서 집을 방문한 것만은 사실인데 그 집이 정확히 어디인지 짚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생님이 다음 학생 집에 가기 위해 대문을 나설 즈음 어머니께서 약간의 돈을 차비하시라며 선생님께 드린 사실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찾아오시는 손님이나 친척 어른들에게 차비하시라며 돌아가실 때 돈을 쥐어드리는 게 인사였긴 했지만 그 장면을 보고 얼굴이 약간 붉게 달아올랐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다 지나간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