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세월 동안 이어져오며 열망골의 역사성은 물론 조상들의 얼과 혼을 담아 온 마을의 고유지명(地名)이
점차 잊혀지며, 미래 후손들에게 승계의 어려움이 있는 듯하여
안타까운 심정으로 마을 어르신들과의 세세한 고증 확인 후 기록에 남기는 바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구룡리
1750년에 구사리(九士里),1789년에 상구사리(上九士里)와 하구사리(下九士里)로 분리되었다가
1845년 구사리(九士里)로 다시 통합되고,1910년에 상구리(上九里)와 하구리(下九里)로 다시 분리되었다.
九里의 뜻은 문의현에서 9리(里)가 되는 거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
또한 九龍里는 九里의 "九"와 五龍洞의 "龍"자를 따서 만들어진 지명인 듯 하다.
*열망골
지세가 아늑하여 따뜻하여 과일이 열매를 잘 열고 또한 많다하여 처음에는 [열매골]이라 불렸는데,
발음을 쉽게 하려는 습성상 점차 열망골로 변형된 듯 하다.
또한 강화崔씨,은진宋씨,동래鄭씨 등 열집(十家口)이 망해서 마을 떠났다하여 유래된 지명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아마 약 400년 전쯤 열망골최씨의 시조격인 란선(蘭善)할아버지께서 문의면 덕유리 진주강씨(晉州姜氏) 댁과
혼인을 맺으면서 경기도 포천으로부터 문의로 이주하게 되는데,
-조선시대 중엽에는 남자가 결혼시 일정기간 처가살이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응허,란선할아버지 양세분 및 강씨할머니
께서 병자호란으로 줄초상이 나면서 집안은 풍비박살이 나고 결국 열망골에 터를 잡고 눌러앉아 살게 된 것으로 보임-
응허할아버지께서 중앙정계를 주무대로 활동하셨던 거물이자 명문 양반가이고 부잣집 망해도 3년은 간다고 재력 또한
남다르다보니 자손이 번성하게 되고,
결국은 기존에 터를 잡고 살던 강화최씨,은진송씨,동래정씨 등이 점차 밀려나 마을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
1. 샘터마을 ; 마을 가운데 있는 샘터를 유래로 지어진 이름.
.
2. 도 란 말 ; "돌아가다"라는 의미에서 파생된 말로 추정되며 즉 쭉 돌아가면 위치한 마을이란 뜻.
3. 오룡동,작은 열망골;五龍洞은 다섯마리 龍이 여의주 한개를 놓고 서로 쟁취하려는 형상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만산도(萬山圖)에 보면 "珠爭"이라는 표현이 있다.
산세가 좋고 五龍의 정기가 있어 명당자리가 많다는 속설에 예로부터 묫자리가 많다.
본디 오룡동은 열망골 전체를 일컫는 말이었으나,요즘은 작은 열망골로 한정하여 오룡동으로 칭함이 정례화된 듯.
4. 닥 밭 ; 한지(韓紙)재료로 쓰이는 닥나무가 많이 자생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어릴 때 닥나무 껍질로 팽이채를 만들어 쓸려고 종종 닥나무를 베러 간 기억이 있다.
지금도 닥나무가 일부 자생 서식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5. 수통골 ; 닥밭 산에서 바라보면 산덕리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용이 길게 누워있는 형상이 보이는데,
용이 오줌싸는 부분에 해당되는 골짜기라하여 붙여진 이름.
6. 잿 뜰 ; 옛날 주변에 옹기와 기와를 굽는 시설이 있어 잿가루가 많이 날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지금도 땅을 파면 옹기와 기와파편이 많이 발견된다.
7. 여우골 ; 지금은 멸종되어 볼 수 없는 진귀한 동물이 되었지만, 예전에 여우가 많이 살아단다.
8. 큰용굴 ; 70년대에 동무들과 자주 놀러가던 정겨운 곳이었는데,
지금은 광산 개발로 흔적도 없이 파괴되어 사라지고 대신 흉물스러운 거대한 구덩이만 남아 있다.
9. 괴실고개 ; 급굴곡, 급경사에 응달이라서 겨울철만 되면 도로가 얼어붙어 통행시 위험천만했는데,
작년 새롭게 도로가 개설된 후 불편한 점이 많이 해소되었다.괴실삼거리에서 구룡초교로 넘어오는 고개.
10. 황송골 ; 예전 황금빛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 황송골이라 부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황송(黃松)은 흔적도 없고 대신 외래종인 리끼다송(松)만 무성해 아쉽다.
11. 모래산 ; 큰 바위와 흰 모래 둔턱이 많아 붙여진 이름.
수몰되기 전 노루실방죽과 호디기바위,장고개를 지나 문의장터를 가자면 꼭 거쳐야하는 산이었는데,
지금은 접근성이 떨어져 그저 바라보아야만 하는 안타까운 곳이다.
국유림이었는지 구사리 방향쪽 양지 바른곳에 과거 가난한 사람들이 몰래 묘를 많이 써 큰 공동묘지가
형성 되었는데, 늦은 시간에 부근을 지나자면 왠지 오싹했던 기억이 있다.
12. 남산재 ; 예전 문의장터를 갈 때 꼭 거쳐야하는 곳으로 장터에서 보면 남쪽에 있는 산,즉 남산(南山)에 있는 고개.
13. 진등날 ; 문의장터에서 피미 뒷산을 지나 산 날망을 타고 남산재로 이어지는 도로로,질퍽하고 험해 진등날이라고 함.
예전에서 문의에서 열망골,염티,샘골로 이어지는 주요도로(지금으로 치면 국도)로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광산 트럭까지 오갔으나 지금은 거의 이용자가 없어 흔적만 겨우 남아 있다.
14. 대산소 ;란선(蘭善)할아버지 합장묘와 2세 의룡(義龍) 의종(義宗)할아버지 산소가 위치한 곳으로
열망골최씨(崔氏)에게는 뿌리가 되는 성지(聖地)이다.
제실 완공 후 시제를 실내에서 지내게 되면서 점차 후손들 왕래가 뜸한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15. 연말방죽 ; 일제시대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축조된 방죽인데, 하류지역 수몰로 지금은 효용성이 없어서인지
수십년간 돌보는 이 없이 버려져 담수된 물도 거의 없고 억새만 무성하다.
행정구역상 구룡리에 속하나 정작 상장리 피미 입구에 위치한 것도 방치의 한 원인이 될 듯.
양쪽 마을의 협조로 어릴적 뱀장어와 말풀이 서식하는 생태방죽으로의 복원이 꼭 필요하나
주민은 물론 마을지도자마저 환경,생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해 안타깝다.
16. 연말뜰 ; 작은 열망골 앞 뜰. 지명 유래는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어 계속 조사 중.
17. 오룡골 ; 대산소 맞은 편 골짜기로 다섯마리 용(五龍)이 잠시 휴식을 취했던 장소라 함.
사실 개인적으로 조부모 및 부모의 산소가 있는 곳으로 의미가 깊은 곳인데,
소시적부터 어른들이 "오릉골"이라 부르며 활자화된 것이 없어
문의 남산재 방향에서 보면마을 오른쪽 방향에 있는 골짜기라하여 "오른골"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 어른들에게 고증을 거치던 중 31세손 무정님(진영군 부친)이 정확한 유래를 말씀해줘
비로소 확정하여 기록에 남긴다.
18.구정토골 ; 샘고개 넘어 마을 버스승강장 앞 뜰로 옛날 절이 있었다 함.
*정토(淨土)-인간 사바세계인 예토(穢土)와 대비되는 곳으로
부정잡예(不淨雜濊)가 사라진 청정한 불국토(佛國土) ,불도 수행의 도량 *
절을 뜻하는 "정토"에 "옛"을 의미하는 구(舊)가 접두사로 붙어, 옛날 절터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
19. 양세 정려각(兩世 旌閭閣)
20. 마을회관 겸 경로당
21. 성 재 ; 삼국시대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토성(土城)이 있는 자리로 지금도 산덕리 쪽으로 토성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정상 부분에 인공으로 만든 듯한 잘 정비된 넓고 평평한 공터가 있는데,
멀리 대전과 청주가 보일 정도로 방팔발방으로 시야가 트여 있어 한 때 혹 봉화대로 쓰여진게 아닌가 추정된다.
22. 제 실,숭모제(崇慕祭) ; 란선(蘭善)할아버지 시제 모시는 곳.
23. 산덕고개; 제실 방향에서 아랫산디기(下山)로 넘어가는 고개로 구룡초등학교가 운영될 80년 초만해도 산덕리
학생들이 등하교를 하는 주요 도로였으나, 지금은 초등학교 폐교와 도로의 신설으로 거의 사람의 왕래가 없을
정도로 효용성이 사라진 추억의 고개이다.
24. 시루봉; 산덕고개와 붙은 송골 방향의 산 으로 떡을 찌는 시루 모양을 닮았다 붙여진 이름.
25.부성이마골; 부성이마란 재래식 부엌에서 아궁이 위에 가마솥을 걸 때 밑 부분이 걸쳐지는 부분을 일컷는 말으로
반드시 넓적하고 튼튼한 돌이 필요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제실 맞은편 아래 -32세손 최종렬님 농가주택 옆 산자락_ 행상(상여)집이 있었는데
위 산쪽으로의 작은 골짜기로 자연석이 꽤 많아 그 돌들을 채취하여
주로 부성이맛돌로 사용하다보니 붙여진 이름이다.
26. 문정골 ; 부성이마골 아래 골짜기로 40여년 전 현 이장인 오원국님의 토종닭 사육장이 있었고, 겨울이면 마을 사람들이
수시로 땔감 나무 마련을 위해 들락거렸던 추억의 골짜기지만 지금은 인적이 뜸하고 더군다나 숲마져 울창해져
쉽게 접근조차 어려운 과거의 장소가 되었다.
27.송곳봉; 말그대로 송곳처럼 뾰족한 마을 최고봉으로 붓끝처럼 생겨 문필봉이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문필봉이 있는 마을에는 학문의 힘으로 세상을 이끌 뛰어난 학자가 배출된다는데,
머지않을 시일내에 후손들 중에서 시조 치원할아버지에 버금갈 세기의 문장가 출현을 기원해 본다.
28.불당골;송곳봉 줄기 문정골 다음 골짜기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인 까막득한 옛날에 사찰이 있었다 한다.
29.개골짝; 지금은 개간되어 과수원 용도로 쓰여 옛 모습을 잃었지만 예전 여름철 비온 후면 오이꽃버섯과 싸리버섯을 채취
하러 들락거렸던 작은 골짜기다. 비가 내리면 물줄기가 계곡을 이뤄 잠시 흐르다가 건조해지면 물줄기가 끊겨
건계곡이 되는 통에 붙여진 지명인 듯하다.여기서 "개"는 온전하지 못한 어설품을 뜻하는 의미의 접두사이다.
닥밭에서 도란말 앞부분을 지나 구사리 방향으로 위치한 작은 골짜기다.
30.소토고개;도란말에서 송(宋)씨댁 옆길을 지나 작은 열망골로 넘어가는 고개.
31.날 망; 도란말 뒷 동산 정상의 평평한 부분.
32.소토골; 소토고개에서 작은 열망골 넘어가는 골짜기.
33. 귀녁골 ; 작은 열망골 뒷편 청남대 진입도로와 접한 골짜기로,
이름만으로도 대낮에 처녀귀신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다.
34. 학교산; 남산재에서 작은용굴방향 산으로 과거 수몰 전에 문의초교에서 관리하던 산이라 학교산이라 불리며
해마다 식목일 쯤이면 단체로 나무심기를 했던 곳인데, 지금은 개인에게 불하되어 별스럽게 관리하는 통에
접근이 어려운 산이 되었다.
35.작은용굴; 너무 유명한 곳이라 구태여 부연설명이 필요없는 곳으로,
열망골이 고향인 사람이면 누구나 각기 애틋한 추억과 사연을 갖고 있는 마을 최고의 명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