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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당시 도봉동은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로서 마을세대가 총 500가구의 빈촌으로 타처에서 온 이주민이 많았고 특히 호남인은 일용으로 연명하는 영세정착민으로 생활 하면서 고달픈생활을 하던차 그해 정월대보름날에 열다섯 사람이 모여 시름과 외로움에 향수를 달래며 서로 의지하고 내일의 희망에 오늘의 시련을 극복하자 - 고 뜻을 같이한 모임이 본회의 발족 계기가 되었다. (소화영 님 증언)
초대회장 으로 소화영 님이 주도 하셨고 이어서 이섭,김태익,정종섭,유석권 님이 회장을 이어받아 파란만장 우여곡절 20여 성상의 파고를 넘겨오다가 드듸어 여주 신륵사에 회-해산모임 관광을 가졌다가- 이래서는 안되겠지 하고 소화영님이 -
회의때마다 출석을 열심히 하는 육군대위 예편후 자영업하시는 나병운님을 추대하여 회장직을 반강제로 맡겼었다
느닷없이 회장을 물려받은 나병운 회장은 어떻게 회를 살리느냐 고심하던중 회원" 정회원제를 도입하여 회비징수로 기금마련은 물론 회 조직을 지역별로 편성하여 활발하게 회 기틀을 잡아 나갔던 것이다 (도움준 회원 -오세영 신양호 윤주식 노상천등) 당시 조직구성은 부회장 유찬일 김종수 박금남 문병섭사무국장 사임 수용하여 사무국장 이병열 총무부장 윤주식 섭외부장 오세영 조직부장 신양호 청년부장 노상천 등을 임명 조직구성하여 전진해 나갔었다
그러던차에 뜻하지않은 분열조짐이 대두된것 분열의 씨앗은 전북출신 일부회원 이 유아독존으로 운영하는 나회장에 반기를 든것- 회원명단에 전북먼저 다음 전남 순서를 주장하는 반대의견에 남북이지 북남이냐 라는 나회장의견 이 하찮은일로 빌미가 되어 일부전북출신 회원들이(오세영 주도) 별도 모임을 갖고 삼성회 라 이름하에 점조직을 펼쳐나가 양측 화합이 무너져갔다
결국 오늘의 전북도민회가 발족된것이다 일부회원들은 호남으로 뭉쳐야 하는데 전북도민회가 왠말이냐 하면서 극구 반대했지 다수 전북 출신회원들은 두개의(호남,전북)향우회를 지닌체 오늘까지 참여 지탱하고 있다
그렇게 분열의 아픔을 간직하면서도 도봉호남향우회는 활기를 띄고 일취월장 전진해 나갔던것이다
매년 봄 가을 총회를 도봉산자락 밤나무골에서 모였을때마다 이곳저곳 도봉 방학 등지에서 꾸역 꾸역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타향인들이 부러워 할정도 이상으로 향우회는 전진해 나갔던것이다 총회때마다 술안주로 홍어회가 일미 유명해져 호남향우회 홍어회먹는날이다 라고 유명해졌다
그무렵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전에서 나회장이 출마해 당선된 기쁨을 회원들은 향우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었다고 기뻐했었다 그러나 또 분열의 조짐이 싹이트더니 실천으로 옮겨졌다 "나회장은 회를 유아독존으로 운영한다 바른말하는 회원은 탈회조치 한다 는 등등 불만을 품어반기를든 회원수가 날로늘어가는 지경에 이르자 이때다하고 뜻을 달리한 회원들이 (독지가 향인 김성수)의 도움으로 25대의 관광버스가 동원돼 800여명이 몰려들어 강화군민이 깜짝놀라 전국에서 호남인이 다 모였느냐고 현지주민들이 어리둥절 놀랐었다
그러한 결과는 나회장측에만 회를 맡기면 애향친목을 저해 한다는결론을 얻고 향우회를 행정동별로 조직편성해서 독존아닌 민주적으로 회를 운영하자는 의견이 압도적인지라 -결국 우리회는 나회장측 을 따르지 않고 오붓하게 도봉2동만 모이자 라는 기치하에 행정동안을 택하여 그해가을 즉-1985년 10월 27일 도봉2동에 거주하면서 뜻을 같이한 박규연 김종채 강영우 님등 67명의 인사들이 관광차 수안보온천에 가서 "우리는 호남인의 신념과 긍지를 도봉사회에 토착화시켜 복지사회건설에 기여함을 목적으로한다" 라는 정관제7장제20조를 제정 공포하여 -도봉2동호남향우회가 햇빛을 보게되어 오늘에 재경도봉호남 향우회가 이루워진것이다
도봉2동호남향우회 는 초대회장에 박규연 ,부회장에 김종채 강영우, 고문격인 명예회장에 황근오 ,사무국장에 노춘식 총무에 노상천 이 추대되어 회 기틀을 잡아 나갔다 도봉2동 뿐아닌 타동에서도 도봉1동 방학동 창동 상계1동 에서도 행정동별 회가 구성되었다
고심하신 나회장측은 일선에서 물러나시고 함평출신 전직교사 김홍식 님을 회장으로 추대하여 만회하려고 노력하였다 김홍식회장은 최기태 사무국장 신양호총무 를 발탁하여 탁월하신 웅변력으로 회를 다시원상회복하려고 노력했으나 이미 각동향우회는 나름데로 번창해나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과는 분열이 극대화 됐다 -나회장측은 도봉호남향우회 박규연측은 도봉2동호남향우회 도봉1동, 방학동,창동,상계1동, 호남향우회 전도민회-로 분열 운영되어 나갔다
그러나 도봉2동호남향우회는 타회가 부러울정도로 급속히 전진하였다 특히 애경사에 주력했다 경사는 개별참여 애사는 본인,배우자타계시 백미3가마 부모타계시 1가마 로결정해 회원모두 환영했다 그렇게 일취월장 나가던 본회 2기까지 박규연회장이 주도하시다 제3대에는 김종채(사무국잔 장명수)님에게 바톤넘기셨다
김종채 님은 온화한 성격에 적이없는 처세로서 회운영에 회원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회가 활기를 띄는 마당에 2년임기가 되어 한번더 연임달라는 열화와같은 회원들의 요청을 고사하고 제4대 회장에게 바톤을 넘겼다.
제4대 이훈재 회장은 5공시절 대의원 역임한 유한석 회원이 회장 출사표를 던진 상황인지라 회장을 사양했었으나 회장은 나이가 지긋해야 한다는 회원들의 극구요청을 받아들여 두사람의 대결구도에서 유한석 회원은 젊었으니 선배에게 양보하라는 회원들의 요청에 고개숙이고 결국 이훈재님이 4대회장(사무국장 윤옥현)에 선출되었다.
이회장은 첫관광총회를 백양사에서 개최 나름데로 열심히 회장직을 수행해냈던것. 무난히 4대회장직을 마친 이회장은 북도출신회장을 추대해 형평성을 유지하자는 명분하에 제5대회장에 전주출신 임 종님에게 바톤을 넘겼다.
제5대 임종회장은 김재혁 노상천(사무국장 총무) 회원을 발탁하여 모든 조직 단체는 기금이 많아야 분열을 막는다 리는 신념으로 회기금 확보에 심혈을 기울리시어 기금이 인수금액에 3배까지 확보했다(본인부담 많음).
그무렵 초대구의원 선거전에 우리회 3대회장 김종채님이 구의원당선으로 호남인의 자긍심이 하늘높은줄 몰랐었다. 기금확보 잘돼가고 전회장님이 구의원까지 당선됐으니 도봉2동 호남향우회 호화전성기 였다. 임 종 회장님은 6대(사무국장 노상천 총무 김창용)까지 연임하시다가 이동복 님에게 바톤을 넘기셨다.
제7대 이동복 회장은 해남출신으로 지역사회 발전에 헌신하신 엘리트 회장 인수차 경리달인 박태좌 회원을 사무국장에 발탁하여, 향우수첩 을 제작케 하여 회원 얼굴 익히는데 일조 함은 물론 관광에 주력하시어 회를 흥미롭게 활성화 시킴은 물론 활기차게 운영하시어 8대까지 연임하시다 깜짝 놀라게 박태좌 사무국장을 제9대 회장에 추대하고 물러나셨다.
제9대 박태좌 회장은 모 회사 경리부장 제직중인지라 " 구의원 에 출마 아쉽게 석폐하였고 박식이 뛰어난 고교후배 박선규 신입회원을 사무국장으로 발탁기용하여 향우회 사무실을 별도차리고 사무실 개소식에는 많은 회원뿐만 아닌 강동향우회에서 까지 축하참석하여 명실상부한 대호남향우회회로 자리매김 하게했다.
박사무장은 회원 명부,입회원서대장 정리, 수첩재발급,등등 허다한 회무를 능수능란하게 처리해 박식을 증명시켰고 또한 회원 배가에 노력함은 물론 기금확보를 위해 매달 일정액을 적립하는 적금을 가입해 신입회원 입회금으로 적립금을 내는 묘안을 발휘했다. 한번더 연임 요청을 "후배를 양성해야한다는 명분으로 고사한 박회장은 바톤을 명정봉 청년회장에게 넘겼다.
제10대 명정봉 회장은 젊은층을 양성시켜야 장래가 촉망된다는 기치하에 정지승 청년회원 을 사무국장에 발탁 기용하고 사업에도 열중하고 청년회 활성에도 물심양면 으로 열심히 도와 본회 청년회 전성기를 이루었다 젊은회장에 메끄럽게 회무를 잘 소화 해내는 유능한 사무국장을 두어 인끼가 상승하는 처지인지라 "한번더 회장직을 연임해야 한다는 열화같은 회원들의 요청을 고사한 명회장은 11대 한성주 님에게 넘겼다.
제11대 한성주 회장은 노상천 현감사를사무국장에 발탁하여 회기금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회무를 실속있게 가다듬었다. 즉 지역장제도를 폐지하고 사무국장 산하에 총무 조작 홍보 기획부장 제를 두어 회무를 뷴야별로 내실있게 (회원명부-가나다순) 다듬었고 기금도 원만이 확보(관광총회시 버스1대 찬조한 친지도 있었음)하여 회를 튼튼히 다졌다."기금이 많아야 회가 산다 라는 철학으로 회발전에 헌신하시다 12대 신양호 회장께 바톤이 넘겨졌다
이어 제12 대 신양호 회장은 박식한 임성수 청년회원을 사무국장에 기용하여 우리회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여 젊은층이 주무대가 되기위한 포석을 세움은 물론 부녀회 청년회를 매달 개최하여 생동감 넘치는 향우회로 발돋음시킴은 물론 향우회기 조기 를 새로제작하여 회 이미지를 바꾸고
도봉2동호남향우회 명칭을 -재경도봉호남향우회- 로 개칭하고 활기차게 실감나게 회를 운영한 12대 신회장의 임기는 우리회 르네상스 시기였다.
이어 제13대 김창용 회장은 시의원에 아쉽게 석페하였고 모대학 강사인 이태용 신입회원을 깜짝 사무국장에 발탁하여 회에 활기찬 바람을 넣어주었다 특히 총회시 매끄러운 사회진행은회원들의 심금을 움직이어 회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던차 옥에도 티가있듯이 뜻하지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인즉슨- 모 수석 부회장의 언행이 문제가 이슈되 간부로서 부적절하다고 판단 하여 이문제를 임원회에 회부시켜 징계를 논의하였으나 회에 헌신한 공로를 참작해 "근신판정"으로 결정이 나자
"항의인터넷 댓글 이 대두됨은 물론 항의여론이 봇물을 이루자 김회장은 "당사자 회직 자진사퇴를 권고했으나 당사자는 응할수 없다하여 "회장직권으로 -당사자는물론 따르는 임원까지 회직(부회장등)을 과감히 거두자 -이에 반발한 당사자 와 추종회원들이 반기를들고 회를 떠나 새 살림을 차린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김회장의 회무처리가 " 용기있는 칼자루냐, 아님 "회조직에 큰 타격을 가한 "과오냐, 이문제를 중대한 숙제로 남긴체 13대임기가 만료돼 14대 윤옥현 회장에게 바톤이 넘겼다.
14대 윤옥현 회장은 어수선한 회 분위기를 쇄신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박식하신 나사일 님을비롯 7명의 유능한 부회장을 추대함고 노상천 회원을 사무국장에 재임명하여 회 분열의 싹이 되어온 운영위원,수석부회장,명예회장제를 없에고 미비한 회칙을 수정 보완하여 안정된 분위기를 찾앗었고, 회 초창기에 명칭을 복원시켰다 -우리나라에서 도봉동은 하나 뿐인데 재경 자를 앞세울필요가 없다 판단하에 우리회 명칭을 "도봉동호남향우회"로복원 시키고 인터넷 카폐에도 모두 새단장 해서 "재경"자를 지우고 "도봉동호남향우회" 로 수정해놨다 또한 미납회원을 과감히 정리 내실있는 아담한 회로 다듬었다
15대회장은 역시 윤옥현 님을 재선출하여 안정된 회분위를 조성하여 새부회장을 김윤석 박경남 홍길희 님을 임명하여 회장단을 튼튼히 조직하고 회무를 내실있게 꾸려나갔다 특히 윤회장은 어려운 회무를 접할시 강영우고문 등 부회장 집행부원들과 상의하고 자문을 받고 논의를 거듭하여 조심스럽게 집행하는 겸손한분이였다
.무엇보다 윤회장의 공로는 향우회연혁을 초창기부터 회를 지켜봐온 노상천 국장으로하여금 발굴 작성 하여 명실상부한 향우회 역사를 완성시킨것.
제16대- 회장은 해남출신 정지승 전사무국장출신이다 취임첫마듸가 "나는 선배님들이 일궈논 밭을 잘가꾸어 알찬열매가 열수있도록 헌신하겠다는 첫인사말 오랜 공무원출신으로 침착하고 인화력이 풍부한 성격의 우리회 주춧돌이 될수있는 재목이다 정회장은 젊음을 과시 중량급 신입회원 을 많이 입회시켰고 임원진을 재배치 연륜타파하고 능력있는 인사를 신입이라도 과감히 발탁 요직에 배치 회를 활성화 시킨 공을 인정받아 전회원 만장일치 추대로- 제17대 회장 까지 수고해주었다 정회장은 우리회 명칭을 다시" 재경도봉호남향우회" 로다시 원위치 시켜놓고 회무를 침착히 소박하고 착실하고 성실하게 이끌어나갔다 우리회의 보배인 정회장의 인품에 우리회원은 두고두고 아쉬움 느낄것이다 상임고문으로 회장 못지않게 회 발전에 헌신하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제18대회장후보 결핍사태에 이르고말았다 창립후 처음있는 일이었다 깜작놀란 원로회원님들의 뜻을모아 박력있는 윤옥현 전직 회장께 간곡한 청을 넣어 회장을 한번더 맡기자는 권유를 못뿌리치고 수락하여 제18대회장으로 14,15대 회장을 수행한 윤옥현 상임고문이 추대되어 총회인준을받아 제18대 화장직을 수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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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회에 공로가 지대한 인물을 소개하면 뒤에 숨어 회를 물심양면으로 협조 해주시는 분을 회원모두는 잊지말아야 할일 우리회 선임고문 강영우 님이다. 이분은 강진출신으로 하나약국을 운영하시면서 향우회를 아끼시는분이다.초창기부터 현제까지 총회시나 중대 회무있을시 한차례도 거르지않으시고 찬조 해주신 일등 공로자 이신 강영우 님을 우리회원 모두는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또한 우리회 명예를 빛내신 분들이 있다 -정계에 중앙무대 까지는 못 미쳤지만 도봉구 의원이 우리회 에서 세분 탄생했다. 김종채(보성) 님, 노인숙(함평)-재선, 이태용(고창)님 - 김종채 님은 도봉구의회 문을연 이래 최대 발언 명발언하셨던분으로 유명하셨고,노인숙 의원은 배짱두둑한 뚝심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은 물론 지역일을 많이 일궈낸 일꾼중의 일꾼 - 중랑천 뚝길에 윤중로가 옮겨져 있는것은 노의원이 고전분투하여 얻어 일궈낸 산 증거이다 벗꽃 만발한 중량천 뚝길 노인숙 비 라도새워야 하지않을가? 생각이든다.
또한 이태용 의원은 본회 13대 사무국장 출신으로 의정활동을 활발히 함은물론 경인대학 부동산학과 강사로써 후학양성에 노력하고 있는 엘리트- 유창한 웅변력과 친절한 인품은 우리 회 회원모두 자긍심을 불어넣어준 우리회 보배 도봉구민의 보배인물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 6대임종회장시 입회하신 법률고문 김영일님을 잊어서는 안될일이다 김영일님은 진도출신으로 제20회 행정고시 제25회 사법고시를 패스한 재원 정부 고급관리로서 헌신하시다 변호사업무를 하시는 인권변호사 다행히 우리회 법률고문으로 추대되신 분이시다.
그리고 창립이래 회무를 총괄하여 회장을 보좌해온 사무국장 이 있다--1,2대-노춘식 3대-장명수 4대-윤옥현 5대-김재혁 6대-노상천 7대-박태좌 8대-김창용 9대 박선규 10대-정지승 11대-노상천 12대-임성수 13대-이태용 14,15대-노상천 16,17대-임성수 18대 - 염기수-
그리고 염영환 총무,정만홍 조직부장은 수차례 부장직을 수행하여 회에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역대 고문,역대부회장,청년,부녀회장, 많은분들이 회발전에 기여 했고 하고있음을 우리회원 모두는 잊어서는 안되겠다.
또한,인터넷카페 개설후 홈페이지를 장식해준 공로회원이 있다 -박선규 이경환 임성수 이태용 배헌동 이 회원들은 "운영자방을 개설해 훌륭한 식견으로 흥미롭고 유익한 정보를 발굴소개 창작하여 카페를 멋지게 장식하였고 하고있다
특히 배헌동 부회장은 초지일관 우리회 기념영상을 제작 해준 공로는 우리가 잊지말아야 하겠다 지금이순간에도 카페지기 대행으로 수고하시는 님께 감사함을 드린다 우리카페 화려한 풍경은 이분의 작품이다-
우리회원 모두는 역대 선배분들의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이겨내고 회 발전에 헌신해오신 정신을 잊지말고 간직하 여, 회 발전에 소흘함이 없어야 하겠다 -손님이오면 안방을내주는 인심 이것이 호남인의 자랑스러운 긍지 이다 이 아름다운 긍지를 도봉사회에 접목시켜 아름다운 사회 이루는데 일조해야한다그것만이 우리의 소명이요 대 도봉호남향우회 회원의 보람이라 여긴다. 자료 발굴 조사 작성 - 노상천
첫댓글 우리회가 걸어온 과거사를 진실하게 적어놓고보니 더더욱 자랑스럽다 재경도봉호남향우회 만세! 대한민국만세!
참 소중한 자료입니다 연혁을 보자니 고인이되신 회장님도게시고 역대 회장단의 업적과 회운영에 도움주신 님들의
내면을 소상희 기록으로 남겨주신 노상천 전 국장님 우리회에 영원한 보배입니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