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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먼저 나(自我)를 알고 남을 아는겄이 순리(順理) 인대, 나를 모르고 사회구조(社會構造)에서 생활(生活) 하면서 어떻게 안다고 말을 할수 있겠는가? 그러함으로 나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보학(譜學) 이라 하며는 너무나 거창(巨創)한 말이 되지마는, 최소한(最小限) 가계(家系)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生覺)에서, 별로 아는것도 없는 본인(本人) 에게 창석(昌錫)제(弟)의 청(請)이 있어 거절(拒絶) 할 수가 없어서 간략(簡略)하게 적어본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성씨(姓氏)를 사용한겄은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서기53년)경부터 중국(中國)과의 국교관계(國交關係)로 사용(使用)했다 하며, 신라(新羅)때에는 진흥왕(서기540년)경부터 백제(百濟)는 근초고왕(近肖古王)(서기346)년 경부터 사용(使用)했다는 기록(記錄)이 있으나, 일반적(一般的)으로 성씨(姓氏)를 널리 사용(使用)하게 된겄은 고려(高麗)11대왕 문종(文宗)때 성씨(姓氏)가 없는 사람은 과거(科擧)에 응(應)할수 없는 제도(制度)가 있었음으로, 이 때부터 성씨(姓氏)를 많이 사용(使用) 하게 된겄으로 나타나 있으나 이조 말엽(李朝.末葉) 까지도 성씨(姓氏)가 없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고(高)씨의 성이 비롯된겄은 이보다도 훨신 이전인 탐라국(耽羅國) 현 제주도(現濟州島) 개국성씨(開國姓氏)로써 우리.나라에서 최고(最古)의 성씨(姓氏)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337년전이 단군(檀君) 기원.원년(紀元元年)인대 그보다 4년전에 제주도(濟州島) 한라산(漢拏山) 북쪽 기슭이에 있는 모흥혈(毛興穴)(삼성혈)에서 삼신인(三神人)이 용출(湧出) 하시었는대, 즉.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 삼신인(三神人) 이시며 동쪽 바다건너 벽랑국(碧浪國)으로부터 상자속에 삼공주(三公主)와.오곡(五穀)과 육축(六畜)이 떠네려 왔기에, 삼신인(三神人)과 삼공주(三公主)가 각(各).각(各). 배필(配匹)로 맞이하여 고을나(高乙那)는 제주(濟州)로 양을나(良乙那)는 대정(大靜)땅으로 부을나(夫乙那)는 정의(㫌義)땅으로 활거정착(割居定着)하여 목축(牧畜)과 농경(農耕)생활(生活)이 시작 되었으며 고을나(高乙那)께서 활.쏘기로 왕(王)이 되시는것이 탐나국(耽羅國) 개국 설화(開國 說話)이며. 우리의 시조(始祖) 고을나 대왕(高乙那 大王)으로 부터 45세(世) 자견왕(自堅王)때 까지 탐나국 왕(耽羅國 王)으로써 군림(君臨)하여 통치(統治) 하였음이 탐나국기(耽羅國記)의 고증(考證)이다
그 뒤 자견왕(自堅王)의 태자(太子) 말자로(末字老)를 고려(高麗) 태조(太祖)21년(서기938년)에 입조(入朝)케 하니 곧 지금 우리의 중시조(仲始祖)이시다 이 중시조(仲始祖) 말자로(末字老) 께서 새아들을 두셨는대 장자(長子)인 유(維)는 정종 조(靖宗朝)에 우복야(右僕射.正二品)에 차자(次子) 강(綱)은 문종조(文宗朝)에 병부상서(兵部尙書) 이시며 손자(孫子) 공자익(恭字益)은 상당군(上黨君)(上黨:淸州의古號)에 봉작(封爵) 되어 본관(本貫)을 청주(淸州)라 했으며 계자(季子) 소(紹)는 도총독(都總督) 이며 손자(孫子) 영신(令臣)은 양경공(良敬公) 이라는 증시(贈諡)를 받어 그 후손들이 개성(開城)에 세거 (世居) 하면서 본관(本貫)을 개성(開城)으로 하고 탐나국 왕손(王孫)으로 예우(禮遇) 받으며 고위관작(高位官爵)에 오르셨다
중 시조(仲 始祖) 말자로(末字老)의 오대손인 세재(世在)의 증손(曾孫) 정( 廷)이 아들 삼형제(三兄弟) 분을 두셨는대 장자(長子) 백자연(伯字 筵)의 아들 경(慶)은 문충공(文忠公) 이며 본관(本貫)을 제주(濟州)로 차자(次子) 중자연(仲字 筳)(福字林.諡.良獻公)의 후손(後孫)들은 본관(本貫)을 장흥(長興) 으로, 삼자(三子) 계자연(季字 筵)의 아들 인비(仁庇)는 화전군파(花田君派)의 파조(派祖)가되어 본관(本貫)을 횡성(橫城)으로 각.각(各各) 썼으나 화전군파(花田君派)는 중년에 제주(濟州)로 환본(還本) 하였으며, 한편 문충공(文忠公) 경(慶)의 증손(曾孫)인 천상. 천우(天祥.天佑) 형제(兄弟)는 고려(高麗)가 망(亡)하자 벼슬을 버리고 개성(開城)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 하면서 그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개성(開城)으로 삼아 쓰기에 양경공파(良敬公派)와 본관(本貫)이 혼동(混同) 될 수 있음이 있다
그러나 문헌상(文獻上)에는 제주(濟州) 장흥(長興) 개성(開城) 청주(淸州) 연안(延安) 용담(龍潭) 의령(宜寧) 고봉(高峰) 옥구(沃溝) 금화(金化) 토산(兎山) 회령(會寧) 안동(安東) 횡성(橫城) 등 十四本이 전(傳)하여 지고있으나 모두가 제주(濟州) 에서의 분적종(分籍宗)인 겄이다
함경도(咸鏡道) 지방(地方)에 거주(居住)하는 철(哲)양산공(陽山公) 후손(後孫)들은 정종조(正宗朝)때 제주(濟州)로 환본(還本) 하였으며 지금의 상세분파도(上世分派圖)를 보면 구개공파(九個公派)로 대별(大別)하고 있으며 호남(湖南) 지방(地方)에서는 장흥백파(長興伯派)의 후예(後裔)들이 가장 번창(繁昌)한 실정이다. 그 사실은 장흥백파조(長興伯派祖) 복자림(福字林)(仲字 筵.諡號.良獻公)의 대(代)에서도 고려(高麗)왕족(王族)인 왕씨(王氏)와 탐라국(耽羅國) 왕족(王族)인 고씨(高氏) 들과는 혼인(婚姻) 관계(關係)가 빈번(頻繁) 하였기에 고려(高麗) 회인군(懷仁君) 규(珪)의 애지이녀(愛之以女)를 19세(歲)에 등제(登第)한 고복림(高福林) 에게 시집을 보넸다는 여사열전(麗史列傳)에 기록(記錄)이 있다하며 자(子)에 합(合) 손(孫)에 백자안(伯字顔) 모두 고려조(高麗朝)에 고관(高官)으로 계시였는대 이씨조선(李氏朝鮮)이 되자 백자안(伯字顔)의 자(子) 협자(協字) 께서는 처가(妻家)와 증외가(曾外家) 왕씨(王氏)의 원수(怨讐)인 이씨(李氏) 조정(朝廷)에 출사(出仕)를 아니하고 전라도(全羅道) 영광(靈光) 삼게(森溪) 산중(山中)(지금은 長城땅)으로 낙향(落鄕) 하시었다
그후 이조(李朝) 태종대왕(太宗大王)이 고협(高協)과는 동문지기(同門知己)이며 인품(人品)과 학문(學問)과 덕망(德望)이 높으신지라 전국(全國)에 방(榜)을 부쳐서 공(公)을 찾았으나 불복(不服) 하시니 벼슬도 내리시며 신하(臣下)도 같고 스승(師)같기도 하다하여 신자부(臣字傅)라 사명(賜名) 하시고 아들을 낳아 기쁘다 하여 미역 피봉에 기쁠열(悅) 자(字)를 친서하여 하사(下賜) 하시니 아들분의 이름을 열(悅) 자로 하셨다고 하며, 그 자(子)에 상자지(尙字志) 께서는 세종대왕(世宗大王)과 같은 한씨외손(韓氏外孫)의 육촌간(六寸間)이 되므로 三十三인 육촌계(六寸契)를 하였는대 十三번째 셨으며, 아들 자.자(自.字行列)에 칠형제분(七兄弟分)을 두셨는대 온(溫).량(良).공(恭).검(儉).(겸(謙).양(讓).신(愼) 이 일곱분 중에 네 번쩨 자자검(自字儉)께서 비로소 광주(光州)로 이거(移居) 하시고, 증 호조참의(贈戶曹參議) 이시며 자(子)에 운자(雲字)이신대 조정암(趙靜菴)과 교유(交遊) 했다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連累)되신바 있는 호 하천공(號.霞川公)이시며 호도(虎圖.호랑이 그림)이 유명(有名) 하시며 증 예조참판(贈禮曹參判)이 시고 자(子)에 맹자영(孟字英) 호(號)하헌공(霞軒公) 이시며 증 의정부 좌의정(贈議政府左議政) 이신대 자(子)에 거룩 하옵시고도 자손(子孫)들은 물론(勿論), 온 국민(國民)들이 존경(尊敬) 하옵는 시호(諡號) 충열공(忠烈公) 경자명(敬字命) 제봉 선조 (霽峯.先祖)이시다 자손(子孫)들은 새독충정(世篤忠貞) 이라는 유훈(遺訓)을 되새기며 천.만대(千.萬代) 까지 영원(永遠)히 간직 하여 실행(實行) 해야 할것이다 아들 여섯분을 두셧는대 차자(次子) 인자후(因字厚) 시호(諡號)는 의열(毅烈) 이시며 임진왜란시(壬辰倭亂時) 아버지와 금산(錦山) 와(臥)뻘의 왜군(倭軍)과의 격전(激戰)에서 부자분(父子分)이 같은 날(七月十日) 순국(殉國)하시니 32세 셨으며, 이미 4남1여(끝남은출계) 를 두시어 자녀분들은 그후에 창평유천(昌平柳川)의 외가(外家)인 황해감사(黃海監司) 이 덕봉(李 德峯) 공(公)댁(宅)으로 가서 살게되니 누대(累代)를 거처 지금까지 세거(世居)해 왓기에 지금의 창평 고씨(昌平高氏)라는 말을 듣고 있다
또한 당시 장자(長子)이신 종자후(從字厚)는 임피 현령(臨陂縣令)을 하셨는대 아버지와 동생이 왜군(倭軍)에게 순절(殉節)하심이 원통(冤痛) 하고 그 분통(憤痛)함을 참지 못하시여 복수(復讐) 의병장(義兵將)으로 창의(倡義) 하시어 복수전(復讐戰)을 전개(展開) 하였으나 전새가 불리 하여짐으로 진주 촉석루(晋州.矗石樓)앞 남강(南江)물에 투신(投身) 순절(殉節)하시니 따라서 순절 하신분 부지기수 였다고한다 그후 나라에서 효열(孝烈) 이라 시호(諡號)하시고 호(號)는 준봉(準峯) 이시며, 그 후 삼 부자분은 왕(王)의 특.명부조(特.命不祧)(불천위라고도함) 하시었음으로 자손만대(子孫萬代) 까지 영원(永遠)히 방안 제사(祭祀)를 모시고 있으며 광주 포충사(光州.褒忠祠)에 배형(配亨) 되시었기에 천추만세에 추앙(千秋萬世.推仰) 되실 것임으로, 우리는 그 위대 하신 조상님 들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자손(子孫) 이라는 자부심(自負心)과 긍지(矜持)를 갖이고 숭조 애족 단결(崇祖愛族團結) 해야 할것이며 또한 학봉 선조 이후(鶴峯 先祖 以後)의 조상(祖上)님 들께서도 대.대.(代代)로 훌융하셧든 행적(行蹟)을 너무 길어저서 여기에 다 올릴수 없음이 죄송(罪悚)하고 애석(哀惜) 하오며 끝으로 요지음 전통 예의 범절(傳統 禮儀 凡節)이 해이(解弛) 해짐을 새상(世上) 탓 으로 빙자(憑藉) 하지말고 고씨 가문(高氏 家門)의 한 사람 임을 자부(自負) 하면서 자.자.손.손.번영(子.子.孫.孫.繁榮)이 무궁(無窮) 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 같을 겄이기에 간략 하게 적었노라. 甲申(2004). 正月. 日 秋 江 高 中 錫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