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관 시인이 본 53 선지식9. 12,보령에서 토정 이지함 후손 이행수 선지식을 친견하고
보령에서 대서 날에 초청을 받고 아침 9시 40분 열차를 타기 위하여 대천을 행해 세 마을 열차 자리를 샀다, 열차 자리를 서서 자리에 앉아서 나에 대한 회고를 하는데 전화가 왔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송월주 대종사 열반하였다는 소식이다, 수행자에게는 흔적을 남기지 말 하고 하였지만 흔적을 남기는 것이 한 불교적 포교라고 생각한다, 수행자의 참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염원하면서 열반송이 전해졌음을 기억하는 날에 송원중 대종사에 대한 행적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금산사를 방문하는 날을 정해 출발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하려고 한다,
새마을 열차 자리를 삿 기에 그 자리는 나에 소유물이다, 자리에 앉아서 온갖 수해의 망상이 떠올랐다, 한편의 시를 창작해야 하는데 옆자리에 노인이 앉아있어서 노인에게 피해가 될 까바 조심하였다 물론 내 옆자리에 노인도 자리를 잣 기에 자리 소유물이다, 노인은 전화 소리를 크게 내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마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노인은 예산에서 내리었다, 나는 대천천역을 행해 열차 자리를 양도할 시간이 얼만 남지 않았다,
대천역에 내리는데 임인식 문화제지킴이 전국회장이 자동차를 준비하여 보령에서 개발한 새 싹 인삼 생산지공장을 방문하였다, 마치 장소에 도착하니 몇 번 방하던 빌딩이었다, 그 장소에는 용봉산 문화제 지킴이 범상 스님도 청해 그 장소에 와 있었다, 우리는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없어서 인원에 재인을 철저하게 지켰다,
토정 마루 개장 대표, 이행수 후손이 토정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건물을 세우고 토정선생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연구를 하는 대표였다, 토정 선생이 마포에서 살고 있을 시기에 토정이라는 호를 얻었다고 하는데 토정비결이라는 책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데 토정이 토정비결을 저작으로 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매우 큰 문화제가 될 수 있다, 토정비결을 통해서 그 시대에 정치에 대한 혼란기를 알 수 있는 저작이 다는 점이다, 토정비결은 토정 이지함의 편저라고 말할 수 있다, 토정 선생이 주역을 통달했다고 하는 인물이기에 연구를 하여 백성들의 고단함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임인식 문화제 지침이 회장님과 새싹인삼주를 마시고 새싹이 생산되는 장소를 참관하고 토정 선생님이 잠들어있는 안식처를 행해 갔다, 토정 선생이 잠들어 있는 터에는 보령에 있는 스님들과 함께 참배를 하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토정선생 상석 앞에 새싹 인삼 공양을 하였다, 전국아 코로나로 인하여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기에 하루라도 빨리 치유할 수 있는 약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에 대하여 축원을 하였다, 태앙이무섭게 내려오고 있었다,
토정 선생이 잠들어있는 명당을 떠나 성주사 지를 참배하려고 성주사 지를 향해서 갔다, 성주사 지를 복원하지지 않고 있는 것은 충청남도의 승려들이 역사를 바르게 고찰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본다, 충청남도 지역에 사찰은 바로 임진왜란 시기에 불에 타 없어진 사찰 터이기에 전제를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성주사지를 복원해야 민족에 역사를 회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성주사지를 방문하는 이유는 토정 선생도 성주사에서 불교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토정 선생이 16살에 한양으로 올라가 토정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시기 이전에는 성주사 지역에서 소녀기를 보냈던 일을 회상해보기 위함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성주사지를 참배하고 보령 시장님 면담을 청해 보고를 하기 위하여 보령 시장 실에 도착했다, 보령 시상님을 친견하는 자라에서 새싹 인삼에 대한 보고와 성주사지에 대한 문제를 5분 정도 면담을 하고 성주사지에 대한 문제는 문화제청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대화를 종결하고 토정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에 도착하였다,
이지함(李之菡)의 호는 토정(土亭)이다. 형 이지번(李之蕃)의 병 때문에 입성(入城)하여 보고서 6품 벼슬에 제배(除拜)되었다는 말을 듣고 귀를 씻고 곧 돌아갔다.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7월 6일 갑신 3번째 1573년 명 만력(萬曆) 1년 이지함이 6품에 제수되자 귀를 씻고 돌아가다
아산 현감(牙山縣監) 이지함(李之菡)이 졸(卒)하였다. 지함의 자(字)는 형중(馨仲)인데 그는 기품이 신기하였고 성격이 탁월하여 어느 격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모산수(毛山守) 정랑(呈琅)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초례를 지낸 다음 날 밖에 나갔다가 늦게야 들어왔다. 집 사람들이 그가 나갈 때 입었던 새 도포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으니, 홍제교(弘濟橋)를 지나다가 얼어서 죽게 된 거지 아이들을 만나 도포를 세 폭으로 나누어 세 아이에게 입혀주었다고 하였다.
그는 어려서 글을 배우지 않았었는데 그의 형 이지번(李之蕃)의 권고를 받고 마침내 분발하여 학문에 주력하면서 밤을 새워 날이 밝도록 공부하곤 했다. 그리하여 경전(經傳)을 모두 통달하고 온갖 사서(史書)와 제자백가의 책까지도 섭렵하였다. 이윽고 붓을 들어 글을 쓰게 되면 평소에 익혀온 것처럼 하였다. 그래서 과거에 응시하려고까지 하였는데 마침 이웃에 신은(新恩)을 받고 연희(宴戲)를 베푼 자가 있었다. 그것을 본 그는 마음 속으로 천하게 여기고 마침내 그만두었다. 하루는 그 부친에게 고하기를,
"아내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으니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가솔을 이끌고 떠났는데, 그 다음 날 모산수 집에 화가 일어났다. 그는 사람들을 관찰할 때 그들의 현부와 길흉을 이따금 먼저 알아맞추곤 했는데 사람들은 그가 무슨 수로 그렇게 알아맞추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는 평소에 형제와 우애를 돈독히 하여 따로 거처한 적이 없고 상사(喪事)와 제례에 있어서 전부 고례(古禮)대로만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살아 있는 이 섬기듯이 하였는데 형이 죽자 심상(心喪) 삼년의 복을 입으면서 ‘형님이 실상 나를 가르치셨으니 이것은 형님을 위한 복이 아니고 스승을 위해 입는 복(服)이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처신하기를 확고히 하되 여색을 더욱 조심하였다. 젊은 시절에 주·군(州郡)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수령과 군수가 이름난 기생을 시켜서 온갖 수단을 다하여 시험해 보았지만 그는 끝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극기(克己)로 색욕을 끊었다.
그는 열흘을 굶고도 견딜 수 있었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초립(草笠)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채 구부정한 모습으로 성시(城市)에 다니면 사람들이 서로 손가락질하며 웃었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어떤 때는 천리 먼 길을 걸어서 가기도 하였으며 배를 타고 바다에 떠다니기를 좋아하여 자주 제주도에 들어가곤 하였는데 바람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조수의 시기를 알았기 때문에 한번도 위험한 고비를 겪지 않았다.
또 선친의 산소를 위하여 바닷물을 막아 산을 만들려고 수천 석의 곡식을 마련하여 모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교우 관계로는 이이가 가장 친했는데 이이가 성리학을 공부하라고 권하자, 지함이 말하기를,
"나는 욕심이 많아서 할 수가 없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공(公)은 무슨 욕심이 있는가?"
하자, 지함이 말하기를,
"사람 마음의 향하는 바가 천리(天理)가 아니면 모두 인욕인데, 나는 스스로 방심하기를 좋아하고 승묵(繩墨)으로 단속하지 못하니 어찌 욕심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내가 1백 리 되는 고을을 얻어서 정치를 하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만들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리게 하여 나라의 보장(保障)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말년에 아산군(牙山郡)에 부임하여 정치를 하게 되었다. 그의 정치는 백성 사랑하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서 해를 없애고 폐단을 제거하는 것으로써 한창 시설을 갖추어나갔는데 갑자기 병으로 졸하니, 고을 사람들은 친척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지함은 일찍이 용산(龍山)의 마포 항구(麻浦港口)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다음 그 아래에는 굴을 만들고 위에는 정사(亭舍)를 지어 자호를 토정(土亭)이라 하였다. 그 뒤에 비록 큰 물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갔지만 흙언덕은 완연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선조수정실록 12권, 선조 11년 7월 1일 경술 2번째 1578년 명 만력(萬曆) 6년 아산 현감 이지함의 졸기
토정 지함이 편찬한 토정비결에 대한 연구를 실행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데 주력하려한다, 한편 보령에서 토정 선생의 가문을 만남을 기억하려고 한다, 보령에서 토정 지함 선생의 후손 이행수 선지식을 친견하는 마음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기록을 하려고 한다,
2021년 7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