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이씨 세보서(原州李氏 世譜序) 갑인보<甲寅譜>
모든 씨족(氏族)에게 족보(族譜)가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성씨(姓氏)가 있으면 종족(宗族)이 있고 종족이 있으면 족보가 있나니 족보가 아니면 종족을 증험(證驗)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이씨(李氏)는 고려(高麗)때 상서공(尙書公)께서 경주이씨(慶州李氏)로 부터 분관(分貫)하여 원주이씨(原州李氏) 시조(始祖)가 되신 이후로 대대 세세(代代 世世) 덕(德)을 쌓고 높은 벼슬을 이었으니 크게 번창(繁昌)하여 이루 모두 족보에 수록(收錄)하기 어렵다,
그러나 년대(年代)가 아득하면 잊혀지기 쉽고 번성(蕃盛)하다보면 모두 갖추기 어려우므로 족보(族譜)를 편수(編修)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정축(丁丑<1937년>)대동보(大同譜)를 편찬(編纂)하였는데 이미 1세(一世<30年>)가 지나 그동안에 자손들이 더욱 번성(蕃盛)하였으니 족보를 어이 편찬하는 일을 늦추지 못하게 되었다,
계축(癸丑<2973年>)겨울에 문회(門會)에서 뜻을 모아 대동보 편찬 보소(大同譜 編纂 譜所)를 묘(墓)동<해남군 마산면 화내리>에 전하고 편수(編修)한지 2년만에 비로소 수찬(修撰)을 끝맺었으니 어찌 우리 문중(門中)의 기쁨이 아닐까 보랴,
비록 그렇지만 세계(世系)를 수록(隨錄)하였을 뿐인 족보는 글에 지나지 않고 조상(祖上)을 높혀 받들고 친족(親族)을 찾는 것은 알맹인데 알맹이를 찾는데 힘쓰지 않고 다만 헛되이 글을 엮는데 그친다면 어찌 족보가 있다 하겠는가,
무릇 우리 동종(同宗)여러분은 비록 유복친(有服親)의 정의(情義)가 끊겼다 할지라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 조상(祖上)에서 나온 형제(兄弟)임에 반드시 서로 공경(恭敬)하고 사랑하며 두루 은혜(恩惠)를 베풀어 의합(意合)하여야 하느니라,
그런다음 조상의 아름다움을 더럽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말 하자면 장공(長公)이 9세(九世)가 한집에서 살았고. 진씨(陳氏)의 백명(百命)의 식구가 한 솥밥을 먹었다지만 이런 옛 고사만 을 좋다고 할 것이 아니라 족보의 알맹이를 찾는 정성(精誠)이 이 뜻에 벗어나지 않는다면 마땅히 마음속에 각심(各心)하기에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하여 이 보첩(譜牒)의 머리에 몇마디 쓰노라,
후손 태휴(後孫 泰烋)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