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떠올리지 않고 가위바위보
고은수
PARAN IS 13∣2025년 8월 10일 발간∣정가 12,000원∣B6(128×208㎜)∣117쪽
ISBN 979-11-94799-07-8 03810∣(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멀리 있는 누구도 떠올리지 않고 가위바위보, 이 하루는 뜻밖의 포춘쿠키
[누구도 떠올리지 않고 가위바위보]는 고은수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으로, 「중앙공원」 「소설이 문제였다」 「입소리」 등 58편이 실려 있다.
고은수 시인은 부산에서 태어났고, 부산대학교 윤리교육과를 졸업했다. 2016년 [시에]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히아신스를 포기해] [모자를 꺼내 썼다] [누구도 떠올리지 않고 가위바위보], 동시집 [선물]을 썼다. 2014년 동서문학상 본상을 수상했다.
우리의 생활과 실존이 고스란히 얽혀 있는 일상의 ‘말’들이 ‘예술’이라는 독특한 문장-시스템에 장착되고 그것이 공감을 일으켜 보편적인 감각과 사유로 고양할 때 비로소 ‘시’는 생성된다. 시는 일상에서 길어 올린 말들의 보고(寶庫)로서 일상어의 특수한 사용이자 그 과정에서 산출되는 미학적 발견이다. 물론 여기에는 시인에게 깃든 또 다른 일상—고유의 말투나 몸짓, 억양과 톤이 덧칠되면서 그 아우라가 완성된다.
특히 고은수 시인의 경우는 그 양상이 삶과 밀착되면서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무너뜨릴 때가 많다. 그것이 본능적이든 아니면 방법의 한 흐름이든 그의 시 쓰기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그 사이로 느리게 걸어가는 고양이, 꼬리가 끌고 오는 저녁. 막 시작된 노을도 동네로 내려앉아 식구가 많아졌다. 말소리가 들린다.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 거리에서 마주친 어른들은 작은 음성으로 안부를 묻는다. 노란 불빛들이 하나둘씩 켜지면 길 가던 바람도 잠시 벤치에 앉고, 철쭉도 이제 어둡다. 돌아갈 집을 생각해 본다. 저녁은 낮은 음조, 서로를 보듬기 좋은 시간이다.”라고 노래하는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여름 저녁에」). 먼 곳에서 속삭이듯 흘러오는 조용한 침묵의 몸짓들이 들려온다. 또는, “그렇게 매화에게서 답장이 왔다/차례로 흐르는 전율이 있으므로/하나, 둘, 셋/아는 노래를 모두 불러도 좋을, 박수가/나오는 장르가 되었다/한 사람이 근처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있지만 꽃망울은 크게 숨을 고른다”고 노래할 때(「답장」) 이미 시인에게 몰아쳐 온 수많은 일상의 편린은 발아하여 만개한다. 그는 말하고 중얼거리고 멈춰 섰다가 갑자기 돌아가기도 하며 돌담에 웅크려 오랫동안 들꽃을 바라보다가 바지를 훌훌 털고 능선을 넘는다. 일정한 방향과 물결도 없이 단지 자신의 무게로만 사물에 닿는 바람처럼. (이상 박성현 시인・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고은수 시인의 시집은 꽃들로 가득하다. 목백일홍, 백합, 철쭉, 능소화, 배롱꽃, 맨드라미, 장미, 쑥부쟁이, 각시붓꽃, 선인장, 라벤더, 벚꽃, 부겐베리아, 매화, 이팝꽃 등등. 시집 여기저기에 피어 있는 꽃들을 이처럼 한자리에 불러 놓고 보면 더없이 향기롭고 화려해 보이지만, 애재라, 속사정을 헤아려 보면 그 꽃들은 하나같이 “만연한 슬픔”이다(「눈이 푹푹,」). 그렇다면 그 속사정을 차근차근 짚어 보는 게 고은수 시인의 시의 진원지를 찾아가는 바른 걸음일 것이다. 그러나 고은수 시인은 그곳이 어디인지 애써 발설하지 않는다. 물론 시인이 시 행간에 설핏 비장해 둔 생의 한때를 소환할 수도 있겠고 할머니의 입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어린 시절을 끌어당길 수도 있겠다(「입소리」). 말하자면 고전적이든 낭만적이든 어떤 상실감을 “만연한 슬픔”의 동력으로 짐작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고은수 시인은 그보다 다른 데다 자신의 시적 영토를 넓힌다. 예컨대 고은수 시인은 이렇게 적는다. “척척 접으면 그간의 상처를 감쌀 수도/있을 것 같은데//너는 나에게 더 붉어지라고/붉음을 덧바른다”(「칸나」). “더 붉어지라고” 달리 말하자면 더 슬퍼지라고, “붉음을” 곧 슬픔을 바르고 “덧바른다”. 이것이 꽃의 정체다. 요컨대 고은수 시인은 상처가, 고통이, 슬픔이 아물길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은수 시인은 「소설이 문제였다」에 적은 바와 같이, 즉 신체가 절단되어 봉합 수술을 받은 후 한동안은 수술 부위를 바늘로 일정하게 찔러 신경이 죽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과 같이 그 상처와 고통과 슬픔을 끊임없이 현행화한다. 그래서 고은수 시인은 “여기 나무는 모두 붉다”라고 적을 수 있고(「아직 흙 묻은 신발을 털지 못했네」), “살아가는, 살아 내는 온도가 여전히 붉은색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오늘의 기분」). “꽃 피면 놀러 가자,/다정하게 말하던 사람//이제 꽃이 되어 다녀가네”라는 막막(寞寞/漠漠)한 문장은(「배웅」) 그러니까 어떤 망실한 대상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하는 바가 아니라 그 망실 자체가 꽃으로 피고 또한 지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꽃은 자연의 이법대로 반드시 다시 필 것이며 그러한 데다가 “매년 피는 꽃은/나이를 먹지 않는다”(「이팝꽃 핀 날」). 참으로 장려(壯麗)하지 않은가. “끌어안고 흘러가는 것이 있어/여기가 그리움”이고 “온몸이 눈물이라/고스란히 반짝인다”(「언젠가 금강」). 이것이 한생 내내 두고두고 피어나는 꽃이라면 말이다.
―채상우 시인
•― 시인의 말
화병의 꽃이 시들었다
오가며 수십 번은 눈을 맞춘 꽃이다
세세하게 잘라 기억을 묻는다
아름다움은 그런 것
•― 저자 소개
고은수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대학교 윤리교육과를 졸업했다.
2016년 [시에]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히아신스를 포기해] [모자를 꺼내 썼다] [누구도 떠올리지 않고 가위바위보], 동시집 [선물]을 썼다.
2014년 동서문학상 본상을 수상했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목백일홍이라고 했다 – 11
중앙공원 – 12
여름 저녁에 – 14
꽃이 비어 있는 시간 – 15
모두 외롭다 – 16
妙 – 18
칸나 – 20
오늘의 기분 – 22
여름날 – 23
쓴맛 – 24
컵이 곁에 있다 – 25
판 – 26
여름 하오 – 28
사랑이 오는 길 – 30
서풍이 분다 – 32
제2부
요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요 – 37
소설이 문제였다 – 38
내일은 바다 – 40
바다는 아무것도 모른다네 – 42
빗속을 걸었다 – 44
방충망을 사이에 두고 – 45
운김 – 46
입소리 – 47
화분에게 – 48
가을이 있는 창 – 49
가족사진 – 50
갈전리에서 – 51
외로움의 얼굴을 보라 – 52
영혼이 트이는 곳 – 54
제3부
이렇게 하면 되죠 – 57
아직 흙 묻은 신발을 털지 못했네 – 58
언젠가 금강 – 60
모자 – 62
비무장지대 – 63
내전은 멈추지 않고 – 64
선인장의 나라 – 66
지구도 흐뭇 – 67
라벤더 – 68
흰 꽃을 삽니다 – 69
십이월 – 70
겨울의 운현궁 – 71
절박함이 오늘을 낳았네 – 72
눈이 푹푹, – 74
제4부
동백 여자 – 79
그 앞에서 카톡을 했지 – 80
사월 – 82
배웅 – 83
안부를 묻다 – 84
오늘의 일기 – 86
엄마의 거울 – 87
저 여자 – 88
금강 여울에 꾸구리가 산다네 – 90
백지 앞에 앉았다 – 92
쓰기 – 93
읽기 – 94
답장 – 96
귀가 순해져 – 97
이팝꽃 핀 날 – 98
해설 박성현 어렴풋하면서도 충만한 그리움 같은 – 99
•― 시집 속의 시 세 편
중앙공원
아쉬움 같은 건 없어 보인다
강아지와 보조를 맞춰서 걸어가는 사람들
여섯 개의 발이 경쾌하다
초록이 깊어진 나무 곁을 지나간다
짙은 색이 겹쳐지는 자리에 여름의
음영이 깃들어 있다, 항상 거기서 멈추게 된다
좁은 어둠을 다 들여다볼 수 없어서
묘해진다
지금은 집을 나설 때의 심정이 아니다
기분은 바람을 닮아 가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든 길이 나온다
저기 백합도 피었던 자리에서 그대로
말라 간다, 꽃잎이 떨어지는 속성이 아니었다
그사이 거리 청소를 마친 누군가는
싸리 빗자루를 비스듬히 세워 두었다
여기서 만나자, 약속은 없었지만
여기로 들어서는 순간 모두 약속이 된다 ■
소설이 문제였다
갓을 썰고 있었다
뻣뻣한 것이 너풀거리기까지 해서
손톱이 딸려 들어갔다
피가 옆으로 새어 나오는데
요오드 액을 바르려다 병째 쏟았다
싱크대가 핏물이랑 빨간약이랑
섞여서 갑자기 분위기가 섬뜩해졌다
요즘 읽고 있는 소설이 문제였다
손가락이 잘린 사람이 그 손가락을
봉합하는 수술을 하고 나면 한동안
수술 부위를 일정하게 바늘로 찔러서
신경이 죽지 않도록 해 줘야 한다는
에피소드,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주인공은 그 사람의 집에 있는 새에게
물을 주려고 서울을 떠나 한라산 중산간
폭설에 갇히며 집을 찾고 있었다
고통의 칼을 서로의 가슴 사이에 두고
깊이 끌어안는 사람들이라니,
갓은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여전히 싱싱하고 밴드 싸맨 내 손가락을
무심히 보고 있다 ■
입소리
할머니는 표정이 담담했다. 기쁨도 슬픔도 넓은 어깨 위에 거뜬히 얹혀 있는 듯, 힘든 내색이 없었다. 늘 자신의 손으로 먹고사셨다. 어둑한 방바닥에 버선본을 놓고, 길이 잘 든 가위로 구불구불한 것들을 오려 냈다. 할머니 솜씨는 날렵한 버선코에서 마무리가 되곤 했다. 나는 그 방에서 노는 게 좋았다. 잡동사니들로 어지러워서 구석이 많았다. 할머니는 다 된 버선을 머리에 이고, 한복 입은 여자들이 있는 집으로 갔다. 호호 웃음소리가 들릴 때 나는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널려 있는 고무신들을 가만히 봤다. 할머니가 신발을 잘 찾을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그때마다 맛난 것을 사 주셨다. 할머니는 황해도 해주 분이다. 한 번씩 입소리를 내는데 어린 내 귀엔 아이호라, 이렇게 들렸다. 그럴 때 나는 할머니가 모르는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떡 내놓으라, 는 호랑이도 안 만나고 잘 내려가고 있다고. 고단한 날들이 흘려보내는 바람 소리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