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1일 월요일
김경윤의 <슬픔의 바닥>
ㅡ해남 생, <아름다운 사람의 마을> <신발의 행자 > <바람의 사원>
아는 언니가 진작 보내주신 시집ㅡ<슬픔의 바닥> 을 이제야 읽었다. 예전에 몇 번인가 시를 나누고 배웠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시인이 해직교사였고 내가 느꼈던 이미지는 한없이 포근하시고 정갈하시고 엄격했다. 이십 삼 년쯤 세월이 흐르고 나는 거의 성함을 잊었다. 그 사이 선생님께서도 절절한 사연이 있었고 그때마다 시적 성숙을 이루었다. 나는 시인으로서 겪어낼 슬픔이나 아픔, 상처가 많지 않다. 애달프고 서럽고 절실한 일들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시라고 쓸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이 시집에서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 (첨착) 한 슬픔이 나온다, 하지만 슬픔의 바닥에서 일어나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선생님은 자기 표현과 마음의 연단을 통하여 슬픔의 늪에서 힘겹게 빠져나온다. 경건하게 애도하고 아픔을 수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단지 표현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주체를 세워 온 시적 과정과 연관된다. 선생님의 삶과 시적 역정은 온전히 슬픔과 고통을 껴안는 자아나 이러한 자아를 내려본 영혼의 표정을 만나게 된다.
자아를 여닫으면서 산전과 사원을 오가는 순려의 항보가 시로 표현되었다. 불혹을 지나고 지천명을 거치면서 사유와 인식의 경계를 더 높아졌다.
선생님은 땅끝 시인이다. 선생님은 땅끝이라는 경계에서 희마믈 찾고 생의 의미를 더하여 새로운 사랑을 발명한다. 외부를 다 털어 내고 내면과 만나는 곳이 땅끝이다. 허영과 허명이 아니라 오직 존재의 내적 가치를 통해 사물과 교응하는 자리이다. 이러한 자리에 타향 시인은 '천 리나 먼 곳/ 서울의 불빛 그리워한 적 앖는' '땅끝 시인' 으로 '눈보라치는 변방에서/마늘씨 같은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삶의 불우함을 다독이고 이겨 내려는 정진의 과정에 있다. 이를 바라본 관음의 입장은 어떨까? 슬프지 않겠는가? 시인은 자아를 더 높은 차원에서 비춘다. 이는 선생님이 보인 동정과 연민과는 다르다. 가령 '깨달아야 넘을 수 있는 고개라는 말인지/ 깨달음을 찾아넘는 고개라는 것인지/ 오고 가는 이도 없는 그 고개를 넘다/ 깨달음 보다 먼저 들꽃에 취해 / 나는 길을 잃었다' 라고 말한다. '발길보다 맹목을 슬픔의 눈길로 바라본다.
나는 김경윤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서 자주 되새기면서 마음의 뒤란에 차곡차곡 쌓아두려한다. 구모룡 문학평론가의 평론을 참고하였다.
* 슬픔의 바닥
슬픔의 바닥을 보지 않고는
슬픔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라
세사메는 어떤 말로도
위로 받지 못한 슬픔이 있다는 것을
슬프의 바닥에 주저앉아 울어 본 자만이 안다
눈물이 말라 돌이 될 때까지 울어 본 자만이 안다
언졔 끝날지도 모르고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는
슬픔의 가파른 언덕길을 걷는 동안 동안
기도는 하늘에 있지 않고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라는 걸 알았다.
침묵의 돌을 등에 지고 걷는 생사의 순례길에서
슬픔의 바닥을 치고 일어나
나는 오늘도 오체투지로 생의 길을 걷는다
차마고도를 기어가던 수행자처럼
*이외에도 좋은 시가 있다
소나무 아래 너를 묻고, 바람의 속삭임, 배롱나무 그늘 아래서, 소와 달, 도솔암 가는 길에서
오도재에서 길을 잃다, 애월, 바람의 기도가 되어, 땅끝을 거닐다, 어느 날 해 저문 갈밭에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