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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2월17일 주일오전설교
성경합독: 이사야28장, 사도행전12장
성경낭독: 사도행전4:31-5:11절
설교본문: 사도행전4:31-5:11절
설교제목: 공동체생활과 발생한 문제들
예배찬송: 144장, 130장, 327장, 357장
행4장 31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2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5장 1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들은 이스라엘 최고 권력기관으로부터 심문을 당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제지당하였고, 감금되었으며 위협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는 것을 담대히 선언하였습니다. 표적의 증거가 눈앞에 있어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상황으로 위협을 하며 놓아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보호하셨고 복음을 전파를 통해 택한 자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도록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사도들이 돌아와서 전한 내용은 공동체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비록 갇힐 수는 있으나 주의 복음은 막을 수 없으며, 일련의 일들이 하나님의 사역임을 선명하게 증거 하였기 때문입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더욱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한 성령, 한 주, 동일한 복음으로 묶여진 공동체는 영적인 말씀 뿐 아니라 형제들이 빠지는 궁핍을 돌아보는 실질적인 돌봄과 연대로 강하게 결속되어갔습니다. 31-37절을 봅시다.
1. 모든 물건의 통용: 바나바
31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2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묶여진 교회 공동체는 이제 무리가 되었고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됨으로 멀어졌고, 심지어 원수가 되어졌던 혈육과의 소원한 관계와 무너진 가족과 달리 하나님은 또 다른 가족으로 위로를 주셨습니다. 어찌 보면 혈육보다 더 진하고 강한 결속으로 하나를 이룬 식구가 되었습니다. 한 성령 안에서 동일한 주를 믿어 한 아버지께 나아가는 새로운 이스라엘이요, 한 가족,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일치 안에서 부어진 성령의 충만은 지체들을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묶었습니다. 성령의 임재 속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3가지였습니다.
첫째는 32절에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마음과 혼이 하나 됨’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의 영이 되었다는 말이고, 참된 우정을 의미합니다. 말씀과 믿음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묶여집니다. 불화가 발생하는 일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되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마음과 뜻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친밀함을 넘어서 뜻하고 원하는 의지가 동일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일치 가운데서 교회는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형제사랑에 대한 눈에 보이는 열매였습니다. 마음과 영혼의 일치, 동일한 믿음이라는 내적인 하나 됨에서 자연스럽게 유무상통의 삶의 결실이 나타난 것입니다. 일치 없는 유무상통과 외적실천의 요구는 참된 열매가 아닙니다. 인위적인 노력이나 구호를 따라 실현되는 운동(movement)은 뒤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자랑하는 사랑이 되고 맙니다. 공동체와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 위한 경건과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것일 뿐입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행위가 악한 행실보다는 나은 것이지만, 중심에서부터 나온 은혜의 열매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인정치 않으실 것입니다.
셋째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당대 최고의 권력기관으로부터 감금되고 심문을 당하는 격렬한 반대와 위협을 당하였지만,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더욱 그리스도의 부활과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부활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사도들을 가두고 심문했던 이들이 부활을 부정하는 제사장 집단이요, 사두개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욱 소리 높여 전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열매는 한 복음, 한 성령, 한 주 아래에서 한 뜻과 한 몸으로 서로를 지키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여든 사람들의 구성원들은 제각각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다수였음에도 그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34-35절에서 말합니다.
34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공동체가 서로에게 헌신하여 공동의 재산을 형성한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공유하다는 유대와 친교의 의미는 같습니다. 공동체로 하나가 된 것이 재산까지 확장된 것입니다.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고 아낌없이 나누어주어서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물건의 통용이 구체적으로는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데,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서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제는 모두에게 해당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과 밭이 있는 사람들이 헌신한 일을 알려주는 것이고, 모든 소유를 팔았다는 것도 아니며 필요한 만큼만을 팔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여기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부유했던 형제들이 자신이 가진 것으로 가난한 지체들을 구제했을 뿐 아니라 더 큰 무리를 이루는 가운데 구제의 필요가 더해진 상황으로 가진 부동산을 처분하여 형제를 가운데 굶주림에 시달리는 지체가 없도록 헌신했다는 것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구제를 위한 헌신으로 부유했던 성도들의 수입은 구제로 인해서 상당량 감소했을 뿐입니다.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다고 말하고 있을 뿐 재물이 균등하게 분배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극도의 궁핍을 겪는 지체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합리적인 분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공산주의의 기원을 찾거나 합리적인 이유를 찾는 것은 주소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은혜 입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으로 묶여진 성도의 교통을 나타낸 것이지 재산분할을 강제하는 근거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은 형제는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인 태도를 가진 이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필요할 경우에는 서로 나누어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재세례파들 가운데서 본문을 근거로 극단적인 공동체 생활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을 근거로 사유재산이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소란을 피우던 광신도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할 것을 강제하고, 규정하여 법으로 만드는 행위를 저지르며, 나누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며 비성경적이요 불신앙이라고 양심을 겁박한 일은 성경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사상을 본문에서 길어내는 일은 은혜와 성령의 공동체를 물리적이고 차가운 제도로 환원시키는 끔찍한 왜곡에 다름 아닙니다.
당시에 성도들은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것을 악착같이 움켜쥐려는 욕망으로 나누고자하는 마음을 죽이지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순전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자신을 것을 내놓았던 반면에,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긁어모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지, 그들은 자신의 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던 것과 달리 우리는 하나님께 봉헌 된 것을 노략질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담대함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당시 교회는 두 가지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기관과 권력자들의 박해로 인해서 성도들은 사회적으로 소외가 되었고, 이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가정에서 쫓겨나거나 일터에서 밀려나 노동에서의 소외로 인해 가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집과 땅을 팔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구제문제가 등장했는데, 구체적인 실례를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바나바의 사례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들어 비교하고 있습니다. 36, 37절을 봅시다.
36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누가는 바나바를 구브로지역 출신 레위지파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유대인들 중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구브로 섬에 정착했습니다(BC 300년 이후).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태어났거나 가족이 그곳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나바는 레위지파 사람이면서도 구브로 지역, 곧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당시 레위인들은 대개는 유복했던 사람들이었고, 교육도 많이 받았지만 제사장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레위인들은 땅을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민18:20), 예외가 존재했는데 생계유지를 위해서는 가능했습니다(렘1:1).
바나바에게는 요셉이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워낙에 흔한 이름이었기에 ‘바나바’로 불려졌습니다. 이름이 둘 인 경우는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시몬, 바울은 사울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을 이름답게 교회공동체의 가난한 식구들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땅의 일부를 팔아서 그 수익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그가 판 땅이 유대 땅에 있는 것인지, 구브로에 있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구제에 빠진 식구들을 돕기 위한 필요에 따라 자신이 가진 부를 쪼개 나누었습니다.
처음에 말씀과 구제 모두 사도들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확장되고 무리가 늘어감으로 후에는 구제담당을 위해 ‘공궤’(구제를 위한 재정집행담당)를 맡는 ‘집사들’을 택하여 선출해야했습니다. 사도들이 감당했던 말씀과 돌봄, 구제의 사역은 장로(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통해서 우리시대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극심한 가난에 빠진 형제나 지체가 없도록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돌봐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시대는 나그네들, 즉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중에 자발적 가난 소에 놓인 사역자들을 돕는 일이 중요한 사랑의 의무가 되었습니다.
2. 기만에 대한 심판: 아나니아와 삽비라
1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당시 예루살렘 교회 안에 아름다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유혹과 어려운 문제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진척되는 곳에는 언제나 사탄의 방해와 유혹이 혼재했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부활의 복음이 증거 되고, 물건을 통용하고 한 마음과 뜻으로 서로에게 헌신했습니다. 바나바의 사례에서 아름다운 헌신의 실제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동시에 성령하나님을 기만하고 심판을 자초한 거짓된 헌신과 위선의 범죄를 기록함으로 교회를 위한 경고로 삼고 있습니다.
사탄은 모든 아름다운 것으로 과장합니다. 거룩한 공동체에 침투하기 위해 사람들이 놀랄만한 선행을 가장해서 파고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구제와 헌신의 모습을 가졌지만 위선이요, 거짓이었습니다. 바나바의 헌신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심판은 거울구조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심판을 받고 곧이어 삽비라가 심판을 받게 됩니다. 두 사람에게 집행된 심판은 하나님의 즉결심판으로 신약에서는 유일한 심판의 기적입니다. 아간과 같은 자백도 없고, 돌을 던져 처형하는 일도 없이 하나님께서 직접 행동하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은 기뻐하시지만 거짓과 위선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단지 물건의 일부를 숨겨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거짓과 속임 배후에는 더 큰 악들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 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멸시한 것이며, 하나님의 것으로 이미 성별된 것의 일부를 빼돌려 신성모독적 기만행위를 행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악한 망상과 공명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부자가 자신의 재산 중에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은 결코 작은 선행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인의 제사를 미워하십니다. 정직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을 때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잠15:8).
부부는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부부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발, 곧 공개적으로 교회 앞에 드러나는 사람들의 눈만을 의식하였습니다. 선한 일을 드러내어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만은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일 뿐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한 마음을 해치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사탄의 영향과 미혹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 일의 책임은 분명코 이들 부부에게 있었습니다. 이러한 악행은 그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불순종의 걸음으로 나아간 것도 분명하게 자신들의 의지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3-5절을 봅시다.
3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베드로는 사탄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아나니아의 죄악이 얼마나 두렵고 엄중한 것인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 은밀하게 찾아와 마음을 유린하려 하며 마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될 때는 강한 힘에 이끌립니다. 사탄이 역사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과 말씀을 통한 회개의 여지가 남지 않은 상태로 사막화 되어버렸습니다. 성령이 역사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은 상태야 말로 멸망 받을 자의 징표이라 하겠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아나니아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죄를 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죄는 더욱 나쁘고 악한 것이었습니다. 외적인 사정에 내몰려서 죄를 범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변명이 될 수 없는 마당에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것이라면 얼마나 더 악한 것이겠습니까. 누구도 그의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도록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자신의 땅을 팔아서 그대로 보유할 수 있는 자유 뿐 아니라, 땅을 판 이후에도 그 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 또한 있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서 그의 죄를 선언했습니다.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의 죽음은 겉보기에는 육신의 죽음인 것 같지만, 실상 이 심판에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징벌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징표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칼이나 외압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베드로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엎드려져 죽음을 맞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지만, 말씀을 거절하는 이들에게는 죽음과 심판을 선고하는 일이 됩니다. 복음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회개하고 믿는 이들에게는 생명이지만, 믿지 않고 거절하는 이들에게는 사망이요 심판의 말씀이 되고 맙니다.
아나니아의 징벌이 너무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나니아의 죄를 하나님의 저울과 심판대가 아니라 사람들의 기준과 판단, 저울로 달아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판단을 자신들이 가진 기준과 저울로 판단하기 때문에 수많은 중대하고 심각한 죄들도 사소한 허물로 여기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선자들과 하나님을 모독하고 우롱하는 자들이 가득한데, 매일같이 아무런 일없이 지나가지만 왜 유독 이들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불공평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과 경멸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고 틀림없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다만 심판하시는 때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기에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더불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심판은 당시 교회의 가시적인 심판의 공개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회에서 위선자들을 뿌리 뽑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말씀으로 심판하신 이 기적적인 일은 온 교회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경각심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11절입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부부의 심판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은 교회로 하여금 죄의 무서움을 알게 하셨습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리실 뿐 아니라 죄에 대해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며, 은혜가 많으신 분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즉결처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가감 없는 심판을 행하셔도 우리는 어떤 항변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래 참으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심은 은혜입니다. 교회가 막 세워지는 때에 발생하여 공동체를 와해시키려했던 무서운 죄에서 교회를 지키시고 정화시키심으로 보존하셨습니다.
교회를 공격하는 죄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역사와 더불어 우리시대는 어떠합니까? 교만과 위선, 재물에 대한 탐욕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노골적인 거짓말이 교회에는 없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순전한 헌신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구하는 위선적인 헌신과 외식은 없을까요? 회칠한 무덤이요 역겨운 냄새나는 바리새인의 위선을 질책하셨던 주님께서 우리시대의 교회를 어떻게 보실까요? 죄는 반드시 처리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변함없이 신실하게 집행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는 교회는 순결하게 보존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인정하며 주의 뜻만을 쫓아 순종하는 걸음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징계와 심판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이름과 영광, 명성을 높이기 위해 교회 안에 바벨탑을 쌓아가지 못하도록 지키시기 위한 은혜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