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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조선 반도를 강점하고 채 10년이 못 되어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기점으로 일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식민지 통치방식을 바꾸었다. 실상은 군대와 경찰을 증파하고 압박을 강화했지만, 표면적으로는 언로를 트고 조선인의 활동을 보장하는 듯했다. 그 결과 신문과 잡지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일제 초기 신문으로는 『매일신보(每日申報)』가 있었다. 1904년 7월 18일 양기탁(梁起鐸)과 영국인 배설(裵說, Bethell, Ernes Thomas)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를 일제가 사들여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을 떼고 개제한 것이었다. 여기에 『조선일보』(1920.3.5)와 『동아일보』(1920.4.1), 『시대일보』(1924.3.31) 등 민족지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문학사에서 익숙하게 들은 허다한 잡지들도 이 시기에 창간되었다.
아동문학 잡지도 이 시기에 대거 발간되었다. 『어린이』(1923.3.20∼1935년 3월호, 통권122호), 『신소년』(1923년 10월호∼1934년 4-5월 합호, 통권127호), 『새벗』(1925년 11월호∼1930년 6월호?), 『별나라』(1926년 6월호∼1935년 2월호, 통권80호) 등이 대표적인 잡지였다. 이 외에도 수많은 잡지들이 발간되었으나 ‘3호 잡지’란 말이 있을 정도로 출몰이 무상했다. 이들 잡지가 폐간된 1930년대 중반에는 아동문학 발표 매체로서 한 축을 담당했던 신문의 학예면마저 시들해져 아동문학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많았다.
앞의 잡지들이 폐간될 시점에 평양에서는 『아이동무』(1933.6∼1936.2)가, 간도(間島) 용정(龍井)에서는 『가톨릭소년』(1936.3∼1938.8)이 발간되었다. 전자는 당시 숭실전문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미국 선교사 윤산온(McCune, George Shannon)이, 후자는 독일인 신부 백화동(白化東, Breher, Theodor)과 배광피(裵光被, Appelmann, Bolduinus)가 발행인이었다. 윤산온의 아들 맥 맥쿤("Mac" McCune, George McAfee)은 1939년 라이샤워 교수와 함께 한글 로마자표기법인 매쿤-라이샤워 표기법(McCune-Reischauer System)을 만든 인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조선일보사에서 『소년』(1937.4∼1940.12)을 발간해 일제 말기에 3년 반 너머 버텼다.
일제강점기 아동문학의 매체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는데, 길어야 10년 남짓 발간되다가 다 폐간되었다. 일제강점기 중후반에 발간되었던 잡지들의 수명은 이보다 더 짧았다. 그 까닭은 재정적인 문제도 없지 않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일제의 검열 등 강압적인 통제가 컸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조선 통치는 3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말기에 해당하는 3기는 1931년 만주사변부터 일제의 패망까지를 가리킨다. 소위 15년 전쟁이라고 하는 이 시기는 일제가 조선을 전시 동원 체제에 편입하고 조선인들을 황민화(皇民化)하는 데 주안을 두고 있었다. 1935년경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1937년 10월에는 ‘황국신민의 서사(皇国臣民ノ誓詞)’를 제정하여 암송하게 하였으며, 1938년 2월에는 징병제의 사전정지 작업으로서 지원병 제도가 시행되었고, 1940년 2월에는 창씨개명을 실시하여 조선인들은 급기야 자신의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또 대륙병참기지를 부르짖으며 일본의 군수산업을 위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제하고, 지하자원을 대대적으로 약탈하였다. 일본 내의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1939년 ‘모집’이란 이름으로 강제연행을 시작하여 1944년에는 ‘징용(徵用)’으로 나아갔는데, 조선인들은 가혹한 노동을 강요받아야 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아동문학인들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17년 11개월 동안이나 장수한 아동문학 잡지가 있었는데 바로 『아이생활』이다. 이 글에서는 『아이생활』의 창간 배경과 잡지의 성격을 알아보자.
『아이생활』은 1926년 3월호를 창간호로 하여 1944년 1월호(통권 203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발행기간이 다른 잡지들에 비해 서너 배는 길다. 먼저 창간의 배경부터 살펴보자. 창간호에 실린 「아희생활의 출세」와 10주년 기념호의 「『아이생활』 10주년 연감」을 보면 창간 당시의 사정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아희생활』이 나오게 된 ᄭᅡ닭
이 본이 될 『아희생활』은 한두 사람의 힘으로 나오게 하지 못할 것이올시다. 작년 가을에 경성에셔 모힌 죠션쥬일학교대회에 오섯든 ᄯᅳᆺ이 갓흔 여러분 선생님들이 죠션 아희들의 부르지지는 소래를 듯고 깁히 늣기든 졍(情)이 발하야 한번 『아희생활』을 내일 의론을 말하매 다수한 어른들이 서로 도아서 『아희생활』을 내기로 하엿고 이 쇼식이 온 죠션에 퍼짐을 좃차 동졍하시는 분이 각 곳에셔 불닐 듯하야 지금은 이백여 명의 찬동자(讚同者)를 엇게 되고 ᄯᅡ라서 이- 귀하고 복스러온 『아희생활』이 우리 아동게에 나오게 되엿슴니다. (밑줄 필자)
2. 창간 당시 산파역을 다한 동인(同人) 제씨 − 본지를 내놓기 위한 당시의 고심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읍니다. 생각은 좋으나 사업에 따르는 재정문제를 해결하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었읍니다. 그 당시에 본사를 창립하기에 많은 노력을 한 이들로는 선교사로 허대전(許大殿), 곽안련(郭安連) 양(兩) 박사와 장홍범(張弘範), 강병주(姜炳周), 김우석(金禹錫), 석근옥(石根玉), 이순기(李舜基), 이석락(李晳洛) 제씨며 특히 창간 당시 주간이든 한석원 선생 이 모든 분들은 본지를 나오게 한 산파역의 수고를 한 이들이오 그 배후에서 노력을 아끼지 아니한 분들도 여러 분이십니다.
3. 본사 조직 당시의 회고 − 1925년 10월 21일로 동(同) 28일까지 경성에서 열린 제2회 조선주일학교대회 직후에 이상에 술(述)한 모든 정세에 의하야 당시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사무실인 종로 2정목(丁目) 12번지에서 정인과, 한석원, 장홍범, 강병주, 김우석, 석근옥 제씨가 회합하야 아희생활사 창립발기회로도 열고 재정에 대하야는 1주(株) 5원식(式)으로 출연하는 정신을 기초로 하야 발기위원 제씨가 책임적으로 각 분담활동하야 사우(社友)를 모집하기로 하고 사장에 정인과 씨, 주간에 한석원 씨로 선임하야 소년소녀 월간잡지의 간행을 촉진키로 한 것입니다. 이듬해 즉 1926년 3월 10일로서 만반 준비가 다 되어 편집인에 한석원 씨 발행인 미국인 나의수 씨의 명의로 소년소녀 월간잡지 『아희생활』 제1호 창간호를 세상에 내놓기로 되었읍니다. 그러고 사(社) 조직 내에 있어는 사우 전체로 총회가 있고 총회를 대표한 10주(株) 이상 사우로 이사회가 되고 이사회에서 간부 직원을 선임케 된 것입니다. (밑줄 필자)
이상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 두 가지가 될 것이다. 하나는 사람들로, 1925년 10월 21일부터 28일까지 경성(서울)에서 열렸던 조선주일학교대회를 마치고 정인과(鄭仁果), 한석원(韓錫源), 장홍범(張弘範), 강병주(姜炳周), 김우석(金禹錫), 석근옥(石根玉) 등 조선인 목사들이 모여 『아이생활』 창립발기회를 가졌으며, 선교사 허대전(許大殿, Holdcroft, James Gordon), 곽안련(郭安連, Clark, Charles Allen)과 조선인 목사 이순기(李舜基), 이석락(李晳洛) 등이 도왔다는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돈인데, 잡지 발간을 위해 사우를 통해 주금(株金)을 모금해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창간 주도 세력이 목사와 선교사들이고 주일학교대회를 마친 후 “50만 다수를 점한 교회가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기 비롯”하고 “내부적으로도 부패의 싹이 보”여 “교회문제나 사회생활에 있어 더욱 건실한 정신을 닦는데 한 도음이 되게 하자는 의도”에서 “소년소녀들의 읽을 만한 서적이 없”(연감, 5쪽)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잡지를 발간한다고 하였다.
주일학교(Sunday School)란 선교사들이 1888년부터 어린이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친 데서 비롯되었다. 주일학교가 늘어나자 이들을 묶어서 1911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이하 ‘연합회’)가 만들어졌다. 세계주일학교연합회와 협의한 결과로 재정 지원도 받게 되었다. 이 당시 허대전이 <연합회>의 총무를 맡았고 정인과는 부총무를 맡았다. 곽안련도 이후 <연합회>의 총무를 맡았고 주일학교와 관련된 책만 7권을 간행할 정도로 주일학교에 관심이 깊은 선교사였다. 제2회 조선주일학교대회의 회장은 장홍범(張弘範) 목사였고, 총무는 허대전과 정인과였다. 이 대회를 마치고 조선인 목사들이 『아이생활』 창간 발기회를 가졌다는 것이고, 선교사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말이다. 창간호부터 발행사는 ‘아이생활사’였으므로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서 발행”하였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이생활』의 창간호(1926년 3월호)부터 제4호(1926년 6월호)까지에는 사우들 명단과 주금 약정 현황이 수록되어 있다. 매달 사우들과 주금이 늘어났다. 그러나 창간 1년 반쯤이 되었을 때인 1927년 10월경, 재정적인 어려움이 커져 <연합회>에서 『아이생활』을 발간하도록 인계하였다. 다시 2년 뒤인 1929년에는 <조선야소교서회(朝鮮耶蘇敎書會)>(이하 ‘서회’)의 도움이 필요해 총무 반우거(班禹巨: Bonwick, Gerald William)와도 교섭하기로 하였다.
반우거는 호주 출신으로 영국에서 교육받은 후 구세군 참령으로 내한해 1910년 구세군을 떠나 <서회> 총무가 되었다. <서회>는 1890년 6월에 장로교와 감리교선교회가 연합하여 만든 <조선성교서회(朝鮮聖敎書會)>가 그 시초이다. 성서 주석, 찬송가, 주일학교 교리, 전도용 소책자를 주로 출판하였는데, 반우거가 취임한 이후 출판 실적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1915년부터 <조선야소교서회>로 개칭하였다. 반우거는 1929년 10월호부터 1936년 7월호까지 『아이생활』의 발행인으로 재임하면서 『아이생활』에 다수의 글도 발표하였고, 재정적인 뒷받침을 톡톡히 하였다. 1928년 안식년을 맞아 캐나다부인선교연합회의 몽고메리(Mrs. Montgomery)와 미국 뉴욕 만국선교연합회 중 부인 및 아동기독교문화사업협회장 플로렌스 타일러 부인(Mrs. Florence Tyler)과 교섭하여 후원을 약속받아 왔다. 1936년 10월경 <연합회>와 <서회>가 후원을 중지하자, 사장 정인과는 몽고메리와 타일러로부터 <서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아이생활사로 후원금을 보내주도록 교섭하여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이마저도 1940년경이 되자 끊겨버렸다. 그 배경으로는 선교사들의 강제 귀국이 영향을 미친 듯하다. 1935년경부터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선교사들이 교육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여러 학교들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받아들일 수 없던 선교사들은 강제출국당하게 되었다. 대체로 1936년경부터 1940년 사이에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귀국하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정인과와 장홍범은 다시 창립이사들로부터 주금을 받고, 독자들이 나서 아이생활후원회를 설립해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재정문제와 관련하여 『아이생활』은 초기부터 지면에 광고를 많이 게재하였다. 『어린이』, 『신소년』, 『별나라』도 광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광고 품목도 대부분 서적이었고 그것도 자사(개벽사, 중앙인서관, 별나라사) 서적 홍보가 대부분이었다. 광고 위치도 대체로 잡지 뒤쪽에 모아두는 식이었다. 『아이생활』은 달랐다. 품목도 서적뿐만 아니라 타사의 잡지와 서적에다, 약품, 과자, 악기, 여관, 항공, 상점, 회사, 출판사 등 다양했다. 광고 위치도 본문 군데군데의 자투리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1934년도 아이생활사의 연말 결산내역을 보면 수입 총계가 5,446원이었다. 정인과의 글에 보면 광고료가 매달 40원이었다고 하니 개산하면 연 480원 정도라, 광고료가 잡지 발행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아이생활』에 실린 글들을 보면 종교적 색채가 짙다. 창간 주도세력과 배경을 보면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기독교 문서선교의 일환으로 발간된 잡지인지라 종교적인 내용이 많은 것은 예견된 일이었던 것이다. 꽃주일, 아이주일, 크리스마스 등의 특집이 때맞춰 편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필진도 목사나 신도, 선교사들이 주를 이루었다.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독자란을 메운 소년 문사들도 신자가 다수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 이어 조선에서도 반기독교운동이 벌어졌을 때 잡지 『개벽』의 특집에 참여한 사회주의자 박헌영(朴憲永)은 “남조선보다는 북선(北鮮)에 기독교 세력이 근거가 깁흔 현상”이라 한 바 있는데 정확한 현실 파악이다. 선교사들은 ‘전략적 요충지의 선교기지’로 7군데를 꼽았는데 경성, 부산, 대구를 제하면 나머지 4군데가 평양, 원산(元山), 평북 선천(宣川), 황해도 재령(載寧)으로 ‘북선’ 지방이 많다. 평양의 숭실(崇實)학교, 숭덕(崇德)학교, 숭의(崇義)여학교와 진남포의 삼숭학교(三崇學校), 원산의 영생(永生)학교, 선천의 신성(信聖)학교, 재령의 명신학교(明新學校) 등은 모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다. 『아이생활』 독자의 도별 통계를 보면, 경기도(경성)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평남, 평북, 황해도, 경북, 전남, 함남의 순이다.(연감, 18쪽) 경성과 대구, 전남도 많지만 이는 다른 잡지에도 공통되는 현상이어서, 『아이생활』에 ‘북선’ 지방 소년 문사들이 더 많이 투고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특징으로 언급할 만하다.
『아이생활』 지면을 꼼꼼히 뜯어보면 의외로 민족주의적인 내용이 많다. 단군(檀君), 이순신(李舜臣), 이준(李儁) 열사 부인, 손기정(孫基禎), 한글, 조선 역사와 인물 등 다양하고도 양이 많다. 이는 거의 전 기간 사장을 맡아 실질적으로 『아이생활』 발간을 주도한 정인과(鄭仁果)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안창호(安昌浩)의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에 가입하였고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하였던 이력의 소유자였다. 정인과를 두고 기독교 민족주의자라 평가하는 이유도 이런 데 그 까닭이 있다.
천도교라는 민족 종교를 배경으로 한 『어린이』나 한글학자 신명균(申明均)이 발간한 『신소년』 그리고 계급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카프(KAPF)의 지도하에 있던 『별나라』에 못지않은 더러는 더 많은 민족주의적 내용의 기사를 게재하고도 검열에 걸려 삭제나 불허가 심지어 압수당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조선출판경찰월보』, 「불허가 출판물 및 삭제 기사 개요」, 「불온 소년소녀독물」, 「언문소년소녀 독물의 내용과 분류」 등의 자료에 따르면, 『어린이』는 26회, 『신소년』은 24회, 『새벗』은 12회, 『별나라』는 42회나 삭제, 압수, 불허가 등의 검열을 받은 반면에 『아이생활』은 2회에 지나지 않는다.(이 수치는 객관적인 통계가 아니라 하나의 경향을 읽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조선총독부는 검열의 기준으로 민족주의적 경향을 보이거나 계급주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경우를 주로 그 대상으로 하였다. 『어린이』, 『신소년』, 『별나라』는 물론이고 발행기간이 짧은 『새벗』에 비해서도 『아이생활』은 검열 횟수가 상대적으로 적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기독교가 가진 국제사회의 연대와 그들의 대리인인 선교사들이 어느 정도 뒷배가 되어준 까닭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아이생활』이 일제와 맞서거나 당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소년』과 『별나라』는 물론이고 신영철(申瑩澈)이 편집을 맡았던 시기의 『어린이』(1931년 10월호부터 1932년 9월호)까지도 당시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이 중첩된 식민지 민족 현실을 지면에 반영하려고 노력한 것에 비추어보면 『아이생활』은 이러한 점에 있어서 거의 완전히 외면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초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포교적 성격 곧 문서선교를 목적으로 한 잡지로서 일제 당국의 눈 밖에 날 일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938년 3월호는 『아이생활』의 12주년 기념호였다. ‘간부의 면영(面影)’이라 하여 사장 정인과와 위원장 장홍범의 사진을 게재하였다. 이즈음 정인과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이를 트집 잡아 조선총독부는 아이생활사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7월호에 처음으로 황국신민의 서사와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君ガ代) 및 중국 북부 지방을 침략하고 있던 황군(皇軍) 사진을 게재하도록 강제하였다.(오른쪽 문건 참조)
1938년 9월 장로회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되었고, 정인과도 변절하여 “유다의 직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인과와 『아이생활』 발간의 중심축이었던 기독교가 이른바 기독교의 일본화에 동조하면서 『아이생활』의 지면은 급격하게 친일적인 내용으로 도배가 된다.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의 ‘신체제운동’에 발맞춰 천황을 받들어 군국주의 파시즘을 부르짖고 총후보국(銃後報國)의 태세를 강조하였다. 선동적인 노래와 논설, 구호와 더불어 각종 문학작품으로 황은(皇恩)에 보답할 것을 되풀이하여 강조하였다. 1940년 말까지 발간되었던 『소년』도 『아이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아이생활』은 오랫동안 아동문학 발표 매체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작가들의 발표의 장이자 어린이들의 교육의 도구였고,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민족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소년』과 마찬가지로 『아이생활』은 일제 말기 아동문학의 안타까운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1938년 8월호에 ‘본지 폐간사’를 남기고 과감하게 붓을 꺾은 『가톨릭소년』과 같이 일제 말기 전시동원 체제의 광풍이 불어닥치기 전에 차라리 폐간했더라면 그나마 치욕은 면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