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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인지
한철(가명)이라는 아이에게 수업을 해준 적이 있다. 친구 아들이고 형편도 그렇고 해서 각서를 쓰고 나중에 153에서 봉사하는 조건으로 무료로 수업을 해주었다. 칠레(실제로는 타국)에서 살다 온 학생이었는데 집과 교회에서는 한국어를 썼지만 학교와 사회생활에서는 칠레어를 사용했던 칠레 네이티브였다.
언어와 언어의 비대칭성
보통 외국에서 살다 온 학생들은 외국어 단어와 한국어 단어를 연결시키지 못한다. 심지어 외국어와 한국어로 모두 그것을 알고 있어도 그것을 연결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영어로 apple이라고 알고 한국어로 사과라고 알지만 그 두 발음이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물론 가정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은 익숙해서 이미 연결이 되어있다. 그런데 그런 단어들도 어느 순간에는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어 할 줄 알아도 학교 수업에 사용하는 단어들이 익숙지를 않아서 학교 수업을 알아들을 수 없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언어사용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단지 성적이 안 나온다는 것을 알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추궁을 한다.
“왜 이렇게 공부를 안 하냐?”
그럼 아이는 대답한다.
“수업을 못 알아듣는다.”
그럼 부모는 반문을 한다.
“이미 외국에서도 배운 내용들이고 너는 한국어를 하는데 왜 못 알아듣느냐?”
이것은 외국에서 살다 온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 중 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한철이 수업을 하기 전에 가족들을 만나서 가족들의 기질이나 성격을 분석해 주었다. 스스로 질문지를 통해서 기질을 테스트해서 오도록 했는데 스스로 작성한 내용들이 오류가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메타인지(자기 인식)가 부족하기 때문에 대부분 테스트가 맞지 않은 경우들도 발생한다. 특히 정식 테스트는 비용이 비싸기에 인터넷에 떠도는 짧은 문항들로는 부족한 경우가 많다. 또 그 내용이 난해할수록 스스로 자기 기질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대표적인 것이 에니어그램이다. 그래서 아들과 아버지 엄마의 기질을 다시 말하며 분석해 주니 가족들 모두가 놀랐다. 보통은 테스트를 해도 그 기질들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점쟁이가 맞히는 것보다 정확하게 가정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서로의 속마음이 어떤지를 말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 친구의 가정은 내가 전혀 모르고 친구라도 대학 때 친구라 20년 정도 전혀 교류가 없었다.
예비 중 3이었던 한철의 기질은 에니어그램 9번이었다. 이 기질의 장점은 남들 사랑하고 봉사 잘하는 기질이다. 그런데 단점은 게으르다는 것이다. 그 정도가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서 생각도 하지 않을 정도로 게으르다. 그냥 집에 가면 과자 먹고 쇼파에 누워서 뒹굴뒹굴 한다.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잔소리 하면 방에 들어가 시간을 때운다. 사실 그냥 책상에 앉아 논다. 그리고 공부 너무 많이 해서 힘들다고 지쳐서 쉬어야 한다고 또 뒹굴뒹굴한다. 수업 시간에도 좀 어려운 내용 나오면 그냥 생각 안 한다. 귀찮은 것이다. 심지어 일도 연애도 다 귀찮다. 연애를 열정적으로 하다가도 어느 날 조금 갈등상황이 생기면 그냥 잠수 타버린다. 해결하기도 귀찮은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왜 잠수 탔는지 설명하기 귀찮아서 더 연락을 안 한다. 공부하기 귀찮아서 그냥 살다가 막노동 인생이 되면 그 막노동도 나오다가 안 나오다가 한다. 그냥 다 귀찮은 것이다. 그래서 사장이 뭐라고 하면 그냥 그 일 안하고 다른 막노동 업체로 일을 나간다. 그도 귀찮으면 사장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고 또 자기식대로 일을 나오다 안 나오다 한다. 귀찮은 것이다. 그런 일을 평생 반복하며 사는 것이 일반적으로 이 기질들의 게으름이다. 부정적일 때 이렇게 산다는 것이다. 그냥 인생 자체가 귀찮다. 하고 싶은 것 있어도 그냥 귀찮아서 안 한다. 놀고 쉬고 즐기고 또 그것도 너무 하면 귀찮다. 또 잔소리 듣는 것도 귀찮다. 그래서 잔소리 안 듣는 선에서는 하려고 무단히 노력을 하는데 그 수준이 남들이 보면 게을러서 도대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수준이다. 그런데 자기 딴에는 그 정도 하려고 엄청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의 기질의 단점을 적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이는 알 것인 데 이것을 적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이 아이의 장점은 성격이 둥글둥글하다는 것이다. 웬만하면 고민 안하고 잘 넘겨준다. 이 글도 다른 아이들이나 부모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니 잘 이해해줄 것이다. 무엇보다 이 글에서 단점을 위주로 적은 것은 설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 기질은 에니어그램 상 최고의 기질로 평가 받는 기질이기도 하다. 모든 기질이 성화가 되면 이 기질처럼 보이게 될 수도 있다. 에니어그램을 고대로부터 전승해오던 수도사들이나 이슬람 신비주의 무리의 성화의 표상인 것이다. 나에게도 상담사들이 이 기질이 아니냐고 처음 보면 묻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나는 이 기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보일 때가 많다. 숱한 인생의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께서 다듬으셔서 이렇게 되었다. 모난 돌이 개울과 강을 따라 오다 치이고 치여서 다듬어지듯이 그렇게 된 것 같다.
아버지의 성격은 아이와는 정반대였다. 에니어그램 1번이었다. 무엇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그대로 다 실행이 되는 기계보다 더 기계 같은 실행력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인 목표나 도덕적인 기준도 상당히 높다. 기본적으로 대쪽 같은 성격이다. 그러니 아이를 보면 절망스럽다. 인간이,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실망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이 기질들도 절망을 한다. 그 열심으로 끝까지 무엇이든 한다. 그래도 안 돼서 절망하면 더 이상 말도, 시도도 하지 않는다. 절제력이 있는 것이다. 포기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결단력도 있는 것이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한철 아버지는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아이를 포기하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아이를 보고 있었다. 물론 믿음으로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이런 내용을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어떤 기질보다 이 아이가 가지고 있는 기질이 변화가 느리다고 설명해 주었다. 성적 변화도 가장 느리다고 말했다. 사실 친구 아들이 아니었으면 이 아이 혼자를 상대로 수업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때 내 몸 상태는 10m를 걸어가면 앉아서 쉬어가야 하는 상태였다. 그렇게도 얼마 버티지를 못했다. 그래서 바깥 구경을 하고 싶으면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다. 1년 넘게 병원 침상에 누워있는 상태에서 전화로 그리고 줌(Zoom)으로 비대면 수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힘이 없어서 수업을 하고 나면 며칠을 앓아야 했다. 아이가 토요일 밖에 시간이 안 된다고 해서 토요일에 수업을 했는데 수업 후에 너무 아파서 다음날인 주일날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니 순종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는 그것을 하는 것이 산제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부으신 긍휼의 마음이 있어 누구든지 심지어 부모가 마음으로 포기했어도 나는 포기가 안 되는 경우들이 많았다. 장승수(가명)라는 학생도 부모도 학교도 학원도 포기했던 아이였는데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셨다. 지금도 세상이 포기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상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외국에 살다 와서 한국에서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정상적으로 수업을 듣기까지는 최소 3년 이상이 걸린다. 그것도 그 학생이 가정과 최소 교회 정도의 한국인 공동체 안에서 한국어를 능통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좀 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외국에 살다 온 학생들이 한국학교에 적응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마련한 장치가 국제학교다. 외국인학교다. 수업 자체를 외국어로 하는 학교다. 그나마 한철(가명)은 가정과 교회공동체에서 한국어를 능통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런 학생에게 내가 내린 처방이 무엇이었겠는가? 사람들이 들으면 비웃거나 최소한 그걸 왜 하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기적과 메타인지 결여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의 교과서를 읽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예비 중 3에게. 그런데 그 교과서를 대충이라도 읽은 한철은 수업내용을 어려움 없이 알아들었다. 열심히 공부해도 3년 이상 걸릴 일을 단 4개월 만에 해낸 것이다. 부모도 한철도 그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는 알지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처음 베푸신 기적이었다. 만약 내가 내려준 처방 없이 고3까지 수업을 못 알아듣고 내신 성적을 다 망치고 재수할 때 나를 만났으면 그 고마움을 알 수 있었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기적이 일어나도 그것이 기적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메타인지 0
더 빠른 시간에도 될 수 있었다. 그런데 4개월이란 시간이 걸린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게으름이다. 중3 학생이 이미 자신이 다 배운 초등학교와 중학교 2학년까지의 교과서를 방학 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시간을 쏟아 읽는 다면 넉넉하게 3주면 다 읽을 수 있다. 좀 열심히 하면 국어교과서나 도덕 사회 등 초등 것은 하루면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사실 2주도 안되어서 모든 교과서를 읽을 수 있다. 좀 많이 논다고 가정하고 여유를 주어도 한 달이면 읽을 수 있다. 사실 교과서는 그 내용도 많지도 않고 두께도 얇아서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학생에게 읽으라고 했다. 그러고 나면 수업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역시 한철이었다. 게으름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4개월이 되어도 교과서를 다 읽지를 못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겨울방학 전에 시작했던 것 같은데 중학교 3학년 1학기가 시작 되었는데도 다 읽지를 못한 것이다. 또 공부하러 가서도 앉아있는 것이지 제대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보면 노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부를 한다. 그리고 자신 딴에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평소의 습관대로 전혀 머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단지 앉아서 책에 있는 글을 기계적으로 읽고 있는 것이다. 12시간을 앉아 있어도 상위권 학생들 1시간 공부 분량도 공부하지 못한다. 그것도 이 따위 것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득 품고서 불만에 가득 차서 다른 것들은 보더라도 교과서는 밀어 놓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를 읽는 데는 4개월 가까이 걸렸다. 그것도 문제는 풀지도 않고 내용만 읽는데 그런 시간이 걸렸다. 그것도 일부는 교과서를 잃어버려서 다 읽지도 않았다. 물론 사실일지라도 좋은 핑계 거리에 불과했다. 있는 교과서들도 다 읽지를 않았다. 나는 알고도 속아 주었다. 그런데 부모님들은 처음 약속을 잊어버렸는지 나에게 왜 수업을 안 해주느냐고 했다. 사실 교과서를 다 읽으면 수업을 해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내가 수업을 하는 조건이 그랬다. 각서에는 이미 모든 것이 명시되어있었다. 수업을 제대로 따라오지 않으면 언제든 조건 없이 수업에서 자를 수 있다고.
수업료도 안 내는데 권리주장을 했다. 원래 내 원칙대로면 한철은 아무리 1억 원 수업료를 다 낸다고 해도 진작에 수업에서 잘랐어야 했다. 내 수업의 가치가 알려지면 수업료 1억 원은 문제도 아니다. 또 몸이 아파서 수업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지금도 소원은 고향마을에 가서 소일하며 텃밭 갈며 주님과 지내다가 조용히 하늘나라 가는 것이다. 153 학원을 시작한 것도 건강이 안 되어서 시작할 수도 없었는데 그냥 시작하라고 하셔서 시작을 했다. 월세만 계속 내고 심지어 전세도 카드론으로 연이자 16~17%가 넘는 고금리로 빌려서 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냐고 묻는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실 때도 있다. 반복해서 확인하고 주변에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감동이 있으면 그것은 순종해야 한다. 물론 몇 달 되지 않아 그 전세금은 하나님께서 갚아주셨다. 또 돈 벌면 뭐하겠는가? 하늘나라 가면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평가하시겠는가?
인생들 생각하는 기준들이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 판단하고 기준으로 삼는 것이 더럽고 원초적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께 묻는 물음이 없다. 자신이 최고의 판단의 기준인 것이다. 귀머거리 되고 소경 된 것이 성경 속에 귀신들린 자들의 일일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영적 상태인 줄은 짐작도 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길을 찾지 못한다. 보통은 하나님의 감동이 아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고 그것에 순종한다. 그러나 한철의 아버지는 조셉 얼라인이 언급한 성경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구원받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믿음으로 판단하고 믿음으로 생각하고 결정한다. 그래서 내가 신뢰하는 부분이 크다.
그래도 잘 모르니 그리고 부모로서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앞서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나는 과제를 다 하도록 4개월을 참고 기다려 주었는데 왜 수업을 안 해주느냐고 나한테 아이 아버지가 묻는다. 나는 분명 초등교과서를 다 읽으면 수업을 해주기로 했던 것이다. 과제를 해야만 수업을 계속해주는 것이다. 각서도 썼다. 그 각서 안에 이러한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과제 수행과 상관없이 내가 임의로 수업에서 학생을 자를 수 있는 조항도 명시를 해두었다. 그리고 수업구성과 방식이 이해가 안 되도 거기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면 감면해준 수업료는 전액 지불해야 함도 명시했다. 확인해 보면 아버지는 내가 설명해 준 것을 잊어버렸다. 어쩔 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러니 그래서 아예 설명도 안 되니 그냥 수업을 잘라버린다. 그런데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다. 하나님께서는 수업을 해주라고 하셨다. 어떤 때는 내가 수업을 해주고 싶어도 자르라고 하실 때도 있었다. 인생의 수준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는 측량할 수 없고 하나님의 자비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리고 수업을 해준지 6개월이 넘어서도 한철은 처음 내어준 과제도 완료하지 못했다. 그냥 수업 시간에 하는 것이 거의 다였다. 물론 과제를 완전히 안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거의 다 하지 않은 것이다. 그 완성도가 0~5% 수준이었다. 그런데 1년이 다되어가는 3학년 2학기 중간고사에서 처음으로 2주 동안 벼락치기 시험공부를 했다고 했다. 하루에 5시간 이하로 잠을 자고 깨어 있는 시간에는 어느 정도 열심을 다했다고 했다. 한철의 기질로 보았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칭찬을 해주었다. 고생했다고. 나는 그냥 아이의 말을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그제야 나는 하나님께서 왜 2개월 전부터 아이를 자르고 수업을 그만 두라고 하셨는지 알게 되었다. 친구 아들이라고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아이가 무엇을 했는가?’ 아셨나 보다. 아이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이고 아이의 메타인지가 문제가 있는 것도 아셨나 보다. 원래 에니어그램 9번과 에니어그렘 2번들이 결과가 가장 좋지 않다. 에니어그램 9번은 게을러서 뇌가 생각하기 싫어하는 습성이 잘 안 고쳐진다. 그리고 에니어그램 2번은 고질적인 감정적 사고를 버리지 못해서 논리적인 판단을 하는데 항상 문제가 생긴다. 그러한 습성들을 버리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해서 아이와 친구 부부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 수밖에 없다. 아마 가명에 외국에 있다가 온 나라도 다른 나라로 써서 본인들도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한철은 편하게 생각해 주리라 믿는다. 가장 욕심 없고 사람 좋은 순수한 기질이기에 그래서 나도 한철은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의 순수함이 그리고 남부의 따뜻한 해양성 기후아래 자란 낭만적이고도 정열적인 칠레 아이의 그 명랑함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심지어 자기 존재조차도 불사르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한 없이 게을러지고 무엇에든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는 아이가 자신감을 잃지 않기를 원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수업에서 자르라고 하셨다. 나는 친구 아들이라 상당히 곤란했다. 처음부터 시작을 안 하면 안 했지 시작했는데 자르는 것은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이었다. 전에도 친분이 있던 사람들의 아이를 수업에서 잘라서 관계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원래 부모란 아무리 설명해도 자식에 대해서는 납득이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말했다. 이제 중학교 공부는 혼자 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 한 달 남은 중3 2학기 기말고사까지 혼자하고 내가 내어준 과제를 다 하면 연락하라고. 그리고 전화하기 전에 IQ 테스트하고 전화하라고 했다. 결국 아이는 이 과제도 끝까지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하라고 한 과제도 있었는데 그것도 끝날 때까지 1년 가까이 되어서도 하지 않았다. 수업을 시작한지 1년이 다되어가도록. 앞에서는 예라고 말하고 과제도 다했다고 하지만 뒤에서는 의지가 받쳐주지를 못하니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물론 일 주일에 두 번 있는 수업을 통해 자신이 그나마 노력 안 해도 잘할 수 있게 된 국어나 영어 그리고 기타 과목은 조금했다. 그러나 수학은 포기한 듯 했다. 본인 스스로는 노력을 했다고 하지만 메타인지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냥 시간을 낭비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사고하기 싫어하는 9번이 수학을 어떻게 대하는가? 훤히 알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깨뜨릴 방책을 알려주었는데 그것도 대충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도 자신은 시키는 것의 일부를 그나마 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글을 적는 이유는 하나다. 혹시 학원이나 개인적인 과외에서 이유 없이 나의 수업에서 잘려나가는 것 같더라도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수업을 해도 소용이 없을 때에는 수업을 안 하는 것이 맞다. 부모의 돈을 낭비하는 것이고 차라리 그런 학생은 노는 것이 낫다. 억지로 학원에 잡아 두면 공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만 강해진다. 설득을 해도 안 되는 학생들은 그냥 두어야 한다. 그래서 인생의 쓴맛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공부하려고 한다. 그게 늦을 것 같아도 억지로 잡아두고 공부시키면 그 시기는 더 늦어진다. 부모가 강요하지 않고 두면 자기 미래는 자기가 걱정한다. 그리고 스스로 계획이라는 걸 세운다. 부모가 강제로 챙기지 않으면 결국 아이 스스로 불안함을 가지고 스스로 챙긴다. 부모도 아이에게 때로는 아이가 하는 만큼만 주겠다고 해야 한다. 자식이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아도 계속 돈을 공급해준다면 자식은 그 늪 속으로 계속 빠져들어 갈 뿐이다. 차라리 그렇게 사는 결과로 감옥도 가고 굶고 해야 정신을 차린다.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줄 것이 아니라 살 수 있는 자립심을 길러주어야 한다. 유산은 미전도 종족 선교를 위해 헌금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야 아이가 자기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자기 인생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시키면 반발심이 일어 공부도 제대로 안 한다. 그러면서도 타성에 젖어 무엇인가 하고 있으니 불안감도 없다. 때로는 극성인 한국 부모가 아이들의 메타인지 발달을 저해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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