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 시온주의자들은 무장단체 하가나를 창설하였습니다.1) 대 무프티(모슬렘 법률가) 하지 아민은 팔레스타인 모슬렘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고,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크게 바꿔놓은 영국의 또 다른 결정이었고, 이런 결정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심각한 결과를 불러왔습니다.2)
1. 왕들이 전쟁을 만들었습니다(창 14:1~2).
창세기 14장 1~2절에 “신알의 왕, 엘람의 왕, 고임의 왕의 날에 되며. 그들이 소돔의 왕과 고모라의 왕과 전쟁을 만든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근본적 정책 방향을 다시 검토하지 않았고, 영국은 가짜 유대인(아시케나지)의 민족적 고향 건설을 지원했습니다.3)
문제의 발단은 서쪽 벽(Western Wall)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서쪽 벽에서 소리 내거나 기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당국은 조용한 예배는 일반적으로 눈감아주었습니다.4)
1929년 8월 15일은 가장 애통한 날로 꼽는 아브월 9일의 하루 전날로, 1929년 8월 16일에는 텔아비브에서는 6000명의 유대인이 운집하였으며 서쪽 벽 앞에 모인 유대인 3000명은 심대한 모욕을 규탄하였습니다. 그들은 깃발을 흔들며 “벽은 우리의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5)
참극이 생겼는데 장애인인 유대인 약사와 그의 아내가 살해를 당하고, 열세 살이었던 딸도 집단강간 후 살해당한 것입니다. 어느 부부는 바닥 피를 묻힌 후 죽은 척하여 그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폭동은 전 세계의 머리기사를 장식하였습니다.6)
영국이 꾸린 조사위원회 위원장은 월터 쇼(Walter Shaw) 경이었으며, 대 무프티 하지 아민도 증인으로 위원회에 참석하였는데 학살에 대한 책임이 대 무프티에게는 없는 것으로 판결되었습니다.7)
보고서는 이제 유대인이 매입할 만한 땅이 거의 남아 있지 아니하다며 유대인의 땅 매입이 땅 부족 사태를 만들 수 있는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총리는 대규모 이민이 계속될 것임을 밝혔습니다.8)
히틀러는 유대인의 왕관은 인류의 장례 화환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독일 영사관에는 나치 문양 깃발이 걸렸습니다. 히틀러의 부상은 팔레스타인 이주 유대인 증가 원인이 되었습니다.9) 많은 유대인이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벤구리온(나중에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가 될 사람)은 뉴욕에서 시온주의 운동과 모금하는 문제에 주력하였습니다. 벤구리온은 이디시어·히브리어·러시아어·폴란드어·영어를 구사하였으며 노동계 시온주의자로 활동하며 아랍인과는 거의 교류하지 아니하였다가 팔레스타인의 주민을 이해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10) 벤구리온은 팔레스타인의 많은 수가 되려 하는 목표를 밝혔습니다.11) 유대인과 아랍인이 섞여 사나 유대인이 다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은 실수이자 모순이었습니다. 세계에 흩어져서 살던 수백만 명의 민족적 고향을 작은 땅에 만들면서 기존 주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공정한 기회가 필요한 것입니다.12) 이것은 아랍인의 관점으로는 공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는 히틀러가 독일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한 상황이었습니다. 1932년 영국은 파이살을 국왕으로 세워 이라크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시리아인들은 프랑스 철수를 논의하는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13) 영국의 처칠은 독일의 히틀러에게 맞서기 위한 성전(聖戰)을 막 시작한 참이었습니다.14)
이스라엘 하잔은 유대인 이민자로 플로렌틴에 살았습니다. 하잔은 아랍 남성들 총에 죽음으로써 ‘아랍 대봉기’의 첫 사망자가 되었습니다. 다음 날 밤에 무장 유대인 두 명이 아랍인 하산을 쏘아 죽였습니다.15) 아랍인들의 테러에 대한 유대인들의 보복인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시 아랍인 폭도들이 음료수 공장 사장에게 다가가서 머리에 몽둥이를 휘둘렀습니다. 유대인 희생자들 모두가 둔기에 맞거나 무기에 찔려서 죽었습니다. 유대인은 9명이 죽고 60명 넘게 상처를 입었습니다.16)
알렉산드리아에는 이탈리아인·아시케나지 유대인과 세파르디 유대인, 그리고 조지 안토니우스 같은 레반트 아랍인이 모여 살았습니다.17)
레반트 지역 아랍인은 영국이 아닌 미국의 위임통치를 바라고 있었고, 팔레스타인에 사는 아랍인은 유대 국가 설립을 단결해 반대하고 있었고, 그러면 밸푸어 선언의 공약이 무효로 될 것이었습니다.18)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집에서 비밀스럽게 다비드 벤구리온을 만났으며 안토니우스는 어느 쪽의 야망도 완전히 실현될 수는 없다고 말하였으며, 아랍인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여도 시온주의의 주장인 유대인 다수화는 용납하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19)
팔레스타인 곳곳의 아랍 도시와 마을에서 지역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시민들에게 세금 납부 중단을 호소하였습니다. 아랍인 상점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파업이 길어지니 아랍인과 유대인은 서로 멀리하였습니다.20)
1) Oren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정영은 옮김 (서울: 위즈덤하우스, 2024), 41.
2)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45.
3)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47.
4)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51-52.
5)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54-55.
6)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57-59.
7)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60-61.
8)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62-63.
9)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64-66.
10)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74.
11)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76.
12)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92.
13)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93.
14)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94.
15)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95-97.
16)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100-102.
17)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106.
18)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108.
19)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109.
20) Kessler, 『팔레스타인 1936』, 11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