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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율(郭𧺝)1531(중종26)~1593(선조26) = 63세].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경상도 의병장(義兵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
곽지인(郭之仁)의 아들이고 승지 정사성(鄭思誠)의 사위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門人)이다.
사마방목은 명종(明宗) 13년(1558) 곽소. 곽율, 곽수륜 /사마시 동방록 에 수록 되어 있습니다
선조 시대 활동
1558년(명종13) 나이 28세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의 추천으로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가 되었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김천찰방(金泉察訪)으로 나갔다가, 1580년(선조13) 내섬시(內贍寺) 직장(直長)으로 승진하였다. 송라도찰방(松羅道察訪)을 거쳐서, 1586년(선조19)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다고 하여 홍산현감(鴻山縣監)에 임명되었다. 그때 향교를 새로 중수하여 매월 초하루 이곳에서 생도들을 데리고 강론하였고, 고을을 순시하면서 농사짓는 일을 권장하였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이성중(李誠中)과 어사(御使) 유대진(兪大進)이 서로 잇달아 그를 표창하도록 상소하니, 선조가 특별히 표리(表裡) 1벌을 하사하였다. 1586년(선조19)에 군자감(軍資監) 판관(判官)으로 승진하였고, 그해 가을에 예천군수(醴泉郡守)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선조25) 그는 작은 사건에 연좌되어 벼슬에서 물러나서 낙향(落鄕)하여 현풍에 머물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초계 지역 방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구(倭寇)가 갑자기 침입하자, 고령(高靈)에 사는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과 합천(陜川)에 사는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곽율(郭*)은 현풍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요충지 초계(草溪)를 지키니, 왜적이 감히 낙동강 우변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초계는 낙동강가의 요충(要衝)으로 낙동강의 동서 지역을 왕래할 때 반드시 이곳을 경유해야 하므로, 그가 현풍 의병을 거느리고 초계의 길목을 철통같이 지켰기 때문에 왜적이 감히 경상우도 지역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경상도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성일(金誠一)이 곽율을 초계군수(草溪郡守)의 직무를 임시로 맡아보게 하였는데, 당시 초계군수 정눌(鄭訥)이 도망쳐서 군수가 공석이었기 때문이다. 임시군수[假守]에 임명된 곽율은 작전 계획을 치밀하게 세운 다음에 장정(壯丁)들을 훈련시키고 기계(器械)를 수리하는 등 전쟁을 준비하는 한편, 북상하는 왜적과 여러 번 접전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왜적의 숫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그를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에 임명하였으나, 도내(道內)의 유생(儒生) 정유명(鄭惟明) 등이 상소하여 그대로 유임되었다. 경상도순찰사 김성일은 “만약 여러 고을로 하여금 모두 초계군에서 정성을 다해 싸우는 곽율처럼 한다면 왜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 당시 전쟁의 재화(災禍)를 당하여 굶어죽은 송장이 들판에 가득하고, 굶주려서 울부짖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초계로 모여들었는데, 곽율은 달마다 그 숫자를 헤아려서 밥을 주고 죽을 주어 그들을 먹여 살렸다. 전쟁 중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동생이 전염병을 걸렸는데, 그가 직접 약을 달여서 동생을 먹이다가 그도 전염병에 전염되어, 1593년(선조26) 4월 팔계(八溪)의 관사(館舍)에서 객사하였는데, 향년 63세였다.
성품과 일화
그는 의지와 기상이 특이하고 풍채(風采)가 범상치 않아서, 멀리서 바라보면 위엄이 있으나, 가까이에서 보면 겸손하고 성실하였다. 나물 반찬 한 가지라도 맛있게 먹었고, 화려한 옷 입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곤경에 처하더라도 굽히지 않는 굳은 절개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가 공무를 집행할 적에는 일에 임하여 명석하고 민첩하게 처리하였다. 마음을 언제나 공명정대하게 가졌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여 일을 세밀하게 처리하기에 힘썼다. 정성을 다하여 공무(公務)를 받들었으나, 오직 관용으로써 사람들을 다스렸으므로, 전후에 관직을 역임하면서 모두 훌륭한 성과가 있었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경상도 고령 용담(龍潭)의 산록에 있는데, 이후경(李厚慶)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있다. 경상도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의 별사(別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보감(國朝寶鑑)』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순암집(順菴集)』
『학봉속집(鶴峯續集)』
「팔계일기(八溪日記)」는 곽율(郭走+日) ; 1531~1593)의 문집『예곡선생문집(禮谷先生文集)』 상(上)의 잡저부분에 수록되어 있으며, 임란 때 왜적들이 팔계를 침입하여 식량과 무기를 강탈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를 때 끝까지 싸워 팔계일대를 지켜낸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팔계를 중심으로 한 영남지방의 임진왜란사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6월 9일부터 9월 20일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중간 중간 빠진 부분이 많아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곽율의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2년 성균관의 천거로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에 초임, 김천도(金泉道) 찰방(察訪), 내섬시(內贍寺) 직장(直長), 송라도(松羅道) 찰방 등을 지냈다. 1586년 사포(司圃)로 특진되고, 홍산현감(鴻山縣監), 예천군수(醴泉郡守) 등을 지냈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초계군수(草溪郡守)에서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으로 특진되었으나 도내 유생 정유명(鄭惟明)등의 만류하는 상소로 초계군수에 유임, 왜군을 방어했다.
남명선생에 대한 제문 祭文 門下郭𧺝
아, 애통합니다. 저는 일찍이 듣건대 증자(曾子)의 말씀에, “어린 군주를 보좌할 중책을 맡길 만하고 제후국의 정사를 섭정하게 할 만하며 생사(生死) 이해(利害)의 관문을 만나 그 절개를 빼앗을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선생의 재주와 덕은 이 말씀에 해당될 수 있을 것입니다. 흉금이 티 없이 맑아 천하의 만물 중에 그 무엇도 그 속에 들어갈 수 없고 기개와 도량은 넓으면서도 바르고 커서 스스로 태산(泰山) 교악(喬嶽)과 그 높이를 겨룰 만하였습니다.
문을 닫아 세속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학문의 일에 전심하되 글을 짓지 않고 논조를 세우지 않으며 그저 옛 성현의 길만 오로지 따르셨습니다. 하나의 지각이 가슴속에 깨어 있어 천지의 귀신이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항상 엄숙하였는데, 공부가 이미 무르익고 큰 근본이 세워지자 일상생활에서 제반 사물을 대처할 때 막힘없이 원활하고 여유로우셨습니다. 자유분방한 논변은 바람을 안은 돛배가 한번 달려 나가자 그 그림자가 아스라한 만경창파를 휩쓰는 듯하고 시원스러운 문장은 서릿발이 이는 칼을 한 번 휘두르자 그 섬광이 구만 리 창공의 반짝이는 별을 쏘는 것 같아, 그 빛나는 빛은 맑은 얼음이 옥병에 비치는 듯하고 담박한 기분은 하얀 달이 가을 하늘에 빛을 뿌리는 듯하였습니다. 이 어찌 이 나라 동방에 다시 나올 수 있는 호걸이겠습니까. 앞으로 후세에 만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지난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천도(天道)가 아득하고 요원하기만 하여 우리의 도가 불행해짐으로 인해 그와 같은 도를 가슴에 안고 이 세상을 피하시어, 꺾을 수 없는 절개를 지니고 초연히 산천에 노닐어 물고기와 산새를 짝하고 소나무와 사슴을 벗삼아 안개와 노을 기운을 마시고 연잎으로 옷을 지어 입고 지내시면서 시사를 걱정하는 눈물을 만 겹의 푸른 산 속에 헛되이 뿌리시고 세상을 분개하는 회포를 십 리의 흰 강물 가에 실없이 쏟으셨습니다. 부열(傅說)이 토담을 쌓고 있는 꿈은 현인을 갈구하는 임금의 잠자리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자릉(子陵)이 제수받은 간의대부(諫議大夫) 벼슬은 오히려 관 뚜껑을 덮은 뒤에 내려졌습니다. 가슴속에 조화를 부리는 묘리가 덧없이 늙어 가고 소매 속에 세상을 다스릴 솜씨가 끝내 잠자니, 길이 뜻있는 선비의 의분을 자아내고 철없는 아이들과 무식한 천민의 입에 칭송만 자자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본심은 민간의 백성을 잊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니 선생의 별세가 어찌 저로 하여금 영원토록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재주가 없는 저는 속세의 테두리 속에 깊이 떨어져 나이는 많아도 학문의 방향을 몰라 저의 내면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취할 만한 장점이 하나도 없었는데, 다행히 하늘로부터 타고난 선을 향하는 본성을 가려 버리기 어려워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해야겠다는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바닷가에서 한 번 인사를 올리고 다시 산중으로 찾아가 뵈었는데, 저를 무지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가르쳐 주신 말씀이 간곡하고 미진한 점이 없으셨으니, 소자는 감격한 나머지 어두운 지각이 열릴 수 있었습니다. 몸은 비록 문인 제자가 되어 정성을 다 바쳐 섬기지 못했으나 사모하고 좋아하는 마음만은 지극하였습니다. 강녕하신 선생의 건강에 마음을 놓으며 모든 신명이 도와 만수무강을 누리심으로써 드높은 기풍을 오랫동안 흠앙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우리의 도를 하늘이 돕지 않아 갑자기 흉한 소식을 듣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미 영위(靈位)를 만들어 곡한 뒤에 또 부의(賻儀)를 부쳐 드리기는 하였으나, 저희 가문에 화가 있어 지난겨울에 형의 상을 당하여 당상에서 상심하시는 노모의 시름겨운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온갖 비감이 한꺼번에 모여들고 갖은 근심이 맺혀 가슴을 짓누르므로 선생의 장례를 치르는 이제까지 찾아가 곡하지 못했으니, 그 누가 비통한 제 심정을 알겠습니까. 선생으로부터 받은 평소의 은정을 생각하니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아, 선생이 떠나셨으니 소자는 이제 어디에 의지한단 말입니까. 해맑은 말씀을 들을 수 없고 따사로운 기풍을 접할 수 없어 바람결과 구름도 쓸쓸한 빛을 띠고 돌이며 샘물도 슬픔을 머금는데, 위대하신 이름만 남아 영원토록 우러르게 할 뿐입니다. 저는 이제 와서 곡을 하노라니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재배하고 제문을 올리니 영령께서는 굽어살피소서. -남명집
祭文 門下郭𧺝
嗚呼哀哉。吾嘗聞於曾子之言曰。可以托六尺之孤。可以寄百里之命。臨大節而不可奪也。如先生之才之德。爲可以庶幾乎斯說。而胸次澹然而絶塵。視天下萬物。皆不足以來入。氣宇浩然而直大。自可以爭高於泰山喬嶽。杜門掃軌。而專心學問之事。不著書。不立論。只一味循古人之塗轍。一箇知覺。要惺惺不昧於方寸之中。肅然常如天地鬼神之臨赫。工夫旣熟。大本旣立。日用應酬。流轉浩活。詞辯駿快。有如駕風之檣。一馳而影凌十千頃烟波之杳然。文翰洒落。有如拍霜之刃。一揮而光射九萬里星斗之燦然。炯如淸氷照采於玉壺。澹如素月揚輝於秋天。夫豈東方再生之豪傑也。不但難見於後。亦復難見於前。然何天道之杳邈。而致吾道之屯邅。懷此德而遯此世。確乎其不拔。卓然長往於林泉。伴魚鳥而友松鹿。餐烟霞而製荷蓮。憂時之淚。空洒於萬疊靑山之中。憤世之懷。聊瀉於十里銀河之邊。傅說板築之夢。未格於側席之上。子陵諫議之職。尙在於蓋棺之後。心上空老造化之妙。袖裏竟縮經綸之手。長扼志士之腕。謾騰走卒之口。夫孰知先生之素心。實未嘗忘君於畎畝。然則先生之亡也。曷不使吾痛哭流涕。猶不能自已於愈久。嗟吾生之不敏。落萬丈之塵臼。年旣多而學迷方。環顧中而無一善可取。幸天與秉彛之難揜。獲立志於擁帚。旣納拜於海上。復進謁於山中。語諄諄而叩竭。不謂我之空空。而小子之感激。得振發其頑躬。縱不能升堂而服勤。而慕悅則徒隆。慰先生之康寧。謂延齡於無窮。賴神明之共扶。久欽仰乎高風。孰意斯文之天喪。忽承音於告凶。旣申爲位之哭。又寄吊賻之封。只緣私門之禍酷。遭兄喪於去冬。傷心堂上之老母。忍見鶴髮之愁容。萬端悲撓之叢集。百憂欝結而塡胸。坐遲遲而迄今。孰知我心之悲恫。想平生而感念。愧靦然而顔紅。嗚呼。先生已矣。小子何托。金聲未聞。玉色未接。風雲帶凄。石泉含悲。空留大名。百世仰之。我來一哭。有淚千行。再拜陳詞。庶格未亡。尙饗。
덕계 오건에 대한 제문 [곽율(郭𧺝)]
아, 일찍이 세상의 군자를 보니 성실하고 도타우며 후덕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학문을 일삼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간혹 학문에 뜻을 두는 사람이 있다 해도 기질이 경박한 것이 병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비록 두 가지를 모두 잘 구비했다 해도 벼슬살이에 빠져 마음과 뜻이 번잡한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또 그렇지 않으면 초야에 묻혀 홀로 고결하여 한 쪽에만 치우치거나 메말랐습니다.
순수하고 도타운 자질로 몸소 효제를 행하였으며 학문은 체와 용을 갖추었고 시종일관 공부가 전일하였습니다. 세속의 영화는 짚신처럼 벗어던지고 산림의 생활을 즐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도를 걱정하고 애쓰는 생각은 초야에 묻혀 있어도 조금도 해이해진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선생에 대해 그리워하며 탄복하기를 그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하늘이 세상의 도에 과연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다면 어찌 수명을 더 주어서 선생으로 하여금 그 재능과 학문을 크게 넓히고 뜻을 둔 사업을 펴게 하지 않으시는지요. 불행한 변고가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애석하지 않으며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선생께서 돌아가시자 오래전부터 알던 이들은 슬퍼하고 탄식하였고 길 가던 사람들도 한숨을 쉬었으며, 품팔이, 장사, 종, 배운 자, 못 배운 자 할 것 없이 모두 국가의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철인이 돌아가셨다니 이는 누가 그렇게 한 것입니까. 온 나라가 함께 애통해 하니 인심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저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외람되이 일찍부터 선생을 알아서 문하에 드나든 지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궤연을 우러러보니 찢어지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지난가을 산성에서 만났을 때와 금년 여름 선생 댁에서 모셨을 때 깨끗하고 맑은 모습은 또렷이 남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끝났습니다. 이번 생에서는 군자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보잘것없는 벼슬에 팔목이 잡혀, 와서 곡하는 것도 아직 못하고 느지막이 오늘에야 와서 보잘것없는 제수를 올립니다. 평소의 일을 생각하니 슬프고 죄송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선생의 영혼이 계시다면 이 마음을 살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嗚呼。嘗觀世之君子。有愿慤敦厚之質者。未必爲學問之事。其或有意於學問者。則鮮不以氣質輕易爲病。雖二者俱善。而不免仕宦汨沒。心志熱鬧。又不然則山林長往。獨潔偏枯。以淳篤之資。躬孝悌之行。學具體用。功專始終。脫屣勢榮。玩意山林。而憂勤世道之念。未嘗少弛於畎畝者。吾於先生。所以傾慕歎服而不已者也。使天而果有心於世道。則寧不假之齡。而使之弘大其才學。展布其志業也哉。而不淑之變。遽忽至此。則天意從亦可知矣。豈不惜哉。豈不慟哉。自先生之喪。知舊悼歎。行路嗟咨。以至傭商僕隸有識無識。莫不皆以爲邦家不幸。哲人云亡。是孰使之然哉。亦可見爲一國之公慟。而人心之不可誣矣。況我愚生。蚤辱相知。出入門庭。歲月已久。仰瞻几筵。摧割何勝。去秋山城之會。今夏高軒之奉。皎皎淸彩。耿耿不可忘。已矣此生。不見君子之容矣。薄宦掣肘。來哭未卽。遲遲今日。菲羞是將。感念平素。悲悚來幷。伏惟先生未亡之靈。庶有以鑒此之心也。
김부륜雪月堂先生文集卷之一 / 詩
달 아래에서 곽군정 원정 태정과 부 처를 불러 운으로 삼고 같이 화답하기를 청하다
月下。與郭君靜元靜泰靜𧺝。呼賦處爲韻。仍請共和。
이리 저리 화정시를 엮어 橫斜和靖詩。
뛰어나게 광평부를 읊었네 獨步廣平賦。
웃음을 찾으니 마음이 무궁하고 素笑意無窮。
달이 밝으니 술병을 가져올 걸 月明携酒處。
곽예촌 율 에 대한 만사 2수 〔輓郭禮村 𧺝 二首〕 -송암 이로
호해의 구레나룻 덥수룩한 선비 태정씨 / 湖海厖髥泰靜氏
평생 의리를 행하여 명성의 떳떳함 환하네 / 平生行義透名彝
일찍이 타맥을 따라 구름문으로 날아올랐고 / 曾從駝陌羾雲闔
다시 용람을 잡고 올라가 옥가루를 마셨네 / 更把龍□吸玉霏
푸른 대와 소나무 같아 늘그막에 사귀었고 / 翠竹靑松歲晩契
기린과 봉황처럼 상서롭고 의젓한 위의를 지녔네 / 祥麟威鳳望中儀
세상사람 효자와 순리라고 칭찬하였으나 / 人稱孝子兼循吏
한바탕 꿈 갑자기 깨니 일은 이미 잘못 됐네 / 一夢俄驚事已非
포산에서 행실과 재주로 이름 떨쳤으나 / 藉甚苞山行與才
운이 막혀 서검이 부질없이 되었어라 / 命屯書劍亦嘻哉
만날 때마다 규룡 오래 서려 있어 감탄했는데 / 相逢每歎虬蟠久
잠깐 이별한 동안 나비 되어 되레 놀랐네 / 乍別還驚蝶化催
모두에 빛이 움직이니 전쟁으로 어지럽고 / 芒動旄頭方搶攘
정령이 기미에 오르니 멋대로 배회하네 / 精升箕尾任徘徊
창천은 어찌 차마 백성의 대들보 원수로 삼나 / 蒼天何忍讎民極
여덟 굽이 계곡 물소리 슬픔을 다하지 못하네 / 八曲溪聲不盡哀
곽태정(郭泰靜) 율 에게 답함
삼가 보내 주신 글월을 받고서 서리 내리는 추운 계절에 부모를 모시는 몸이 두루 평안하심을 살펴 알고는 매우 위안이 되었습니다만, 외가댁의 상사를 만났다니 가슴이 아픕니다.
말씀하신 바 세 가지 축문은 모두 《가례(家禮)》를 상고하여 써서 올립니다. 그중 하나는 옛법을 찾지 못해 함부로 초하여 올립니다만, 아마도 예법(禮法)에 흡족하지 못한 듯하여 매우 부끄럽습니다.
대상(大祥)을 치르기 하루 전에 신주(神主)를 사당으로 옮길 것이라고 영전(靈前)에 고하고, 고한 뒤에는 신주를 고쳐 쓰며, 이전에 진설했던 술이며 과일을 치우고, 다시 새 과일을 진설하여 잔을 올리면서 신주를 자리를 옮겨 안치한다고 고합니다. 그리고 즉시 새 사당에 봉안(奉安)하고 대상을 치른 이튿날까지 기다렸다가 부묘제(祔廟祭)를 지내고 신주를 사당으로 받들고 들어갑니다. 그러고서 주인과 형제들이 원래의 잠자리를 회복하고 - 부인과 함께 자지는 않는다. - 대상 뒤에 한 달을 건너뛰어 세 달째 되는 달에 담제(禫祭)를 지내고 비로소 술을 마시고 - 먼저 단술을 마신다. - 고기를 먹으며 - 먼저 마른 고기를 먹는다. - 중월(仲月)을 넘기고 협제(祫祭)를 지낸 다음 비로소 침상에 눕는다 - 부인과 잠자리를 함께한다. - 고 합니다. 제가 옛날에 예문(禮文)에 관해 들은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지금 서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감히 정성을 다 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숙부(肅夫 김우옹)가 임금에게 진달했다는 말은 곧 이른바 마음을 수양하자는 것으로서 오늘날 가장 중시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는 진정 군자가 임금을 위해 행하기 어려운 일을 임금께 권해 드리는 도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으니 저 같은 시골 사람도 기운이 나는 것을 느끼겠습니다. 다만 고향의 소나무와 국화가 행여나 옥당(玉堂)에 벼슬하고 있는 숙부의 꿈속에 어른거리지 않을까 염려될 뿐입니다.
존형께서 고향으로 돌아오시는 날 저를 찾아오겠다고 하신 약속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요즘에 와서 전혀 존체의 근황을 살피지 못하였으나 흠모하여 그리는 정성만은 지나가는 날짜와 함께 자꾸 쌓여 갑니다. 지금 부모님을 모시고서 즐겁게 복을 누리고 계시는지요? 저는 벗들과 천곡(川谷)으로 와서 거처한 지가 이미 두 달이 되어 갑니다. 비록 감히 얻은 것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감히 완전히 공부를 폐해 버리지는 않았으므로 이따금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반성해 볼 때 제 자신의 기상(氣象)이 과거와는 다른 것 같으니, 이 또한 모두 여러 사람과 함께 공부함으로써 얻은 도움이라고 봅니다. 다만 고명(高明)의 가르침을 직접 받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머지않아 글방 모임을 해산할 예정인데 앞으로는 또 이 몸이 어디에서 공부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인연이 닿아 한번 만날 수 있을지, 편지지를 앞에 대하고 보니 그리움이 더한층 사무칩니다.
伏承下書。伏審霜寒侍奉萬福。仰慰仰慰。但聞遭外服之慘。爲之怛然也。所敎三祝並考家禮書上。其一則未得舊例。輒妄草以呈。恐未愜禮。爲愧千萬。大祥之前一日。告遷于祠堂。告訖改題訖。輟前設酒果。復設新果酌獻。告以移安。卽奉安于新祠。以待大祥之明日。袝祭訖。奉入祠堂。主人兄弟復寢。未御婦人 中月而禫。始飮酒 先飮醴酒 食肉。先食乾肉 過仲月祫祭。始臥床。御婦人蓋昔者所聞於禮文如是。故今爲相愛。不敢不盡心焉。肅夫聞所陳達。是所謂本原之地。乃今日第一義。眞得君子爲君責難之道也。野人亦覺氣增。但恐松菊頻入玉堂之夢也。還斾之日。辱過之約。待之如黃石爾。
近來全未候尊體動止。惟是慕嚮之誠。與日俱積。卽今伏惟侍奉有日。欣喜享福。弟與朋友來棲川谷。已將二箇月。雖不敢自謂有得。而亦不敢專廢工夫。時懔懔自省。似覺氣象與嚮時不同。此亦莫非羣居之助也。但恨不得高明之誨。有以親炙而疑承也。月旬將罷接。此後又不知此身又在何處作工夫。何緣一謀承顔。臨紙益切馳情。
곽예곡(郭禮谷) 율 의 무덤에 올린 제문 –한강 정구
효성 우애 천품에다 / 孝友之資
충성 신의 자질이요 / 忠信之質
온후하신 용모에다 / 溫厚之容
강직하신 심덕으로 / 懇確之德
독실히 선 좋아함은 / 好善之篤
이 세상에 짝이 없고 / 在今無倫
순박한 덕행 규범 / 制行之醇
옛적에도 흔치 않아 / 於古罕比
부모 형제 치하 말씀 / 父母兄弟
부정한 이 없었다네 / 人無間言
세상 나가 임금 섬겨 / 出身事君
충성 노고 드러났고 / 忠勤並著
난리 속에 직무 수행 / 亂離奉職
심력 모두 다했는데 / 心力俱殫
애석할손 어인 일로 / 嗚呼奈何
몸져누워 돌아갔나 / 一疾莫救
어진 이 장수한단 이치가 사라지니 / 仁壽理爽
선한 자 복 준다는 천심을 모를레라 / 福善天茫
정구 이 몸 소생은 / 逑也小生
일찍부터 사랑 입어 / 幼蒙撫育
은정이며 의리 모두 / 情義之際
골육지친 못지않아 / 骨肉莫如
한평생 의지하길 / 平生瞻依
태산처럼 하였는데 / 有同喬嶽
남북으로 헤어져서 / 分離南北
생사 서로 몰랐었네 / 死生莫親
그리하여 궤연 앞에 / 几筵之前
통곡 한번 못하였고 / 旣闕一哭
무덤 찾아 둘러보니 / 來披宿草
십 년 세월 흘렀구나 / 十年如今
비감이 뼛속 스며 / 悲感纏骨
부끄럽고 애통하니 / 慚慟兩極
영혼 행여 계시거든 / 精靈如在
이내 정성 살피소서 / 尙歆卑誠
선조 25년 임진(1592) 7월 6일(계해)
비변사가 첨사 김원룡과 훈도 강욱의 징계와 곽율의 승서를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사대부가 군부(君父)의 위급을 무시한 채, 달려와 구하려는 뜻이 없습니다. 대가(大駕)가 이곳에 온 지 벌써 오래되었는데, 인산 첨사(麟山僉使) 김원룡(金元龍)과 본주(本州)의 훈도(訓導) 강욱(康昱)은 모두 경내(境內)의 관원이면서도 와서 현신하지 않으니 그 죄가 큽니다. 김원룡은 본주에 충군(充軍)시키고 강욱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을 징계시키소서. 김성일(金誠一)의 서장(書狀)에 전 군수 곽율(郭𧺝)과 유학(幼學) 권양(權瀁)이 향병(鄕兵)을 불러 모았는데 의거(義擧)를 일으킬 만하다고 하니, 곽율은 승서(陞敍)하고 권양은 관직을 제수하여 권장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경상도 신민에게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상동(上同) 운운.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 본도(영남)의 사세와 적의 기세가 쇠하였는지 왕성한지 어떠한 줄을 알지 못하였더니, 근자에 들은즉, 우도 감사(右道監司) 김수(金睟)가 용인에서 패하여 물러갔고, 좌도 감사(左道監司) 김성일이 진주에서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이 싸우지 않고 도망한 죄로 참형(斬刑)을 당하여 박진이 충성스럽고 용감하다 하여 이각을 대신하였고, 우병사(右兵使) 조대곤이 노쇠하여 양사준(梁士俊)으로서 대신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이 좌도 수사(左道水使)가 되었다 하니, 그들이 각기 본도로 돌아가서 힘을 써서 한 일이 있는가 모르겠다. 좌도에는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에는 진주 등 몇 고을이 아직 보전되었다 하니 이것이 사방 십 리 되는 땅이나 군사 일려(一旅)보다 낫지 않겠는가. 본도는 백성이 신실하고 후하며 본시 충의가 많으니 너희 다사들이 진실로 서로 분려(奮勵)한다면 반드시 회복의 바탕이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을 것이다. 들은즉, 정인홍ㆍ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월(郭𧺝)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ㆍ노흠(盧欽)ㆍ곽재우ㆍ권양(權瀁)ㆍ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이 의병을 일으켜서 군사를 모집함이 이미 많았다 하고 배덕문(裵德文)은 이미 적승(賊僧) 찬희(贊熙)를 죽였다 하니, 본도의 충의가 오늘날에도 아직 쇠하지 않았음을 더욱 믿겠도다. 하물며 곽재우는 전술이 비상하여 적을 죽인 것이 더욱 많았으되 공을 조정에 아뢰지 않는다 하니, 내가 더욱 기특히 여기노라. 내가 그의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이로다. 호남에도 또한 전 부사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의 병마 2만과 더불어 나아와 수원에 머무르면서 바야흐로 경성을 회복하도록 도모하고, 그의 부하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로와 육로로 달려와서 행재(行在)에 아뢰는데, 내가 그의 아룀을 보고 눈물이 글썽거려 한편으로는 위로되고도 슬펐다. 이제 양산숙 등이 군중(軍中)으로 돌아가는 편에 이 글을 부쳐 그로 하여금 전하여 이르게 하노니, 너희 사중(士衆)들은 내가 말하는 뜻을 알도록 하라. 내가 왕위에 오른 이래로 운운. 상동 군사들이 마땅히 분발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하물며 지금 광포한 왜적이 죄악을 쌓아 이미 가득 찼으니 하늘의 주벌이 마땅히 내릴 것이다. 더구나 평양의 적이 여러 번 야습(夜襲)을 당하여 세력이 쇠하였으니 섬멸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곧 맑은 가을이 철을 재촉하여 태백성(太白星)이 바야흐로 높아서 우리 군사의 머무는 곳에 살기가 이미 응하니 충의가 향하는 곳에 어느 적인들 꺾지 못하랴. 너희 사민들은 마땅히 힘을 헤아려서 비록 고경명 등과 힘을 합쳐 북으로 올라오지 못하더라도, 본도에 유둔(留屯)한 적 또한 많고 왕래하는 자 또한 많아서 길에 잇달았다 하니, 마땅히 서로 요해지를 끼고서 적들이 노략질하는 것을 나누어 무찌르도록 하라. 또한 마땅히 길 옆에 군사를 매복시켜 좌우로 서로 응하여 혹 맞아서 치고 혹은 뒤밟아 쳐서 적으로 하여금 마음 놓고 다니지 못하게 하여 마침내 한 놈도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도록 만들고, 온 지방을 깨끗이 하고 평정시켜 노약(老弱)을 불러들여 살게 하라. 그런 뒤에 힘을 합하여 경성으로 나의 행차를 맞아 돌아가면, 너희 사민들이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고 은택이 자손에게까지 흐를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정인홍 제용감 정(濟用監正), 김면 합천 군수, 곽일 예빈시 정(禮賓寺正), 박성 공조 정랑, 곽재우 유곡 찰방(幽谷察訪), 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표창하고 장려하노니, 생각건대, 너희들의 충의는 벼슬과 상을 기대하지 않겠지마는 운운. 상동 -국조보감. 난중잡록
○ 합천(陜川)에 사는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인홍은 평소에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인물이었다. 전 좌랑 김면(金沔)ㆍ전 현감 박성(朴惺)ㆍ유생 곽준(郭䞭)ㆍ전 현감 곽율(郭𧺝) 및 인홍의 제자 하혼(河渾)ㆍ조응인(曹應仁)ㆍ문경호(文景虎)ㆍ권양(權瀁)ㆍ박이장(朴而章)ㆍ문홍도(文弘道) 등으로 더불어 고을의 군사를 모아 합치고, 또 전 첨절제사 손인갑(孫仁甲)을 얻어 중위장(中衛將)을 삼았다. 김수(金晬)가 삼가(三嘉)ㆍ초계(草溪)ㆍ성주(星州)ㆍ고령(高靈)의 군사를 그에게 배속시켜 주었다. 《순영록》
우도의 경우는,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이 거창(居昌)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본현의 경내를 지키면서 금산(金山)과 무주(茂朱)의 왜적들을 방비하고 있으며, 가장(假將)인 전 주부(主簿) 손승의(孫承義)와 전 수문장 제말(諸沫) 등으로 하여금 고령을 나누어 지키면서 성주(星州)의 왜적들을 막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을 가수(假守)로 삼고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을 가장(假將)으로 삼아 합천군을 지키게 하였으며, 전 군수 곽율(郭𧺝)을 가수로 삼고 전 만호(萬戶) 정언충(鄭彦忠)을 가장으로 삼아 유학(幼學) 이대기(李大期)와 전치원(全致遠)이 일으킨 의병을 거느리고 함께 초계군을 지키면서 무계(茂溪) 및 낙동강 가를 오가는 왜적들을 방어하게 하였습니다. 김성일 학봉집
○ 이때 초계(草溪)에는 수령이 없어서 전 군수 곽율(郭𧺝)을 가수(假守)로 삼았으며, 의령에도 수령이 없는 데다가 조종도 역시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사양하자, 전 목사(牧使)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곽재우와 합심하여 의병들을 불러모으게 하였다. 오운은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처음부터 자신의 재물을 희사하여 군량을 공급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온 마음을 다해 일하였다. 학봉집
전 군수 곽율(郭𧺝)은 지금 초계(草溪)의 가수(假守)가 되었는데, 관(官)의 일을 잘 다스려서 관원과 백성들이 모두 사랑하여 떠받들면서 모두들 정식 수령으로 삼기를 원하고 있으며, 새 군수 정눌(鄭訥)은 현재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곽율을 본군의 군수로 삼는 것이 역시 마땅합니다. 김성일 학봉집
곽율(郭𧺝) : 1531~1593.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 저서로는 《예곡집(禮谷集》 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초계군(草溪郡)의 임시 수령으로 기용되어 왜군과 싸웠으며, 곧 예빈시부정으로 전직명령이 내렸으나, 유생 정유명(鄭惟明) 등의 유임상소에 의해 초계 군수로 유임되어 강우(江右) 지역의 보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고대일록
통훈대부(通訓大夫)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예곡(禮谷) 곽공(郭公)의 묘갈명-이현일
금상(今上 숙종) 19년 겨울에 포산(苞山) 상사생(上舍生) 곽군 유(郭君逌)가 한양의 우사(寓舍)로 나를 찾아와 고왕부(高王父) 예곡 선생의 훌륭한 덕행과 치적을 말하고 또 공의 문생인 이공 후경(李公厚慶)이 지은 행장을 내놓으면서 울며 절하고 청하기를, “선조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지금 101년이 됩니다. 장사 지낼 당시에 마침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묘에 표석(表石)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우리 아득한 후손은 세대가 더욱 내려가면 마침내 사적이 민멸되어 후대에 전해질 수 없게 될까 매우 두려워 속히 돌을 세우고 글을 새겨 그 묘에 표석을 세우고 싶습니다. 그대는 한마디 말씀을 해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덕도 없고 글재주도 없어서 이 부탁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사양했으나 곽군의 청이 더욱 간곡하여 내가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행장을 살펴 그 일을 아래와 같이 적는다.
공의 휘는 율(𧺝)이고, 자는 봉정(奉靜)이며, 일찍이 자호를 예곡이라 하였다. 시조 자의(子儀)가 고려조에 현달하였고, 본조에 들어와서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지낸 안방(安邦)이 청백리(淸白吏)로 저명하였으니, 이분이 공의 고왕부이다. 증조는 휘가 승양(承陽)인데, 충좌위 부사직(忠佐衛副司直)을 지냈고, 조부는 휘가 당(瑭)인데, 분순교위(奮順校尉)를 지냈고, 고는 휘가 지인(之仁)인데,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냈다. 모친은 창녕 조씨(昌寧曺氏)인데, 형부 시랑(刑部侍郞) 서(瑞)의 후손이고 칠원 현감(漆原縣監) 세은(世殷)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26) 10월 모일에 현풍(玄風) 솔례촌(率禮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고, 겨우 외부(外傅)에게 나아가 배울 나이인 10세 때에는 경전(經傳)을 외고 읽는데 가르칠 필요가 없었으며, 15, 6세 때에는 말과 행동이 성인과 같았다. 판서 정공 사중(鄭公思中)이 한 번 보고서 인재로 여겨 그 아우인 사성(思誠)의 따님을 아내로 삼아 주었다. 무오년(1558, 명종13) 가을에 상사생이 되었는데, 어버이 때문에 과거 공부를 폐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의 구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일찍이 남명(南冥 조식(曺植)) 조 선생(曺先生)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정한강(鄭寒岡 정구(鄭逑)), 김동강(金東岡 김우옹(金宇顒)), 낙천(洛川) 배공 신(裵公紳), 오계(梧溪) 김공 부륜(金公富倫), 대암(大庵) 박공 성(朴公惺), 존재(存齋) 곽공 준(郭公䞭)과 도의(道義)로 사귀어 서로 간에 절차탁마하는 도움을 주고받았다. 경신년(1560) 봄에 수의공(修義公)이 병들자 공이 직접 탕제를 달여서 약을 올릴 때에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고, 상을 당하자 과도하게 슬퍼하였다. 모부인을 봉양하고 형 익(𧾰)을 섬기면서 효도와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임신년(1572, 선조5) 겨울에 관천(館薦)으로 조지서 별검(造紙署別檢)에 조용(調用)되었고, 이듬해 봄에 모부인을 봉양하기 편리하도록 김천 승(金泉丞)으로 바꾸었는데, 청렴하게 봉직(奉職)하고 털끝만큼도 사리(私利)를 도모하지 않으니, 역례(驛隷)가 풍족하여 말이 번성하였다. 이때 동강 김 문정공(金文貞公)이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영천군(永川郡)에 당도하였다. 태수(太守) 주박(周博)이 공 및 선위사와 함께 동년우(同年友)라 하여 풍악을 갖추고서 공을 맞아 방회(榜會)를 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마침 누이의 상을 당하였기 때문에 복중(服中)이라고 사양하였다. 태수가 불쾌해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관직에 있으면서 어찌 이런 모난 행동을 하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만약 왕명을 받들어 객사(客使)에게 연향을 베푸는 일이라면 참으로 복중이라 해서 사양할 수 없겠지만 오늘의 연회는 사적으로 베푼 것이니, 어찌 중한 슬픔을 무릅쓰고서 명교(名敎)를 범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위사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억지로 잡지 않았다. 경진년(1580) 겨울에 풍저창 직장(豐儲倉直長)으로 전보(轉補)되었는데, 직임에 나아가기 전에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으로 이직되었다. 임오년(1582) 봄에 근친(覲親)하기 위해 휴가를 받았다가 4월에 조정으로 돌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 내간(內艱)을 당해 돌아와서 삼년상을 마치도록 한결같이 슬퍼하고 그리워하였다. 을유년(1585) 가을에 송라 승(松羅丞)에 제수되었는데, 그곳에서 청렴하고 신중하며 공평하여 이졸(吏卒)의 마음을 얻었다. 우역(郵驛)의 곁에 내연(內延)이라는 산이 있는데 골짜기의 경치가 매우 수려하였다. 매번 한가한 날이면 그곳에 가서 배회하며 돌아올 줄도 잊은 채 고요하게 진세(塵世)를 벗어난 고결한 뜻이 있었다. 병술년(1586) 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해 준 사람이 있어서 특진되어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에 외직으로 나가 홍산 현감(鴻山縣監)이 되었는데, 향교에서 민사(民事)를 강론하여 해로운 일을 없애고 쇠잔해진 것들을 소생시켰다. 특히 학교에 유의해서 매월 초하루에 제생(諸生)을 불러서 경의(經義)를 강설(講說)하고, 술과 음식을 갖추어 고을의 부로(父老)를 맞아 직접 권하였다. 또 농사일을 살펴서 권면하거나 징계하였고, 수재나 한재나 기근을 만나면 식구를 헤아려 고르게 나누어 주니 백성들이 굶어 죽는 근심이 없었다. 지방관으로 있는 6년 동안 온 경내가 편안하자 관찰사가 그 공장(功狀)을 올리고, 어사(御史)가 그 정사를 여러 군 중에서 으뜸으로 평하니, 이에 표리(表裏)를 하사하여 포장하였다. 품계가 차서 승진하여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에 외직으로 나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는데, 홍산에 있을 때와 똑같이 다스렸다. 임진년(1592, 선조25) 봄에 전관(前官)이 누락한 실책을 끌어대면서 일이 공에게까지 미치자 마침내 군수에서 해면되었다. 이때 일본이 병란을 일으켰는데 공이 산계(散階)에 있었으므로 병란을 피하여 덕유산(德裕山) 아래로 들어갔다. 그때 김 문충공(金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이 초유(招諭)의 명을 받고 내려와 의춘(宜春)과 진양(晉陽)의 경계에 있으면서 공에게 격문(檄文)을 보내 초계군(草溪郡)의 일을 맡게 하였다. 공이 이에 개연히 몸을 잊고 순국(殉國)할 뜻을 품었다. 군무(軍務)를 처리하고 경토(境土)를 완전히 보호하니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이 왜적을 토벌한 공을 상주하자 마침내 특진되어 예빈시 부정에 제수되었고, 유생 정유명(鄭惟明) 등이 또 상소하여 그 탁월한 치적을 진달하자 곧바로 정식 군수에 제수하였다. 공이 공사 간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때에 지방관을 맡아서 곡식을 모집하여 식량을 넉넉하게 하였고, 정예병을 뽑아 군병을 충분하게 하였으며, 상벌을 분명하게 하고 법규를 엄정하게 하니 온 경내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여 비록 호강하고 간사한 아전이라도 모두 법을 받들어 지키고 간사한 짓을 하지 못하였다. 문충공이 일찍이 탄식하기를, “만약 여러 군의 수재(守宰)가 모두 곽군처럼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한다면 어찌 국세(國勢)가 펴지지 못하고 백성들의 고충이 치유되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과도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지쳐서 병이 생겨 갑자기 팔거(八莒)의 관사(館舍)에서 세상을 떠나니, 이때가 계사년(1593, 선조26) 4월 13일이고, 향년 63세였다. 그러나 왜란이 한창 심하여 고양(高陽) 땅에 가매장하였다가 을미년(1595) 봄에야 비로소 그곳 병향(丙向)의 언덕에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부인은 정씨(鄭氏)이니, 바로 승지 사성의 따님이다. 공보다 28년 후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 곁에 장사 지냈는데, 같은 언덕에 봉분이 다르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영희(永禧)이고, 문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딸이 하나인데, 현감 이후경(李厚慶)에게 시집갔다. 그 외에 아들이 둘 있으니, 영순(永順), 영근(永謹)이고, 딸이 하나 있는데 박대암(朴大庵)의 소실(小室)이 되었다. 현감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홍점(鴻漸)이고, 딸이 둘인데 장녀는 사과(司果) 조전(曺䡘)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충의위(忠義衛) 유밀(柳謐)에게 시집갔다. 홍점이 아들 둘을 두었으니, 수강(壽岡)은 생원이고 수진(壽𡺽)은 진사인데, 모두 유행(儒行)이 있어 남주(南州)의 사대부들이 칭찬하였다. 수강이 아들 셋을 두었으니, 장남 요(遼)는 일찍 죽어 자식이 없고, 다음은 이(邐)이고, 다음은 유(逌)인데 국자감 상상(國子監上庠)이다. 수진이 아들 넷을 두었는데, 이름이 왕(迬), 식(遈), 형(逈), 내(逨)이다. 내손자(來孫子)가 4명인데 모두 어리다.
공은 지극한 품성과 순수한 행실이 있었다. 자식으로서는 효성스럽고 아우로서는 공손하였으며, 초상 때에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 때에는 정성을 다하였다. 과부가 된 누이를 돌봐 주고 그 딸을 거두어 길러서 예물을 후하게 하여 시집보냈고, 이모가 과부가 되어 자식이 없자 공이 모부인 곁에 모셔 두고 살아 있을 때에 봉양하는 것과 죽은 뒤에 제사 지내는 데에 모두 정성을 다하였다. 벼슬살이할 때에 내직으로 있을 때는 직임을 근면하고 민첩하게 수행하였고, 외직으로 나갔을 때는 인자함과 사랑이 백성에게 미쳤다. 사변(事變)을 만나 시기적절하게 수응(酬應)하였으니, 공은 큰일을 하고 지조가 있으며 독실히 행한 군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곽씨는 고려조에 현달하여 망족(望族)이 되었고 / 郭顯于麗爲聞族
본조에 들어와서는 청백리로 저명하였네 / 爰及國朝著淸白
공은 전대의 음덕으로 순수한 덕을 품부받아 / 公胎前光稟醇德
효도하고 우애하여 집안에서 행실이 돈독하였네 / 旣孝且友內行篤
나가서 벼슬할 때에는 과감하고 사리에 밝아 / 出爲世用果而達
편하건 쉽건 그 일에 힘쓰고 / 夷險一致懋厥績
몸을 돌보지 않고 힘을 다해 신하의 절의를 바쳤네 / 忘身殄瘁效臣節
나무로 둘러싸인 묘에 비석이 없으니 / 宰樹荒原闕顯刻
내 명을 써서 드러내어 남긴 공렬을 꾸미네 / 我銘著之賁遺烈
通訓大夫禮賓寺副正禮谷郭公墓碣銘
上之十九年冬。苞山上舍生郭君逌訪余於漢陽之寓舍。道其高王父禮谷先生德行業治之懿。旣又出示公門生李公厚慶之狀。泣拜以請曰。先祖下世今百有一年矣。其葬也。適當干戈搶攘之際。墓道未克表。惟我藐孤孫大懼世益下。遂至沈泯無傳。亟欲建石琢辭以表其隧。惟吾子之惠一言。玄逸以不德不文。不足以勝此寄辭。郭君之請愈懇。玄逸不得終辭。乃按狀以表其事如左。公諱𧺝。字奉靜。嘗自號禮谷。其上祖子儀顯高麗世。入本朝。有知益山郡事者曰安邦。以淸白著聞。是於公爲高王父。曾祖諱承陽。忠佐衛副司直。祖諱瑭。奮順校尉。考諱之仁。修義副尉。母昌寧曹氏。刑部侍郞瑞之後。漆原縣監世殷之女。以嘉靖辛卯十月某日。生公于玄風率禮村。生有異質。纔就外傅。誦習經傳。不煩提誨。及年十五六時。言語擧止如成人。判書鄭公思中一見器之。歸以其弟思誠之女。戊午秋。補上舍生。以親故。雖不廢擧子業。已知有內外輕重之分。嘗遊南冥曹先生之門。與鄭寒岡,金東岡,洛川裴公紳,梧溪金公富倫,大庵朴公惺,存齋郭公䞭。結道義交。以資麗澤之益。庚申春。修義公寢疾。公躬親湯劑。進藥必先嘗。及喪。哀毀踰禮。奉母夫人及事兄𧺝。孝敬備至。壬申冬。有館薦。調造紙署別檢。明年春。以便養換金泉丞。洗手奉職。不營分寸私。驛隷豐足。馬以蕃殖。時東岡金文貞公爲宣慰使。行到永川郡。太守周博與公及宣慰使俱爲同年友。具聲樂延公坐。要與爲榜會。公適有姊之喪。以服辭。守不悅曰。君旣在職。何爲此厓異之行。公曰。若承命饗客使。則誠不可以服解。今日之宴。是私設也。豈可冒重哀以犯名敎乎。宣慰使是其言。不強留。庚辰冬。轉豐儲倉直長。未及就職。移內贍寺直長。壬午春。以寧親予告。四月還朝。未幾丁母憂而歸。終三年。哀慕如一日。乙酉秋。除松羅丞。所至以淸愼公平。得吏卒心。郵置之傍。有山曰內延。洞壑殊勝。每暇日。輒至其處。徜徉忘返。蕭然有出塵之想。丙戌春。有以學行薦者。超授司圃署別提。俄出知鴻山縣事。校講民事。去害蘇殘。尤留意學校。每月朔。招諸生。講說經義。具酒食。邀縣中父老。親爲勸酬。旣又巡省農功。以行勸懲之政。若遇水旱饑饉。則計口均給。未嘗有捐瘠之患。六載居官。闔境晏然。觀察使上其功狀。御史褒其政爲諸郡最。於是賜表裏以嘉之。秩滿。陞授軍資監判官。俄出爲醴泉郡守。其爲治一如鴻山時。壬辰春。前官有致漏失。相牽引者。事及於公。遂解郡事。會日本兵作。公方在散階。避兵德裕山下。時金文忠公受招諭之命。駐節宜春晉陽之境。檄公攝草溪郡事。公於是慨然有忘身徇國之志。料理軍務。保完境土。都事金穎男上其討賊功。遂超授禮賓寺副正。儒生鄭惟明等。又上疏陳其治有異績。旋拜眞郡守。公承公私赤立之後。募粟米以足食。簡精銳以足兵。賞罰明而約束嚴。一境之民。無不喜悅。雖豪強猾吏。皆奉法守條。無所容其姦。文忠公嘗歎曰。若使列郡守宰愛民憂國。皆如郭君者。何憂國勢之不張。民隱之不瘳乎。卒以治事勤劇。勞悴成疾。遽啓手足於八莒館舍。癸巳四月十三日也。享年六十三。以寇亂方張。假窆于高陽地。乙未春。始卽其處。占丙向之原。備禮以葬。夫人鄭氏。卽承旨思誠之女。後公二十八年卒。葬公墓之側。同原異封。有子男一人曰永禧。登文科。官至縣監。女一人適縣監李厚慶。餘男二人。曰永順,永謹。女一人爲朴大庵小室。縣監有子一人曰鴻漸。女二人。長適司果曹䡘。次適忠義衛柳謐。鴻漸有子二人。曰壽岡生員。曰壽𡺽進士。皆有儒行。南州士大夫稱之。壽岡有子三人。曰遼早卒無子。曰邐。曰逌國子上庠。壽𡺽有子四人。曰迬,曰遈,曰逈,曰逨。來孫男凡四人。皆幼。公有至性醇行。爲子孝爲弟悌。喪致哀祭致誠。館嫠姊。畜其孤女。厚資以嫁之。姨母寡居無子。公迎置母夫人之側。生養沒祭。皆盡其誠。出而從仕則其在內。勤敏擧其職。其在外。仁愛及於民。其遇事變。酬應中機會。公可謂有爲有守。篤行君子者矣。銘曰。
郭顯于麗爲聞族。爰及國朝著淸白。公胎前光稟醇德。旣孝且友內行篤。出爲世用果而達。夷險一致懋厥績。忘身殄瘁效臣節。宰樹荒原闕顯刻。我銘著之賁遺烈。
명종 13년 진사시
왕대년 | 명종(明宗) 13 |
시험일 | 1558년 |
합격자발표일 | 1558년 10월 10일 |
시험종류 | 식년시(式年試) |
방목정보 | 방목명 : 가정37년무오식년추사마방목(嘉靖三十七年戊午式年秋司馬榜目) 표제명 : 蓮桂榜 권수제 : 戊午司馬榜 |
시험장소1 | 한성부(漢城府) |
1소 시험관 | 1소 시관(一所試官)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조사수(趙士秀) 양주(楊州) 1소 시관(一所試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몽량(李夢亮) 경주(慶州) 1소 시관(一所試官) 장악원정(掌樂院正) 남경춘(南慶春) 의령(宜寧) 1소 시관(一所試官)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 김언거(金彦琚) 광산(光山) 1소 시관(一所試官) 내섬시첨정(內贍寺僉正) 유창문(柳昌門) 진주(晉州) 1소 시관(一所試官)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곽익(郭𧾰) 현풍(玄風) |
시험장소2 | 성균관(成均館) |
2소 시험관 | 2소 시관(二所試官)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이준경(李浚慶) 광주(廣州) 2소 시관(二所試官)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민기(閔箕) 여흥(驪興) 2소 시관(二所試官)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 홍춘년(洪春年) 남양(南陽) 2소 시관(二所試官)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박승임(朴承任) 반남(潘南) 2소 시관(二所試官) 예조좌랑(禮曹佐郞) 이민각(李民覺) 광주(廣州) 2소 시관(二所試官)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정희증(鄭希曾) 동래(東萊) |
생원장원 | 장원급제 : 주박(周博) 합격인원 : 100명 |
진사장원 | 장원급제 : 이중립(李中立) 합격인원 : 100명 |
시험실시이유 | 식년시이다. 명종실록에는 상이 근정전에 나아가 생원‧진사 시험을 방방(放榜)하였다.【생원 시험의 수석은 주박(周博)이고, 진사 시험의 수석은 이중립(李中立)이다.】고 나온다. |
진사시 수록인원 : 100명
인명자호생몰년본관합격등급
생원시 수록인원 : 100명
인명자호생몰년본관합격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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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곽율(郭 走+日)께서 조봉대부行홍산현감 시절(만력15년 1587년)에 진산강씨한와추모록(전2권)의 서문을 쓰신 기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