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에서 예수의 혁명적인 행동을 삽입하는 이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를 그 이튿날의 말과 마찬가지로, 지성소에서 한 말과 행동을 다른 형상층위의 관점에서 읽게 하는 비유로 해석했다.
성전으로 갈 때 예수는 철(계절)을 따르지 않는 불가사의한 음식에 대한 시장기를 지니고, 외양에도 상거래와 실리적 부산함에도 속지 않는 갈증을 가진 이다. 예수는 지성소를 실리적인 관심에서 기도 안에 고백하는 갈망 쪽으로 방향을 돌려놓으려 한다.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을 때, 충족시킬 필요가 아닌 이런 종류의 시장기를 유지할 그의 능력에 관한 진리가 실현된다. 무화과나무는 성전에서 사람들이 하는 것의 표징이 된다. 틀어박히는 안전을 위한 강도들의 소굴은, 삶에 대한 식욕을 남겨두는 절대타자에 대한 갈망이 살아 있는 모두에게 열린 « 집 »이라 부르는 성경의 목소리를 못 듣게 한다. 무화과나무에게 일어난 것은 기적이 아니라, 지성소가 가시적으로 되고 또 되어야 하는 것의 예언적 표징이다. 이에 비해 성경 인용은 보이지 않는 미래로 성전을 열면서 성지의 소명을 복구시킨다. 주어진 이 표징은 수용하는 땅의 깊이에 따라 열매를 맺는 씨 뿌려진 말처럼 읽을 필요가 있다.
예수의 예측불능의 기대와 제철과일 사이의 괴리, « 기도의 집 »과 « 강도들의 소굴 » 사이의 격차, 덧없는(일시적인) 행위와 이 폭력에서 이미 예고된 성전의 미래 사이의 차이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서 구조적인 차이를 알아본다. 이러한 괴리는, 곧이어 기도에서 말해지는 것인 깊은 구조에 근거를 둔다. 산을 들어서 바다에 던지는 눈에 띠게 불가능한 예문에서부터, 기도의 구조자체가 상연된다. 그럼에도 믿음 속에서 후일로 보내진 미래와 일치하는 말(발언)의 역설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시간적 연속의 부정이다. 말과 행동 사이에, 말과 « 될 것이다 » 사이에 한 간격이 있다. 기도는, 신앙인일 때조차, 결코 즉각적인 결말은 없다. 내가 말하는 것, 그것이 당장 이루어지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이를 말하는 순간 그렇게 된다고 내가 믿는다면, 나에게 « 그렇게 ‘될 것’ »이기 때문이다. 이런 팽팽한 긴장은 갈망과 갈망의 충족 사이에 지속한다. 갈망은 « 그렇게 ‘될 것이다’ »이므로 일의 도래로 인해 ‘채워지지’ 않는다. 어쨌든 갈망은 이미 기도 ‘안에서’ 그리고 믿기 ‘안에서’ 효력이 ‘있다.’ 곧 « 말한 것이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 « 너희가 그것을 받았다고 믿으면 »이다. 그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약간 미친 짓이다! 무화과 철도 아닌데 무화과나무에 먹거리를 찾으러 가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산더러 자리를 옮기라고 명령하는 것은 미친 짓이 아닌가? 그런데 갈망은 이와 같다. 또 « 하느님의 믿음 »은 이런 종류다. 무화과나무 앞에서 또 성전 앞에서 예수가 느낀 갈망(인간의 갈망처럼)은 논리적이지 않다. 논리는 기도를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갈망과 기도는 굳게 맺어져 있다. 미친 듯한(광적인) 갈망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 하느님의 믿음 »이 없는 게다.
무화과나무에게 했던 예수의 말은 글자그대로 즉시 실행되지 않았다. 그것이 « 기적 »의 문제였다면, 결과가 당장에 말해진 그대로 이루어지는 게 더 효과적이었을 게다. 성전에 관한 것에서, 예수의 말과 행동은 그 효력을 기다린다. 그것은 ‘그’가 죽을 것이며, « 기도의 집 »이 아직 실현되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현재가 있다. 곧 그의 죽음과 장래의 성전파괴보다 더 멀리 가는 성경말씀과 예수의 행동이 있다. 무화과나무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지성소가 참된 배고픔을 위해 부적절하며,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에 응답하지 못함을 알게 된다. 지금 읽도록 우리에게 주어지고, 성전에서 예수의 폭력을 통해 다시 읽히도록 제공된 성경구절은 성전이 만족시킬 수 없는 갈망을 끊임없이 증명한다. 여기에 또한 무화과나무에게 했던 말과 확인한 결과 사이에 기한이 의미심장하다. 나무가 말라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갈망을 지탱할 외양을 주지 않는 날이 오는 것처럼, 성전도 « 기도의 집 »이 될 그의 부적절함을 보여주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이런 철저한 심판은 지성소인 그대로를 고발하지 않는다. 지성소가 잠재적으로 항상 더 멀리 밀고나갈 갈망을 위한 중계객체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갈망은 객체들을 통해서 더욱 깊어지기 때문이다. 곧 우리는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가고, 갈망은 지속된다. 그것은 어떤 성전도 응답할 수 없는 갈망 앞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무화과나무 곁을 지나면서 예수가 느낀 시장기나, 자신이 말한 것이 이루어진다고 믿으면서 산에게 말하는 이의 시장기 같은 이런 « 배고픔 »은 완전히 상상을 초월하는 시장기다.
이 이틀은 참된 인간의 갈망을 듣게 하기 위해, 정상상태와 가능성에 대한 상식을 질문제기에 둔다. 무화과나무와 산에게 했던 말은 우리인 모든 말의 주체에게 충격요법을 치르게 한다. 우리가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의지로는 변화시킬 수 없는 우주의 법칙 앞에서 조차, 이 말들은 말해지고 있는 중인 것을 진실로 생각(간주)하는 말의 행위로 초대한다. 그것은 이러한 것이 가장 강렬한 그의 갈망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어리둥절하게 하는 배고픔이 유지된 갈망의 힘을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 하느님의 믿음 »으로 하는 말은 창조질서의 정상상태와 율법의 중심지에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갈망을 유지시킨다. 갈망과 기도는 굳게 맺어져 있다. 이 둘은 시간도(무화과 계절) 공간도(산의 이동) 보여주지 않지만, 갈망을 유지하는 말의 관계를 계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