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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코끼리가 탈출했다
심상우 동화
1. 드넓은 라오스 풀밭에서
내가 나중에 친구가 된 이코, 삼코, 사코, 오코, 육코를 만난 것은 비가 내리는 오후였어.
그런데, 내가 누구냐고? 나는 일코야! 코끼리지.
코끼리하면 사람 친구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땅위에 살고 있는 동물 가운데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우선 떠오르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코가 길다는 것도 얼른 생각나겠지.
우리 코끼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친구들은 우리가 풀을 아주 많이 먹고, 피자보다도 더 큰 똥을 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야. 하하!
나의 원래 이름은 다른 코끼리처럼 아기였을 때 엄마가 지어주었어.
우리 엄마는 코끼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튼튼해. 이건 아기가 엄마에게 느끼는 똑같은 생각이야.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은 자신의 엄마가 가장 아름답고, 튼튼하고, 똑똑하다고 여기지.
그건 이 글을 읽는 한때 아기였던 친구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내 이야기가 틀렸다거나 의심스럽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길 바라. 그러니까 내가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튼튼하다고 말하는 것에 시비를 걸지 마.
“눔바야! 걸을 땐 코를 너무 흔들면 안 돼!”
엄마는 걸핏하면 말했지. 근데 눔바가 누구냐고?
눔바는 바로 나지. 엄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코끼리’라는 뜻으로 붙여준 내 이름이야.
그럼 일코는 뭐냐고? 일코는 친구들이 나한테 붙여준 이름이지. 그러니까 눔바는 본명. 일코는 별명이야!
나는 내가 태어나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해.
나도 다른 아기코끼리처럼 태어날 때 몸무게가 120킬로그램쯤 됐고, 태어난 지 한 시간쯤 지나면서 걸을 수가 있어. 120킬로그램이면 사람 어른 중에서도 많지 않을걸. 이건 뭐 다른 아기코끼리도 다 그러니까 자랑거리도 아니야.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본 것은 드넓은 풀밭과 달이었어.
라오스 메콩 강 근처 루앙프라방이 내가 태어난 곳이야.
먼동이 터올 무렵 나는 태어났어. 하늘은 반쯤 구름으로 가려있었고, 희뿌연 안개가 걷히고 있었지. 안개가 모두 걷히고 나자 강 저쪽 언덕 위 하늘에 노란 무언가가 떠 있는 거야.
우리 코끼리들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어. 그래서 당연하게도 태어나자마자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엄마 뱃속에 있으면서 엄마랑 나눈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해줄 수 없어. 그건 코끼리 세계에서는 비밀에 속하는 거야. 그러니 내가 엄마 뱃속에서 엄마랑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줘. 그건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걸. 사람에게,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엄마랑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캐묻는 건 그 사람을 아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일걸.
사람들은 난처한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말하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대답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지.
“그런 건 왜 물어요?”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참 이상한 질문을 하시네요.”
그러니 내가 엄마 뱃속에서 엄마한테 맛있는 풀을 아주 많이 먹으라고 한 이야기 같은 것은 절대로 말할 수 없어.
아무튼 내가 태어나자마자 엄마한테 처음으로 한 말은 이거야. 이건 비밀도 아니니까 긴장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들어.
“엄마, 저게 뭐야?”
“달이란다.”
“달?”
“달은 왜 저기 있는 거야?”
“글쎄다. 달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냥 저기에 있었단다. 물론 작아지거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엄마의 말씀을 듣고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어.
달이 거기 그냥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데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잖아. 달이 거기 없었다면 나는 묻지도 않았을 거야. 달이 없는데 달이 왜 거기 있느냐고 묻는 건 좀 바보 같은 질문이겠지. 달은 그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하늘에 떠 있다는 것밖에 알 수 없었어. 그것을 안 것만도 대단한 거겠지.
달이 하늘에 왜 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좀 가르쳐 줘!
아차!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또 생각났어.
바람이 왜 부는지? 강물은 왜 흘러가는지? 풀은 왜 푸르게만 자라는지? 눈에 겨우 보이는 개미들은 어디에 사는지? 흩어져 내리는 빗방울이 강에서는 왜 하나로 합쳐지는지? 파리들은 어떻게 날 수 있는지? 우리가 땅을 딛고 가면 왜 움푹움푹한 발자국이 생기는지? 거꾸로 자라는 풀은 왜 없는지? 아이쿠! 궁금한 게 너무 많아.
궁금한 걸 생각하다보면 배가 고파.
배가 고프면 풀을 먹어야 돼. 이건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야.
우리 코끼리들이 들판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이야. 생각을 많이 하면 배가 고파. 배가 고프면 풀을 먹어야 돼. 그래서 풀을 먹으러 다니는 거야.
그러니까 사람들은 알아야 해. 드넓은 풀밭에서 우리 같은 코끼리들이 어슬렁거리거나 뛰어다니는 것은 생각을 아주 많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면 틀림없어.
그리고 풀을 뜯어 먹는 건 배가 고프기 때문이지. 그냥 심심해서 풀을 먹는 건 절대 아니야.
그건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걸. 그냥 심심해서 밥을 먹는 게 아닐 거야.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는 거지. 하하!
코끼리가 풀 먹는 이야기만 하면 재미없겠지? 그건 사람들이 밥 먹는 이야기만 하면 재미없는 거랑 마찬가지야.
하지만 코끼리에게 있어서 풀 먹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야.
코끼리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는 풀을 먹을 때와 풀을 먹지 않았을 때 일어나게 마련이지.
내가 엄마와 함께 메콩 강 언덕을 거니는 일은 풀 먹는 일만큼 흔한 일이야. 사실 우리 코끼리들은 풀 먹는 게 일이잖아.
우리는 학원에 다닐 필요도 없고 전자오락에 빠지는 일도 없어. 그저 풀을 먹기 위해서는 메콩 강 언덕을 걸어 다녀야만 해.
뭐 다른 지방에 사는 코끼리라면 굳이 메콩 강 언덕을 지나다닐 필요가 없겠지. 그들은 그들만의 풀밭 주변을 거닐면 될 테니까.
아, 그리고 우리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한없이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것만은 꼭 말해줄게. 우리 가족은 가장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대장이야. 할머니, 엄마, 이모, 외종사촌 언니와 동생, 그리고 나. 할아버지와 아빠는 따로 나가서 살아. 코끼리 가족들은 대부분 다 그래. 바로 옆집에 사는 가족들도 다 그렇지.
가끔 이웃마을에 사는 코끼리들이 우리 마을로 찾아오기도 해. 그들은 더 맛있는 풀을 뜯어먹기 위해 우연히 강둑을 따라 오는 것일 수도 있고, 나처럼 강둑을 따라 무작정 어디론가 걷고 싶어서 우리 마을로 오는 것일 수도 있어.
나도 가끔 그러거든. 어떤 때는 이상한 풀이나 곤충을 따라 가기도 하지. 세상은 자꾸 돌아볼수록 재미있고 신기한 것들로 넘쳐 나.
그러면서 나는 점점 자라났어. 우리 코끼리들은 10살이 되면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어. 몸도 마음도 튼튼해졌어. 상아도 제법 자라났어. 상아가 뭔지 알고 있지? 상아는 우리 코끼리의 앞니가 길게 자라면서 구부러지는데, 사람들은 그걸 상아라고 불러.
우리는 상아로 나무껍질을 벗겨먹기도 하고, 풀뿌리도 캐어먹지. 또 하이에나 같은 귀찮은 녀석들이 오면 상아로 겁을 주어 쫓아버리지. 상아는 평생 자란대. 한마디로 말해서 상아는 코끼리의 보석이지.
2. 또 다른 세상으로 나가다
어느 날, 이웃마을에 사는 이코가 우리 마을에 왔어. 이코는 나와 너무나 비슷하게 생겨서 사람들이 보면 누가 누군지 모를 거야.
하지만 나 일코와 이코는 다른 점도 아주 많아.
코 길이가 서로 비슷하다고 해도 내 코가 훨씬 더 멋지거든.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코를 가진 것은 우리 눔바야. 눔바의 코는 어쩜 이렇게 잘 생겼을꼬!”
엄마는 틈만 나면 내 코를 만지면서 그랬어.
그러니 내 코가 얼마나 잘 생겼는지 알겠지! 코는 그렇고.
하여튼, 우리 마을에 온 이코가 말했어.
“일코야! 내가 조직을 하나 만들었는데 너도 들어올래?”
난 조직이란 말을 처음 들었어.
“조직이 뭔데?”
“사람들로 치면 축구 클럽이나 등산모임 같은 거야!”
축구나 등산에 대해서는 엄마한테 들어서 나도 알고 있지. 축구는 발로 공을 차는 거고 등산은 산에 올라가는 것이지. 어때, 내 말이 맞지?
나는 당장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
이코의 말을 거절할 이유가 내게는 없었거든. 풀 뜯어먹는 일 말고 별다르게 할일도 없었으니까. 나는 마침 잘된 일이라고 여겼지.
“이코야, 조직에서 내가 할 일은 뭔데?”
“응. 통나무집 짓는 일을 하면 돼.”
“뭐? 통나무집을 짓는다고?”
“그래. 비만 오면 우리는 그저 커다란 나무 밑에서 비를 맞으며 비가 그치기를 바랄뿐이잖아. 그래서 우리도 사람처럼 비를 피할 수 있는 통나무집을 만들기 위해 조직을 만든 거야.”
“그것참 멋지고 재미있겠다.”
“일코야, 내일부터 뾰돌 바위가 있는 곳으로 와. 뾰돌 바위가 어디 있는지 알지?”
“알고 있어. 거기가 모이는 장소니?”
“그래. 뾰돌 바위는 우리 친구들만 모이는 비밀 장소야. 거긴 사람들이 모르는 장소잖아.”
“알았어. 내일 보자.”
이코와 나는 그렇게 약속하고 헤어졌어.
그날 밤 나는 엄마에게 뾰돌 바위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했어.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 일이야. 그런데 어디서 놀더라도 사람들을 조심해라. 사람은 이 세상에서 코끼리를 못 살게 구는 오직 하나뿐인 동물이야. 우리는 사자도 겁내지 않고, 뱀이나 표범도 무섭지 않아. 그러나 사람은 우리 가족이나 친구들을 붙잡아 가서는 한 번도 돌려보내지 않아. 그러니 사람을 조심해야 해.”
“예. 엄마 알았어요.”
나는 자신 있게 대답을 했지만, 무언가 약간 걱정이 되기는 했어.
그러다가 이코의 말을 생각해 내고는 안심을 했지. 뾰돌 바위는 사람들이 모르는 장소라고 했으니까.
이튿날은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어. 비를 맞고 걸으면 참 시원하고 기분도 좋아져.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엄마한테 허락을 받고 뾰돌 바위로 갔어.
그곳에는 이미 여러 친구들이 와 있었어.
이코가 친구들을 소개했어.
“일코야, 여기 있는 친구는 삼코, 사코, 오코, 육코야.”
“반갑다. 우리 잘 지내자.”
나는 친구들과 코를 부비며 인사를 했어. 오코란 친구는 그저 단순하게 코를 부비는 것이 아니라 코를 휘휘 내둘러 비틀어 꼬면서 크게 반가워했어.
“일코야, 넌 참 멋진 코를 가졌구나!”
“고마워. 오코야, 넌 귀가 참 멋지구나!”
“하하. 일코는 역시 사람을, 아니 멋진 코끼리를 알아보는구나! 내가 귀로 파리를 잡는 법을 알고 있으니, 널 귀찮게 하는 파리가 있으면 나한테 알려줘. 내가 그 파리를 확 잡아버릴 테니…….”
“하하! 넌 귀로 파리를 잡는구나. 난 코로 잡는데…….”
오코와 내가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 때 이코가 말했어.
“친구들! 자랑은 그만하고 우리 조직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겠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여기 뾰돌 바위 옆에 비가 많이 와도 새지 않는 통나무집을 지을 거야. 그러니 모두 나무를 하러 가자.”
우리는 이코의 말에 따라 나무를 하러 갔어. 뾰돌 바위 옆에 커다란 나무는 얼마든지 널려 있어.
우리는 둘씩 짝꿍이 되어 나무를 했어. 처음에는 죽거나 쓰러진 나무를 거둬들였어. 그렇게 거둬들인 나무로 집을 지었어. 커다란 나무와 나무 사이에 주워온 나무를 걸쳐놓았어. 모아 논 나무가 금세 없어졌어.
나무 위에는 풀과 나뭇잎을 뜯어다 얹었어. 코코스나무나 바나나나무 잎은 얼마든지 있어. 금세 두툼한 지붕이 만들어졌어.
지붕을 만들어야 비가 새지 않는 건 어떻게 알았냐고? 그거야 코끼리라면 다 알고 있는 상식이지. 우리는 비가 올 때마다 잎이 우거진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거든. 비가 조금 올 때는 괜찮지만, 비가 아주 많이 오면 온몸이 다 젖어.
그럴 때마다 우리 코끼리는 생각하지.
‘어떻게 해야 비를 맞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알게 되었어. 비를 막아주는 지붕이 있으면 된다고. 그걸 깨닫는 시간은 조금씩 달라도 코끼리라면 다 아는 거니까 그리 신기해 할 필요는 없어.
마침내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그럴듯한 통나무집이 되었어.
통나무집이 다 만들어졌을 때 이코가 말했어.
“우리 친구들. 정말 대단하다. 이 세상 모든 코끼리 가운데 스스로 집을 짓고 사는 코끼리는 우리뿐이야. 이건 참 대단한 일이야!”
우리가 그렇게 집 짓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을 때, 놀랍고 무서운 일이 벌어졌어.
뾰돌 바위 쪽으로 사람들이 트럭을 몰고 나타났어.
트럭은 열 대가 넘었어.
사람들은 모두 무서운 총을 메고 있었고, 트럭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그물을 들고 있었어. 그들은 뾰돌 바위를 둘러싸면서 우리 코끼리들과 거리를 좁히면서 다가왔어.
이코가 소리쳤어.
“모두 침착해야 돼. 저 사람들은 우리를 잡으러 온 사냥꾼이야!”
“여긴 사람들이 모르는 장소라고 했잖아!”
육코가 소리쳤어.
“지금 그런 얘길 해봤자 소용없어. 도망치는 게 더 급하잖아!”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어. 이코가 다시 소리쳤어.
“안 돼. 도망치면 사람들이 총을 쏠 거야. 저 총을 맞으면 정신을 잃게 된대. 엄마가 그랬어.”
우리는 모두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갈팡질팡하면서 어쩔 줄 몰랐어.
마침내 사람들이 다가와 그물을 쳤어. 우리 여섯 코끼리, 나 일코, 이코, 삼코, 사코, 오코, 육코는 메콩 강이 내려다보이는 뾰돌 바위 언덕에서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어.
우리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멋진 통나무집을 지어놓고 그 집에서 비를 피하며 느긋하게 놀아보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붙잡힌 거야.
우리는 모두 서로를 쳐다보며, 이 세상에 태어난 뒤로 가장 크게 울었어. 눈물이 콧구멍으로 마구 들어왔어. 사코는 연달아 재채기를 했어. 재채기를 심하게 하며 목도 아프고, 다리에도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아.
우리는 각각 트럭 하나에 실려 메콩 강을 따라 난 길로 한없이 내려갔어.
나는 트럭에 실리는 순간, 이제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고, 아름다운 강둑길을 따라 풀을 뜯어먹을 수 없게 된다고 느꼈어. 자꾸 눈물이 났어. 하지만 참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울음을 뚝 그쳤어. 철없이 주저앉아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나는 커버린 거야.
엄마보다 나이를 더 먹을 수는 없지만, 나도 이미 아기는 아니니까.
3. 공연단 재롱둥이가 되어
나와 친구들은 이틀 동안 낯선 우리에 갇히게 되었어.
“이코야,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그야 나도 모르지. 다만…….”
“다만?”
“우린 다 자라지도 않았고, 상아도 크지 않으니 죽이지는 않을 거야. 엄마가 그랬어. 사람들은 코끼리를 잡아다가 일을 시키거나 상아를 잘라버린대. 상아를 자르면 우리는 죽게 된댔어. 엄마는 그러면서 그런 것이 ‘코끼리의 운명’ 같은 거라고 했어. 코끼리의 운명은 살아있기만 하면 여러 가지로 바뀔 수도 있대. 그러니 우리는 살아 있어야 돼. 알았지?”
“응.”
나는 이코와 오코가 나누는 소리를 듣고 또 슬퍼졌어. 자꾸만 멀어지는 드넓은 풀밭을 생각하고 또 울었어. 울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눈물이 나. 친구들도 다 나와 마찬가지야.
사냥꾼들은 우리 안에 풀을 잔뜩 넣어주었어. 나는 울면서 풀을 먹었어. 엄마가 보고 싶고, 배도 무척 고팠어. 나하고 친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풀을 먹는 것밖에 없었어.
이틀 뒤 우리는 다시 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갔어. 우리가 내린 곳은 시장이었어. 우리는 시장에 오자마자 라오스공연단에 팔려갔어. 그건 이미 사람들 사이에 정해진 거래였어. 사냥꾼들은 우릴 잡아다가 공연단에 팔기로 약속을 한 거야.
“거봐. 내 말이 맞지. 우릴 죽이지는 않잖아!”
이코가 소리쳤어.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육코가 코를 훌쩍이며 소리쳤어.
“나도. 나도. 나도.”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어. 나도 당연히 그렇게 말했지만, 그건 코끼리 친구들의 소원일 뿐! 사람들은 결코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지.
라오스공연단에 들어오자마자, 우리는 사람들에게 훈련을 받기 시작했어. 엄마나 친척들이면 결코 가르쳐주지 않을 우스꽝스런 놀이를 하게 된 거야.
공놀이, 통나무 옮기기, 앞발 들고 오래 버티기, 사람을 코에 태우고 빙글빙글 돌기, 둘 또는 셋이서 똑같은 동작하기, 콧속에 물을 잔뜩 머금었다가 내뿜기…….
우리는 정말 여러 가지 훈련을 받았어. 배우는 일은 즐거울 때도 있고 하기 싫을 때도 있지.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일거야.
조련사가 똑같은 말을 자꾸 하자, 나와 친구들은 사람의 말을 모두 알아듣게 되었어. 나는 조련사에게 내 생각을 표현했어.
“이 통나무는 너무 무겁단 말예요.”
나는 통나무를 들지 않고 앞발로 차면서 말했어.
그러자 조련사는 그보다 훨씬 가벼운 통나무를 가져다주었어. 나와 다섯 친구들은 그렇게 해서 점점 더 새로운 재주를 배워나갔어.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코끼리 재주를 잘하면 우리는 배고프지 않게 풀을 먹을 수 있었어. 그러나 아무리 좋은 풀을 먹어도 메콩 강 언덕에서 뜯어먹던 풀보다는 좋지 않았어.
재주를 잘 배우지 못하면 채찍으로 얻어맞았어.
맞을 때마다 몇 번이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참았어. 우리는 모두 조련사에게 반항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항상 무슨 일이든지 씩씩하게 떠벌이고 재깔대기 잘하는 이코도 별다른 반항 없이 순순하게 훈련을 받았어.
그렇게 6개월쯤 훈련을 받고나서 우리는 공연을 하기 시작했어.
사람들은 우리가 멋진 공연을 하면 좋아하고 박수를 쳐주었어.
내가 두 발을 높이 들어 올리면 마치 공연장을 번쩍 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이코는 힘이 세어서 무거운 것을 잘 들어. 삼코와 사코는 공굴리기나 아주 작은 것을 코로 삼켰다가 멀리 내뿜는 것을 잘해. 오코는 물구나무서기를 잘해. 육코는 사람을 코로 감아 들고 공연장을 도는 걸 잘해.
공연을 잘해서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져. 맛있는 풀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아서 좋아.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더 친해졌고 정이 들었지. 가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다가 다투기도 했지만 금세 화해를 하고 서로를 칭찬해 주었어.
어느 날, 공연을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생각했어.
‘사람이 가르쳐준 재주만 부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코끼리의 운명일까?’
‘이제 다시 엄마는 볼 수 없겠지!’
‘뾰돌 바위 옆에 지은 통나무집은 그대로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자 배가 고파졌어.
“일코야,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삼코가 싱끗빙끗하며 물었어.
“뭐, 별것 아니야. 그냥 뾰돌 바위 통나무집에 대해 생각했어.”
“아! 그것 참 멋있었는데……. 우리한테 다시 그런 시절이 올까?”
“어떤 시절?”
“아무런 걱정 없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절!”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절이라…….”
그러고 보니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닌 것 같았다. 모두들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절을 생각하고 있었어.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어.
달! 달이 떠 있었어. 내가 태어나서 맨 처음 본 그 달이 환하게 웃고 있었어.
“삼코야! 저기 달이 보이지?”
“응.”
“나는 달을 보면 마음이 참 편안해져. 엄마랑 함께 보던 저 달이 이젠 엄마처럼 보여.”
“나도 달 참 좋아해!”
삼코와 나는 어깨를 맞대고 달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어.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르르 잠이 들었어.
4. 낯선 나라 한국으로
“자, 모두 일어나!”
우리가 달콤한 잠에 빠져 있을 때, 조련사가 채찍을 들고 나타나 소리쳤어.
“아유, 지겨워!”
오코가 코를 툴툴거리며 잔소리를 했어.
“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나가 보자고.”
언제나 침착하고 긍정적인 삼코가 코를 둘둘 말아 올리며 느릿하게 말했어.
내가 맨 앞에 서고 친구들도 모두 줄을 맞춰 나란히 섰어. 조련사가 내 코앞에서 말했어.
“이제부터 우리 라오스공연단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우리 모두 멋진 공연을 보여주자.”
나와 친구들은 ‘비행기’라는 말과 ‘한국’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어. 그래서 잠깐 그 뜻이 궁금했지만,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아무리 낯설고 모르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는 걸 우리는 알게 되었지.
우리는 모두 트럭을 타고 어딘가로 갔어.
트럭을 타는 일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야. 트럭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끌려오던 날을 생각나게 해주니까. 하지만 뭐 우리는 이미 조련사로부터 여러 가지 훈련을 받았고, 트럭을 타는 일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지.
‘새로운 곳에 가는 것도 그리 나쁜 건 아닐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낯선 곳은 흥미로운 것도 많고 기분도 달라지잖아.
우리는 루앙프라방 공항에서 물과 풀을 많이 먹었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라오스에서 한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짐작을 했어.
오늘은 공연을 하지도 않았는데 조련사가 인심 좋게 많은 풀과 과일을 주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게다가 조련사는 우리가 좋아하는 물을 흠뻑 부려주고 목욕을 시켜주었어. 목욕을 할 때면 우리는 기분이 좋아서 코를 위 아래로 흔들면서 즐거워하지.
마침내 나와 친구들은 커다란 화물 비행기에 올라탔어. 우리가 탄 비행기에는 창문이 없어서 밖을 내다볼 수 없었어. 하긴 하늘 높이 떠서 밖을 내려다본다면 많이 어지러울 거야.
“나 토할 것 같아!”
육코가 코를 말아 쥐고 신음처럼 내뱉었어.
“나는 똥이 나오려고 해!”
사코는 되록되록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안절부절못했어.
나도 그리 형편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꾹 참고서 한마디 했어.
“토하고 싶으면 토해. 똥이 나오면 눠!”
그러자 이코가 피식 웃으며 말했어.
“예전에 하늘 위로 날아다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이거였어. 하여간 사람들은 참 재미있어.”
“트럭을 타고 가는 것하고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
나와 이코가 이런 말을 주고받을 때 사코가 소리쳤어.
“어, 어, 어, 나온다. 으, 으, 윽!”
사코는 그예 똥을 싸고 말았어.
그리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지금껏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 코끼리는 누가 먼저 똥을 싸면 다른 친구들도 연달아 똥을 싸는 버릇이 있어. 그래서 우리는 모두 사코를 따라 푸드득 소리를 내며 똥을 누었어. 비행기 안에 똥 냄새가 솔솔 풍겼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 살아있는 코끼리는 누구나 똥을 누게 되어 있잖아.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잖아.
우리가 풀밭이나 강가에서 누는 똥은 땅속으로 스며들거나 말똥구리들이 파헤쳐서 풀과 나무의 거름이 되지. 우리가 먹고 싼 똥에 들어있는 씨앗은 땅속에 들어가 싹을 틔우지. 그렇지만 비행기 안에서 눈 똥은 거름이 되지 않겠지.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어. 비행기 안에서는 별다르게 할일이 없잖아.
우리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조련사에게 비행기 안에서 지켜야할 사항에 대해 단단히 주의를 들었지. 그러나 똥을 누지 말라는 소리는 듣지 않았어. 주의를 들었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잖아.
몇 시간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고 가끔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니까 슬슬 졸음이 몰려왔어.
얼마나 잤을까?
비행기가 조금 심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멈췄어.
“다 왔나 봐!”
오코가 꼬리를 흔들어대며 소리쳤어.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어. 조금 쌀쌀하면서도 산뜻한 공기가 확 다가왔어.
“어이, 자랑스러운 라오스공연단 여러분! 한국에 잘 왔습니다. 모두 내리시오.”
조련사는 채찍을 깐닥거리며 우리에게 재촉했어.
비행기에서 내리자 라오스와는 확실히 다른 공기의 냄새가 느껴졌어. 우리는 몇 시간 동안 비행기 안에 갇혀 있어서 그런지 어딘가로 막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조련사가 우리의 이런 기분을 알아줄 리가 없지.
조련사는 다만 우리에게 먹을 물과 풀을 주었어.
그리고 얼마 뒤 우리는 트럭을 타고 또 어딘가로 갔어. 조련사와는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트럭을 운전했어. 우리는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긴 다리와 바다를 보았어. 호수나 강과는 다른 바다. 내가 바다에 가본 적이 없지만 그냥 느낌만으로도 뭔가 다른 걸 느꼈어.
“휘이잉―.”
우리가 타고 가는 트럭 위로 칼 같은 바람이 지나갔어. 우리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앞다리 사이로 코를 처박았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날씨가 차가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어.
‘집 떠나면 생고생이지!’
이건 코끼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명언이야. 우리는 모두 고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거야.
우리가 원해서 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하루 여행이 끝난 시간은 해가 꼴딱 넘어간 밤이었어. 우리는 모두 낯선 집으로 들어갔어.
다들 지쳐서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았어. 그러나 나는 좋지 않은 상황일 때 오히려 무슨 말이든 하는 게 우울한 기분을 씻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
“아이고! 오래 걷거나 뛴 것도 아닌데……. 코, 어깨, 다리, 꼬리가 다 쑤시네.”
나는 친구들이 다 들으라는 듯 애써 우스꽝스런 말투로 소리쳤어.
그러자 오코가 냉큼 내 말에 대꾸를 했어.
“공짜로 비행기를 타면 다 그런 거야!”
“뭐라고? 하하하!”
“하하하!”
오코의 뜬금없는 소리에 나와 친구들은 한바탕 웃었어.
그러자 우울한 기분은 사라지고, 낯선 땅, 낯선 공기,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시나브로 사라져갔어.
전에도 한 번 말했지만, 사실 우리 코끼리는 사람을 가장 두려워 해. 채찍으로 두들겨 맞는 것도 무섭지만, 낯선 곳에 우릴 데려왔다가 버리고 가면 우리는 아마 굶어죽을 거야. 코끼리에게 있어서 굶주리는 것은 가장 끔찍한 두려움이야.
조련사는 우리가 잠들기 전에 많은 풀과 과일을 주었어.
풀은 마른 풀이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고, 바나나와 사과는 맛이 있어서 우리는 모두 배불리 먹었어.
라오스에서 공연할 때 아주 가끔 사과를 먹었는데, 한국에 온 첫날 맛있는 사과를 배불리 먹게 되어 우리는 그런대로 만족해하며 잠이 들었어.
‘우리는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공연을 해야 할까?’
나는 잠결에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어. 생각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지쳤으니까.
5. 뭔가 다른 것을 해보고 싶어
이튿날부터 우리는 다시 공연 연습을 했어.
우리는 조련사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줄 듯이 열심히 했어. 점심을 먹고 오후 연습을 할 때, 조련사는 한국인 조련사를 소개했어.
“자랑스러운 라오스 공연단 여러분! 한국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이 한국에서 멋진 공연을 하여, 라오스 코끼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재주 많고 똑똑하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한국인 조련사는 라오스 말과 한국말을 섞어가면서 말했어.
우리는 어떤 언어든지 한 번 들으면 금방 알아들을 수 있어. 이건 결코 코끼리의 자랑이 아니라 당연히 그런 것이라서 하는 말이야. 우리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지. 아차! 식은 죽은 사람들이나 먹는 음식이고, 코끼리 마른 풀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 사람들이 하는 말뿐만 아니라 바람이나 물이 흘러가며 나누는 소리도 우린 알아들을 수 있어.
우리는 그런 말이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고 우쭐대거나 뽐낼 생각은 전혀 없어.
라오스 공연단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코끼리 연구가란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와서 나누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코끼리들은 친구나 가족이 죽으면 나무나 풀을 가져다 덮고 흙도 뿌려줍니다. 코끼리가 지나다니다가 미처 파묻지 않은 코끼리의 뼈를 보거나 다른 동물들의 시체를 보면 흙으로 덮어줍니다. 코끼리의 이런 행동은 거룩한 성자와도 같습니다. 코끼리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박사님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나도 모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코끼리는 사람만큼 지혜로운 하나뿐인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하하. 이렇게 이야기하면 결국 우리 코끼리가 똑똑하다는 자랑을 하는 것인데, 그건 어디까지나 사실이니까 따지지는 말아줘. 코끼리든 사람이든 남의 말을 믿지 않고 따지는 건 좋지 않은 거잖아.
내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건, 우리 코끼리는 한 번 들은 이야기는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거야. 라오스 말이든 한국말이든 코끼리에게는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란 얘기지.
하여튼 새로 온 한국인 조련사는 우리에게 한국에서도 멋진 공연을 해달라고 했지. 우리는 모두 알았다는 듯이 코를 쳐들고 꽈배기처럼 꼬면서 입을 실룩거렸어. 그게 ‘알았다’는 대답이지.
우리는 며칠 동안 라오스에서 했던 공연을 열심히 연습했어. 그런데 우리 마음은 둥둥 떠다니는 거야. 무언가 불안한 생각도 들어서 나는 움츠렸나봐.
나도 그랬지만 친구들은 배운 걸 잊어버리고 실수를 하기 시작했어.
한국인 조련사가 라오스 조련사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어.
“아니, 라오스 최고의 코끼리 공연단이라고 하더니 자꾸 같은 실수를 되풀이합니까?”
그러자 라오스 조련사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어.
“아무래도 얘들이 환경이 바뀌어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습니다. 우선 안정을 시킨 다음에 다시 차근차근 훈련을 시키겠습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코를 들었다 내렸다 했어. 우리가 조련사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신호지.
“그럼 며칠 동안 코끼리들을 쉬게 합시다.”
라오스 조련사의 말에 한국인 조련사가 고개를 끄덕였어.
우리에게는 꿀맛 같은 쉼이 찾아온 거야. 우리는 모두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나풀거렸어. 그건 우리끼리 신호를 보낼 때 쓰는 건데……. 모든 게 만족스럽다는 뜻이지.
우리 여섯 친구들이 다 모였을 때, 이코가 뜬금없이 말했어.
“우리가 오늘처럼 한 곳에 모여 있는 것도 쉽지 않을 거야! 그래서 우리의 대장을 뽑는 게 어때? 나는 일코가 가장 똑똑하고 힘도 세다고 봐. 그래서 일코가 대장이 됐으면 좋겠어. 친구들 생각은 어때?”
“좋아! 좋아! 일코가 대장해!”
친구들이 아우성쳤어.
나는 느닷없이 대장이 됐어.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말했어.
“친구들 의견을 존중해주지. 난 대장이라고 해서 결코 으스대거나 친구들한테 잘난 척하지 않을게. 대신 내가 생각하는 거랑 어떤 결정을 내릴 땐 꼭 친구들 의견을 존중할게.”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친구들은 귀박수를 쳤어. 귀박수는 귀를 세 번씩 나풀거리면서 치는 박수야.
육코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어.
“일코 대장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거야?”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무척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어.
나는 조금 전보다 더 당황스러웠어. 친구들이 묻고 있는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잖아. 그렇다고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할 수도 없고……. 나는 생각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오래 전부터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말을 꺼냈어.
“우리는 라오스의 풀밭을 잊어버리면 안 돼. 사람들에게 붙잡혀 사람이 가르쳐주는 코끼리 재주를 배워 공연을 하고 있지. 그러다 이제는 낯선 나라 한국에까지 와서 공연을 해야 해. 이건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야. 그러니 우선 공연 준비를 열심히 하고 공연을 잘해서 한국에 잘 적응하는 거야. 그 다음엔…….”
나는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다음 말을 이어나갔어.
“그 다음엔 뭔가 다른 것을 해보고 싶어!”
“다른 것이 뭔데?”
이코가 냉큼 질문을 했어.
“내 마음대로 가보고 싶은 곳을 가 볼 거야!”
“뭐? 그럼 울타리를 넘어 나가겠다는 거야?”
“그래. 우리 코끼리는 사람들이 주는 풀이나 받아먹고 사는 한심한 동물이 아니란 걸 알려주고 싶어.”
“그러면 사람들이 총을 쏘거나 아예 더 안 좋은 곳에 가둬버릴지도 모르잖아.”
“그런 위험이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싶어. 다른 일을 할 때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지. 위험을 생각하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 우리 처지는 조금도 바뀌지 않아. 친구들 생각은 어때?”
“그건 나도 그래. 전에는 그저 배부르게 먹고, 사람들에게 재주나 보여주고 박수만 많이 받으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잖아. 우리는 코끼리야. 코끼리는 코끼리다운 생활을 해야지.”
“맞아 맞아!”
이코의 말에 모두 맞장구를 쳤어. 그건 바로 나의 생각이기도 하지. 나는 기뻤어. 내가 오랫동안 속에 담아둔 말을 했을 때, 친구들이 틀렸다고 하거나 비난을 했다면 틀림없이 기분이 안 좋았을 거야. 그런데 막상 내가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조련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코끼리는 사실 재롱이나 부리며 주는 먹이만 먹고 사는 게 아니다.’
이런 생각은 사실 참 오래된 생각이었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친구들도 다 같은 생각을 했던 거야.
“코끼리는 코끼리다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이코의 말은 너무나 멋진 말이었어.
나는 대장으로서 이 상황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어. 친구들도 뭔가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들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친구들아. 우리 이렇게 하자. 며칠 뒤 공연을 한 뒤에 내가 신호를 보내면 모두 울타리를 넘어가는 거야.”
“좋아! 좋아!”
그날 밤 우리는 모두 알 수 없는 흥분과 설렘을 안고 잠이 들었어.
6. 진짜 코끼리가 탈출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공연을 한 곳은 서울 어린이대공원이야.
어린이대공원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했어. 주변에 아름답게 늘어선 나무들은 푸른 잎을 팔랑이며 우리를 응원해 주는 것 같았어. 어떤 나무는 잎도 없이 연분홍 꽃을 꽃다발처럼 달고 있었어.
아이들은 참새처럼 재깔대며 공연장으로 몰려들었어.
“우와! 아이들은 참 시끄럽고, 어쩌면 모두 다 저렇게 예쁜 옷을 입고 있을까?”
오코가 연방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했어.
“그래그래. 녀석들이 아주 호기심이 가득해 보여. 후후!”
나도 최대한 기분 좋은 목소리로 대답했어.
‘오늘은 공연을 잘해야지.’
친구들도 모두 기분이 좋고 공연을 잘하자는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어.
그렇게 우리는 이틀 동안 그야말로 기분 좋게 공연을 했어.
그러나 저녁이 되어 터덜터덜 잠잘 곳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어. 나를 비롯한 친구들 가슴 속에서 뭉클하며 솟구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모두 느낄 수 있었어.
“친구들아. 내일이야! 내일 공연장 앞 광장에서 달려 나가자.”
“좋아, 좋아!”
나는 대장으로서 친구들을 격려했어. 이코, 삼코, 사코, 오코, 육코와 번갈아가며 코를 비볐어.
“울타리를 넘어가면 뭔가 다른 세상을 보게 될 거야.”
“그럼, 그럼!”
우리는 서로 격려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소곤거렸어.
이튿날, 이미 며칠 동안 다녀서 익숙해진 공연장 앞 광장에 도착했어. 나는 앞서 걷다가 한곳에 우뚝 멈췄어. 그러자 다섯 친구들도 모두 걸음을 멈췄어.
그때 우리 앞으로 비둘기 수십 마리가 모여들었어.
라오스에 살 때는 백로나 할미새들이 우리 등에 올라앉아 우리 몸에 붙은 벌레와 기생충을 잡아주어서 친하게 지냈어. 하지만 비둘기와는 그리 친하지 않아.
나와 친구들은 비둘기를 쫓으려고 몇 걸음 걸어 나갔어. 그러자 비둘기들이 화들짝 놀라며 날아올랐어. 흙먼지가 뽀얗게 피어올랐어.
나는 크게 소리쳤어.
“그래 지금이야! 달려 나가자.”
나는 앞으로 곧장 내달렸어. 친구들도 미리 생각해 둔 방향이 있는 듯 우르르 달려 나갔어.
조련사가 크게 소리 지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과 탄성을 질렀어.
“으 아앗! 코끼리가 달아난다.”
조련사 네 명이 달려와 나와 친구들을 막았지만 조련사를 가볍게 비켜선 다음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내달렸어.
내 옆에는 오코와 육코가 같이 달리고 있었어.
잠시 뒤 어린이대공원 정문 옆 호수가 보이고 커다란 철문도 보였어. 우리 셋은 철문을 가볍게 부순 채 광장으로 내달렸어.
거리로 나오자 차들이 놀라 경적을 울려대고 급히 지나갔어. 아스팔트길을 얼마쯤 달려 나가자 강이 보였어.
“와, 강이다.”
오코와 육코가 거의 동시에 소리쳤어.
우리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강가로 내려갔어.
“이코, 삼코, 사코는 어디로 갔지?”
“몰라.”
그런 이야기를 하며, 우리 셋은 유유히 강물로 들어가 물놀이를 했어.
“와. 이렇게 큰 강에서 목욕하고 물놀이하니 너무너무 기분이 좋다.”
우리는 탈출로 얻은 자유를 맘껏 즐겼어.
잠시 뒤 강가에 사진기를 든 사람들이 몰려들어 연방 사진을 찍었어.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즐겁게 물놀이를 하며 놀았어. 지칠 때까지 물놀이를 한 우리 셋은 조련사가 시키는 말을 따라 고분고분하게 집으로 돌아왔어.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이코는 아스팔트길을 달리다가 어떤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정원이 있는 커다란 음식점이었대. 안에서 무언가 맛있는 냄새가 나긴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뒤돌아섰대. 그곳에서 어정거려봤자 재미있는 일도 없을 것 같아 담장 하나를 짚고 나오려는데 담장이 무너지더래. 그러다가 경찰관들에게 붙잡혀 역시 집으로 돌아왔어.
삼코와 사코는 어느 성당 옆을 지나다가 예전에 어딘가에서 맡았던 향기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대. 성당 한 쪽에 있는 종이 신기해서 코로 슬쩍 건드렸더니 “뎅! 뎅! 뎅!”하는 소리가 났대. 그러자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이 코끼리를 가리키며 웃었대.
“와하하! 코끼리가 성당 종지기가 됐네.”
삼코와 사코는 성당 둘레에서 계속 어정거리다가 허겁지겁 달려온 조련사와 소방대원에게 붙잡히고 말았대.
그날 저녁, 정확히 말해서 우리가 광장을 탈출한 지 다섯 시간이 지난 뒤에 우리 여섯 친구들은 한곳에 모였어. 물론 우리가 제 발로 걸어들어 온 것은 아니야. 조련사와 경찰관, 소방대원에게 붙잡혀 온 거지.
우리가 탈출하자마자 방송국에서는 무슨 난리라도 난 듯 요란하게 방송을 했대. 진짜 코끼리가 탈출한 사건은 한국에서 처음 일어난 일이래.
라오스 조련사와 한국인 조련사가 몰려와 우리 여섯 친구를 한 곳에 모아놓고 제 각각 한마디씩 했어.
“야! 이 녀석들아!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 다 들어줄게. 일코, 오코, 육코 너희들은 강에서 물놀이를 그렇게도 하고 싶었니?”
“그리고 이코! 넌 음식점에 갔으면 맛난 음식이라도 달래서 먹고 올 것이지 애꿎게 담장은 왜 부숴놓았니?”
“성당으로 간 삼코, 사코는 또 뭐니? 종교에 관심이 많은 거니?”
“야! 이 엉뚱한 녀석들아! 도대체 뭐가 문제야?”
우리 여섯 친구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서 모르는 척 눈만 슴벅거리고 이따금 귀를 팔랑거렸어.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 코끼리 문제라고요!’
그런 뜻이었지만, 조련사가 우리 코끼리 말을 죄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어.
어쨌든 우리는 조련사에게 미안했어.
우리는 다섯 시간의 탈출로 한국에서 너무나 유명한 코끼리 공연단이 되었어. 그래서 열흘 뒤, 우리가 공연을 할 때, 서울 어린이대공원 코끼리 공연장 앞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코와 손발을 척척 맞추며 신 나게 공연을 했어. 사람들은 어린이대공원이 떠나갈 듯이 박수를 쳐주었어.
나는 친구들과 눈을 맞추며 코를 높이 들었다가 몇 번씩 휘휘 돌렸어.
그리고 나는 어깨를 으쓱대며 친구들에게 말했어.
“뭔가 다른 걸 해 보고 싶을 때 우리 또 달아나자.”
친구들도 어깨를 으쓱대며 대답했어.
“좋아! 그렇게 하자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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