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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년 루이 13세가 건립한 파리 승리의 성모 성당에 모셔진 성모상이다.
1832년 이 성당에 부임한 데 즈네트 신부는 신자들의 신앙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절망적이었다.
1836년 미사를 봉헌하던 중 "지극히 거룩하고 하자 없으신 마리아의 성심께 너의 성당을 봉헌해라"는 음성을 듣게 된다. 데즈네트 신부는 곧 성모의 밤을 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성당을 찾게 되었다.
1855년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교리 선포 이후, 1856년 교황 비오 9세는 '승리의 성모상'에 관을 씌워 드렸다. 수없이 많은 기적이 승리의 많은 기적이 승리의 성모님을 통해 일어났고 성인들도 승리의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꽃피었다.
성면의 예수 아기의 데레사
<1883년 11세의 소화 데레사가 병에 걸렸을 때>
"하루는 아버지가 제가 누워 있던 마리아의 방에 들어오시어 매우 슬픈 얼굴로 마리에게 금전을 여러 닢 주며 자기 작은 딸(소화)의 병이 낫도록 파리에 있는 승리의 성모 성당에 미사를 청하는 편지를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아! 저의 임금님(아버지)의 이러한 신앙과 사랑을 눈앞에 보면서 얼마나 감격했는지요! 제가 소생하기 위해선 기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기적이 필요했는데, 이 기적을 승리의 성모께서 행하셨습니다. (소화 데레사 자서전. 안응렬 역, 89-90쪽)
<1887년 11월 4일, 15세의 데레사가 아버지와 함께 파리여행을 갔을 때 >
아버지는 우리를 기쁘게 해주시려고 무척 고달프게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내 파리의 모든 명소를 다 보았습니다. 제게 기뻤던 것은 승리의 성모 성당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성모께서 제게 내려 주신 은혜는 너무나 벅차서 제 첫 영성체 때와 같이 오직 눈물만이 제 행복을 드러냈습니다. 그분에게 엄마라는 이름밖에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상동 책 165쪽)
성면의 예수 아기의 데레사
(St. Thérèse de l'Enfant Jésus de la Sainte Face, Lisieux, Fr.)
(1873. 1. 2. - 1897, 동정 교회학자, 프랑스와 선교의 수호성인) :
마음이 온순하고 겸손한 작은 어린이처럼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산 불꽃으로 타오른 이 성녀는 숨겨진 작은 길(Little way)로 천상아빠께 돌아가신 ‘사랑의 학문’의 박사이자 거룩하신 얼굴(聖面)에 대한 영성의 대가이시며 이 성녀를 알게 됨은 하느님의 놀라운 배려이십니다.
1887년 11월 20일, 데레사가 15세 나던 해, 아빠 루이 마르탱(Louis Martin,1823-1894)과 함께 가르멜 수녀회 입회를 허락 받기 위해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하여 무릎을 꿇고 발에 친구를 하였습니다.
교황께서 손을 내미시어 손을 마주 잡으시자 눈물 어린 눈을 들어서 성하의 자비로운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간청했습니다.“교황성하시여, 큰 은혜를 청할 것이 있나이다.....!”
그러자 교황께서는 데레사의 얼굴에 거의 닿을 만큼 머리를 숙이시며 영혼 속까지 꿰뚫으시려는 것 같은 그 ‘검고 그윽하신’ 눈으로 그녀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데레사는,
“교황성하, 성하의 금경축 기념으로 제가 15살에 가르멜에 들어갈 허락을 내려 주십시오...!”하고 청하자 옆에 있는 주교님이 그 상황과 웃어른들의 심사 중에 있다고 말씀을 드리셨습니다.
교황님은 “웃어른의 말씀에 따르면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시 데레사는......
“교황성하시여, 성하께서 좋다고 하시면, 모든 이가 다 따를 것입니다.”하고 용기를 내어 말씀을 드리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주시어,
“좋다.....좋아.....!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들어가게 될 테지” 하시며 당신 손을 들어 입에 친구를 시키시고 머리에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지순례를 마친 데레사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이 때에 프랑스에서는 국제적 비밀 결사주의의, 자칭 프랑마쏭(Francmaçon)이 신비의 계시로 일컫는 기사가 계속 출판되었는데 바타유 박사와 디아나 보강이라는 여성에 의해서 출판되었는데 이 기사는 한동안 대중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다가 나중에 가서는 그것들이 거짓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어린나이에 이 기사를 보고 ‘주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라고 나름대로 판단하여 ‘진리’와 ‘교회’와 ‘사랑’의 3가지 기초에 대한 충실함을 엿보이셨습니다. 데레사는 약하고 겁이 많았던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과 결합되어 살았으므로 내면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고 악마의 수중에 있는 수많은 영혼을 구하려 1888년 4월 9일 가르멜에 입회하였고 1897년 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천번이라도 내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번제물이 되길 원하셨던 것처럼 봉쇄 수녀회에서 숨은 꽃으로 사셨습니다. 데레사는 임종 자리에서 그녀의 자서전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예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더 많이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나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1923년 시복, 25년 (이 해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시복되심) 시성되셨고 27년에 선교의 주보로 선포되셨습니다.
거룩하신 얼굴에 대한 신심은 “소화 데레사 성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이 신심을 아마도 신앙의 기초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베로니카 성녀의 수건에 찍힌 성용(聖容, 거룩하신 얼굴)의 그림을 관상하기를 즐겨 하신 성녀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마음과 마음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그분의 얼굴은 맞대고 그분을 뵙는 것이 허락될 때까지 그렇게 할 것입니다....그분의 얼굴은 나의 빛이요, 나의 숭배(devotion)입니다.”
그분 얼굴의 빛이 15세의 어린 소녀를 봉쇄 가르멜 수녀로, 수련장으로, 성녀로, 끝내는 교회학자로 인도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심장과 그 고통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본 성녀는 세상에 외칩니다.
“오, 사랑이신 예수님… 마침내 찾았습니다. 제 성소는 사랑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의 눈길이 얼마나 강하게 수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는지 그녀는 날마다 베로니카 베일 그림의 예수님의 거룩하신 얼굴(聖面)을 깊이 관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 예수님께 대한 이사야서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이사야 52,14)
데레사 성녀는 예수님의 거룩하신 얼굴이 어떻게 해서“유일한 조국, 사랑의 왕국, 발걸음을 인도하는 별”이 되었는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쓴 자서전과 가족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나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부에서 나는 사랑이 됨으로써 모든 것이 될 것입니다…그렇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게 되면 이 지상에 장미 비를 뿌리겠습니다.”
대희년을 준비하는 성자(聖子)의 해인 1997년 10월 19일(전교주일), 복자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면(聖面)의 아기예수의 소화 데레사 성녀(St. Thérèse de l'Enfant Jésus de la Sainte Face)를 33번째의 교회학자(Doctor of the Church)로서 선포하셨으며, 복음의 메시지를 파악한 지혜와 실제성과 시대에 적절한 그녀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습니다.
“성면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사랑의 신학’을 통해, 또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써 하느님을 찾는 길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는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나는 사도좌의 권위로써 성면의 아기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전 세계가 공경해야 할 교회 박사로 선언합니다.”
이 위대한 소화 데레사 성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도 심장을 가지고 있고 그 심장이 사랑으로 불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또한 사랑만이 교회 구성원들을 행동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저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는 것과 사랑이 모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성녀 데레사가 잘 이해한 것처럼 사랑이야말로 진정 교회의 ‘핵심’입니다. 교황님이 성녀를 교회 학자로 선포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학문(Scientia amoris)의 전문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도 그분의 사랑이 아가페와 에로스를 완성시키는 실재하는 “생수의 강”으로 비유하고, 모든 죄를 용서하는 사랑으로 정의를 거슬러 자비를 베푸는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예수의 아녜스 수녀(성녀의 둘째 언니, 마리 폴리나, 1861-1951)의 명에 따라 쓰기 시작한(1894년 12월)자서전 내용 중 몇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눈부시게 빛나며, 상처와 눈물로 가득함에도 이미 그토록 아름다우신데 하늘에서 우리가 그분을 뵐 때는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으로 불타오르십니다. 그분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관상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만큼 사랑하시는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얼굴은 내 생애에 얼마나 많은 선익을 주셨는지요, 거룩하신 얼굴은 제가 예수님을 닮도록 하기위한 고통으로의 계속적인 부르심이었습니다.”
“의인들은 주님의 재림에 앞서 나타날 구원의 상징인 십자가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좀 더 정확하게 마지막 날에 빛나실 당신의 얼굴로 그분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경외하올 주님의 얼굴이여, 당신의 은총을 얻겠나이다. 사랑하는 주님의 얼굴이여, 당신의 무한한 영광이 비추기를…… 당신의 그 영원의 날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당신의 신성한 눈을 기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얼굴을 숨겨 다른 이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겠나이다. 우리의 천국은 당신의 감춰진 얼굴입니다.”
“오, 작은 아기예수님, 제 유일한 보물이시여, 제게 사랑의 모든 빛을 보여 주소서.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오, 예수님, 작은 형제여, 당신 외에 다른 기쁨을 원하지 않사오니 당신을 떠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작은 왕(王)이시여, 당신의 유아기의 모든 덕을 저에게 주십시오.”
소화 데레사 성녀가 말하는 거룩하신 얼굴에 대한 신심이란 좋으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이사야의 예언과 고통 받으시는 성면(聖面)에서 임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가 거룩하신 얼굴에 흠숭을 드린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는데 그분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순교자
저는 가족들 중에 아무도 제가 보내드린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모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감탄할 만한 것인데요! 그리고 이 신심회의 일에 선교 활동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텐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불성실한 사람들, 우상 숭배자, 유다교 신자 등등 말하자면 좋은 하느님께 빚을 지고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니까요. 단지 매일 '아베 마리아(성모송)을 바치고 기적의 패를 지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은총을 받게 됩니다. 저도 역시 파리에 승리의 성모 성당 안에 있는 본회의 경당에 기도하러 가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가족들 모두 기억하였습니다. (1839년 4월 8일 가족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그러므로 '승리의 성모님' 앞에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한다. 불성실한 자와 우상 숭배자 그리고 신앙을 가지지 못한 자, 냉담한 이들을 아버지께로 이끄시는 성모님께 의탁한다.
'승리의 성모님'앞에서 위로를 청한다. 낙담하고 희망을 잃은 고난의 순간에 어머니로서 주실 위로를 구한다.
'승리의 성모님'앞에서 신앙을 청한다. 모든 이를 주님께로 이끄시는 어머니께 온갖 의심과 분심에서 벗어나도록 간구한다.
'승리의 성모님'앞에서 앞에서 용덕을 청한다. 순교자들의 모후로서 당신을 사랑한 성인들을 그리스도의 증거자로 만들어 주신 분별 있고 용기 있는 신앙을 주시기를 청한다.
자료 출처 (신리 성지 : www.sinri.or.kr 사무실 041-363-1359, 사제관 1353)
다블뤼 안토니오 안주교 03.30 한국성인
(安敦伊 ANTONIO DABLEUX, 48세로 1866년 3월 30일 군문효수)
첫댓글 모든이가 성모님과 함께 승리하시길 빕니다. 파이팅~~!! to the victory~~!!
승리의 비결은 바로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온전히 봉헌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