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을 찾던 그 날은 첫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북한강변에 자리잡은 마현마을이다.
조선후기 최고의 지성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묻힌 고향이다.
정치.경제.종교.철학.의학.역사.건축학 등 모든 분야에
박학다식했던 조선 최고의 실학자요 사상가 다산 정약용이다.
이곳 마현은 그의 사상의 고향,역사의 땅이다.
다산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이다.
여유(與猶)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 망설임이여! 겨울에 시냇물 건너듯 신중하게 하고,
경계함이여!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
(與呵其若冬涉水 猶呵其若畏四隣 )"
다산 나이 39세 때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자 다산은 자신의 정치생명도
끝났음을 직감하고 이곳 고향집으로 내려와 여유당을 짖고 칩거했다고 한다.
그는 남인의 가계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조상이 당쟁의 중심인물이
되지 않았음을 자랑했고 그 아들에게도 그런 일에 가담하지 말것을 당부했다고 전한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 월 16일에 경기도 광주의 마현리에서 부친 정재원과
모친 해남윤씨의 4남으로 태어난다. 다산은 유년시절 가학(家學)의 전통 속에서 자란다.
그의 집안은 8대에 걸처 문과에 급제한 홍문관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역임한 명문가이다.
어머니 역시 윤선도의 6세손이자 윤두선의 손녀이다.
그는 외조부인 윤두서가 남긴 과학적 지도와 그의 문집을 통해 학문 방법을 익히고,
친형인 손암(巽庵) 정약전을 지기(知己)와 스승으로 모시면서 성장한다.
그러던 다산은 15세에 서울로 유학하면서 새로운 학문 분위기를 접하게 된다.
주로 남인계 학자를 통해 접하고 학맥을 이어 받는다.
단아한 목조건물 여유당은 서른세칸의 전통 양반집이다.
큰 나무 그늘과 나즈막하고 단아한 담장이 양반의 울타리를 넘어 아랫사람들을
허물없이 대했던 다산의 성품을 보여주듯 편하게 와 닿는다.
여유당 안은 무척이나 깨끗하고 검소하다. 규모도 작고 주변이 화려하지도 않다.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다산 정약용은
바로 생가의 뒷동산에 묻혀 지금까지 170년이 넘도록 고이 잠든다.
다산이 7살때 남긴 시 산(山)은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소산폐대산(小山蔽大山) 원근지부동(遠近地不同)
(작은 산이 큰산을 덮는 것은 땅의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시를 보고 아버지 정재원은 크게 기뻐하며
"이 아이의 두뇌가 이렇듯 명석하니 장래에 반드시 역법과 산수에 밝을 것이야."
라고 했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옛 벗들과 회포를 풀면서
먼저 간 친구들의 묘비명을 지어주고
1822년 회갑때 자신의 자찬묘비명을 손수 짓는다.
“네가 너의 잘한 일을 적는다면 몇 편 되겠지만,
너의 숨겨진 허물을 기록하면 책은 끝이 없으리.
너는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 행실을 살핀다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산의 묘소는 여유당 오른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소박한 호석(護石)의 보호를 받으며
부인 풍산 홍씨와 함께 조용히 잠들어 있다.
다산은 75년을 살면서 17년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그는 누구보다도 고향을 못 잊어 했다.
“지사(地師)들에게 물어보지 말고 집 뒷동산에 매장하라”
다산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집에서 눈을 감으며 유언했다.
다산의 생가와 묘는 아래 위로 한곳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의 초상을 모신 사당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사당은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안내문이 대문에 걸려 있었다.
두 갈래의 큰 물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어름이라서
두물머리라고 한다. 양수리(兩水里)라고도 부른다.
이 두물머리 어름 능내리에서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죽어 묻혔다.
그의 다산사상은 영원히 이곳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