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Today 인터뷰] 동부산대학교 실용음악&클래식과 백원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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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인상의 백원석 교수 말투는 이색적이다. 서울 말씨와 경상남북도 말씨가 섞여 지역색을 분간하기 힘들다.
3남매 중 막내로 서울 장충동에서 태어나 장충단 공원을 마당처럼 뛰놀며 자란 백 교수의 집안은 ‘대한민국 클래식 제1세대’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극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 일본 동양음악대(동경대학교 한 학부의 전신)에서 음악공부를 하셨고, 해방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잠시 했지만, 결국 다시 활을 잡았다.
백 교수는 영문도 모른체 6살 때 ‘악기는 하나쯤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바이올린을 부친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중학교로 진학할 때 즈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집안에 위기가 찾아왔다. 가족은 모두 서울을 떠나 대구로 내려갔다. 백 교수의 아버지는 ‘다시는 서울을 찾을 일이 없을 것’이라 단호하게 말했다.
하루는 진로결정에 대해 이야기를 아버지께서 먼저 꺼냈다. “결정은 너가 하겠지만 먹고 사는데는 공대진학이 제일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내비추며 음악과 공부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했다.
막상 늘 함께했던 음악을 등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깜깜해졌다. 백원석 교수는 심각한 고민을 이어가다가 어린 마음에 생긴 음악에 대한 절박함으로 음악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아버지가 부산시립 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수석으로 가면서 백 교수도 외삼촌이 계셨던 부산으로 전학갔고 자연스레 부산의 대학으로 진학했다. 하지만 좌절이었다.
서울과는 다르게 당시 부산의 음대 환경은 열악했기 때문이다. 전공수업은 뒷전이었다. 단기복무를 마치고 남는 시간에 짬짬이 아르바이트 레슨을 다녔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꽤나 큰 돈을 모을 수 있었고, 점차 해외 유학에 대한 꿈을 구체화 시켰다.
1983년 부산대학교 김영희 교수의 조언으로 유학간 곳은 독일의 뮌헨. 음악의 도시 뮌헨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났다. 드디어 ‘대한민국 음악가 제1세대’의 자제로 태어나 날개를 달고 날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배워갔다. 남다른 성실함과 천재성으로 1987년 뮌헨 아카데미 심포니 오케스트라 퍼스트 바이올린 단원으로 입단 결정되었다. 하지만 행복은 얼마 못 갔다. 학생비자를 노동비자로 바꾸지 못해, 비자만기로 강제 입국조치 되어야 했다.
부산에 돌아와서는 여기 저기 대학강의를 다녔다. 클래식의 저변확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백원석 교수.
“앞으로 재능기부 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된다면 실질적인 음악인, 소외 계층을 포용할 수 있는 지역 음악인으로 남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지네요. 더욱 현실적으로 동래 구립 오케스트라를 활성화 시켜 나가고, 빈민층 구성으로 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서 사회자정 효과를 꼭 한 번 실험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도 이기대 공원을 걸으면서, 지역사회의 문화저변확대를 위해 고민하는 백원석 교수. 유명한 음악가보다 대중가 함께 편하게 즐기는 음악가로서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그의 뒷모습이 노을 만큼이나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