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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르단(Jordan)의 제라쉬(Jerash)
제라쉬는 암만에서 50km 북쪽에 있는 로마시절 데카폴리스(Decapolis) 가운데 두 번째로
번성했다고 하는 일명 “거라사(Garasa)”라는 도시를 말한다.
제라쉬는 “황금의 강”이라는 뜻으로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며 성경에는
“이방인들이 사는 곳”이라고 적혀 있고 주민들을 거라사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유적지 안에서 6500년이 넘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이는 이 지역이
600m 고도에 위치해 있지만 기온이 온화하고 일 년 내내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지역으로서 사람이
거주하기에는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마귀 들린 사람(레기온)을 고치시고 그 귀신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시어 돼지들이 갈릴리
바다로 뛰어 들어 몰살하게 한 곳이 호수 건너편의 게사라(마르꼬 5-2)와 게르게사(루가 8-26)와
가다라(마태오 9-28)라는 지명이 성경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인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같은
지명으로 거라사(Garasa)를 말한 모양이다.
고대 제라쉬는 헬라어로 가르쇼(Garsho)라고 불렸던 것을 로마가 점령한 후 거라사(Garasa)라고
그리스화 해 불렸고 그 후 아랍인이 제라쉬(Jerash)로 바꿔 불렀다.
이는 페트라(Petra)의 유적지에서 나온 비문에 거라사(Garasa)라고 쓰여 있어 확인된바 있다.
제라쉬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정복하고서는 동서양의 다른 두문화가 그리스 식으로
통일되었는데 대왕의 사후에도 프톨레미 2세(BC 285-245) 치하에서도 주위의 비옥한 토지와 교통의
요충지라는 이점을 배경으로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한때 시리아 셀레우시드왕 안티오쿠스 3세(BC 215-164)에게 다스림을 받게 되기도 하지만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에게 정복되어 통상과 정치와 문명의 지배력에 의해 맺어진
데카폴리스(Decapolis)동맹의 하나로 만들어 지면서 커다란 경제적 이익을 가져 왔다.
AD106년에 트리야누스(Trajan) 황제가 나바티안(Nanbatean) 왕국의 위협을 막으려고 페트라를
점령하면서 제라쉬에 건축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커다란 무역의 부(富)가 흘러들어 오게 되었다.
AD129년에 하드리안(Hadrian) 황제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방문을 기념하여 입구 남쪽 끝에 13m높이의
웅장한 개선문을 세웠는데 이 문을 승리의 문(Triumphal Arch)
또는 하드리안의 아취(Hadrian's Arch)라 부른다.
그 위에는 “이 나라의 국부이시고 위대한 성직자(Priest)이신 하드리안 황제를 기념하여 그의 행복과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라고 쓰여 있다.
제라쉬의 번영은 4-7세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부터 문화의 꽃을 피우고 전성기가 펼쳐졌는데
이 기간에 제라쉬의 인구는 2만명이나 되었다.
제라쉬는 AD614년에 페르시아(Persia)의 침공을 받았고, AD636년에는 아랍의 침략을 받아 많은 문화재들이
파괴되는가 하면 AD749년에는 연속하여 일어난 큰 지진으로 대부분의 웅장한 석조건물이 파괴되어 찬란한
문화가 흙더미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인구도 4천명으로 감소되어 십자군이 제라쉬에 침공해 왔을 때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고 기술하였을
정도였다고 하니 페허로 인한 상흔이 심각하였다는 것은 짐작이 간다.
제라쉬는 1806년 독일 유적 탐험가 Seetzer에 의해 발견되면서 세계 고고학계에서 앞 다퉈 발굴에 참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폐허로만 여겼던 이 옛 도시는 놀랄 만큼 모래 속에 잘 보존되어 있어 세상에 이목을
끌면서 자취를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발굴된 유적은 전체의 20%에 불과하다고 하며 현재 제라쉬에는 20만평이 넘는 넓은 언덕에 웅장한
석조건물 유적이 펼쳐져 화려한 옛 문화가 2천년 전의 투영된 그림자처럼 재현해 보이고 있다.
성안에는 모두 101개의 석주가 20여 미터의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고 3m의 성벽에는 모두 6개의 성문이
있는데 성문은 남북에 각1개 동서에 각2개가 설계되어 있다.
남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면 왼쪽 언덕에 제우스 신전(Zeus Temple)과 원형 야외극장이 높이
자리 잡고 있다.
오른쪽 아래로는 움푹하게 낮아진 지형을 이용하여 타원형으로 세워진 이오니아식 열주가 아름다운
포럼(Oval Plaza)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타원형의 광장에서 제우스신과의 연관된 제례의식을
거행하지 안했나 추측되었다.
특히 이곳 제라쉬의 유적을 들러보면서 인상에 남은 것은 남문에서 북문을 연결하는 중앙을 가로지르는
남북대로였는데 양측으로 카르도(Cardo)라고 불리는 열주(Collonade)가 장대하게 둘러 세워져 있어
참으로 경관이 웅장하였다.
바닥이 돌로 포장되어 있는 전형적인 로마양식의 이 열주대로(列柱大路)는 길이가 800m에
이른다고 하며 폼페이에서처럼 양쪽이 패인 마차바퀴자국이 나 있었고 대로 밑으로 하수도 시설이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하드리안 아취(Hadrian's Arch) 개선문-----
-----전차 경기장(Hippodrome)-----
길이 245m 폭 52m로 1-3세기에 걸쳐 U자 모양으로 건설되었는데 수용인원은 1만 5천명이다.
-----전차 경기장의 관람석-----
-----남문((South Gate)-----
제라쉬의 출입문으로 AD 130년에 건설되었다.
이 남문을 중심으로 3.456m에 달하는 성벽이 둘러 처져 있다.
-----타원형 광장(Forum 또는 Oval plaza)-----
76개의 돌 기둥으로 둥굴게 만들어진 이 거대한 타원형 광장은 90m 80m로 장대한 감을 준다.
-----원형 야외극장-----
AD 90년에 만들어 졌으며 32게 열에 3천명 정도가 앉아 관람할 수 있다.
최대 수용 인원은 5천명으로 중앙 무대는 화려하게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고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제라쉬 유적 전경-----
-----아르테미스 신전-----
아르테미스는 제우스의 딸이면서 아폴로의 여동생으로 사냥과 풍요의 여신이다.
12개의 석주중 11개가 지금껏 남아 있다.
-----님프(Nymph)의 신전-----
-----석주 기둥길(Colonades street) 카르도 막시무스(Cardo Maximus)-----
800m에 이르는 도시 남북을 축으로 건설된 도로인데 500개의 석주가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다.
-----석주 기둥길의 돌로 깔린 밑 바닥-----
(2)요르단(Jordan)의 고대도시 페트라(Petra) (상)
-----페트라 매표소 입구-----
페트라(petra)는 수도 암만에서 서남쪽으로 150km정도 떨어져 위치해 있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요르단의 고대 유적이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인데 2천여년 전 이곳을 수도로 삼은 나바테아인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인도나 아라비아로부터 향료와 금. 은 등의 값비싼 서역무역을 한
고대 대상(隊商) 도시이다.
대상교역에 의해 수세기 동안 부유한 상업도시로 번영한 이곳은 고대국가 에돔(Edom)의
수도였는데 기원전 300년경 에돔인을 몰아낸 나바테안(Nabateans)인들이 그들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하여 한층 발전시키며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페트라는 이집트와 아라비아. 시리아와 페니키아. 그리고 홍해와 흑해.
사이의 중요한 교차점임으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고대 동방의
전통과 헬레니즘 건축양식의 혼합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고학
유산을 증언하는 곳이다.
-----매표소입구에서 시크까지 진입로-----
유대 역사에 의하면 베두인의 조상 나바테아인은 신구약 중간시대 북쪽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원주민인 아랍계 유목민족을 말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그 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돌산을 깎아내고
조각하는 방법으로 독특한 암석문화를 발전시켰고 그 조각 건물들에는 각 지역을
경유했던 여러 문명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곳 페트라는 초기의 단순하고 투박스러운 나바테아인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시작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건축기교을 거쳐 후기의 세련되고 건축미가 혼합된
희랍. 로마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건축변천 발전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약시대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유대 민족을 이끌고 애급(埃及=이집트)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을 떠났을 때 이곳을 통과 하려 했으나 당시 에돔왕이
거절하여 인근 아라바(Araba) 광야에서 38년간을 머물다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갔다고 하여 “와디무사(Wadi Musa)” (모세의 계곡) 라고
불리는 곳과 모세가 바위를 칠 때 물이 솟아났다고 하여 “모세의 샘”(므리바)이라고 하는
우물이 있으며 모세의 형 아론이 죽어 무덤이 있다는 호르산에 교회가 있다.
-----모세의 샘-----
페트라는 대부분의 건물들을 암벽을 파고 깎아서 만들었다.
각종 신전 무덤들이 자연소재 그대로의 색상과 구조로 설계축조 되었고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되어 마치 지하에 구축된 지하 왕국이 연상될 만큼 신비롭다.
결코 좁지 않은 지역에 펼쳐진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유적은 현대 도시
못지않은 시설 규모를 갖추었고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유럽 문명의 골간을
이룬 성서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지구상의 변방에 불과한 곳이 되어 황량한 광야에는 남루한
베두인족들이 염소 떼를 한가히 몰고 있는 마치 고대세계에서 시계가 멈춰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방에 유령처럼 버티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이 도시유적은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선정되어 1985년 12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바 있다.
-----Djin Blocks-----
-----오벨리스크 무덤과 밥 아스 시크 트리클리니움
(Obelisk Tomb and Bab As Siq Triclinium)-----
오벨리스크 무덤과 트리클리니움은 상단과 하단으로 붙어 있어 한 시대에 걸쳐 건설된
일치된 무덤으로 보이지만 두 무덤은 시간을 두고 완성된 전혀 다른 무덤들이다.
상단을 구성하는 오벨리스크 무덤은 이집트 신전에서 볼 수 있는 오벨리스크 4개가
조각되어 있고 침식으로 희미해진 사람 조각이 사이사이에 남아 있어 5명의 무덤으로
사용되었음이 예측된다.
하단을 구성하는 밥 아스 시크 트리클리니움은 고대 로마에서 쓰던 3면에 눕는 안락의자가
붙은 식탁인 트리클리니움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내부에는 3개의 작은 방으로
구분되어 있어 죽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매년 향연을 펼쳤던 곳으로 보인다.
-----시크 입구-----
해발 950m에 자리 잡은 산악도시 페트라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면서 영욕의 명암이
오간 듯싶다.
기원전 6세기경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과 에돔족이 혼합정착 하여 왕국을
세운 민족이 나바테아인들이라고 역사는 말한다.
이들은 실크로드를 왕래하는 대상들에게 통행세를 거두어 부를 축적하여 국제적인
통상의 거점으로 번영을 누리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로마시대에 들어와 폼페이우스 장군이 침략을 시작으로 마침내 106년 로마황제
트라야누스(Trajanus)가 나바테안 왕국을 점령 제라쉬(Jerash)와 다마스커스(Damascus)를
잇는 교역로로 삼았고 이어 하드리안 황제는 페트라를 방문하고 이곳을 “하드리안 페트라”라고
개명을 하기도 했다.
그 후 세력이 바뀌면서 아라비아 사막엔 새로운 상업 로가 개척되고 로마 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수자원의 고갈로 도시가 폐허가 되고 쇠락을 거듭하였는데
아랍인과 십자군이 점령을 반복하면서 요새를 건설하고 페트라의 과거를 되찾는 듯싶었으나
대상 무역의 한계에 부딪쳐 상업적 역할보다는 요르단과 남부 시리아의 종교적 중심도시로
자리하게 되었다.
4세기엔 콘스탄틴에 의하여 기독교화 되었고 6세기경엔 큰 지진으로 인하여 파계되고
함몰되어 여러 세기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 세상에서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1812년 스위스의 젊은 이슬람 학자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n Ludwing Burckhardt)에게 이 웅장한 유적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감동적인 시크-----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밋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영국의 시인 “존 버곤”
신부는 페트라를 보고 묘사하였던가?
정말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틈 속으로 좁고 깊은 골짜기는 나타났다.
하늘을 가릴 듯한 높은 암석들 사이로 미로와 같은 협곡이 펼쳐졌는데 이 통로의 길이가
약 1.2km 가 된단다.
하늘이 보일 듯 말 듯한 이 깎아지른 암벽 사이의 좁은 길을 아랍어로 “시크(Siq)"라고
하는데 의미는 협곡이라는 뜻이란다.
까마득한 수직절벽의 웅장한 붉은 바위들이 주위를 헤 덥고 분위기를 위압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이런 붉은 절벽바위가 미로와 같이 협곡을 이루면서 통로로
연결되고 또 그 벽면 하단을 쪼아 수로를 조성했는지 불가사의 한 경이로움이 감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이 장관이야 말로 자연의 조화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자연의 위대함의 극치였다.
자연의 위력으로 시현(示現)된 이 시크는 해수에 의한 융기와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란다.
하나의 거대한 암석 불럭이 지각변동에 의해 분리되고 결합되면서 급류와 바람에 의해
시간이 오래 흐르면서 암석표면이 변모 되여 기묘한 형상이 생겼다고 한다.
시크의 넓이는 2m~5m 밖에 안 되는데 협곡의 절벽들은 100m가 훨씬 넘는 듯 했다.
하늘 높이 압도하는 단애(斷崖)사이로 태양광선이 밝게 비추어 붉은 사암의 현란한
물결모양이 신비스럽게 그려져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페트라유적은 이 경탄스러운 시크가 있기에 그렇게 유명해지고 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세계의 이목을 끄는 것 같았다.
-----알 카즈네(Ai Khazneh)-----
시크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좁고 어두워졌다.
그런데 길이 더 이상 이어질 것 같지 않은 시크의 끝자락에 이르자 한줄기 선명한 빛
내림이 들어오며 그 빛 속에 페트라(Petra) 알 카즈네(Al Khazneh)가 장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알 카즈네는 아랍어로 보물창고(The Treasury)라는 뜻이다.
보물창고라고 하는 이름은 사막유목민의 베두인들에게 전해지던
카즈넷 알 파라운(Khaznet al Faraoun)이라는 어원에서 부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건물
정면 제일 윗부분에 항아리 형태의 조각된 곳에 나바테아인들이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속설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 허황된 소문에 보물을 탐한 베두인들은 어리석게도 이 항아리 조각부분을 훼손
식혔다는 허망한 일화도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밝혀진 학설로는 알 카즈네는 기원전 1세기경에 헬레니즘 양식으로 조성된
나바테아왕 아레타스(Aretas) 3세의 무덤이라고 한다.
높이 43m 길이 30m 크기로 사암을 쪼아내어 만든 알 카즈네는 6개의 원형 기둥이 받치고
있는 2층 구조로 기둥이나 벽을 세우지 않고 오로지 바위를 정교하게 파내고 다듬어
만든 부조건물이다.
건물의 맨 위쪽에는 (현재는 파손됨) 독수리 조각 두 개가 좌우에 장식되어 있는데 이
독수리는 나바테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남성 신인 두샤라(Dushara)를 상징한다고 한다.
2층 중앙에 원형 형태로 만든 토로스(Tholos)는 나바테아인들의 가장 신성시하는 여신
알 우자(Al Uzza)가 조각되어 있다.
“알 우자”여신은 나바테아인들의 주신이다. 그들은 바위 자체를 신으로 모셨고 바위에서
태어나 바위에서 죽는 것이 신에게 닦아간다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바위 속에 매장된다는
것은 축복이며 당연한 바램이었다.
토로스 옆으로 우묵히 들어간 두세 번째 기둥 사이와 네다섯 번째 기둥 사이에는
날개 달린 빅토리아 여신이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 지붕이 있는 원뿔모양의 둥근 부조는
유골 단지가 들어 있는 천장식(遷葬式) 분묘이다.
1층은 높이 25m의 6개의 고린도식 석주가 꽃무늬 기둥머리를 얹고 있는데 중앙은
알 카즈네 입구에 해당하며 좌우에는 말을 타고 있는 제으스 신의 쌍둥이 아들인
카스토르(Castor)와 폴록스(Pollux)가 조각 되어 있다.
-----베두인과 낙타-----
제법 넓은 알 카즈네 마당엔 낙타와 좀 남루하게 보이는 베두인들이 뒤엉켜 여행객을
싫어 나르는 그리 바쁘지 않은 모습이 보였다.
오랜 전 여기 이곳에서 나바테인들의 삶의 가치와 세계를 은연히 떠올리면서 이 웅장하고
신비스러운 유적의 내면에 숨어 있는 진실과 풍기는 체취가 어쩐지 어울리지 않음을 느꼈다.
* * * * *
베드인족(Bedouin)은 요르단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이다.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사막일대에 사는 아랍계유목민을 일컬어 말하는 것인데
“베두인”이란 베두(bedu)라는 아랍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사막의 척박한 가운데서도 탁월한 능력과 극심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수천 년 동안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지키면서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유목민 생활을 고수하고 있는 민족이다.
베두인족에게는 고향이 따로 없다.
오아시스나 물을 찾아다니면서 낙타나 양을 키우면 그것이 생활의 전부고 일상이다.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전통방식에 익숙해져 오히려 문화적인 생활에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축을 집안으로 들이고 자신은 천막에서 사는 고착화 된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원시적 삶이 그들의 정신에서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베두인족은 호전적이어서 타종 족들에게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결코 무례하거나 타민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물을 얻어 마시려 청하면 친절히 텐트 안으로 안내하여 대접하는 융숭한 미덕이
전통적으로 있는데 이는 일정한 거처가 없이 돌아다니는 자신이 내일이라도 나그네가
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자와 아이들만 있는 텐트 안으로 무심코 들어갔다간 큰 봉변을 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여야 한다.
여기는 요르단이고 특히 무슬림의 법도에 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Outer Siq 를 나와 Street of Facades-----
아침 햇쌀에 선명히 비춰지는 알 카즈네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한참을 머물다
바깥협곡(Outer Siq)을 빠져나오니 하늘이 열리면서 좌우에 귀기 묘묘한 바위산들이 나타났다.
붉은 사암으로 형성된 웅장한 봉우리가 우측에 솟아있어 눈길이 갖는데 특히 또렷한
붉은 물결무늬 속에 바위마다 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호기심이 일면서 관심이 갔다.
곧이어 좌측에 로마시대의 유적이라 하는 원형극장이 발길을 멈추게 했다.
(계 속)
(3)요르단(Jordan)의 고대도시 페트라(Petra)(하)
-----로마 원형극장(The Theater)-----
페트라 원형극장은 약 2천년 전에 나바테아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전체적인 양식은 로마제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바위를 깎아 만든 기발한 독창성과 우직한
추진력은 나바테안인들의 독특한 건축기술을 마음껏 발휘된 작품이다.
붉은 사암의 바위를 통째로 잘라 깎아 만든 이 원형극장은 너비가 40m에 이르고
33층의 계단식 의자가 모두 자연바위 그대로여서 주변풍경과 어울려 웅장함을 더 하여 주었다.
본래는 3000명 정도의 좌석의 규모였으나 로마제국이 페트라를 점령한 이후 기원106년에
확대하여 암만의 노천극장보다 더 큰 규모의 8000명을 능히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원형극장은 각종 예술행사나 오락적 행사를 위한 기능보다는 하나의 제의적 기능을 갖춘
장소로 여겨지며 왕의 장례식은 물론 각종 회의 및 종교의식을 치룬 것으로 여겨진다.
왕들의 무덤으로 돌아가면서 바위색이 현란하다.
-----형형 색깔 바위의 물결무늬-----
-----왕들의 무덤(Royal Tomb)-----
로마 원형극장에서 바른쪽으로 돌아가면 제벨 알-쿱타(Jebel Al-Khubtha) 산에 색깔이 현란한
바위 절벽에 많은 무덤 군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무덤 군이 왕들의 무덤(Royal Tomb)이다.
이 무덤군은 페트라에서 알 카즈네와 더불어 가장 인상적인 유적으로 무덤자체의 경관은 물론
계단을 올라가서 돌아보는 페트라의 풍광은 정말 환상적이다.
무덤마다 이름과 주인이 다른데 각자 알아보자.
-----납골당 무덤(The Urn Tomb)-----
납골당 무덤(The Urn Tomb)은 계단을 올라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데 우선 거대한
외관이 눈을 사로잡는다.
바위를 파서 만든 전형적인 나바테아인 무덤으로 중앙 무덤의 크기만 18m x 20m로
왕실 무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건축 시기는 서기 70년으로 추정되며 마리초스(Malichos) 2세 또는 아레타스(Aretas) 4세를
위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납골당 무덤이라는 명칭은 박공벽 꼭대기 부분에서 발견된 거대한 유골단지 때문이다.
4개의 둥근 기둥이 벽면에 양각되어 있고 기둥 사이에 3개의 무덤이 만들어져 있는데
3개의 무덤 중에 중앙에 있는 것이 왕을 위한 것이며 돌덩이로 입구가 봉쇄된 것이 특징이다.
납골당 무덤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탓에 5세기 중반에는 비잔틴 성당으로
사용되었던 흔적이 남아있는데 중앙의 내부 방 뒷면 벽 왼쪽 코너에 그리스 명각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그 증거다.
납골당 무덤을 지나 위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실크 무덤(The Silk Tomb)
코린트 무덤(The Corinthian Tomb) 왕궁 무덤(The Palace Tomb)이 차례대로 나온다.
-----실크 무덤(The Silk Tomb)-----
실크 무덤(The Silk Tomb)은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어 세 개의 무덤 중에 볼거리가
가장 빈약하지만 붉은 핑크색 바위에 새겨진 핑크색 하얀색 노란색 물결치듯 선명한
바위 결이 나름대로 아름답다.
-----코린트 무덤(The Corinthian Tomb)-----
코린트 무덤(The Corinthian Tomb)은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나바테아 양식이 혼합된
무덤으로 기둥이 조각된 아래층은 나바테아 양식이고 위층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나바테아 왕의 무덤으로 만들어졌으나 박공벽이 훼손되면서 완성도는 떨어지는 편인데
무덤의 이름은 고대 그리스의 코린트의 수도이름에서 연유했으며 박공벽에 조각됐던
꽃들은 침식으로 인해 남아있지 않는다.
-----왕궁 무덤(The Palace Tomb)-----
왕궁 무덤(The Palace Tomb)은 로마나 그리스 왕궁의 외관조각과 흡사하여
“왕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절벽을 깎아 만든 무덤의 앞면이 마치 로마의 3층짜리
왕궁을 연상케 한다.
정면 조각에 있어서 페트라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무덤은 종교적인 목적보다는
무덤 자체의 조각이 훌륭한 것으로 수많은 기둥과 원주의 조각이 뛰어나다.
1층 상단의 박공벽은 삼각형태가 중앙에 조각되어 있으며 아치 형태가 가장자리에
조각되어있어 다른 무덤과 동일하게 내부는 커다란 방에 아무런 장식 없다.
-----섹스티우스 플로렌티누스 무덤(Sextius Florentinus Tomb)-----
페트라에서 유일하게 로마 제국의 통치자를 위해 만든 무덤이다.
입구 상단에 라틴어로 새겨진 명각을 통해 이곳의 주인이 아라비아를 통치했던
로마 제국의 섹스티우스 무덤임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아라비아의 행정 중심지였던
보스라(Bosra) 대신 페트라에 묻혔다.
무덤은 서기 126~13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열주대로(Colonnade Street)-----
열주대로(列柱大路)는 서기 106년에 나바테아인들이 도시 입구에 만든 길이다.
로마제국에서 건설한 도시 입구의 형태로 건설된 길인데 로마에서는 남북축으로
마르도 막시무스(Mardo Maximus)라 불리는 길을 만든 반면 이곳 페트라의 열주대로는
동서축으로 길이 만들어진 것이 다르다.
길의 넓이는 6m로 좌우에 석주 기둥 길을 따라 상점과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열주대로와 병행하여 오른쪽엔 와디 무사(Wadi Musa) 계곡이 흐르고 건너편엔
페트라 교회(Petra Church)가 있고 대로 왼쪽엔 위대한 사원(The Great Temple)이 있다.
-----위대한 사원(The Greet Temple)-----
기원전 1세기 후반에 건설된 사원으로 페트라에서 가장 큰 건축물중의 하나다.
사원의 규모는 7000m2 로 높이 18m 사원 외벽의 둘레가 40m 28m의 크기이다.
지진으로 파손되었다가 1993년 미국 브라운 대학(Brown Univirsity)팀에 의해 발굴되어
복원이 시작됐으나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한창 발굴이 진행 중인 이 위대한 사원은 열주대로와 계단이 연결되어 있어
사원에 해당하는 부분을 테메노스(Temenos) 즉 신성한 안마당이라 불린다.
테메노스 상단부분은 위대한 사원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입구에 붉은 색과 하얀색을
주로 사용한 스투코 장식이 조각된 4개의 거대한 기둥이 세워져 있다.
신성한 공간의 중앙에는 작은 원형극장 형태를 띤 테아트론(Theatron)이 있는데
직경 7m 크기로 30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회의실 역할을 한것 같다.
-----테메노스 문(Temenos Gate)-----
열주대로의 서쪽 끝에 세워진 이 테메노스 문은 아치문(Arched Gate)이라고도 하는데
이 문은 페트라의 상업지역과 신성한 지역을 구분하던 문이다.
2세기경에 만들어진 세 개의 아치를 갖고 있는 이 문은 로마 양식과 비슷하지만
꽃무늬 조각 장식등으로 나바테안 특유의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카스르 알 빈트(Qasr Al Bint)-----
“파라오 딸의 궁전“이라는 뜻을 가진 이 궁전은 페트라에서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건물로 서기 30년에 나바테아인 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신인 다샤라(Dashara)를 위해 만든 이 사원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의 딸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카스르 알 빈트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이름은 베두인들에 의해 붙여졌다고 한다.
규모는 4각형 구조로 높이는 23m에 이르고 대리석 계단이 사원의 입구에 깔려 있고
내부는 아티톤(Adyton)으로 불리는 중앙 성소에 신들의 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입구에는 13m 12m 크기에 높이 3m 규모의 야외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카스르 알 빈트 유적을 지나 바른쪽으로 와디무사 다리를 건너면 푸른 숲 그늘이 있고
넓은 마당에 텐트가 쳐진 레스토랑이 길을 가로 막는다.
-----베이슨 레스토랑(Basin Restaurant)-----
Basin Restaurant는 크라운 프라자 리조트(Crown plaza Resort)가
페트라 한가운데에서 운영하는 음식점이다.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격인 이 레스토랑은 이른 아침부터 햇볕이 따가운 불볕더위
속에서 시크와 알 카즈네를 비롯하여 여러 유적 관광을 하는 데에 육체적으로는
힘겨워지고 시간적으로는 점심시간이 맞물리는 지점이다.
-----Restaurant의 주변 풍경-----
보통 관광객들은 여기에서 맛있는 뷔페로 허기를 때우고 휴식을 취하고 나면
페트라 유적이 끝인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은 800개의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협곡 정상에 알 데이르(Al Deir) 일명
수도원(The Monastery)이라는 유명한 유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놓칠 수 있다.
안내판에 “Venturing beyond the point without a guide is dangerous” 라고 쓰여 있어
위험한 곳이 아닐까 하는 염려도 들었지만 해발 220m를 오르는데 힘든 것 외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알 데이르 까지는 보통 40분~1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여 체력에 한계가 올 가봐
그들이 말하는 “에어컨 택시” 당나귀를 타기로 했다.
그런데 편안하게 올라갈 줄로만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등에 싫은 하중이 버거워서인지
이 당나귀는 작구만 계단 낭떠러지 쪽으로 방향을 틀어 까마득한 협곡으로 굴을 것만 같은
가슴조림으로 십년감수(十年減壽)를 한것 같다.
-----Basin Restaurant에서 Al Deir 까지의 주위풍광-----
-----알 데이르(Al Deir) 일명 수도원(The Monastery)-----
알 데이르 까지 오르는 길이 힘들다고 해서 페트라 관광에서 빼놓는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알 카즈네와 흡사한 느낌을 받을 수 도 있으나 알 카즈네에 비해 웅장하고 정교한
알 데이르는 3세기경에 만들어진 나바테아인 들의 무덤이다.
다른 페트라 유적과 동일하게 바위를 깎아서 만든 건물이지만 높이 45m 넓이 50m
크기로 오보다스(Obodas)1세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수도원이라는 이름은 무덤 내부에서 발견된 십자가 형태모양의 조각 때문으로
비잔틴 시대때 교회로 사용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알 데이르의 특징이라면 외관 치장은 거의 없으나 단순함이 주는 완벽함을
느낄 수 있는 깔끔함과 안정감이 동시에 온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2단 구조로 설계되어 있어 헬레니즘 양식을 띠고 있고 단순한 아래층에
비해 복잡한 위층의 박공벽(牔栱壁)은 3차원 입체영상을 보는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Al Deir에서 바라 본 View Point-----
알 데이르 앞에는 광장이 있고 맞은편에는 베두인이 운영하는 카페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한동안을 휴식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카페 뒤쪽으로 이어진 산길은 전망대로 향하는 길인데 이곳에 오르면 멀리
와디 아라바(Wadi Araba)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영토까지 보인다.
체력적으로 많은 고통이 몰려왔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 하여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정상에서 바라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
(4)요르단의 와디 룸 (Wadi Rum)
와디 럼(Wadi Rum)은 중동에서 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뒤지지 않는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할 수 있는 요르단의 기묘(奇妙)한 사막이다.
붉은 모래와 붉은 괴암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환상적인 자연경관을 이루는 와디 룸은 암만에서
남쪽 320km 아카바에서는 북동쪽으로 35km 지점의 홍해 바다를 향해 치닫는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와디 럼(Wadi rum)은 달의 계곡이라는 뜻인데 와디(Wadi)란 아랍어로 비가 오는 겨울에는 강이
되지만 비가 내리지 않을 때에는 마른 계곡이나 땅이 되어 버린다는 의미다.
와디 럼(Wadi rum)은 끝없이 펼쳐지는 붉은 사막과 800m높이의 거대한 사암바위(Jebel)가 신비스럽게
조화를 이루면서 붉은 모래 사막과 언덕을 형성한다.
이 몽환적인 절경은 한 폭의 파노라마로 연출되어 신이 빚어 놓은 자연의 예술품으로 둔갑 하여
여행자의 눈을 황홀케 한다.
눈앞에 닦아오는 갖가지 형태의 바위산들은 서로 경쟁이나 하듯 절묘함을 뽐내고 강렬히 내려 쪼이는
햇볕은 다양하게 모래 빛깔을 변화 시켜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2km 정도의 폭과 19km 가량의 길이를 가진 와디 룸은 마치 핏빛을 연상케 하는 광활한 사막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펼쳐 놓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풍화작용(weathering)에 따라 급격한 융기와 침식(erosion)과
절리(joint)활동을 통하여 조성된 자연의 걸작품이다.
3억 년 전에 지각작용으로 형성되었다는 이 와디 럼은 연구결과 아래층에는 화강암층이 있고 위에
석회암 그리고 가장 상부에는 사암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745m의 럼 마운틴(Rum mountain)이며 평지로 보이는 곳도 해발
1000m 정도라고 한다.
특히 이 와디 룸은 다른 사막과는 달리 곳곳에 샘물이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이 거주했을 거라는
추측들이 사실로 증명되어 기원전 4 5백년경의 나바테아인(Nabataean) 들의 생활터전으로 알려졌다.
와디 룸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아라비아에서 활동한 실존인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rence)가 주인공으로 한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영국 영화 장면으로 인해서이다.
영화 줄거리는 수에즈 운하의 지배권을 놓고 영국과 터키가 맞선 상황에서 로렌스 중위가 아랍부족을
연합하여 터키 군을 무찌르는 내용인데 붉은 사막 와디 럼을 통하여 요르단 최남단의 아카바(Aqabah)
항구를 점령하는 영화의 무대가 너무 인상적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와디 럼은 과거에 아라비아 상인들의 교역로로도 많은 역할을 하였단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올라오는 카라반(caravan))들이 시리아(Syria)와 레바논(Lebanon) 그리고
팔레스타인(Palestine)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그들이 거쳐 가면서 남겨 놓은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선사시대에도 유목민들이 이곳에 살면서 암벽에 새겨놓은 알 수 없는 문자와 벽화는 이들의 확실한
삶의 흔적이고 자취이다.
계곡 안에는 위에서 떨어지는 물에 의해 패어진 바위로 만들어진 웅덩이 들이 있어 오랜 세월동안
흘러내린 물의 위력을 유추할 수도 있다.
와디 럼은 구약성서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가장 에돔(Edom)은 성경을 잘 나타내고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지역을 지날 때 왕이 대로로 지날 것을 에돔 왕에게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자
우회해서 요단 동쪽의 북부지역으로 도라서 갔는데 그들이 우회했던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 바로
와디 럼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여러 곳에 사람들이 살 수 있을 정도로 샘물이 솟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와디 럼에는 지금도 수백여 명의 베드인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염소 털로 짠 거대한 텐트를 치고 살면서 염소와 양떼를 돌보며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상점도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고대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수천 년에 걸친 아랍인들의 사막에서의 삶을
엿볼 수도 있다.
사막의 극한 상황에서 생존하는 베두인의 생활방식 중 구약시대의 관습이 그대로 이어져 오는데
그들은 구약의 나그네 접대법과 같이 외부 나그네들에게 매우 관대하며 손님 접대를 잘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자신들에게 위해를 할 경우는 아주 공격적으로 반격한다고 한다.
와디 룸은 700km2의방대한 면적과 사막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와디 룸 보호구역(Wadi Rum Protect Area)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워낙 광활한 지역이서 진짜 풍광의 매력을 느끼려면 차나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지정된 지프차를 타고 모래위에 자동차 바퀴 자옥의 길을 따라
질펀한 사막으로 진입 했다.
이곳에서의 관광은 지정된 차량으로 일정한 길을 따라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야 하는 규칙이 있다.
그러나 여유가 된다면 준비된 낙타를 타고 한 영화의 주인공처럼 사막을 누비며 한껏 멋을
부릴 수 있는 예외도 있다.
지프차에 오르니 모래바닥이 고르지 않아 많이 요동쳤지만 오랫동안 아라비아 상인들의 교역로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흔적을 더듬어 붉은 모래 먼지를 날리며 복판으로 달렸다.
스크린이 아닌 와디 룸 리얼 파노라마가 사방으로 감싸 않아 단번에 여행자의 마음을 압도 해
환성이 터졌다.
우선 탁 트인 시야가 마음을 환 하게 살아 잡았고 붉은 모래 속에 여기저기 장대하게 불끈 솟은 교묘한
바위산이 짙푸른 하늘과 함께 일체의 수식이 개입할 수 없는 무아의 경지로 이끌었다.
모래바람 이외는 움직임이 전혀 없는 정지된 세계가 황량함을 암시하며 회오리처럼 정신을
몽롱하게도 했다.
물질문명 속에서 누릴 수 없었던 영혼의 갈망이 텅 빈 공간을 메워주듯 영원한 기억 속에
소중한 보물을 만들어 안기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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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레바논(Lebanon)의 안자르(Anjar)
안자르(Anjar)는 8세기경 우마야드(Umayyads) 왕조의 칼리프(Caliph) 알 왈리드(Al Walid)가
건설한 도시이다.
안티레바논산맥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도시는 예로부터 다마스쿠스와 베이루트를 잇는 대상로의
중계지로서 우마야드(Umayyad) 왕조 지배시대의 도시계획과 정돈된 배치의 고대궁전 도시를
유일무이하게 잘 보여주고 있는 유적(遺蹟)이다.
레바논의 다른 역사 유적들과는 달리 비교적 근대문명의 영향을 받아 놀랍도록 창조적 도시로 설계된
이 안자르는 완성되지 못한 채 일부만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알 왈리드의 아들인 칼리프 이브라힘(Ibrahim)이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도시의 이름은 아랍어로 “바위에서 샘솟는 물”이라는 의미의 “아인 알자르(Ayn aljaar)에서 인용한 것으로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을 가리킨다고 하여 지은 이름인데 실지로 근처에서 시냇물을 홈통을 설치해
사용했다고 한다.
건축양식에는 토착 양식과 외부에서 들여 온 양식을 혼합시켜 성벽의 석조 세공기술을 완성 시켰는데
여기에서 그리스. 로마. 초기기독교 건물이 지닌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옛 건축물의 자재를 재활용하여 건축양식에 통합해 조립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시는 이슬람 시대 초기에 건설되었으므로 비잔틴 문화의 원형에서 이슬람 예술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변천사를 보여주고 있어 전체적인 구조물을 통해서 당시의 발달한 기술과 장식등을 엿볼 수 있다.
이 고대 도시의 유적지는 1940년대 말에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동서 길이 350m 남북 길이 385m의 직사각형의 형태로 된 이 도시는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벽 중앙에는 문이 있고 40기의 둥근 탑을 설치하여 요새로서의 도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성 안은 직각으로 교차하는 2개의 대로를 내어 4구역으로 나누었고 각 구획은 다시 직각으로 교차하는
선으로 나누었는데 남북으로 뻗은 대로를 “카르도(Cardo maximus)”라 하고 동서로 뻗은 대로를
“데쿠마누스(Decumanus maximus)”라고 한다.
공공건물과 사유건물을 엄격한 계획에 따라 배치해 주요궁전과 모스크는 남동쪽에 부차적인 궁전과
공중목욕탕은 북동쪽과 북서쪽에 두었으며 집들이 많이 들어찬 남서쪽은 도로 교차지점에 직각
배치하였다.
놀랍도록 잘 짜인 도시의 공간 구조는 로마군대의 야영지나 식민 도시의 구조보다는 왕실거주지의
구조를 연상케 하지만 로마시대의 장식이나 건축요소를 가미해 비교할 때 현대적 적응성은 놀라우리만치
주목할 만하다.
우마야드 왕조가 다른 문화의 건축술 전통에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로는 공중목욕탕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로마 공중목욕탕의 전통적인 3가지 특징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목욕탕에 냉탕과 온탕 그리고 열탕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는 것과 또 목욕할 때에 옷을 갈아입고 목욕하고
나서 휴식을 취하는 의복 보관실(휴게실)이 비교적 크게 만들어졌다는 것과 그리고 단순한 휴식공간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사교의 장소이기도 했다는 것이 특징인 것이다.
우마야드(Umayyad)는 이슬람(회교)을 이어받은 최초의 왕조이며 인더스 계곡으로부터 남부
스페인 이집트까지 뻗어 있었던 이슬람 제국을 건설한 아랍의 정복 왕조다.
100년간 번영을 누렸으나 아바시드(Abbasids)가 우마야드 제국의 쇠퇴를 틈타 안자르에서 2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서 우마야드를 격파시킴으로서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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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레바논(Lebanon)의 바알베크((Baal Bek)
바알베크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동북쪽 약 65km 떨어져 있는 고대도시다.
바알베크가 위치한 베카계곡(Bekaa Valley)은 레바논 산맥과 안티레바논 산맥 사이에 있는
고원 지대로 북쪽에는 오론테스강(Orotes River)과 남쪽에는 리타니강(Litani River)이 거쳐
흘러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한 풍요로운 곡창지대다.
남북길이는 120km 동서길이는 15km인 베카계곡은 넓은 평원지대로 해발 1000m 이상 되는
산맥 능선까지 백향목과 전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고 농산물로는 밀과 보리. 감자가 주로
수확되고 과일로는 포도와 살구를 재배한다.
레바논의 대표적인 풍요로운 농업지대로 손꼽히는 이곳은 계곡을 중심으로 산지에는
기독교계인 마론(Maronites)파와 평지에는 이슬람게인 드루즈(Druze)파가 살고 있다.
흰 눈을 그림같이 머리에 인 안티레바논 산맥의 베카계곡의 평원을 차로 달리면서
여행자는 감각적으로 이곳은 물이 흔하고 토지가 기름질것이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청명한 하늘과 맑은 평원의 풍요로움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모두 버스에서 내려 길옆 가게에 들러 탐스런 과일을 한 꾸러미씩 사 가지고
마을주위를 거닐며 낫선 시골정취를 항껏 체감했다.
정말 이곳은 복 받은 땅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인 것만 같았다.
-----흰 눈을 머리에 인 안티레바논산맥-----
-----눈 덮인 안티레바논산맥과 농작물을 경작하는 마을 사람들-----
-----눈 덮인 안티레바논산맥과 농작물을 수확하는 마을 사람들-----
-----눈 덮인 안티레바논산맥과 바알베크 유적-----
-----눈 덮인 안티레바논산맥과 바알베크 유적-----
바알베크(Baal Bek)신전은 베카계곡 기름진 옥토 도시마을에 있었다.
바알(Baal)은 성서에서 유대인들이 유대교의 유일신 야훼대신 섬기는 우상이지만
페니키아 사람들은 여기가 우주의 중심이고 최고의 태양신인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던 고대 종교의 중심지였다.
페니키아 시대에는 다산의 3신인 샤마쉬(Shamash) 안타(Anta) 알린(Alyn)을 숭배하였던
지역이었는데 기원전 64년 로마제국의 영토가 된 후 토착신앙과 로마종교가 조화롭게 결합된
포용력을 보여주는 로마의 관용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부서지고 쓸어져 널브러진 돌덩이들이 무질서하게 굴러 있었지만 고대도시의 화려한 영광은
작은 꽃무늬 조각에서도 큰 의미를 찾을 수 있기에 관심을 갖이고 유적을 둘러보기로 했다.
-----바알베크 신전 정문에 있는 안내표지판-----
----- 바알베크 신전 정문-----
-----바알베크 신전 그랜드 코트(Grand court)-----
-----바알베크 신전 그랜드 코트(Grand court)-----
-----바알베크 신전 그랜드 코트(Grand court)-----
로마가 이곳을 점령했을 때의 도시 이름은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라고 불리였다.
헬리오폴리스는 “태양의 도시”라는 뜻인데 헬레니즘시대 때부터 그리스의 태양신과
동일시되어 이집트에 있는 같은 지명을 인용한 것이다.
이는 기원전 4세기경에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왕조의 지배를 받은데 서
기인한 것으로 농업이 발달한 지역에 농경과 관련된 종교가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바알베크(Baal Bek)라는 명칭 역시 바알(Baal)은 “페니키아의 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알베크에 거대한 로마신전 건축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다.
바알베크에 남아 있는 3개의 신전 중 가장 규모가 큰 규모의 유피테르(영어로는 주피터) 신전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직접 설계하여 네로 황제 때인 60년에 완성되었다.
유피테르 신전의 크기는 측면 88m 정면 48m로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큰데 대부분
지진으로 무너지고 파괴되어 넓은 터와 6개의 거대한 기둥만이 남아 있다.
이 기둥들은 이집트 아스완(Aswan)에서 채석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둥의 높이는 22m가
넘고 지름은 2.4m에 이른다고 하는데 원래는 54개의 기둥이 있었으며 높이도 40m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트라야누스(Trajanus)의 통치 때 건설이 시작된 그랜드 코트(Grand Court)에는 페니키아
토착 종교 건물과 2개의 제단이 모셔져 있고 좌우에는 연못이 있다.
토착신인 아버지 어머니 아들을 상징하는 하다드(Hadad=하늘과 폭풍의 신)와.
아타르카티스(Atargatis=물과 풍요의 신)와. 알리얀(Aliyan=식물의 정령 신) 3신이
안치되어 있다
.
-----바알베크 신전 그랜드 코트(Grand court)-----
-----바알베크 신전 그랜드 코트(Grand court)-----
-----바알베크 신전 그랜드 코트(Grand court)-----
-----바알베크 신전 그랜드 코트(Grand court)-----
-----무너진 바알베크 신전의 돌 조각-----
-----무너진 바알베크 신전의 돌 조각----
-----무너진 바알베크 신전의 돌 조각-----
-----무너진 바알베크 신전의 돌 조각-----
-----바알베크 신전의 웅장한 남은 6개의 돌기둥-----
-----바알베크 신전의 웅장한 남은 6개의 돌 기둥-----
바쿠스(Bacchus) 신전
-----보전이 잘된 바쿠스 신전-----
유피테르 신전보다 조금 늦은 2세기경에 건립된 바쿠스 신전은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신전으로 지붕만 파괴되고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다.
신전 안에는 시리아의 천등의 신 하다드와 베누스에 견불 수 있는 자연의 여신 아타르카티스와
식물의 영혼의 로마의신 메리쿠리우스 등 3신이 모셔져 있는데 원래는 순수하게 농업에 관한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그 후 인격신을 숭배하는 미신적 측면이 발전하여 신을 모시는 제사도 주신제(酒神祭)의
모습으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바쿠스 신전 역시 코린트 양식으로 지어져 앞뒤로 8개씩 양옆으로 15개씩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데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사원을 장식하고 있는 상징물들은 농업에 관련된 3신에게 내세구원을 믿던 미신적 의식이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도시 벽의 유적과 주민들의 집에서 출토된 로마식 모자이크와 옛날 재료를 써서
복원한 모스크의 폐허(廢墟) 등이 있었으며 아랍제국의 요새 유적 등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박쿠스 신전 내부-----
-----박쿠스 신전의 돌 기둥-----
-----박쿠스 신전에 있는 디오니소스(Dionysos)-----
-----박쿠스 신전의 천정 돌무늬-----
-----박쿠스 신전의 천정 돌무늬-----
-----박쿠스 신전의 내부모습-----
-----뱀과 크레오파트라-----
-----도시벽의 유적-----
비너스 신전(Templa of The Venus)
-----파괴된 비너스 신전-----
-----파괴된 비너스신전의 기둥-----
-----파괴된 비너스 신전의 기둥-----
유피테르와 디오니소스 신전 남동쪽에 3세기경에 지어진 비너스(Venus) 신전이 있다.
지성소 앞에는 4개의 기둥이 세워진 현관 량이 있고 6개의 열주가 신전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외관은 로마의 바로크 양식을 연상 시켰다.
시내와 접경하고 있는 이 비너스신전은 쥬피터와 바쿠스신전에 비해 보존 상태가 많이 떨어졌고
규모도 미치지 못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비너스 신전은 바알베크 유적 입구에 자리 잡고 있어 유적 일부가 도로에 잠식당하는 등 훼손과
파괴로 원형은 찾아볼 수 없었고 출입도 금지되어 있었다.
-----시내에서 바라 본 바알베크와 안티레바논 산맥-----
바알베크는 고대 세계의 가장 유명한 성소 중의 한 곳으로서 200여 년 동안 거대 건축물을
계속해서 건설해 나간 인상 깊은 제정 로마 시대의 건축물이다.
1994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7)레바논(Lebanon)의 비블로스(Byblos)
비블로스는 베이루트에서 북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지중해 연안 항구
도시다.
수많은 인류문화 역사의 유적이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이 도시는 페니키아 문명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여 수천 년 동안 지중해 지역의
역사를 긴밀하게 맺어주는 곳이다.
비블로스라는 이름은 파피루스를 뜻하는 그리스어로 비블로스를 통해 파피루스를 에게해로
수출되었기 때문인데 오늘날 성경 즉 바이불(Bible)의 어원도 파피루스로 만든 책을 뜻하는
비블로스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비블로스는 BC 4500년경부터 도시가 형성되었고 BC 1200년경에는 페니키아의
3대 항구(시돈.티레)도시로 성장하였는데 교역에 능한 페니키아인들은 레바논에서 나는
백향목과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기름을 수출하고 이집트 산 파피루스를 사들여 그리스 등지에
파는 중계무역을 한 상업 기지였다.
그리고 페니키아인들은 비블로스를 통하여 실크염색에 없어서는 안 되는 고급 자색 염료를 그리스
등으로 수출을 하였는데 그 당시 자색(紫色) 염료를 “포에니(Poeni)”라고 부르던 그리스인으로부터
자연스레 “페니키아(Phoenicia)"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페니키아인들은 실크 옷감염색에 없어서는 안 되는 값비싼 보랏빛 염료를 생산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니키아 문명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유적지에 들어서면 십자군 점령기에 축조된 거대한 성채가
버티고 있었는데 여기에선 유적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푸른 지중해가 시원스럽게 보였다.
비블로스는 도시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로마시대의 열주도로와
원형극장 등 십자군 시대 성벽까지 다양한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굴된 곳이다.
청동기시대 중반 무렵의 9개 왕릉은 당시의 문명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을 말해주었는데 가장 관심을
끌었던 유물은 프랑스의 이집트학자 “피에르 몽테(Pierre Montet)가 아히람 왕(King Ahiram)의 묘
석관에서 출토된 페니키아인의 문자가 새겨진 비문이었다.
기원전 11세기경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석관은 알파벳의 기원이 되는 페니키아 문자 22개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가장 오래전의 것이라고 한다.
페니키아는 본래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楔形文字)를 사용했으나 기원전 1500년경에 22개의
자모로 이루어진 고유한 문자 체계를 발명했으며 이곳 비블로스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거주지도 계획을 세워 조성하는 착상을 처음해난 곳도 비블로스라고 한다.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 도시는 세계의 도시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었는데 중앙부의
좁고 굽은 길을 따라 2차선이 샛길로 갈라지고 가옥들 사이사이로 불규칙하게 작은 도로망을 갖추고 있다.
기원전 2800년경에는 풍성한 제물을 바치던 도시의 여신인 비블로스의 여인(Lady of Byblos)인
“바알라트 게발(Baalat Gebal)"을 위해 거대한 사원이 지어졌고 이어 남신(男神)을 위한 사원도
세워 졌다고 한다.
비블로스는 그리스시대 훨씬 이전부터 자신의 왕과 문화를 가진 무역이 번성한 강력한
독립 도시(국가)로 유지해 왔고 로마에 점령당한 후에도 큰 사원들과 공공건물들이 계속
축조되었으며 거리에 가로수가 심어지는 등 도시미관이 균형 있게 조성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잔틴과 아랍시대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자취를 찾아 볼 수가 없다.
프랑스의 고고학자 피에르 몽테에 이어 “모리스 듀낭(Morris Dunand)”은 50년 동안 평생에 걸쳐
비블로스 발굴과 연구에 전념을 다해 7000년 전 신석기시대까지 소급되는 역사를 밝혀 지구상에서
유례없는 가장 오래된 항구도시라는 것을 입증했다.
12세기경에는 비블로스가 십자군에 점령되어 로마 사원과 공공건물의 건축에 쓰였던 거대한
석재와 화강암 기둥들을 가져가 그들의 성(城)과 호(壕)를 축조하는데 사용 되였다고 한다.
그래도 세계에서 유례없는 고고학적 유적을 발굴함으로 지금은 그때에 지어진 십자군의
성과 페니키아 왕족의 공동묘지 그리고 로마식 원형 극장과 오벨리스크 신전이라 하는
바알신전 터 등을 볼 수 있다.
-----십자군 성 입구-----
-----십자군 돌 성벽-----
-----십자군 성채에서 바라 본 비블로스 유적과 지중해-----
-----비부로스 박물관 내부-----
-----아히람 왕의 석관 사진-----
(실물은 베이루트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었음)
페니키아의 도시국가 비블로스 아히람왕의 무덤 석관에서 기원전 11세기에 22개의 글자로
이뤄진 알파벳이 발견된다.
비블로스에서 나온 기원전 11세기경 아히람왕의 석관 비문과 기원전 10세기경의
레바논 접시 등에서 틀잡힌 페니키아 알파벳 원형이 발견된것은 기원전 11~18세기
그리스로 전파되면서 알파벳의 틀이 잡힌다.
페니키아 문자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유물은 1923년 비블로스에서 발굴된 석관이다.
이 석관은 기원전 11세기 경 이 지역을 다스렸던 아히람 왕의 것으로서, 석관의
뚜껑에는 도굴을 막기 위한 저주의 글이 페니키아 문자로 쓰여 있다.
-----알파벧 글자의 기원이 된 문자-----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
-----십자군 성채에서 바라 본 지중해-----
-----비불로스 유적-----
-----비불로스 유적-----
-----비불로스 유적-----
-----파괴된 거대한 돌 조각-----
-----파괴된 거대한 돌 조각-----
-----발굴된 석관-----
-----발굴된 석관-----
-----원형국장 무대 받침대 조각-----
-----원형국장 무대 받침대 조각-----
-----로마시대 원형극장-----
-----비블로스 유적지에서 맞난 천진한 여학생들-----
-----비블로스 항구-----
-----비블로스 항구-----
-----비블로스 항구-----
-----비블로스 항구-----
-----레바논의 백향목(柏香木.Cedar)-----
백향목은 레바논을 대표하고 레바논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이유인즉 위엄(majesty)과 힘(power)과 영화(glory) 그리고 영원함(eternity)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향목 문장이 레바논 국기 한가운데 줄기와 뿌리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특공대의
베레모와 항공기에도 그려져 있다.
또한 레바논은 세계1차 대전이 끝날 무렵 영국과 프랑스가 마음대로 국경선을 그어 인종
및 종교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을 때 국민들은 백향목이 그려진 국기를 집집마다 게양하고
레바논의 정체성을 찾아 혼란을 수습했다.
나라의 상징목인 삼나무(성경에 등장하는 백향목)는 최고급 목재로 유명하여 해충에 강하고
방부력(防腐力)도 있어서 성전이나 궁전 등 주요 건축물의 건축 자재로 많이 쓰였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올 때 포도와 올리브를 함께 들고 나왔다고 전해지는
신성한 나무다.
레바논이 원산이며 국목(國木)이기도 한 이 나무는 과거에는 레바논의 산에 많이 산재해
있었다고 하는데 수세기에 걸친 남벌로 지금은 몇몇 제한된 지역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백향목은 “히말라야 삼목“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고산지대에서도 잘 자라는 특히 북풍설한에
고난을 잘 견디며 인내의 힘이 강한 수종(樹種)이다.
예부터 레바논의 백향목은 유명하여 이집트와 앗수르와 팔레스타인으로 수출되었다.
다윗과 솔로몬은 성전과 왕궁건축을 위해 레바논의 백향목을 해로로 욥바를 통해 수입했으며
선박건조용으로도 이용되었다.
특히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두로왕 히람과 상거래의 계약을 맺고 백향목을
벌채해 수입했고 대가로 곡물과 기름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집트인들은 백향목 나무의 송진을 미이라를 만들 때 사용했고 나무 관에는 백향목
톱밥을 넣었으며 탈무드에 의하면 히브리 사람들은 올리브 동산에서 백향목을 태우면서
새해를 맞았다고 한다.
백향목은 종종 힘과 영광과 호화로움의 상징으로 나타낸다고 한다.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라고 표현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상징하였고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여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고
기록되어 의인의 성장을 상징하였다.
-----비불로스 항을 통하여 수출되었던 백향목-----
(8)레바논(Lebanon)의 티레(Tyre) 유적
티레는 고대 페니키아의 주도(主都)로 카르타고(Carthago)를 비롯하여 중동 각국과의
해상무역을 통하여 경제적인 번영과 문화의 꽃을 피웠던 역사적인 무역 상업도시다.
위치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226km. 레바논의 시돈 항에서는 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어 이스라엘 국경에서는 불과 20km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티레 항구는 처음에는 팔레스타인 본토와 맞은 편 섬에 티레 성읍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랜 세월동안 토사가 쌓여 육지와 섬이 연결되어 지금과 같은 반도형태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는 옛 항구의 남쪽에 있는 방파제가 수면 밑 15m 지점에서 발견됨으로서
추정으로만 여겼던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BC 10세기경 히람 왕(솔로몬 왕과 동시대)에 의하여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방파제의 길이는 897m이고 너비가 9.8m 로 이 방파제를 통하여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삼아 부를 축적하였던 것이다.
티레 왕인 히람(Hiram) 왕은 백향목과 함께 목수와 석공을 보내 다윗이 왕궁을 짓는데
협조했으며 솔로몬 왕 때에도 벌채한 백향목을 뗏목으로 만들어 자중해 남쪽에 있는
욥바로 보내 성전 건축을 도왔다.
이렇게 해상무역이 활발할 때 세라큐레스란 사람은 자기가 기르던 개의 입에서 붉은
자주색물감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유명해 졌는데 당시의 자주색 물감은 귀족들의
실크 옷감에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귀한염료로 사용 되였다고 한다.
당시의 자주색 물감의 값이 금값과도 같았다고 하니 성경에서 특별히 루디아를
두아빌라 성(터키)에서 자주색장사를 했다고 기록한 이유를 알 것 같다.
티레는 한동안 경제적인 풍요로움 속에 주변 지중해의 많은 섬들을 식민지로 거느리고
부유한 왕국으로 떠올랐으나 그러한 번영은 열강의 야욕을 부추기는 촉매체가 되어
끊임없는 침입과 찬탈의 목표가 되었다.
주변 나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지중해를 중심한 강대국들의 교역의 요충지였던
티레 항도 “부귀영화가 꿈같이 물속에 잠기고 그물 말리는 한적한 어촌이 되리라“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대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고 유린당하게 된다.
바벨론 다음엔 페르시아의 침입을 겪어야 했고 그 이후엔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제국
등이 이 도시에 새로운 정복자로 등장한다.
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은 이 전략적인 해변의 도시를 점령하기로 하고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쳤지만 페르시아에 적대감을 갖고 있었던 티레인들은 새로운 지배자
알렉산더를 환영 면서도 성스런 도시에 들어오는 것은 허락하지 안했다.
7개월간 티레를 포위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알렉산더는 섬에 이르는 방죽을 건설하여
길을 트고 제방 옆의 해협을 봉쇄하는 최후 공격에 결국 티레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치열한 싸움에서 섬에 거주하는 6천명의 인명이 살육 당하고 역사적인 격전지였던
이곳은 처음에는 그리스의 지배가 기원전 64년에는 로마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B.C 64년 새로운 정복자가 된 로마인들은 티레를 그들의 제국에
편입시키고 개선문과 거대한 히포드럼(전차 경기장)을 건설하였다.
도시에는 로마인들의 황제를 위한 길을 닦았고 사우나를 할 수 있는 목욕탕 시설을
했으며 길 좌우로는 비잔틴 시대의 유적과 코린트 양식의 문양이 새겨진 기둥
조형물들의 잔해가 누워 있는 걸로 보아 화려한 도시를 건설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티레 성의 동편에서 서편으로 이어지는 로마 가도(街道)가 뻗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양 옆으로 네크로폴리스(Necropolis)가 길게 형성되어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죽음의 도시인 것이다.
이 공동묘지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네크로폴리스로 로마와 비잔틴
시대 (A.D 2세기부터 7세기 까지)의 유적인데 당시 성문 앞에 공동묘지를 조성하는
것은 로마의 관습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거창한 석관에는 고인의 이름과 직함을 새겨 놓기도 하고
고급 대리석으로 된 석관들도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석관은 그리스에서
직수입해 온 것으로 추정한다.
-----네크로폴리스가 끝나는 곳에 20m 높이의 아치로 된 개선문-----
(로마황제 세브러스 셉티무스를 기리기 위해 B.C 2세기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 고대 로마의 거대한 전차경기장 히포드럼(Hippodrone)-----
(길이가 480m이고 폭이 160m인 히포드럼은 3만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잘 보전된 전차경기장이라고 한다.
경기장 양편에 있는 오벨리스크와 커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돌 대야를 7바퀴 도는 경주가
벌어졌다고 한다.
거석들로 쌓아 올려진 관중석의 일부가 그대로 남아있고 요즘에도 국제적인
페스티발 음악회가 열리는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진--------
(9)이스라엘의 예루살렘(Jerusalem)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평화와 황금의 도시 예루살렘은 지중해와 사해사이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도시이다.
해발 800m의 산악지대에 위치한 이 도시는 역사가 3000년 전으로 올라가 기원전
1000년경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세운이래. 수많은 역경 속에서 오늘날 까지
세계역사 중심에서 하나의 신앙만을 고집하고 꿋꿋하게 이어오고 있다.
언뜻 보아 보잘것없어 보이는 유다광야 불모의 언덕에 이곳을 수도로 정한 이후 수많은
침략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주인이 바뀌고 주민은 쫓겨나는 등 질곡의 역사를 거쳐 온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성스러운 신앙으로서 충만 되어 은혜가 넘치고
평화로움이 가득하여야 할 이 도시는 궁극적인 최후의 주도권 싸움에 살기가 넘치고
피의 참혹한 살육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앙과 평화의 원천이 되어야 할 이 예루살렘이 무려 50차례의 포위 공격과 10차례의
심한 파괴를 당하면서 지구상의 어떤 도시보다 많은 전쟁과 슬픔. 사랑과 증오. 그리고
영광과 오욕이 교차된 역사를 지닌 도시는 별로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 전경-----
예루살렘은 유대교뿐만 아니라 인류 3대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의 중심지이기도
한데 전 세계 인구의 약 절반가량인 30억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신앙적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검은 모자와 검은 두루마기 차림에 검은 수염을 달고 거리를 활보하는 정통파 유대인들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모습의 기독교 종파의 수도사들도 있고 그리고 하얀 통치마 같은
옷을 입고 머리에 터번을 두른 무슬림들이 교차하는 곳이다.
유대인의 안식일(토요일) 거리엔 자동차가 다니지 않으며 기독교의 주일(일요일)엔
교회의 종탑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하루 다섯 번씩 기도하는 이슬람 사원의
확성기에서 나오는 아잔(기도)소리는 묘한 불협화음 속에서 도시 하늘을 뒤덮곤 한다.
예루살렘은 인구 70만 명이 살아가는 대도시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며 서로 다른 신앙과 색깔로 제각각 분주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때때로 욕심과 만용으로 배타적 감정과 보복의 법칙에 따라 죽고
죽이는 피 흘림이 자행되는 곳이다.
언제 어디서 보복과 폭력이 발생할지 아무도 모르는 곳이지만 그렇게도 대조적인 삶의
모습 에서도 한결같이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호흡과 요동치는 고동소리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간 기독교의 발생지이자 이슬람교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아브라함의 한 자손으로 끝없는 종교의 갈등과
민족분쟁의 중심지가 되는 도시이다.
그래서 수많은 방문객과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아와 울고 웃으며 발길이 이어지는
흥미로운 도시이다.
예루살렘 성 (구 시가=Old city)
-----예루살렘성 약도-----
오늘날의 예루살렘의 구시가(Old City)를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성벽은 오스만
터키제국의 슐레이만 황제가 예루살렘을 견고한 요새로 만들기 위해 1537년부터
1542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다.
둘레는 4km 높이는 12m로 모두 34개의 탑이 있는 대형 축조물로 4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과 곳곳에 24개의 망루가 세워져 있고 성을 드나들 수 있는 문은 모두8개로 문마다
각각 특색을 살려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예루살렘성은 3000년 전에 다윗이 세운 성에서부터 솔로몬성. 그리고 제1성전과
제2성전의 모습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술레이만이 재건한 성의 모습까지 여러
차례 그 위치와 크기가 변화되어 온 것이다.
전기에 의하면 지금의 성이 완성되었을 때 이 대역사를 지휘한 2명의 건축가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예루살렘 성벽 건축과 관련된 모든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였다고 한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이만한 장대한 성을 축조할 수 없는 유일한 성으로 남게 하고 싶은
술레이만 대제의 과욕 때문이었다고 한다.
성의 대표적인 욥바문(Jaffa Gate) 안쪽 한편에 오스만투르크 시대의 이름 없는 두 개의
무덤이 바로 그 건축가들의 묘인데 재능을 맘껏 발휘하고도 비운을 맞은 것이다.
아름다운 성벽을 축조하는 대역사(大役事)도 중요하지만 이 성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여행자에겐 더 크게 다가왔다.
-----다메섹 문앞 풍경-----
-----다메섹 문(Damascus Gate)-----
다메섹 문은 동쪽의 헤롯문과 서쪽의 새문 중앙에 있는 문으로 문들 가운데 가장 크고
인상적인 문으로 알려져 있다.
다메섹 문이란 이름은 세겜을 거쳐 다메섹 도시로 가는 길이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고 히브리어로는 세겜문. 아랍어로는 바브 엘 아무드(원주기둥 성문)라고 부른다.
로마시대에 이 다메섹 문을 중심으로 두 개의 길이 뻗어 나갔는데 그 하나가 성전 서쪽 벽
앞으로 지나갔고 다른 하나는 시온 문이 서쪽으로 좀 옮겨졌지만 시온 문으로 통했다.
이 문은 적의 갑작스런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 중각을 이루고 있고 원래는 쇠가 덮여
있는 나무로 된 삼중의 문이었으나 현재는 한 쌍의 문만 남아 있다.
문 위에는 1536년에서 1538년 사이에 이 문을 세운 술레이만 대제를 기념하는 문구가
아랍어로 쓰여 있다.
문 밑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서쪽으로는 십자군 시대의 교회를 볼 수 있고 동쪽으로는
성안으로 통하던 옛 문이 있는데 들어가 볼 수도 있다.
-----아랍 사람들의 상가-----
-----아랍사람들의 상가-----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말 혼잡스러워 여행자를 놀라게 한다.
넓지 않은 도로엔 양쪽으로 가게가 빼곡히 들어서 있고 지나는 사람들은 몸이 부딪칠
정도로 복잡하여 꼭 우리나라의 남대문 시장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짤따란 성경지식에 예루살렘의 거룩한 신령스런 예수님의 흔적을 잔뜩 머리에 그리며
예루살렘의 구시가(The old city of Jerusalem)를 찾은 여행자로서는 기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실망 그 자체였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예루살렘 성지가 어떻게 이렇게 도떼기시장 모양으로 복잡하고
요란스런 곳으로 변해 버린단 말인가?
이곳이 기독교인 주거지역이 아니고 이슬람교 지역이여서 성역화 하기엔 좀 무리가 따르고
교리갈등이 심화 되어 그렇게 상황을 만들지 안했나 싶었지만 이건 너무 한 것 같았다.
성 안에는 아르메니아 주거지역(Armenian Quarter). 기독교인 주거지역(Christian Quarter)
유대교 주거지역(Jewish Quarter). 이슬람교 주거지역(Muslim Quarter)으로 나뉘어 제각기의
율례대로 생활방식과 믿음이 다른 사람들이 공존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
그럼 여기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의 앙숙적(怏宿的) 관계를 알아보자.
이들 3종교는 똑같이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며 디그리스 강이 있는 중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아브라함”이라는 동일한 조상을 가지고 있다.
다 같이 하느님(여호와. 야훼. 알라)을 섬기며 구약이라는 거의 동일한 경전을 사용하고
있는데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에서 동일하게
존경하며 추앙하는 조상이다.
열국의 아비라는 뜻을 가진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지시대로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본토와
친척을 떠나 이주하게 되는데 하느님으로부터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는 약속을
받고 가나안에 정착생활을 하게 된다.
“네 씨로 크게 창대하게 하겠다” 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자신과 아내 사라의
나이가 많아지자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에 아내 사라의 종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
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가 약속의 지녀가 아니라고 하면서 12년이 지난 100세가 되어서야
본처의 사라로부터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녀인 “이삭”의 정상적인 양육을 위하여 “이스마엘“에게 집을 떠나도록
축복해 주었는데 후에 그가 바로 터키인과 아랍인의 조상이 된다.
이스마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아브라함의 분명한 장자이며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언약은 당연히 자신이 유업으로 상속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슬람교가 아브라함의 정통이며 자신들이 바로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이다.
본처의 소생인 이삭의 주장은 이와 정반대의 설명이다.
하느님은 본처의 소생인 이삭을 약속의 자녀로 삼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약속과 유업은 당연히 이삭의 후손들이 누려야 함을 주장한다.
선민의식을 갖고 있는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이삭은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고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꾼 야곱은 4아내를 통해
12명의 자녀를 얻게 되는데 이들이 이스라엘 12지파가 되며 이중 유대 지파는 4번째 아들인 것이다)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동일하게 하느님을 섬기며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야(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독교는 예수를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메시야 즉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그리스도로 받아드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 및 재림을 믿으며 새로운
언약인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교는 “예수는 하느님의 신성을 모독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십자가
처형을 받아 마땅한 자”로 여기며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 역시 이단 종교를 퍼트리는
용서 할 수 없는 이단의 괴수들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으며 탈무드를 자신의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고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은 그들에게는 읽어서는 안 되는 금지의 책인 것이다.
이슬람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는 필요치 않으며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라
아브라함. 모세. 다윗. 그리고 마지막 예언자인 무하마드와 동일한 5대 성사에 불과하며
오히려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가 계시로 받은 쿨란에 더 큰 비중을 두고
경전으로 삼고 있다.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며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 3종교는 같은 하느님을 섬기면서도 하느님의 약속하신 메시야가 누구인가
하는 메시야 관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나는 것이다.
동일한 유일신을 섬기고 하느님의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리며 그 메시야를 믿는
믿음에서는 동일하나 메시야 관에서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는 이슬람의 말대로 5대 성사중의 하나인 인간인가?
유대인들의 말대로 하느님을 모독한 십자가 처형이 마땅한 극악무도한 죄인인가?
아니면 기독교인들이 믿는 대로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 메시야인가?
이것이 세종교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차이점이라 하겠다.
한 자손의 사람들이 경전해석에 휘말려 살벌하게 반목하고 피 흘리며 투쟁하고 싸우면서
함께 모여 지역을 나누어 살아가는 곳이 곧 예루살렘인 것이다.
-----예루살렘성안 상가-----
-----예루살렘성 안 상가-----
가이드는 혼잡스런 거리를 얼마 안 걸어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십자가의 길(Via Dolorosa=비아돌로로사) 라틴어로는 “비탄의 길“로 인도 했다.
이 비아돌로로사는 로마총독 빌라도의 집무실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1.5km 연결된 길인데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기 때문에 기독인들에게는 구원의 길이자 기독신앙의 완성을
의미하는 길인 것이다.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는 빌라도의 집무실이었던 채찍교회가 있는 곳에서 채찍을
맞고 십자가를 진 뒤 골고다로 걸어가는데서 시작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돌무덤 장소인 무덤교회에서 끝난다.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 안내표지-----
-----비아돌로로사길 1처-----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정이 있는 곳이다.
-----에케 호머 아치(Ecco home Arch)-----
빌라도는 온몸에 상처를 입고 서 있는 예수님을 향해 "자 이사람이다" 즉
"에케 호모(Ecco Home)"라고 했는데 135년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가 이곳에 크고 작은
아치 3개를 연결해서 세운것이
지금도 길 위에 반쯤 남아 걸쳐 있다.
-----비아돌로로사 길 2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로마 병사들에 의해 옷을 벗기우고 가시관을 쓰고
채찍을 맞고 조롱을 당한 곳이다.
-----비아돌로로사 길 3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여 가다가 첫 번째로 쓰러진 곳이다.
-----비아돌로로사 길 4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마리아가 길가에 서서 지켜 보다가
고통스럽게 앞을 지나가는 아들의 눈과 마주쳐 슬퍼했다는 곳이다.
-----비아돌로로사 길 5처-----
고통에 힘 들어 하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키레네에서 온 시몬이 대신해서 십자가를 진 곳이다.
-----비아돌로로사 길-----
-----비아돌로로사 길-----
통곡의 벽 (Wailing Wall)
-----통곡의 벽-----
통곡의 벽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구 예루살렘 시가지의 동편에 있는 돌로 이루어진 통곡의 벽은 고대 이스라엘의 신전의
서쪽 벽 일부로 남은 것인데 유대인들은 조상들이 건설한 성스러운 원래의 신전의 파괴를
슬퍼하고 재건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유대교의 최대 성지인 이 서쪽 벽(Western Wall)은 “솔로몬”왕때 세워진 성전이 전쟁
등으로 인하여 파괴되어 BC20년 “헤로데스” 왕때 여기에 제2 성전을 다시 건립하였으나
로마군에 의하여 파괴된 성전의 일부라 한다.
대부분 성전은 살아지고 현재 남은 것은 18m 높이의 서쪽 벽뿐인데 이벽을
“통곡의 벽”으로 부르게 된 것은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 비극을 지켜보고 성벽이 밤이 되면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는 설과.
로마시대에는 유대인을 예루살렘에 출입을 금지 시켰는데 비잔틴시대에 들어와 1년에 한번
허용하면서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이벽에 와서 나라 잃은 것을
한탄하며 부서진 성전을 보면서 슬프게 우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성전은 처음 지어졌을 때는 하얀 돌로 외부를 마감하고 입구는 황금으로 장식한 무척
웅장하고 화려하게 축조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유대인 역사학자인
“프라비우스 요세프스”는 “지금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고 들어 본 적도 없는 아름다운
건물“이였다고만 기록해 있다고 한다.
남아 있는 이 벽은 전체가 아니고 일부로 모두 43단의 돌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실제 볼 수
있는 28단을 뺀 15단은 아직도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높은 바위 벽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벽에 손을 짚고 간절히 무언가 중얼거리며 빌고
있었는데 이는 자신의 소원을 적은 쪽지를 돌 틈에 끼우고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 때문이란다.
1948년에서 1967년까지는 요르단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었으나 6일 전쟁 이후 이곳을 다시 회복하여 이곳은 유대인들에게
기쁨과 참배의 장소가
되었다.
-----통곡의 벽-----
통로는 남녀가 따로 펜스로 구분되어 있었고 열심히 고개를 숙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3000년 전의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은 이슬람교에게도 “바위의 돔” 다음가는 중요한 큰 성지로 십자군 전쟁에서 피를
흘려가며 값지게 얻은 곳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세상에 다시 돌아 올 무함마드가 그를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온
날개 달린 말(天馬)을 서쪽 성벽에 묶어 두어 머무는 곳이라고 믿는다.
이곳에 온 무하마드는 천사가 그를 천상에 데려가 모세. 예수. 엘리야와 만나게 해
주었다고 이슬람교에선 믿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인간이 죽은 이후에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보았다고 하면서 하늘과 통하는
이곳에 “바위의 돔”을 세웠다.
무하마드가 타고 온 천마는 이 서쪽 성벽광장에서 대기하면서 예언자 무하마드가 다시
세상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곳이다.
통곡의 벽과 바위의 성전(Western Wall and Dome of the Rock)은 나란히 있는데
이 황금빛 돔의 성전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하늘로 올라간 장소이며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는 곳이다.
바로 옆이지만 유대인들은 종교법에 의해 이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다.
통곡의 벽은 이슬람 사원의 성전 벽이고 유대인들은 그 이슬람의 성벽 아래서 기도를 하고
그것을 보는 여행자의 마음은 종교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그들의 갈등이 착잡하기만 하다.
이 통곡의 벽은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 3종교유적들이 나란히 겹쳐 존재해 있는
성지이지만 얄궂게도 예루살렘의 숙명적인 과거역사를 오늘에 대물려 주고 있는
현장인 것이다.
-----시온 문-----
시온산으로 가는 통로이기 때문에 시온 문으로 부르게 되었고
아랍어로는 바브 나비 다우드(Bab nabi Daud) 즉 "예언자 다윗의 문"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다윗의 무덤이 시온산에 있기 때문이다.
-----시온문(Zion Gate), 예언자 다윗의문-----
시온문은 성의 남쪽 성벽 서쪽에 있다.
시온산으로 통하기 때문에 ‘시온문’이라 부르고 시온산에 있는 다윗왕의 무덤을 갈 때
이 문을 통해서 가기 때문에 아랍어로 ‘예언자 다윗의 문’이라고도 한다.
문의 바깥쪽에서 보면 많은 총알 자국이 있다.
이는 1948년 독립전쟁 동안 아랍인과 싸울 때 아랍군인이 쏜 총탄 흔적이다.
시온문은 1968년 6일 전쟁 후 회복되어 보수되었다.
입구 위쪽에 이 문을 세운 슐레이만 대제를 기념하는 터어키 문구가 있다.
(10)올리브 산(Mount of Olives) 에서
-----올리브 산에서 바라 본 예루살렘 시가-----
올리브 산은(감람산이라 고도함)은 해발 830m로 예루살렘 성 동쪽 키드론 골짜기의
건너편에 있다.
이 산이 이렇게 불린 것은 예로부터 이 산에 올리브 나무들이 무성했기 때문인데 지금은
개발되어 많은 주택들이 들어섰고 근래에 생긴 유대인들의 공동묘지가 산의 일부를
차지하여 올리브 산의 옛 모습을 별로 못 느끼게 한다.
올리브 산에서 서쪽의 예루살렘의 시가를 보면 대단히 가까운 거리에 있어 금방 손에
잡힐 듯한 풍광이 펼쳐 저 파노라마처럼 시원스럽게 시야가 전개 된다.
구시가의 성곽은 물론 “황금 돔“을 비롯하여 신시가지도 한눈에 들어와 예루살렘 시가를
조망하는 데는 최고의 전망대가 될 성싶다.
-----올리브 산에서 바라 본 황금 돔-----
-----시가와 주위 풍광-----
-----시가와 러시아 정교회도 보인다 -----
-----러시아 정교회에서 설립한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
-----눈물교회(Dominus Flevit)-----
Dominus Flevit는 라틴어로 “주께서 우셨다(The Lord Wept)”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붕괴를 예언하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전해지고 있는 예수 눈물교회인데
5세기경 비잔틴 양식의 교회가 있던 자리에 1955년 겟세마네 교회를 설계하였던 이탈리아인
바를루치(Antonio Barluzzi)가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을 형상화하여 재건축한 것이다)
예루살렘의 성 박의 올리브 산은 성안에의 유대교와 이슬람 역사와는 달리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아주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중요한 성지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가 두루 깊게 남겨져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머무르시는 동안 예루살렘을 오가실 때 이산 고갯길을 오르셨고
예루살렘 시가지를 보시고 한탄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곳이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을 내려다보시며 세상의 종말에 일어날 사태에 관해 말씀하셨고 가짜
그리스도에 현혹되지 말고 전쟁과 지진에 놀라지 말고 장차 박해가 닥칠지라도 항상 영적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곳이다.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고 죽음의 공포에서 고뇌하시며 성부께 기도하신 곳도 올리브
산이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3일 만에 부활 후 승천하신 곳도 바로 이 올리브 산이다.
초세기 부터 이곳은 중요한 성지로 여겨져 왔으며 성경에 세상의 종말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이 감람산 묵시록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 돔 (바위 돔=Dorme of the Rock)
-----예루살렘 시가속의 황금 돔-----
-----크로즈 업 시킨 황금 돔-----
바위 돔은 화려했던 예루살렘 최초의 성전 터에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3번의 건축과
파괴로 수난의 역사를 지닌 성전이다.
그리고 3대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충돌하며 분쟁의 뇌관이 되는 성소이기도
한 이 바위 돔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 마크 중 하나이다.
코란에 따르면 예언자 마호메트가 대천사 가브리엘과 함께 천국으로 가기 위해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다는 이 바위 돔은 아랍어로는 쿱밧 아스 사크라(Qubba al Sakhra)라고도
하며 뜻은 고귀한 성소(The Noble Sanctuary)라고 한다.
원래 이곳 성전 산(temple Mount)엔 헤롯 대왕의 2번째 유대인 성전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AD691년 이슬람인 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당시 통치자인
칼리프 압둘 말리크(Caliph Abdal Malik)가 마호메트 승천을 기념하기 위하여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큰 바위 위에 종교적으로 기념하고 보전하기 위하여 사원을 건축한 것이
그것이다.
이곳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을 시험했고 솔로몬 시대에는
언약궤가 이 바위 위에 놓여 있다고 하며 마호메트가 대천사 가브리엘과 함께 메카에서
천국으로 가기 위해 이 바위로 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승천했다고 전해지는
3대 종교의 최고의 성지다.
그럼 이 대목에서 3대종교의 충돌과 끊임없이 갈등이 비저 지는 근원을 살펴보자.
이슬람교는 예언자 마호메트가 이곳에서 승천했고 다시 재림 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
반면 유대교와 기독교는 하느님께서 그의 아들이삭을 희생 시키도록 명한 곳으로만 믿는다.
이슬람에게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가 자신들 종교에 중요한 선지자이고 예언자이지만
유대교와 기독교는 마호메트를 부정하고 아브라함의 조상만 인정하니 한쪽은 보듬고
한쪽은 밀어내는 형국이다.
여기에서 피의 살육이 계속되는 진원지가 되고 새로운 십자군의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쳐 다툼이
벌어지는 것이다.
종교에서 신앙은 최고의 가치가 되겠지만 서로 자기 편에 서서 유리하게만 경전해석을 주장하는 한
첨예하게 부딪치는 충돌과 분쟁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올리브 산에서 본 예루살렘-----
황금돔 성전은 지름이 78피트 높이가 108피트인 돔은 구리와 알루미늄의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져
태양빛이 비칠 때에는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게 반사 한다.
1300년 동안 여러 차례 보수는 하였지만 외형은 변형시키지 않았으며 1960대 사원의 돔을
교체하면서 황금빛으로 변조 시킨 것이 독특하여 황금의 돔(Golden Dome of Rock)이라고도
부른다.
최근에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650만 달러의 사채를 드려 돔을 24k의 금으로 씌우게
했는데 이는 현존하는 다른 유일신 종교에 비해 이슬람이 우월함을 상징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11)서안지역(West Bank)과 사해(Dead Sea)
서안지역 관광은 원래 여행 일정에는 포함되지 안한 지역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제 요르단과 이스라엘 국경(알렌비) 입국과정에서 너무나 시간이 지체되어
차질이 생겼기 때문에 오늘 사해를 보기위해 아침 일찍 출발하게 된 것이다.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그 위험한 서안지역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 본 일이지만 버스를 타고
예루살렘에서 사해로 가는 도로가 서안지역을 통과 해야만 하기에 차창 밖으로 비쳐지는
실상만을 보았을 뿐이다.
예루살렘(해발 800m)이란 도시도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하지만 사해로 가려면 동쪽 언덕 높은
구릉지를 지나야 했다.
버스 안에서 빠르게 지나는 풍광을 보고 있으려니 정말 실감나는 갈등의 현실을 목격하게 되고
국내 언론매체에서 왜 중동 분쟁의 불씨가 서안지역 바로 여기에서 촉발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중동 분쟁의 비극의 참 모습을 똑똑히 보는 것 같아 씁쓸함을 느꼈고 한편으로
이스라엘 관광의 진수(眞髓)의 묘미를 체감할 수 있어 흡족하였다.
수천 년 전부터 심심찮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종교와 영토분쟁이 잉태되어 두민족의
아픈 역사가 얼마나 많은 갈등과 반목으로 이어졌는지 대충 짐작이 같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분쟁의 서안지역 약도-----
-----예루살렘 동쪽구릉지의 서안 지역-----
-----이스라엘 정착촌을 보호하기 위한 콩크리트 벽-----
-----이스라엘 정착촌을 보호하기 위한 콩크리트 벽-----
-----예루살렘 동쪽 구릉지의 베두인족 마을-----
서안지역(West Bank)은 이스라엘의 동쪽지역과 요단강 사해 사이의 분쟁지역을 말한다.
면적이 5860km2정도이며 현재 아랍인이 210만 명이 살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토분쟁의 핵심 지역이다.
행정구역상 팔레스타인 독립국 자치정부의 영토로 분할되어 있는 이 지역은 국제법상 어느
나라의 영토도 아니고 실질적으로 이스라엘 군사 통제 하에 놓여 있는 곳이다.
이곳은 팔레스타인의 대 이스라엘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는 지역이어서 이스라엘이 테러범
소탕작전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곳이기도 하다.
서안지역(West Bank) 안에는 유대인 정착촌이 군데군데 산재해 있어 이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스라엘군이 개입하는 것이다.
성지순례 하는 관광객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혹은 무력행사로 테러를 서슴지 않고 감행하는
아랍인 들은 그 이유가 관광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간접적으로 돕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서안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군의 철군 문제와 연관되어 있어 중동평화회담의
핵심이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요단강 서안지역이 처음 형성된 것은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와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독립선언을 선포하고 UN의 승인을 받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아랍인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을 하고 요르단은 요단강 서쪽지대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일으켜 분쟁지역으로 만든다.
1949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소위 “녹색선(The Green Line)" 이라는
경계선이 형성되면서 ”서안지역“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이곳에 아랍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그리나 요르단은 이스라엘과의 휴전협정을 어기고 이 서안지역을 일방적으로 요르단 영토에
편입시키는 한편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에 1967년 이스라엘은 6일 전쟁을 통해 완승을 거두고 이스라엘 영토는 두 배로 확장되면서
이 지역도 점령했으나 합병하지 않고 군사적 점령지역으로만 남겨 두었었다.
그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샤론 총리(당시 건설장관)가
이곳에 대규모 유대인 정착촌(140여 곳)을 건설하고 20여만 명의 유대인들을 이주 시킨데 서 부터다.
국제법상으로 불법점령지에 정착촌을 세운다는 것은 UN을 비롯하여 모두가 비난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역대정권은 이를 무시하고 현재까지 입장 변화 없이 정착촌을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이 대이스라엘 무장테러를 시작한 것은 1982년 “레바논 전쟁” 이후부터인데
이는 레바논을 거점으로 테러를 일삼는 PLO 본부를 섬멸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의도에서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극한 대립은 점점 고조되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민족봉기(인티파다)로
이어져 양측은 첨예한 대립관계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미국 워싱턴에서 회합을 갖고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해결하는 듯 했다.
그러나 최종 협상과정에서 양측은 현격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는데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가 보장된
이후에 요단강 서안지역을 팔레스타인에게 돌려주겠다는 “선 안보 후 반환” 을
팔레스타인 측은 “선 반환 후 협상”이라는 주장을 서로 굽히지 않았다.
그러한 다른 입장을 내세워 1996년부터 팔레스타인의 대이스라엘 테러행위가 격렬하게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대중교통수단인 버스에서의 자살테러가 감행되는가 하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측의 평화협정
준수 의지를 의심하고 팔레스타인 측은 영토를 반환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이스라엘 측에
책임을 떠넘겼다.
이러한 양측의 뚜렷한 입장 차이는 수십 차례의 평화회담에도 불구하고 전혀 좁혀지지 않고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 했다.
이러한 가운데 요단강 서안지역서는 다시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나 안보에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은 중동평화회담을 전면 중단한다.
그 후 팔레스타인의 테러행위는 계속되었고 테러행위를 저지하기 위하여 철수하였던
이스라엘군대가 재점령하고 강경정책을 썼지만 분쟁은 계속되었다.
-----서안지역 이스라엘 정착촌 콩크리트 벽-----
-----서안지역 구릉지의 베두인족 마을---
-----서안지역 구릉지의 베두인족 마을-----
그럼 왜 분쟁의 실마리를 못 찾고 있는지 원인과 역사적 배경을 되돌아보기로 하자.
역시 이 분쟁을 이해하는 데는 구약성서라는 성경에서부터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데
이 두민족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아브라함의 한 핏줄이다.
적자(이삭)와 서자(이스마엘)로 출생된 이 두 형제는 장구한 세월을 같은 언어 같은 풍습을
지니고 반목과 질시 서로 다른 배타적 성격의 종교를 갖고 철천지원수로 살아간다.
기원전 77년 유대는 로마에 의해 패망하여 지도상에서 흔적도 없이 살아져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 각 지역에서 뿔뿔이 흩어져 갖은 박해를 받으며 살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전항이 불리해지자 아랍인과
유대인에게 각각전쟁에서 승리하면 독립을 약속하며
샤리프 후세인(Sharif Hussein)-헨리 맥마흔(Henry Macmahon)서한과
밸푸어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했다.
내용을 보면 후세인- 맥마흔 서한이란 주 카이로 영국 판무관 맥마흔이 10여 차례에
걸쳐 아랍의 정치지도자 샤리프 후세인에게 독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의 서한이고.
밸푸어 선언이란 영국외상 밸푸어가 유대계 은행가 로스차일드(Rothschild Nathan Meyer)
에게 시오니즘을 지지함과 동시에 전쟁비용을 지원해 주면 종전 후 옛 유대 땅에 이스라엘
건국을 약속한 것이다.
어떻게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영국은 양진영에 독립 국가를 보장한다는 약속을 하고
한쪽에는 목숨을 걸고 싸우게 하고 한쪽에는 막대한 자금을 지원 받았는데 결국 종전 후에는
모든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의 위임 통치지역으로 만들었다.
한 지역을 가지고 두 민족에게 모순된 약속을 하여 양 민족 간의 분쟁을 일으키게 한 촉진제
역할을 한 영국정부가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 같다.
밸푸어 선언과 맥마흔 선언은 독립을 열망했던 아랍인들의 분노로 이어져 테러와 습격에
봉착하였고 영국은 사태 해결을 보류한 채 UN에 떠넘기고 발을 무책임하게 뺐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두고 갈등을 빚은 중동전쟁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데 그래도
이 복잡한 문제를 당사자와 국제적 감각으로 풀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쉽사리 분쟁의 해결책이 나오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진정한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세계 각국의 중재노력과 양측 간의 신뢰회복이 선결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황량한 구릉지 사막-----
-----황량한 구릉지 사막-----
-----높은 구릉지 사막에의 서안지역-----
-----해면을 알리는사해로 내려가는 레벨입구-----
-----사해로 들어가는 입구에 레벨 표시점-----
(12)사해 (死海=Dead Sea)
사해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 국경에 있는 염호(鹽湖)이다.
호면이 해면보다 400m 가량 낮아 지구에서 가장 낮은 수역을 형성하고 있는 이 염호는
서쪽엔 이스라엘 구릉지대와 동쪽으론 요르단 고원이 있고 북쪽으로는 요단강이 흘러든다.
길이는 80km. 너비는 18km. 면적은 1020km2로 최대수심은 396m에 이른다.
사해라는 이름은 고대 헬레니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히브리인의 조상 아브라함과
고대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성서의 내용에서부터 관련되어 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백성들의 부도덕으로 인해 하늘에서 내린 유황불로 심판했다고
전해지는 소돔과 고모라의 터가 현재 사해의 남쪽 수역에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사해라는 이름이 연유된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사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염도가 일반 바다보다 10배가량 높아 생물이 전혀
살지 못하기 때문에 사해라는 명칭이 자연스럽게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사해는 역사적으로도 숫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왕 다윗과 유대 왕 헤롯 1세가
왕이 되기 전 피신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인들이 난공불락의 마사다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전투를 벌인 격전지로도 유명하다.
또한 연안지대는 고대문명이 발전한 곳이어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 많이 발굴되고 특히
근처 쿰란동굴(Qumran Caves)에서는 고대 필사본 두루마기 사해문서(DeadSeaScrolls)가
발견되어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역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레벨 표시점에서 사해로 내려가는 길 옆 풍광-----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는 북쪽의 요단강으로부터 물은 유입되나 유출 구는 없는 막힌 호수다.
이 지방은 비교적 건조한 기후이기 때문에 유입수량과 거의 동량의 수분을 증발 식혀 수면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균형이 깨져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된 이런 상황이 사해의 크기가 줄고
퇴적층의 두께는 많이 두꺼워진다고 한다.
사해에 유입되는 물의 량에 비하여 증발되는 량이 많아 1년에 평균 80cm 가량 수면이 낮아져
이미 50년 전에 비하여 20m 이상 낮아졌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비율로 간다면 얼마 안가
사해는 소금밭으로 지형이 변형 될 것이라 학계에선 보고 있다.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과 요르단과 세계은행 등에서는 사해로 유입되는
수량을 늘리기 위하여 이념과 민족 간 갈등을 초월하여 협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한다.
-----사해 풍광-----
-----사해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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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풍광-----
사해의 물은 기본적으로 지중해에서 유입된 바닷물이라고 한다.
400만년 전 지구 온난화를 비롯한 기후 대변동을 겪으면서 지중해의 해수면이 상승하여
바닷물이 이곳에 흘러들어 큰 호수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냉각기가 도래하면서 바닷물이 더 이상 흘러들어 가지 못하자 현재의 사해보다 긴 225km 길이의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더운 기후와 함께 호수의 물은 증발하여
호수 면이 차츰 낮아지면서 지중해 해수면보다 낮아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거대한 호수는 결국 물의 증발이 가속되어 북쪽의 갈릴리 호수와 남쪽의 사해로 나뉘게 되고
이 두 호수는 지금도 요단강으로 연결되어 물이 흐르고 있다.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는 염도가 높아 누구라도 물에 들어가면 수영을 못해도 가라않지 않는 진기한 현상을 맞이한다.
그리고 인체에 유익한 각종 광물질을 다량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진흙 목욕과 함께 병 치료에도
효과적이고 특히 미용효과에 뛰어나다고 알려지면서 화장품공장이 설립되기도 했다.
이집트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도 미용을 위해 노예들을 시켜 정기적으로 사해의 검은 진흙을
가져 오라고 했다니 고대부터 이 사해의 진흙은 유명했던가 보다.
(13)요단강(Jordan River)과 세례터(Baptismal Place)
요단강은 시리아의 헬몬(Hermon)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Galilee) 호수를 거쳐
사해(Dead sea)로 이어지는 강이다.
헬몬산에서 눈이 녹아 물줄기를 만들어 갈릴리 호수까지 유입되는 강을
상부요단강((upper jordan River)이라 하고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까지 흐르는 강을
하부요단강(Lower jordan River)이라 구분하여 부른다.
이 강의 전체 길이는 260Km 인데 가파른 경사지를 따라 흘러 해수면 보다 낮은 강으로
알려져 있으며 폭은 약 30m이고 깊이는 1-3m가 된다고 한다.
요단강은 비교적 작은 강이지만 세계에서 잘 알려지고 유명한 강이다.
구약성서에 엘리야가 요단강을 건너 하늘로 올려 졌다는 구절 때문에 “요단강을 건넌다”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미국에 흑인 노예제가 있을 때
“요단강을 건넌다”는 말은 오하이오 강을 건너 노예제가 폐지된 자유의 북부 땅으로
간다는 노예해방의 뜻을 품은 말이기도 하다.
즉 죽음으로서 괴로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도 있는 반면 오하이오 강을
건너 자유를 찾는다는 어찌 보면 상반되는 이중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지정학적으로 시리아와 요르단과의 사이를 이루고 있는 이 요단강은 성서에서
수 없이 대립과 이적(異蹟)의 역사적인 이야기들이 나온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널 때 여호수아는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처럼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강을 건넜다는데 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까지 왔을 때 마침
추수기간이어서 물이 가득 차 발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에 위에서 흐르던 물이 완전히 끊어졌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 가운데
마른 땅에 서있는 동안 백성들은 모두 요단강을 건넜고 이어 제사장들마저 요단강을 무사히
건너고 나니 강물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납득 못할 황당한 일이지만 이스라엘을 위해 하느님의
기적은 또 일어났다.
구약성경 열왕기하에 나오는 “나아만” 이라는 아랍(오늘날 시리아) 나라의 장군의
이야기인데 이분이 불행하게도 문둥병(Leprosy)에 걸려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행이 나아만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사로잡혀온 계집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녀는 곧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엘리사”를 소개하였다.
나아만은 즉시 왕을 설득하여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왕에게 문둥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였더니 왕은 내가 어찌 하나님이건대 사람을 죽이며 살리겠느냐 하고 당황하며 전쟁을
일으키려는 술책이라고 의심을 하고 두려워했다.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엘리사가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면 선처하여 보겠노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의 권능이 왕권을 능가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일 것이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오니 엘리사는 사자를 보내어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고 지시만 하고 접대를 안했는데 교만으로 가득한 나아만은 돌아가려 하다가 지혜로운
종들의 충고를 받아드려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을 몸을 담그니 더럽던 문둥병이
깨끗하게 치유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곳이 또한 요단강이라는 것은 크리스찬이
아니래도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와 같이 성서에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많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마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만 볼 수 있고 알려 주시는 것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약성서를 최초로 편집한 네델란드 인문주의학자 에라스므스(Desiderius Erasmus)는
“나는 믿기 위해 알고 알기 위해 믿는다” 고 했다.
믿어 아는 세계가 있는가 하면 알아 믿을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노력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함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터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곳이 어디냐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주던 요단강 동편 “베다니(Bethany)” 라는 주장과
갈릴리 호수에서 요단강으로 흘러나가는 멀지 않은 “야르테니트(Yardenit)"라는
지점이 그것이다.
베다니는 사해에서 북쪽으로 요르단과 이스라엘 국경을 통과하는 출입국 관리소
알렌비 다리(Allenby Bridge) 에서 멀지 않은 여리고 지역에서 가까운 지점에 위치해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게 되자 잠시 예루살렘을 떠나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베다니에 가서 계셨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세례터를 발견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기울이여 졌다.
그 후 많은 학자들은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 끝에 교회. 수로. 세례터 등의 유적을 다량으로
발굴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남 요단강 계곡지역에 속하는 여리고 맞은편에 위치한
이 베다니(Bethany)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장소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야르테니트(Yardenit)는 베다니에서 위도 상으로 한참 올라간 갈릴리 호수 남단에 있다.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나사렛에서 활동하시던 예수님이 요한에게 가서 세레를 받으셨다고
기록했기 때문에 갈릴리 지방에 근접한 야르테니트를 세례 터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도 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와 이곳에서 세례의식을 행하고 있는데 이곳 어디에도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표식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기록한 마가복음의 말씀이 벽타일 위에 여러 나라 말로
선명히 새겨져 있고 주변의 세례시설들이 너무나 잘 되어 있어 이곳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가이드가 살짝 귀띔해 주었다.
이곳 야르테니트(Yardenit)는 유대인들의 한 키부츠(Kibbutz)에서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일종의 세례체험 상품을 파는 장소라고 하면서 기독교의 성지 순례
객들이 매년 50만명 정도가 찾는 인기 관광명소로 자리매김 했다고 말했다.
**아랫 사진은 야르테니트(Yardenit)의 세례터(Baptismal Pla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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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이스라엘의 키부츠(Kibbutz). 엔게브(Ein gev)
키부츠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집단농경(集團農耕) 공동체의 한 형태를 말한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때로는 식품가공을 비롯하여 경공업(輕工業)
기계부품제조(機械部品製造)도 하는데 여기에서 축적된 재산은 모두가 공유하고 주민들의
의식주와 복지에 쓰인다.
키부츠의 설립은 기존 경지의 집단화(集團化)가 아니라 계획적인 입식사업(入植事業)으로
철저한 자치조직에 기초를 둔 생활공동체인 점이 특색이다.
최초의 키부츠는 1909년 팔레스타인의 데가니아(Deganya)에서 어려운
시오니즘(Zionism)운동 중 탄생되었다고 한다.
케부조트(Kevuzot)로 작게 시작된 키부츠는 점차 발전하여 규모가 커졌는데 현재
이스라엘에는 200여개의 키부츠가 있고 구성원이 10만 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키부츠의 주민은 사유재산(私有財産)을 가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생산 및 생활재(生活財)는 공동소유로 하고 전 수입은 키부츠에 귀속되는데 남는
재산은 재투자(再投資) 한다.
성인들은 대개 부부단위로 개인 숙소에서 생활하게 되지만 어린이들은 집단(集團) 양육되고
요리와 식사는 공동으로 하고 의류는 계획적인 공동구입(共同購入)과 평등한 배포로
이루어진다.
유대 국가 기금으로 임차(賃借)한 땅에 세워진 키부츠는 주 1회 모든 구성원이
전체회의(全體會議)를 개체하여 정책을 결정하고 행정요원을 선출하는데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에는 개인적인 생활과 사적(私的)인 소유에 더 많은 자유를 주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키부츠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새로운 거주지를 개척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민주적이고 평등한 운영방식을 통해 초기 이스라엘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경제와 정치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며 전체인구 가운데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을 차지하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 * * * *
엔게브(Ein gev)
엔게브는 골란 고원이 정면에 바라다 보이는 갈릴리 호숫가 동편에 위치한 최초 유대인
정착지 중의 하나이다.
주변에 그리스 로마유적지가 있고 갈릴리 호수 옆에 자리하여 토양이 비옥하고 매우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엔게브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전 팔레스타인을 영국이 위임
통치하던 기간 중인 1937년 키부츠가 세워지면서 부터이다
.
이스라엘이 1948년 독립하기 전까지 엔게브 키부츠는 매우 급격히 규모가 커졌으나
적대국 시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8년 제 1차 중동전쟁 당시
키나롯 계곡(Kinarot Valley) 전투 등으로 커다란 폭격 피해를 입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골란고원을 완전히 시리아로부터 빼앗을 당시 6일 동안
치열한 전쟁이 계속 되었는데 키부츠 출신 군인 6명이 전사하여 이를 기리기 위하여
6명을 위한 “6일 전쟁 기념관이”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엔게브 키부츠의 거주민은 약 500명 정도이며 그 중 250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18세 미만의 150명은 어린이어서 진짜 영농을 하는 농업인은 80여명에 불과하다.
전체농지면적(全體農地面積)은 3000Km2에 달하는데 1/3이 바나나 농장이고 연간
소득은 22억원 정도니 농업인 1인당 3억원 가까운 소득이 돌아가는 셈이다.
키부츠내에는 유아원과 학교 그리고 병원까지 모든 시설이 다 갖추어져 있으며 키부츠
활동 체험 프로그램을 위한 캠프시설과 리조트도 마련되어 있다.
또한 이곳은 국제적인 자원봉사자(自願奉仕者)들이 체류하며 농장 일을 돕고 키부츠의
농업과 협동생활(協同生活) 등을 학습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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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갈릴리(Galilee) 호수
갈릴리 호수(갈릴레야 바다)는 예루살렘 북쪽 150Km 지점에 있는 담수호이다.
호수의 둘레가 53Km 남북으로 21Km 동서로 11Km이며 면적은 대략 166Km2 에
이른다.
해수면으로부터 약 209m가량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심의 평균 깊이는 약 26m
가장 깊은 곳은 43m이다.
갈릴리 호수 북쪽에는 해발 2814m의 헬몬산이 만년설에 덮힌채 솟아 있고 동쪽에는
해발 평균 1000m 정도 되는 골란고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 외의 주변도 해발 약 300m 이상 되는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분 지내에 있는
호수로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평풍처럼 둘러싸여진 험준한 산과 호수면의 표고 차이가 약 500m 이상 되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특수한 지정학적 구조로 말미암아 성경에 많이 등장하고 있는 갈릴리의
돌풍에 의한 풍랑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 같다.
주로 아침에는 고요하고 잔잔한 수면을 보이다가도 한낮이 되면 세찬 바람이 닦아와 큰
풍랑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한 낮의 뜨거운 태양열에 데워진 중동지방의 열기가 산사면의
낮은 기온과 부딪쳐 일어나는 현상의 원인인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실 때 돌풍을 맞나 위기를 겪으시는
기록이 있다.
마태복음 8장 23절에서 27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갈 때 돌풍을 맞나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면서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 4장 39절)
또 돌풍으로 풍랑이 이는 수면 위를 걷는 기적을 행하셨다.(마가복음 6장 45절)
갈릴리 호수는 모양이 하프처럼 생겼다하여 이 호수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하프를 지칭하는
킨놀(Kinnor)에서 유래되어 호수 이름을
구약시대에는 긴네렛 호수(the Lake of Chinnereth) (민수기 34장 11절 여호수아 12장 3절)
신약시대에는 겐네사렛 호수(the Sea of Gennesaret) (누가복음 5장 1절) 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갈릴리에서 멀지 안은 곳에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성지가 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부활했다 하지만
그의 활동지역은 주로 갈릴리였고 제자들도 배반자 유다를 제하고는 모두 갈릴리 출신들이다.
예수님이 처음 기적을 보이신 곳도 갈릴리의 가나였으며 사람들에게 설교와 치료를 해준
곳도 나사렛이 아니라 갈릴리 해안의 가버나움이었다.
갈릴리 호수의 물은 현재 이스라엘의 자원으로 거의 생면수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는데
이 물은 관개수로를 통하여 이스라엘 전 지역에 공급되어 원래 황무지였던 광야에 여러
종류의 농작물과 과일을 재배 할 수 있게 한 옥토로서의 원천인 것이다.
또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공생애(共生涯)를 시작하셨는데 제자중의 7명이
이곳 갈릴리 출신이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호수가의 사람들은 대부분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했었는데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불러놓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낙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면서 형제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 제자를 삼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헬몬 산에서 발원이 되어 호수의 북쪽으로 흘러 들어오는 짧은 강도 요단강이요 남쪽에서
흘러나와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긴 강도 요단강이기에 두 개의 요단강을 거느린 갈릴리
호수가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전도활동의 주 무대였다.
호반(湖畔)에 본거지로 삼은 가버나움(마 4~13) 막달라(마 27~56) 고라신 (마 11~21)
티베리야(요 6~23)등의 성읍이 그것인데 기념교회가 지어졌으나 예루살렘 보다는 훨씬
적어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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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아(Tiberias)
티베리아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 약 1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호수 서안에 자리한 티베리아는 역사적으로 유구한 종교적 유적지로
성지순례의 중요한 기착지가 되고 주위에 온천과 풍광이 아름다워 건강과 휴일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 오는 곳이다.
이 도시는 산중턱에 자리 잡아 호수너머로 골란고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태로 남서해안의
하마스 온천을 근처에 품고 있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으로 유대인들은 믿었다.
AD 19년 헤롯왕의 아들 혜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에 의해 형성된 이 도시는 대리석으로
빗나는 성전을 짓고 병을 치유하는 온천을 개발하여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하듯 성스럽게
여기고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이후 BC 57년 유대국이 가비니우스 지방 분권화된 이래로 종교적인 행정 중심지로 있다가
안티파스는 갈릴리의 모든 도시의 수도로 만들었고 로마 티베리우스(Tiberias) 황제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명명했다.
원래 로마는 이 도시를 요새로 개발하기 보다는 기후가 따듯하여 사치스런 휴양도시로 설계를
하였기에 오늘날 티베리아의 갈릴리 호수주변은 사계절 휴양지로 개발되어 수상 스포츠와
각종 놀이로 즐길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곳 갈릴리 호수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위를 걷는 기적을
일으켰던 성소인 동시에 대부분의 제자들이 이곳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과 제자
베드로와 안드레이아와의 첫 맞남 역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곳은 수세기 동안 유태교 학문의 전당으로 존재했으며
팔레스틴 탈무드(Palestinian Talmud)가 이곳에서 편찬되었고 유대교의 율법중심주의에
반대한 예수님의 복음 선교 활동중심지이기도 하여 유대인들도 이곳 티베리아를
4대 성도 중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자연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이곳은 지금도 바나나.
목화. 오렌지. 올리브 등 갖가지 농산물이 풍부하게 재배되고 있으며 갈릴리 호수의 물은
전 이스라엘 땅의 음료수는 물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까지 대부분 충당하는 생명선이
되고 있다.
(티베리아 "Club hotel"에서 1박을 하면서 호텔 객실에서 갈릴리 호수를 바라 보면서 호텔주위와
Restaurant 내부를 촬영한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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