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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뭐꼬 누땅고(플로리다 여행기 3)
오늘 여행의 주목적지는 성 어그스틴(St. Augustine) 시이다. 역사가 길지 않은 미국에서 성 어그스틴은 ‘가장 오래된 도시’로 통한다. 미국의 역사가 길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나를 포함하여 그런 표현을 무심코 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인 실수를 하고 있다. 땅이 있는 한 역사는 존재하는 법이다. 이 드넓은 아메리카 대륙은 그 넓은 것만큼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곳의 역사가 짧다는 표현은 백인들이 이곳을 점령하기 이전의 역사를 의중에 두지 않는다.
고속도로에서 이탈하여 도시에 다가갈수록 집들이 스페인풍으로 달라졌다. 시가지에 들어서니 스페인에 왔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스페인 풍 건물 일색이었다. 관광안내센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거에는 스페인 범선의 모형과 그 범선을 타고 온 초기 이주자들의 생활 풍속이 모형으로 집대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 순례자의 청결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었다.
성 어그스틴 시는 1565년 스페인에 의해 세워져서 235년 동안 플로리다 지역의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수도 노릇을 해왔다. 그래서인지 이 도시는 참 다양한 볼거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음식점, 대학, 대정원, 대저택, 시청, 다리, 등대 박물관 등 ‘역사가 일천한’ 미국에서 쉽게 관람하기 어려운 구조물과 유적들이 시가지 전체에 널려 있었다. 그것도 다들 올망졸망 붙어있으니 짧은 시간 안에 쉽게 구경할 수 있다.
성 어그스틴 시 관광의 중심은 바닷가 요새인 산마르코 성(Castillo de San Marcos)이다. 요새의 본체는 정사각형이었고 네 모서리에서는 다이어몬드형의 전망대를 돌출시켰다. 요새의 본체에서 사방을 관측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망대에서는 본체의 벽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가령 본체의 벽을 타고 오르는 적도 발견하고 저격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이 성채는 조개와 다른 흙 등을 이겨서 만든 벽돌로 만들어져 있기에 아무리 강력한 포탄도 뚫을 수 없다 했다. 벽돌이 바위보다 강했다. 잡탕이 순수보다 강한 법이다.
스페인이 이 도시와 요새를 건설하게 된 내력은 이러하다. 스페인은 중남미 열대 아열대 지역인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콜롬비아, 베네수웰라 등에서 산출되는 열대 염료, 사탕수수, 담배, 초코렛, 보석, 목재, 은과 금 등을 유럽으로 실어가는데 멕시코 걸프만 걸프 해류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그 해역을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플로리다 반도를 먼저 점령해야 했다. 스페인은 1513년 플로리다의 소유권을 선언했다. 그러자 프랑스가 가만 있지 않았다. 프랑스는 1564년 플로리다 성 죤스강(St. Johns River)가에 캐롤린 항(Fort Caroline)을 건설하면서 스페인의 플로리다 반도 점령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에 대해 스페인 황제 필립(Philip)2세는 메넨데쯔(Menendez)를 보네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그는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기 위한 교두보로서 1565년 성 어그스틴 시를 건설한 것이다. 스페인 군은 프랑스가 새운 캐롤린 항을 공격하여 주민 대부분을 살해했다. 스페인 군은 살륙자라 불렸다.
다음으로 영국이 도전해왔다. 영국의 프랑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는 성 어그스틴을 공격하였다. 그때가 1586년이었다. 영국 해적들은 1670년 이 도시를 다시 공격하였고 그 뒤 몇 번을 더 공격하여 온 도시를 파괴하고 살육을 자행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산마르코 요새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나무로 지어졌기에 여러 번 보수되고 새로 지어졌다. 지어지고 보수되면서도 산마르코 요새는 성 어그스틴을 공격해오는 적군을 방어하였다. 특이한 점은 마르코 요새가 성 어그스틴 시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르코 요새는 전투하는 군사들이 주거하면서 도시와 자기를 방어하는 철벽성이었다. 바다의 길목에 있기에 바다를 통해 성 어그스틴을 공격해오는 적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적들이 산마르코 요새로부터의 포격을 무릅쓰고 상륙하여 성 어그스틴 시를 공격해가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 그 다음부터는 오직 자기 방어만 하게 된다. 산 마르코 요새 안에는 몇 달 동안 자급자족할 군수품이 완벽하게 보관되어 있어 적들의 장기적 공격에도 버틸 수 있었다. 영국군이 공격해왔을 때도 그랬다. 영국군은 이 요새를 함락하면 플로리다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집요하게 공격을 해왔다. 영국군은 몇 달 동안 이 요새를 공격했지만 결국 자기 군수품이 먼저 떨어져 돌아가야만 했다. 그 분풀이로 성 어그스틴 시민들을 모조리 죽이고 도시를 파괴하고 불 질렀다는 것이다.
요컨대 플로리다는 조지아, 캐롤라이나와 함께 16,7세기 제국주의의 ‘폭발적 국제 전쟁터’(explosive international battleground)였다. 플로리다 중에서도 성 어그스틴 시와 산마르코 요새는 스페인 식민 정부의 무역과 상업을 보호하는 군사 기지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었다.
스페인과 영국은 그 뒤로도 플로리다를 두고 거래를 계속 했다. 1763년 7년 전쟁의 결과로 스페인은 큐바의 하바나(La Habana)를 받는 대신 플로리다를 영국에 양도했다. 1783년 파리조약으로 플로리다는 다시 스페인의 소유가 되었다. 스페인은 1821년까지 플로리다를 소유하다가 미국에 양도했다. 마르코 요새를 양도 받은 미국은 인디언 원주민과의 전쟁인 세미놀 전쟁(Seminole War, 1835-1842) 중에 이 요새를 인디언 포로들의 형무소로 사용하였다. 또 남북전쟁 중에는 연합군이 이 요새를 잠시 점령하였는데 이번에도 서부 군사 운동(Western Military Campaingn)의 인디언 포로들을 여기에다 투옥시켰다.
우리가 마르코 요새에 도착하였을 때는 스페인 병사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포탄을 쏘는 의식을 올리고 있었다. 실제 발사 때는 새하얀 연기가 일어나면서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나왔다. 사격 마무리를 하는 과정도 꽤나 절도와 격식이 있었다. 스페인 병사들은 일련의 의식이 다 끝나자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어주는 친절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성채의 방들은 옛날의 모습을 다양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한 방에 들어가니 남북전쟁 중 남군의 복장을 한 여성이 마르코 요새와 관련된 역사를 일사천리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신이 나 있었다. 스페인 군의 기발한 성채 구축 과정과 방어 전략을 실감나게 이야기해주었고, 요새의 용도가 지금까지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대해서 때로는 놀란 표정을 짓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거나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관광객들의 반응도 대단했다. 모두들 승자인 스페인의 국민이 된 신이 나 있었다.
그녀도 영국군이 공격했다 돌아간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남군의 복장을 한 그녀도 두달 치 이상 군량미와 군수품들을 요새 안에 비치해두고 영국군의 공격을 물리친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스페인 군사가 되는 것 같았다. 영국 군인들이 화가 나서 성 어그스틴 시에 불을 지르고 시민들을 살육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여전히 신바람을 내었다.
나는 그 그럴듯한 포격 의식과 요새 내 온갖 방들의 진열품과 신바람난 남군 여성 해설사의 해설 풍경들을 다 구경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다는 참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그런데도 현기증이 일어났다. 저 멀리서 아비규환이 들려왔다.
난공불락의 산마르코 요새가 성 어그스틴 시가지와 운명을 함께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참 묘한 기분을 자아내었다. 물론 요새의 군사들은 시가지를 공격해오는 적들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다 썼지만 그 요새는 어느 단계에 이르면 시가지를 포기하고 자기 방어로 전환했다. 영국군이 성 어그스틴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들 때도 산마르코 요새의 군사들은 요새 문을 굳게 잠그고 버티기만 했던 것이다. 아니 산마르코 요새의 그런 버티기가 영국군으로 하여금 시가지를 불지르게 한 것이었다. 그때가 1586년이다.
성 어그스틴 사람들은 난도질 당하면서 불에 타 죽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의 죽음에 대해 기록해주지 않았다. 죽은 사람들이 인디언인지 스페인 사람들인지 아니면 또 다른 민족인지. 요새의 견고함과 기막힌 수비능력 등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남군 복장의 여성 해설사도 그 점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푹 빠져 고개를 끄덕이고 손뼉을 치던 관광객들들이 살해된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돌아보니 용심을 내고 진절머리를 치고 이를 악다물은 것 나 혼자인 것 같았다. 나는 그 견고한 요새 꼭대기에서 몇 백년 전의 절망적 절규와 비명을 들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전쟁 공간에 대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영국군이 성 어그스틴 시를 불바다로 만든 날로부터 6년 뒤인 셈이다. 1592년 음력 4월 부산진 전투에서 승리한 왜장 고시니 유키나가는 동래성으로 향했다. 소문을 들은 조선의 군사 수장들은 많이들 도망을 치고 송상현 홀로 울산군사 이언성과 함께 동래성을 지켰다. 유키나가는 무리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 했다. 송상현은 ‘싸우다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화답했다. 그게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동래성 안의 백성들까지 합세하여 저항했지만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다. 동래읍성 터에서 출토된 유골들은 그때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살해되었는가를 증언해준다. 그분들의 두개골은 칼에 베이기도 했고 찔기기도 했다. 총과 화살에 맞기도 했고 둔기에 맞아 함몰되기도 하였다. 5세 미만 아이를 근거리에서 조총으로 쏘아 죽였는가 하면, 20대 여성을 꿇어앉히고 머리를 숙이게 하여 뒤에서 칼로 내리치기도 했다. 두개골이 함몰된 경우는 칼 이외의 도구로 무참하게 살해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로부터 17년 뒤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李安訥)은 이런 글을 남겼다.
4월15일 청명에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나 늙은 아전에게 물어보았다. 이날이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라 하였다. 송상현 부사를 좇아 모인 성안 백성들은 피바다로 변하고 쌓인 시체 밑에 투신하여 천 명 중 한 두 명이 생명을 보전할 정도였고, 조손·부모·부부·자매 중에 살아남은 자는 죽은 친족을 제사지내며 통곡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내가 눈물을 흘리자 늙은 아전은 ‘곡해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죽어 곡해 줄 사람조차 남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이안눌, ‘맹하유감사(孟夏有感祠)’)
그래도 나는 동래성을 지킨 장군과 병사들이 자랑스럽다. 산마르코 요새의 병사들이 문을 닫아걸고 불타는 성 어그시틴의 풍광을 바라보기만 하였다면, 송상현 부사를 비롯한 동래성의 병사들은 끝까지 동래성 인민들과 운명을 함께 하였다. 그 최후가 장렬하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기억해주지 않고 그 누구로부터도 애도를 받지 못하는 망자는 얼마나 혹독한 원한을 일으키는가를. 그에 비하면 우리에게는 참으로 많은 제문과 애도문과 비문과 추도시가 전해지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수백 년 뒤에서 자기 죽음의 진실을 풀기 위해 산자에게 와락 달려드는 귀신의 이야기가 많기도 하다.
플로리다와 동래. 이 땅이 누구 땅인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그 땅에서 그런대로 자기 앞가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처참하게 살해되어야 한 이유가 있는가? 이미 제국주의가 되었거나 곧 제국주의가 될 나라들은 그렇게 남의 땅으로 가서 남의 민족을 침탈해야만 비대해진 자기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게 되어서인가?
그리고 내 상념은 산마르코 요새가 결국 인디언 감옥이 되었다는 사실에 꽂혀버렸다. 미국 어딜 가나 한때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이 피를 흘리고 처단되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산마르코 요새는 이상하리만큼 인디언의 운명을 애처롭게 부각시킨다. 인디언들은 자기 땅에서 살해되고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새워진 그 요새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결국 하나 둘 처단된 것이다.
산 마르코 요새와 성 어그스틴 시의 관광은 이렇게 땅 주인의 비극과 침략자의 잔인함이라는 인류 역사의 근원적 비극과 역설을 고통스럽게 환기시켰다. 그러다가 전혀 뜻밖의 상념이 나를 다른 식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이 땅의 주인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베링해를 건너 알라스카를 거쳐 마침내 플로리다까지 왔을 때 이곳에는 이미 살고 있던 사람이 없었을까? 없었다면 그들은 산천의 나무들과 슾지의 악어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조금만 방심하면 달려들고는 했던 독수리들이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어 행위를 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선조가 고아시아족이라 했을 때 그분들은 시베리아 지역으로부터 청동기를 가지고 반도로 들어왔다. 그 선조들이 경주나 김해까지 내려왔을 때 그곳에서 이미 농경생활을 하던 원주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순순히 땅을 양도하고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갔을까? 청동기와 철기로 무기를 만들어 고대국가를 건설한 이주족 우리 선조들. 그분들은 그때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며 자비를 베푸셨을까?
그 땅과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땅의 점령에서 완벽하게 떳떳한 원주민은 어떤 존재인가. 이주한 사람들이 원주민은 물론 땅과 원초적으로 결속되어 있던 유정 무정의 생명체들과 맺을 수 있는 가장 온당한 방법은 어떤 것일까?
사람이 이동한다는 것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게도 하지만 생명에 대한 훼손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주는 이주민에게는 새 영역의 확보를 의미하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쪽에게는 자기 존재 지속에 대한 결정적 타격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아, 미국 땅에 온지 일 년이 되지 않았는데 내가 달라지고 이상해지고 있다. 내 눈에 덧씌워진 지구인의 안경이 너무 무겁다.
보고 듣는 매순간이 화두 참선의 순간이지만, 화두가 가장 잘 들리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아침 잠에서 깨어난 베개 머리맡, 용변을 오래 보는 화장실, 그리고 먼 길 운전하는 운전석이다. 그래서 나는 운전하면서 화두를 든다. 운전 참선에 제법 이력이 생겼다. 성 어그스틴에서 나사(NASA)로 운전해가면서 ‘이뭐꼬’ 화두를 들었다. 그러나 이날은 화두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내가 이뭐꼬. 이뭐꼬 하면 어느새 내 안의 또 다른 놈이 나타나 누땅고? 누땅고? 하며 대드는 것이었다.
누땅고. 누땅고. 이 땅이 누땅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