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元發
鷹揚軍 民部典書 璡之子 版圖摠郞 大年之孫 典法摠郞 忠敬之曾孫入元朝 爲榮祿大夫 兵部尙書 集賢殿大學士 本國封竺山府院君 號菊坡 贈金蘭溪 詩曰
江闊脩鱗縱
林深倦鳥歸
歸田乃吾志
非是蚤知機
응양군 민부전서(鷹揚軍 民部典書)를 역임하였던 「진(璡)」의 자(子)이다. 판도총랑(版圖摠郞)을 역임하였던 「대년(大年)」의 손자이며, 전법총랑(典法摠郎)을 역임하였던 「충경(忠敬)」의 증손이다.
원(元)나라에 입국하여 그곳에서의 벼슬은 금자영록대부 병부상서겸 집현전 태학사(金紫榮祿大夫 兵部尙書兼 集賢殿 太學士)에 이르렀으며 귀국하여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封)하여졌다. 호는 국파(菊坡)이며 난계(蘭溪) 「김득배」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증정하였다.
강 넓어 큰 고기들 마음껏 놀고
깊은 숲에 지친 새 돌아오는구나!
시골로 돌아옴이 내 뜻이지만
진작에 기미를 안 것은 아니었도다.
[출처] 문경군읍지 [ 附 인근읍지 ]
자료제공: 문경문화원장 전홍석
◎ 전원발 [ 全元發 ]
시대/고려 말 ~ 조선 초기
출생-사망/? ~ 1421
분야/서예
직업/문신, 서예가
고려 말~조선 초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호는 국파(菊坡), 본관은 용궁(龍宮)이다. 증조부는 전법총랑(典法摠郞) 전충경(全忠敬), 조부는 판도총랑(判圖摠郞) 전대년(全大年), 부친은 전진(全璡)이다. 고려 말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 · 집현전 태학사가 되었으며, 영록대부에 가자되었다. 귀국 후 조선 태조 때 축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용궁의 소천서원에 제향되었다.
1342년 전교부령 직보문각을 역임하여 <법주사자정국사보명탑비(法住寺慈淨國師普明塔碑)>의 비문을 썼다. 글씨를 잘 썼으며, 안진경의 서체에 소식의 획법이 가미된 고려 말의 전통 서법을 따랐다.
집필자
배옥영(서예)
주요 작품
法住寺慈淨國師普明塔碑
[네이버 지식백과] 전원발 [全元發]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 김득배 [ 金得培 ]
정의
1312(충선왕 4)∼1362(공민왕 11). 고려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상주(尙州). 호는 난계(蘭溪). 아버지는 판전의(判典醫) 김록(金祿)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직되었으며, 그 뒤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서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제수되었으며, 1357년(공민왕 6)에 서북면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가 되었다가, 이어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에 오르고, 서북면도순문사겸서경윤상만호(西北面都巡問使兼西京尹上萬戶)가 되었다.
1359년 정월에 첨서추밀원사(詹書樞密院事)가 되었으며, 그 해 6월에 기철(奇轍)을 숙청한 공으로 2등공신에 올랐다. 같은 해 10월에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홍건적의 괴수 위평장(僞平章)·모거경(毛居敬)이 4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하였으며,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 및 주민 1,000여 명을 살해하였다.
이어 정주(靜州)에서는 도지휘사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인주(麟州)까지 함락시켰다. 이 때 김득배는 도지휘사가 되어 서북면도원수 이암(李嵒), 부원수 경복흥(慶復興)과 더불어 적에 대비하고,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분전하여 서경을 탈환하고 압록강 밖으로 적을 격퇴시켰다.
1360년 3월에 그 공으로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에 책봉되고, 정당문학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고, 정몽주(鄭夢周)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1361년 다시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 이성(泥城)으로 침입하자 서북면도병마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 도지휘사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방어했으나, 안주에서 대패, 개경까지 함락당하였다.
다음 해에 안우·이방실·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로 적의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을 베고, 적 10여 만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 때,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 김용(金鏞)이 거짓으로 조서를 꾸며 안우·이방실·김득배에게 정세운을 살해할 것을 명하자, 이들은 그것을 믿고 정세운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죄를 입어 안우·이방실이 살해되었으며, 김득배도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되어 도망하여 산양현(山陽縣)에 숨었으나 체포되어 상주에서 효수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득배의 문생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김득배의 시신을 거두고 제문을 지어 억울한 죽음을 개탄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김득배의 누명이 벗겨지고, 그 자손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김득배 [金得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민부 [ 民部 ]
고려 후기 상서호부의 후신으로 호구(戶口)·공부(貢賦)·전량(錢粮)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
[네이버 지식백과] 민부 [民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판도사 [ 版圖司 ]
정의
고려 후기 호구(戶口)·공부(貢賦)·전량(錢粮)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중앙관청.
내용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상서육부(尙書六部)를 4사(司)로 축소·격하하는 과정에서 상서호부(尙書戶部)를 판도사로 고치고, 그 관원으로 판서를 두고 그 아래 총랑(摠郎)·정랑·좌랑을 두었다.
1298년에 민조(民曹)로 고쳤고, 1308년에 민부(民部)로 고쳤다가 뒤이어 다시 판도사로 고쳤으며, 1356년(공민왕 5) '반원개혁'의 일환으로 문종대의 관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다시 호부(戶部)로 고쳤다. 그 뒤 1362년에 다시 판도사로 고쳤고, 1369년에 민부로 고쳤다가 1372년에 다시 판도사로 고쳤으며, 1389년(공양왕 1)에 호조로 고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판도사 [版圖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